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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한글역주, 위정 제이 - 4. 멋있게 나이를 먹기 본문

고전/논어

논어한글역주, 위정 제이 - 4. 멋있게 나이를 먹기

건방진방랑자 2021. 5. 26.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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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멋있게 나이를 먹기

 

 

2-4.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나는 열 다섯 살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서른 살에는 우뚝 섰으며, 마흔 살에는 미혹됨이 없었고, 쉰 살에는 천명을 알았고, 예순 살에는 귀가 순해졌고, 일흔 살에는 마음이 원하는 바를 따라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었다.”
2-4. 子曰: “吾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欲, 不踰矩.”

 

 

내면적 깊이가 담긴 회고

 

아마도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논어구절을 뽑으라고 한다면 단연코 이 장이 후보로 올라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전장의 내용을 심층적으로 알지는 못해도 부분적으로, 특히 자기의 나이를 말할 때 마흔 살이라고 하는 것보다는 불혹의 나이라고 하든가, 쉰 살이라고 하지 않고 꼭 지천 명의 나이라고 하는 식의 표현은 한국인의 교양을 나타내는 일종의 트레이드 마크처럼 되어버렸다. 특히 신문에 글이나 쓸 줄 아는 사람이면, 그리고 대개 450세의 연령층이면 그 출전을 몰라도 불혹’ ‘지천명은 빼놓을 수 없는 일상의 어휘가 되어버린 것이다.

 

()의 나이라든가, ‘지우학(志于學)의 나이라든가, ‘이순(耳順)의 나이라는 표현이 잘 쓰이지 않는 것을 보면, 결국 한 사회를 정신적으로, 문화적으로 리드하는 연령층은 450대가 될 수밖에 없다고 하는 어떤 통계적 진리를 말해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과연 불혹이니 지천명이니 하는 말을 제대로나 알고 쓰고 있는 자가 몇이나 있겠는가?

 

이것은 공자가 자신의 삶을 회고하면서, 그 삶의 체험의 과정을 몇 단계로 나누어 서술한 것이다. 여기 분명 칠십(七十)’이라는 구절이 삽입되어 있는 것을 보아도 이 말은 그가 70세 이후 그리고 그의 생애를 73세로 마감하기 이전의 어떤 시기에 발출된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말은 대체적으로 학이(學而)편의 1,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 불역열호(不亦說乎)?’로 시작되는 세 구문과 같은 궤적 위에서 동일한 심도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우선 내가 늙었다고 생각해보자! 70이 넘은 고령의 나이에(옛날 감각으로는 요즈음보다도 더 고령의 느낌이었을 것이다) 내 인생을 회고한다고 생각해보자! 우리에게 먼저 떠오르는 것은 아마도 이러한 이야기일 것이다. ~ 나는 스무 살 때 그 꽃다운 처녀를 만났지, 그리고 스물다섯 살 때 결혼을 했어. 그리고 서른 살 때 그 명문대학으로 유학을 갔지, 그리고 마흔 살 때, 반독재투쟁을 하다가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는 비운의 고비가 있었지

 

이러한 얘기들은 우리가 인생을 회고할 때, 너무도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한 폭의 영상들이다. 그러나 재미있는 사실은 공자의 삶의 회고에는 삶에서 일어난 사건의 나열이 없다는 것이다. 매우 추상적인 삶의 느낌이나 경지를 조촐하게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바로 이러한 사실에서 공자라는 인격의 위대함을 읽는다. 일국의 수상까지 지냈던 사람이라고 한다면 누구든지, 나는 몇 살 때 수상직에 올랐다는 이야기를 하지 아니하고서는 못 배길 것이다. 공자에게는 그러한 떠벌임이 전혀 없다. 공자라는 역사적 인물이 얼마나 내면적인 관심의 인간이었나 하는 것이, 그가 그토록 정치적 열정에 불타있었던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여기 여실하게 입증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공자의 내면적 깊이 가 오늘날까지도 우리 범인이 따라가지 못하는 어떠한 위대한 측면일 것이며, 오늘날까지도 인간의 보편적 심성에 메아리치는 그의 향기일 것이다.

 

이 장의 언사는 분명 공자 자신의 말로서 초기파편에 속하는 것이다. 많은 주석가들이 여기, 15, 30, 40, 50, 60, 70이라는 숫자를 공자의 생애의 사건과 관련 지어 해석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너무 세밀하게 그러한 연보적 정보와 관련지어 생각하면 무리가 생긴다. 공자의 생애에 관한 정보가 고신록(考信錄)이나 선진제자계년(先秦諸子繫年)에서 충분히 논의하고 있듯이 절대적인 신빙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결국 이 공자의 말들은 공자 자신의 생애에 관한 주관적 느낌을 피력한 언사일 것이다. 이에 대한 궁극적 해석은 읽는 이들의 주관적, 다시 말해서 해석자 자신의 삶의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너무 공자의 삶에서 추상화시켜 공허하게 논의하면 생동하는 풍요로운 의미를 상실할 수가 있다. 나는 양면을 다 고려해가면서 그 뜻을 대략적으로 파악하고자 한다.

 

 

15살의 회고

 

먼저 ()’라는 첫 글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논어에서 주격과 소유격으로 쓰인다. 앞서 1-4오일삼성오신(吾日三省吾身)’의 용법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그런데 논어에서 라는 주격으로 오()만이 쓰이는 것은 아니다. 바로 다음 장맹손문효어아(孟孫問孝於我), 아대왈(我對曰)’ 운운한 것을 보면, ()는 주격으로도 쓰이고 전치사나 동사의 목적격으로도 쓰인다. 그러나 오()는 목적격으로 쓰일 수 없다. ‘맹손문효어오(孟孫問孝於吾)’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따르는 자라 할 때, ‘종아자(從我者)’는 가능해도 종오자(從吾者)’는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주격으로서 오()와 아()의 차이는 무엇일까? 실제적으로 뚜렷한 차이는 없지만, ()의 경우는 보다 주관적이고 사적인 느낌이 강하고, 어떤 행위의 지속의 주체로서의 느낌이 강하다. ()의 경우는 의 행위를 단절시켜서 객관적으로 서술하는 느낌이 강하다.

 

십유오(十有五)’()’는 우()와 같다. 그래서 이때의 유()는 거성(去聲)으로 읽는다. 그런데 중국고문헌에는 10과 같은 정수(整數)와 우수리수() 사이에 ()’자보다는 ()’자를 삽입시키는 것이 통례였다. 그러니까 15‘10하고 5’로 읽을 때, 하고의 뜻으로 유()를 삽입하는 것이다. ‘지우학(志于學)’이라 할 때 ()’는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어떤 나의 삶의 총체적 지향성을 말하는 것으로 주체적 결단(Entscheidung)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나이가 차서 학교에 입학한다든가, 남이 하는 대로 서당에 간다든가, 부모님께서 공부하라고 하시니까 공부를 시작한다든가 하는 따위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공자의 삶의 최초의 자각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 자각이란 배움을 향한 자각이었다. 사실 공자의 자각은 인류의 배움다운 배움그 자체를 출발시킨 사건이었다. 그것은 인류의 고등한 문화의 건설, 그 헌신의 계기가 공자에게서는 15세 때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 인류라는 말에 과장적 함의를 느끼는 사람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서양에서 배움다운 배움이란 르네상스 이후에서나 운운할 수 있는 것이다. 자연과학 이전의 배움은 대체적으로 종교적 신앙(religious belief)’에 관한 것이었고 순수한 인문학적 동기가 희소했다. 공자의 배움이란 순수한 호기심의 발동이며 무전제의 인간학적 탐구였다. 그것은 결코 사소한 계기로 시작된 우발적 사건이 아니었다. 그가 개비로서 수모를 당했든, 무당 과부의 자식으로 괄시를 당했든, 계씨문전에서 박대를 당했든 어떤 심각한 좌절의 계기가 있었을 것이다. 그 좌절을 공자는 비관이나 자포자기로 낭비해버린 것이 아니라, 참으로 배워야겠다는 의지로 승화시킨 것이다.

 

이 공자의 회고담이 우리에게 참으로 놀랍게 여겨지는 사실은, 이천오백년이 지난 오늘 우리의 나이의 감각으로 보아도 전혀 괴리감을 느끼지 않는 가장 평범한 인간의 생애를 그리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깨달음의 최초의 계기는 이미 15세 전후에는 대강 형성되는 것이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속담이 있듯이 한 인간의 일생을 지배하는 어떤 체험의 깊이는, 상상력의 폭이 넓은 15세 전후의 소년시절에 이미 형성되는 것이다. 공자 자신의 삶의 환경에 즉하여 이 문제를 생각해보면 15세에 학()에 뜻을 두었다는 것은 참으로 눈물겨운 한 소년의 결의 같은 것을 느끼게 한다. 15세의 소년 공자의 삶은 불우했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본가로부터 소외된 채 외롭게 사는 무녀였다. 당시의 지체높은 집안의 자녀들은 그 나름대로 체계적인 교육을 받는 사회체제의 혜택을 향유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공자는 천하게 컸으며[吾少也賤], 잡기에만 능했을 뿐 고등한 문화에 대한 배움의 기회가 없었다. 공자는 이러한 배움의 기회를 자각적으로 스스로 만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오십유오이지우학(吾十有五而志于學)’이라는 이 한 마디는 불우한 소년이 자신의 역경을 극복하고 고등한 문명에로의 도약을 희구하는 결단, 그리고 그 고뇌를 말해주고 있다. 그러하기에 다음의 이야기는 더욱 우리 마음에 절실하게 와 닿는다.

 

 

30살의 회고

 

거두절미하고, ‘삼십이립(三十而立)!’ 이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이 삼십이 되어 홀로 설 수 없는 인간은 정말 별 볼일 없는 인간이다. ()이란 부모나 친지의 도움이 없이 자력으로 선다는 것이다. 이 선다는 말에는 인생에 대한 자신감, 나는 이제 내 두 발로, 내가 살아가는 이 땅의 세계를 딛고 설 수 있다는 자신감이 강력히 표출되어 있다. 그것은 바로 자기가 건설하고자 하는 인생에 대한 대강의 청사진이나 방향감각이 완성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자시대 당시의 상식으로 말하더라도, 15세에서 30세로, 생의 계기의 연결점을 훌쩍 건너뛰어 말하는 것은 좀 이상하다. 왜냐하면 20세에 자()를 받으며, 상투를 틀고, 성년식을 거행하고, 결혼을 하는 등, 사관례를 중심으로 하는 다양한 이벤트가 전개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자의 인생이 이러한 사관례를 거쳐야 할 신분에 있었는지 우리가 알 수가 없고, 또 그러한 형식적 삶의 변화 가 전혀 무의미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자는 15세에 한 인간으로서 배움에 뜻을 두게 되었다. 바로 그 이 어느 정도 성취[]되었다고 자신감을 얻게 되는 순간이 30세나 되어 가능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그의 삶이 15세에 30세 때까지는 번문욕례에 구애됨이 없이 오로지 학에 뜻을 두고, 학이 확립되는 과정에만 몰두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15세에 나는 역경을 헤치고 배움을 지향하게 되었다. 그리고 30세에나 그 배움에 대한 자신감을 획득할 수 있었다. 나는 그동안 일체의 잡념이 없이 배움에만 매달렸다. 아마도 행간에 이런 독 백이 숨어있지 않을까 나 도올은 생각하는 것이다.

 

 

40살의 회고

 

사십이불혹(四十而不惑)’이란 단순히 의혹이 없어진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나이 사십이란 인생의 과정 중에서 가장 왕성하게 활동할 시기이며 따라서 주변상황이나 사람들과의 충돌이 많은 시기인 것이다. 이렇게 상충되는 의견(conflicting opinions)이 있을 때에 현혹됨이 없이 올바른 자기의 주관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을 공자는 불혹(不惑)’이라 표현한 것이다. 불혹은 곧 주체성의 확립이다. 그리고 공자에게 있어서 불혹(不惑)’이란 끊임없이 그를 유혹하는 괴력난신(怪力亂神)의 사도(邪道)였다. 인문(人文)에 대한 확신을 흔들게 만드는 종교적 귀의였고, 허약한 인간의 심성을 파고드는 초월적 힘에 대한 의지였 다. 젊을 때 맨 정신으로 살던 명철한 인간이, 장가들고 취직하고 애낳으면 이제 교회나가기 시작하고 서낭당에 가서 빌기 시작하는 것이다. 항상 길 잃은 양떼운운하는 사람들은 과연 길 잃은 자들이 누구인지를 한번 깊게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제도적 종교의 울타리 속에서 안주하는 인간이야말로 길 잃은 양일 수 있다. 제도적 학문의 울타리조차 거부하고 은ㆍ송의 종교적 질곡을 초탈하여, 들판에 홀로 입()하여 불혹(不惑)하는 공자의 모습이야말로 후에 맹자가 대장부(大丈夫)라고 표현한 그 기상을 구현한 진정한 신의 아들이었다. 그리고 공자의 인생역정에서 이를 논하자면 확실한 연대를 꼬집어 말하기 어려우나, 공자가 30대에 제나라에 유학했던 것은 사실인 것 같고 또 40세 전후로는 노나라의 소공(昭公)이 삼환(三桓)과의 대결 속에서 불우하게 생애를 마감한 슬픈 사건이 개재되어 있다. 공자는 이러한 정치적 상황을 바라보면서 그러한 덧없는 정치적 영고성쇠에 의하여 미혹될 수 없는 그 어떤 내면의 주체성을 확립했다는 의미도 여기 내포될 수도 있을 것 같다.

 

 

50살의 회고

 

오십이지천명(五十而知天命)’, 사람이 나이 오십이 되면 이제 한 인간으로서 대강 권위의 정점에 오른다. 주변에서 리더로서의 권위를 인정받게 되는 시기 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삶의 모습이 원만한 작품의 틀을 완성해가는 것이다. 이때가 되면 마흔 때의 주관적 확신성보다는 나의 판단을 넘어서는 어떤 보편적 기준을 항상 앞서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보편적 기준을 하늘의 명령곧 천명(天命)이라 부르는 것이다. 공자의 생애에 있어서 50세 전후의 시기는 공자가 가장 직접적으로 정치에 관여한 시기였다. 따라서 천명(天命)이란 정치적 맥락을 내포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정치적으로 실현해야만 할 하늘의 명령이라고 하는 것은 곧 사문(斯文)의 세계였다. 불혹(不惑)은 자기주관을 중심으로 이야기 한 것이므로 주관적 측면이 강하다. 그러나 천명(天命)은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보편적 원리를 말한 것이며 객관적 측면이 강하다. 그것은 라는 개체의 철저한 부정 위에서 성립하는 어떤 보 편적 가치의 세계에 대한 확신인 것이다. 공자는 죽음에 직면했을 때도 태연히 거문고를 뜯으며 외쳤다: “저들이 날 어찌하리오. 이 몸에 주공(周公)으로부터 내려오는 문화(文化)가 깃들어 있을진대, 하늘이 정녕코 이 문화(文化)를 버리지 않으시려 한다면 저들이 날 어찌하리오!” 공자의 생() ()는 이미 개인적 주관적 판단에 따라 결정될 수가 없는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가 믿었던 것은 하늘의 소리요, 하늘의 명령이었다. 그것은 이미 나라는 개체의 논리를 떠나, 보편적으로 공유되는 문화적 가치였다. 이러한 문화적 가치를 그는 사문(斯文)’이라 불렀고, 그것이 곧 그의 천명이었던 것이다. 칸트의 정언명령(Categorical Imperative)의 제일 명제는 무엇이었는가? 네 의지의 격률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로서 타당할 수 있도록 행위하라(Act only according to that maxim by which you can at the same time will that it should become a universal law.).

 

 

60살의 회고

 

육십이이순(六十而耳順)’, 이 말은 정말 우리의 일상적 언어감각에 리얼하게 와 닿는 말이다. 주희의 주는 이를 소리가 내 귀로 들어오면 마음에 다 통달되기 때문에 거슬리는 바가 없다. 우리가 안다고 하는 것도 지극한 경지에 이르게 되면 생각치 않아도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다[성입심통(聲入心通), 무소위역(無所違逆), 지지지지(知之之至) 불사이득야(不思而得也)]’라고 해설하였다. 그런데 많은 주석가들이 이 이순(耳順)’을 너무 지적인 측면으로 해석하였다. 정현(鄭玄)사람의 말을 들으면 곧 그 미묘한 뜻의 전모를 다 파악해 버린다[문기언이지기미지야(聞其言而知其微旨也)]’라고 하였고, 황간(皇侃)도 식지(識智)가 광박(廣博)하여 단지 남의 말을 듣기만 해도 그 미지(微旨)를 다 이해하기 때문에 귀에 거슬림이 있을 수 없다는 식으로 해설하였다.

 

그러나 이순(耳順)’은 우리말로 그냥 귀가 순해진다는 말이다. 이것은 모든 것을 통달하여 거슬림이 없다는 그런 달자(達者)의 모습을 그린 것이라기보다는, 순수히 인간의 감성과 관련된 용서의 함의가 더 강할 것 같다. 인간에게서 가장 다스리기 어려운 것은 이지적인 냉철함이나 논리적인 일관성이 아니다. 감정적으로 남이 나에게 어떠한 역한 소리를 해도 그것을 역한 소리로 듣지 않을 수 있는 감성의 순화! 이것이야말로 인간에게는 최종적으로 다스리기 어려운 것이다. 나이 60이 되면, 이미 신체적으로도 사양길이요 쇠약의 일로를 걷는다. 그리고 이성의 날카로움보다는 단연 감성의 원만함이 돋보여야 할 시기인 것이다. 이러한 인간 공자의 현실태에 대한 인식이 없이 공자의 생애를 너무 신격화(神格化)시키려는 태도가 그의 지식의 광박함 때문에 모든 것이 다 료해되어 거침이 없다는 식의 주석을 낳았다고 생각된다. ‘이순(耳順)’은 소박한 공 노인의 독백으로 해석해도 무방할 듯하다: “난 말야 예순이 되니깐, 아무리 날 욕하는 소리를 들어도 화가 안 나!” 혹은 아무리 세파의 거슬리는 일들이 내 귓 전을 때려도 감정의 동요가 없어!”라는 정도의 이야기가 아닐까? 나이가 예순이 되면 사람은 반드시 귀가 순해져야 한다. 그런데 요즈음의 한국 예순 노인장들은 귀가 순해져가기는커녕 귀가 어두워져가기만 하는 것이다. 귀가 어두워, 완고해지기만 하고, 자기 고집만 세우고, 사태의 참신한 분석이 없이 맨 똑같은 자기얘기만 뇌까리고 앉아있는 것이다. 그리고 용서의 넓은 마음이 생기기는커녕 주변사람들에 대한 원망의 골만 깊어져 가는 것이다.

 

공자의 생애와 관련지어 이야기한다면 이 시기는 공자의 유랑의 고난이 절정에 달한 시기였다. 공자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절망의 골은 깊어져만 갔다. 그리고 송()에서는 환퇴의 기습을 받는가 하면 진()ㆍ채()의 사이에서는 곡식이 끊어지는 재액을 당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고난의 시기에 공자는 이순(耳順)’의 달관을 이야기했던 것이다. 공자는 고난 속에서 넓어지고 깊어지고 용서의 마음이 생겨났던 것이다. 지천명의 사명이 이순의 달관으로 확대되어 갔던 것이다.

 

 

70살의 회고

 

칠십이종심소욕(七十而從心所欲), 불유구(不踰矩)!’ 이 공자의 최후 독백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의 삶의 과정이 도달한 최후의 경지, 그것은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이다. ‘종심소욕(從心所欲)’이란 문자 그대로 마음이 욕()하는 바를 따른다는 뜻이다. ‘불유구(不踰矩)’()’넘는다’, ‘건넌다는 뜻이다. ‘수유리(水踰里)물 건너 동네라는 뜻이다. ‘()’는 원래 목수들이 쓰는 기역자 모양의 곡척을 말하는 것이다. 콤파스를 뜻하는 규()와 함께 법도’, ‘규칙’, ‘기준’, ‘준칙의 의미가 된다. 불유구(不踰矩)는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다, 일정한 질서의 기준을 넘어가지 않는다는 뜻이다. 내 마음이 원하는 바를 마음껏 따라 가도 조금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는 경지! 이것이 진정한 인간의 자유가 아니고 무엇이랴!

 

이 공자의 말을 논리적으로만 분석하면 우리는 칸트의 도덕철학의 결론과는 매우 상이한 결론에 이르는 것임을 알 수가 있다.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실천이성비판(Kritik der praktischen Vernunft)에서 순수한 실천 이성, 즉 순수의지의 목적의 무제약적 전체로서의 최고선(Das höchste Gut)을 그의 변증론(Dialektik)의 방법으로 논구하고 있다. 최고선은 복합적 개념이며The highest good is a synthesis of concepts, 그 복합성은 결코 단순하게 경험적으로나 후천적으로 분석될 수 없다는 것이며 이러한 개념의 도출은 필연적으로 선험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변증론의 요지인 것이다.

 

최고선은 최상선(最上善, Das oberste Gut)최상은 supremum의 의미이며, 그것은 그 조건이 타자에게 다시 예속되지 않는다는 무제약적 조건의 의미이다과 완전선(完全善, Das vollendete Gut)완전은 consummatum의 의미이며, 그것은 동종의 더 큰 전체의 부분으로서 다시 예속될 수 없는 전체라는 의미이다의 두 의미를 다 충족시키는 것이어야 하며, 그러한 최고선(最高善)은 의지와 도덕률이 일치하는 경지를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의지와 도덕률이 일치하는 경지는 이성적이며 유한한 인간의 생존시에는 일순간도 경험할 수 없고 단지 성(, Heiligkeit)의 경지에서만 가능하다고 하였다. 이는 우리의 현실 속에서는 불가능하지만 이념 속에서는 가능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이상의 실현을 위하여 부단히 그리고 영구히 의지와 도덕률의 일치를 위하여 노력해야만 하며, 이러한 실천이성의 노력의 방편적 근거로서 요청(Postulat)되는 것이 영혼불멸(Die Unsterblichkeit der Seele)이라고 하였다. ! 이제 칸트의 말을 직접 한번 들어보자!

 

 

이 세상에서의 최고의 성취는 도덕률에 의하여 결정지어지는 의지의 필 연적 대상(목표)이다. 그러나 그러한 의지에 있어서는 우리 마음의 의도가 도덕률에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 최고선의 최상의 조건이다. ……

Die Bewirkung des höchsten Guts in der Welt ist das notwendige Objekt eines durchs moralische Gesetz bestimmbaren Willens. In diesem aber ist die völlige Angemessenheit der Gesinnungen zum moralischen Gesetze die oberste Bedingung des höchsten Guts. ……

 

그러나 도덕률에 의지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성()의 경지이며 이 경지는 감관계에 있는 어떠한 이성적 존재도 어떠한 순간에도 달성할 수 없는 완전성이다. 그러나 이것은 실천적으로 필요한 것으로 요구되기 때문에 그것은 그 완전한 일치에 끊임없이 전진해 나가는 데서만 발견된다. 순수한 실천이성의 원칙상에서 본다면, 그러한 실천적 전진을 우리의 의지의 구체적 목표로 간주하는 것이 필요하다.

Die völlige Angemessenheit des Willens aber zum moralischen Gesetze ist Heiligkeit, eine Vollkommenheit, deren kein vernünftiges Wesen der Sinnenwelt in keinem Zeitpunkte seines Daseins fähig ist. Da sie indessen gleichwohl als praktisch notwendig gefordert wird, so kann sie nur in einem ins Unendliche gehenden Progressus zu jener völligen Angemessenheit angetroffen werden, und es ist nach Prinzipien der reinen praktischen Vernunft notwendig, eine solche praktische Fortschreitung als das reale Objekt unseres Willens anzunehmen.

 

이러한 끊임없는 전진은, 그러나, 무한히 지속되는 존재성과 동일한 이성적 존재의 인격성이 전제될 때에만 가능하다. 이것을 바로 영혼불멸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최고선은 영혼불멸의 전제 위에서만 실천적으로 가능하다. 따라서 영혼불멸은 도덕률에 분리되어질 수 없도록 묶여져 있는 것이요, 순수한 실천이성의 요청이다.

Dieser unedliche Progressus ist aber nur unter Voraussetzung einer ins Unendliche fortdauernden Existenz und Persönlichkeit desselben vernünftigen Wesens (welche man die Unsterblichkeit der Seele nennt) möglich. Also ist das höchste Gut praktisch nur unter der Voraussetzung der Unsterblichkeit der Seele möglich; mithin diese, als unzertrennlich mit dem moralischen Gesetz verbunden, ein Postulat der reinen praktischen Vernunft.

 

도덕적 완성의 저차원에서 고차원으로의 끊임없는 전진만이, 이성적이지만 유한한 존재에게 있어서 가능할 뿐이다.

Einem vernünftigen, aber endlichen Wesen ist nur der Progressus ins Unendliche, von niederen zu den höheren Stufen der moralischen Volkommenheit möglich.

(이상은 실천이성비판, Erster Teil, II. Buch, 2. Hauptstück. IV: Die Unsterblichkeit der Seele als ein Postulat der reinen praktischen Vernunft에서 뽑아 수록한 것이다.)

 

 

칸트가 말하는 의지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바로 공자가 말하는 종심소욕(從心所欲)’이다. 공자가 말하는 심()은 칸트가 말하는 ‘Gesinnung(마음가짐)’이나 ‘Wille(의지)’와 동일한 내포를 가지는 것이다. 칸트가 말하는 도덕률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공자가 말하는 구()이다. ()는 곧 칸트의 ‘moralische Gesetz(도덕률)’인 것이다. 그렇다면 공자가 말하는 칠십이종심소욕불유구(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란 말은 곧 다음과 같이 번역될 수 있을 것이다: “나이 일흔이 되니까 나의 마음의 의지와 도덕률이 완전히 일치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칸트에게 이런 최고의 순간은 살아생전 일순간도 달성될 수 없는 지고의 이상일 뿐이다. 이 지고의 이상의 실현을 위하여 요청되는 것이 영혼의 불멸이라고 하였다. 즉 죽어서까지도 부단히 노력해야 하는 영원한 이상이라는 것이다. 이 정반대되는 두 견해는 과연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가?

 

공자 칸트
종심소욕(從心所欲) - () 의지 - 도덕률
일치관계 불일치관계
나이 70에 달성 살아있을 동안에는 일순간도 달성할 수 없다

 

여기 우리는 두 사람의 논리구조 그 자체를 비교하기 전에 그러한 논리를 탄생시킨 두 사람의 인간관의 전제를 검토하는 작업을 선행시켜야 하는 것이다. 칸트는 기독교인이다. 그는 광적인, 비이성적인 모든 신앙의 형태에 대하여 더 이상 없는 준엄하고 가혹한 비판을 가했지만, 그런 만큼 그는 깊은 청교도의 경건주의(Pietismus) 신앙체계 속에서 자라났다. 어머니의 경건한 모태신앙에서 그는 벗어난 적이 없다. 그러기 때문에 그의 인간관에는 출발부터 심각한 원죄(Original Sin)사상이 깔려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의지와 도덕률이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성(, Heiligkeit)의 경지이며, 이 성의 경지는 이성적 존재의 어떠 한 순간에도 달성할 수 없는 완전성이라는 주장은 인간원죄의 완곡한 표현이다. 인간원죄란 인간의 타고난 유한성이다. 그 유한성은 의지와 도덕률이 완전히 일치할 수 없다는 불완전성으로 여기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생각해보자! 색욕(色欲)의 한 문제를! 자신의 색욕을 완벽하게 콘트롤할 수 있는 고승(高僧)의 경지가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으나, 우리의 상식적 경험으로 볼 때 우리는 참으려 해도 참을 수 없는 영원한 욕망의 충동을 느끼게 되고, 그러한 충동은 항상 나의 존재의 규구(規矩)와 신체적으로나 사회도덕적으로나 충돌을 일으키게 마련이다. 신체적 충돌이란 내 몸의 불건강의 초래를 의미하는 것이요, 사회도 덕적 충돌이란 성범죄나 성문란의 사태로써 충분히 입증이 될 것이다. 칸트에 있어서는 덕(Virtue)과 행복(Happiness)이란 영원히 일치될 수 없는 문제상황인 것이다. 칸트는 이러한 현실적 인간, 원죄의 인간, 유한한 인간, 불완전한 인간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유한성과 불완전성을 현실로서 수용하고 그 현실을 초월하는 부단한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부단한 노력이 바로 실천이성의 요청(Postulat)이다.

 

그러나 공자는 이러한 칸트의 현실적 인간이야말로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한다. 우선 칸트의 현실적 인간상에 깔려있는 논리적 구조를 제거해야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즉 현실적 인간을 바라보는 눈이 지나치게 형식논리적이라는 것이다. ‘최상(最上)’이니 완전(完全)’이니 하는 따위의 논리적 전제가 이미 형식적인 것이며, 그것은 현실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한 형식논리적 잣대로 파악하면, 인간은 물론 그러한 형식논리적 완전성이 규정하는 기준에 의하여 항상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칸트가 말하는 현실적 인간은 오히려 현실적이 아닌, 이성적으로 전제된 논리적 인간일 뿐이다. 다시 말해서 공자에게는 원죄라고 하는 인간의 유한성의 한계의 전제가 근원적으로 부재한 것이다. 그러한 원죄를 인간에게서 제거한다면, 물론 종심소욕(從心所欲)과 구()의 일치(Angemessenheit)는 살아 생전에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다. 그 일치의 요구의 수준이 논리적인 것이 아 니라 현실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나이 든 모습 그리기

 

칸트가 바라보고 있는 인간은 생성론적 인간(Man of Becoming)이 아니다. 그것은 이성의 주체이며, 모든 감관계를 초월한 선험적 자아로서의 존재론적 인간(Man of Being)이다. 존재론적 인간은 시간의 과정성이 없다. 그러나 공자의 생성론적 인간에게는 시간의 과정성이 철저히 개재되어 있다. 공자의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는 바로 70세라고 하는 생성론적인 단계를 전제로 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70세쯤 되면 꼴릴 힘이 없어지는 것이다. ‘꼴릴 힘이 없다는 것은 좀 어폐가 있지만(죽음을 의미하므로),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식색지성(食色之性)의 꼴림이 그다지 나의 존재를 괴롭히지 않는 어떤 생리적 단계로 이행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자가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이십이(二十而)……하고 운운했다면 공자는 분명 위선자가 될 것이다. 그러나 칠십이(七十而)……하고 운운한 것은 너무도 현실적이요 너무도 인간적이요 너무도 가능한 인간의 사태인 것이다. 나이 칠십(七十)이 되면 불면이중(不勉而中, 힘쓰지 않아도 저절로 들어맞고) 불사이득(不思而得, 생각치 않아도 얻어지는)하는 성자(誠者)의 경지중용(中庸)20에 인간은 도달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칸트가 부정한 성()의 경지다. ()은 살아 생전에 도달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살아 생전에 반드시 도달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유교의 가르침을 위성지학(爲聖之學, 성인이 되는 배움)’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유학에서 성()이란 곧 성()이다.

 

이 문제를 또 다시 공자의 생애에 즉하여 생각해보자. 그가 60세를 전후로 하여 유랑길의 고난 속에서도 귀가 순해지고, 용서하는 마음이 깊어졌으며 천명(天命)의 자각이 생명의 가치에 대한 달관으로 승화되었다고 한다면, 결론은 너무 당연한 것이다. 귀로(歸魯)밖에는 딴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모든 것을 용서하고 나의 제자들과 나에게 배움을 희구하는 젊은이들이 있는 노나라로 돌아가자! 바로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라는 명제는 그의 생애에서 귀로라고 하는 최후의 결단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그가 노나라에 돌아왔을 때, 그는 이미 불가항력의 정치적 판세에 대한 모든 꿈을 버렸으며 오로지 시ㆍ서ㆍ예ㆍ악의 사문을 통하여 인류 문명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하고자 하는 사명에 남은 생애의 가치를 소진하고자 했다. 이 사명감이 종심소욕불유구라는 말로 표현되었을 수도 있다. 이미 시ㆍ서ㆍ예ㆍ악의 세계에 있어서는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가 어떠한 사회적 규범이나 양심의 도덕률과 상치되는 것이 없는 경지에 그는 달해 있었던 것이다.

 

나 도올은 말한다: 인생이란 할아버지ㆍ할머니 모습 그리기인생이란 곧 자기가 늙어 할아버지가 되었을 때의 자화상을 그려가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늙으면 원시(遠視)가 된다. 원시란 무엇인가? 가까운 데 있는 것은 이제 그만 보고 살라는 것이다. 멀리 보고 멀리 생각하라는 것이다. 늙으면 귀가 어두워진다. 너무 많은 소소한 것들을 들으려 하지 말라는 것이다. 늙으면 기억력이 감퇴된다. 나에게 상처로 남는 모든 원망이나 원한마저 다 잊어버리라는 뜻이다. 그리고 허()한 마음을 가지고 허허 웃는 큰 인격체가 되라는 것이다. 원효(元曉)대사가 말하는 한마음, 큰마음(일심, 一心)의 여여(如如)로운 인간이 되라는 것이다. 종심소욕불유구!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본장은 후대에 날조된 로기온자료로 볼 수는 없다. 공자의 말년 독백을 진실하게 전달하는 초기파편에 속하는 것이다. 나는 본 장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인간의 생애에 보편적으로 내재하는 추상적 의미의 맥락에서도 생각하여 보고, 공자라는 인간의 삶의 구체적 맥락 속에서도 생각하여 보았다. 공자라는 한 인간이 성인이 되어가는 그 과정을 요약한 이 위대한 자기독백 속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자아상에 관하여 끊임없이 반추하게 되는 것이다.

 

15 지우학(志于學)
30 ()
40 불혹(不惑)
50 지천명(知天命)
60 이순(耳順)
70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

 

15살로부터 70세까지 자화상을 이렇게 그려간 공자의 모습에 어찌 우리는 경건히 고개숙이지 않을 수 있을까. 어찌 성인의 길에 매진하지 않을 수 있을까. 다시 한 번 말한다: 우리네 인생이란 할아버지ㆍ할머니 모습 그리기.

 

 

옛날에는 열다섯이 되면 대학(大學)에 들어갔다. 마음이 쏠리는 것을 ()’라 일컫는다. 여기서 말하는 소위 ()’이라는 것은 대학의 도이다. 이러한 도에 뜻을 두게 되면 모든 생각이 여기에만 있게 되어 실천하는 데 싫증이 없을 것이다.

古者十五而入大學. 心之所之謂之志. 此所謂學, 卽大學之道也. 志乎此, 則念念在此而爲之不厭矣.

 

스스로 섬[自立]이 있게 되면, 지키는 바가 굳건하여져서 뜻을 둔다고 하는 것을 일삼을 바가 없게 된다.

有以自立, 則守之固而無所事志矣.

 

사물의 마땅히 그러한 바에 있어서 의혹함이 없게 되면 앎이 명료하게 되어 지킨다고 하는 것을 일삼을 바가 없게 된다.

於事物之所當然, 皆無所疑, 則知之明而無所事守矣.

 

천명(天命)’이란 천도(天道)가 유행하여 사물에 구현되는 것이니, 그것은 곧 사물의 당연한 까닭이다. 천명을 안다는 것은 그 지식이 정미함의 극한에 달한다는 것이니 미혹하지 않게 되는 것은 말할 건덕지도 없다.

天命, 卽天道之流行而賦於物者, 乃事物所以當然之故也. 知此則知極其精, 而不惑又不足言矣.

 

소리가 들어오면 마음이 깨달아 어긋나거나 걸림이 없어진다. 앎이 지극하여지니 생각하지 않아도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다.

聲入心通, 無所違逆, 知之之至, 不思而得也.

 

()’은 따른다는 것이다. ‘()’는 법에 맞추어 재는 기구이다. 직각을 만드는 기구이다.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좇아도 저절로 법도에 지나치지 않으니, 편안히 행할 수 있고, 힘쓰지 않아도 절로 들어맞는다.

, 隨也. , 法度之器, 所以爲方者也. 隨其心之所欲, 而自不過於法度, 安而行之, 不勉而中也.

 

 

주희가 공자의 일생에 관한 논의를 해설한 것을 보면 참으로 따분하고 한심하다. 전혀 살아있는 인간 공자의 삶을 보려는 태도가 없다. 송유들에게는 이미 어떤 도학적 관념의 틀을 초탈하는 이매지네이션은 고갈되어 있었다. 딱 한 일이다.

 

 

정이천이 말하였다: “공자는 생득적으로 아는 사람이다. 그런데도 배움을 통하여 경지에 이르렀다고 말한 것은 후학들을 권면하여 나아가게 하려 함이다. ‘()’이란 사도(斯道)에 능히 스스로 서는 것이다. ‘불혹(不惑)’한즉슨 의심이 없다. ‘지천명(知天命)’ 한다는 것은 이치를 궁구하고 본성을 다하는 것이다. ‘이순(耳順)’하면 듣는 바가 다 통한다.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慾不踰矩)’하면 힘쓰지 않아도 들어맞는다.’

程子曰: “孔子生而知之也, 言亦由學而至, 所以勉進後人也. , 能自立於斯道也. 不惑, 則無所疑矣. 知天命, 窮理盡性也. 耳順, 所聞皆通也. 從心所欲, 不踰矩, 則不勉而中矣.”

 

정이천이 또 말하였다: “공자는 그 덕이 나아간 순서를 이와 같이 스스로 밝히었으니 성인의 길이 반드시 다 이와 같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단지 학문을 하는 자들이 법을 세워서, 한 구덩이를 채우면 나아가고, 문장을 이룬 후에 달()하게 하도록 하려 함이리라.”

又曰: “孔子自言其進德之序如此者, 聖人未必然, 但爲學者立法, 使之盈科而後進, 成章而後達耳.”

 

호인(胡寅)이 말하였다: “성인의 가르침은 또한 다양한 방법을 구사한다. 그렇지만 그 요체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 본심을 잃지 않게 하려함에 있다. 그 본심을 얻고 싶어하는 자는 오로지 성인께서 제시하신 배움의 길에 뜻을 두어야 할 것이요, 그 순서를 밟아 차곡차곡 나아가야 할 것이다. 한 가지의 흠도 남아있지 않고 만물의 이치가 다 밝혀진 후에는 그 일용지간에 본심이 밝게 빛나 의욕하는 바를 마음대로 따라 해도 리()가 아닌 것이 없게 된다. 대저 심()이란 체()이며, ()이란 용()이다. ()는 곧 도(), ()은 곧 의()가 된다. 소리를 내면 그것이 곧 음률이 되고, 몸을 움직이면 그것이 곧 법도가 된다.”

胡氏曰: “聖人之敎亦多術, 然其要使人不失其本心而已. 欲得此心者, 惟志乎聖人所示之學, 循其序而進焉. 至於一疵不存, 萬理明盡之後, 則其日用之間, 本心瑩然, 隨所意欲, 莫非至理. 蓋心卽體, 欲卽用, 體卽道, 用卽義, 聲爲律而身爲度矣.”

 

호인이 또 말하였다: “성인께서 이것을 말씀하신 것은 한편으로는 배우는 자들이 여유있게 헤엄치며 그 속에 푹 배서 순서를 뛰어넘어 섣불리 나아가지 않게 하려고 자기 인생을 보여주신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배우는 자들이 마땅히 일취월장하여 도중에 폐하는 일이 없도록 하려고 보여주신 것이다.”

又曰: “聖人言此, 一以示學者當優游宿泳, 不可躐等而進; 二以示學者當日就月將, 不可半途而廢也.”

 

나 주희는 생각한다. 성인은 생득적으로 깨달음이 있어 편안히 행하는 사람이며, 본시 하나하나 쌓아나가는 점진적 과정이 없다. 그러나 성인의 마음이라 해 도 스스로 내가 여기 이미 도달하였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단지 일용지간에서 홀로 그 나아감을 깨달았으나, 타인들은 그것을 미처 깨닫지 못한 바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 근사한 것으로 인하여 자기표현을 하신 것은 배우는 자들이 이것을 준칙으로 삼아 스스로 힘쓰도록 하게 하려 하심이다. 마음속으로 실제는 스스로 성인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겉으로 일부러 겸손한 척 근사한 말을 한 것은 아니다. 뒤에 나오는 겸사(謙辭)에 속하는 말씀들은 대개 이러한 뜻으로 새겨야 할 것이다.

愚謂聖人生知安行, 固無積累之漸, 然其心未嘗自謂已至此也. 是其日用之間, 必有獨覺其進而人不及知者. 故因其近似以自名, 欲學者以是爲則而自勉, 非心實自聖而姑爲是退託也. 後凡言謙辭之屬, 意皆放此.

 

 

정주지학(程朱之學)의 졸렬함을 한 눈에 볼 수 있게 만드는 꾀죄죄한 해설이다. 조선의 유자들이 이런 주석을 놓고 벌벌 떨었으니 참으로 한심하다는 느낌이 든다. 공자는 결코 성인이 아니다. 성인의 길을 개척한 한 인간일 뿐이요, 끊임없이 성인이 되고자 하학이상달(下學而上達)한 호학(好學)의 인간이었다. 정주의 학문이 모두 공자는 성인이다라는 명제를 실체적으로 전제해놓고 성인이라고 규정되는 어떤 초월적 속성의 대전제에 따라 모든 것을 해설하려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공자는 우리의 삶에서 격리되어갈 뿐이다. 그러한 공자는 그리스도화 되어버린 예수와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 정이천의 해설은 그러한 실체화의 오류의 전형이다. 전혀 흥미롭지 못하다. 호인이 체ㆍ용 운운한 것은 비속하기 그지없다. 단지 주자의 마지막 해설이 조금 그러한 오류에서 벗어나려는 상식의 건강함이 엿보이지만 역시 그도 성인이라는 명사적 사고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봉불살불(逢佛殺佛: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하라고 외친 임제(臨濟)의 포효가 당말(唐末)이었는데, 이제 남송에 와서 공자라는 성인의 생지(生知)를 운운한다면 역사의 퇴보라 해도 한참 퇴보한 것이다.

 

 

 

 

인용

목차 / 전문

공자 철학 / 제자들

맹자한글역주

효경한글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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