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공백이 이룬 통일
카스트 제도가 처음 성립할 때와 같은 강력한 힘을 이후에도 내내 발휘했다면, 인도에는 고대국가의 성립이 훨씬 늦어졌을지도 모른다. 신분 질서가 워낙 강한 탓에 국가라는 질서의 중심이 존재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리아인의 지배가 계속되면서 카스트의 힘은 점차 약해졌다. 처음에는 아리아인과 인도 원주민이 외양에서부터 현저한 차이가 나서 카스트의 구분도 쉬웠으나, 나중에는 서로 융화되면서 인종적 구별이 사라져 직업으로 카스트를 구분해야 했다(코가 뾰족하고 눈동자와 피부색이 검은 오늘날의 인도인들은 수천 년에 걸쳐 아리아인과 원주민이 혼혈을 이룬 결과다).
카스트 제도가 약화되면서 그에 반비례해 각 도시국가에서는 왕권이 강화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일종의 원시적 공화정과 같이 부족장들의 원로 회의가 국가를 지배하고 왕은 상징적 존재에 불과했으나(심지어 왕이 세습되지 않고 부족 연맹에서 선출하기도 했다), 점차 강력한 왕권을 지니는 도시국가들이 출현하게 되었다.
마가다, 비데하, 코살라, 아반티, 앙가 등 10여 개에 이르는 주요 왕국들이 갠지스 강 유역을 따라 퍼져 있었다. 중국의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 해당하는 기원전 7세기부터 기원전 4세기까지 인도에서도 여러 도시국가가 각축전을 벌였다. 특히 마가다는 빔비사라 왕과 그 아들 아자타사트루의 지배기에 코살라와 비데하를 병합하고 북인도를 거의 석권하는 데 성공했다.
인도의 역사가 이대로 지속되었더라면 마가다가 인도를 통일하는 최초의 왕조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가다의 세력이 커지던 기원전 4세기에 인도의 서쪽에서 엄청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멀리 그리스에서 출발한 알렉산드로스의 동방 원정군이 페르시아를 멸망시키고 인도 서북부까지 들이닥친 것이다.
▲ 최고의 카스트. 브라만 승려의 모습이다. 사실 브라만 승려는 귀족보다 신분이 높았다. 현실 정치보다 종교를 우위에 두는 인도 특유의 관습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인도를 가장 먼저 침공한 사람은 페르시아의 다리우스(Darius)였다. 한때 그는 펀자브 지방을 점령해 통치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 강국인 페르시아를 무찌른 자가 바로 알렉산드로스(Alexandros)였다. 당시 알렉산드로스는 인도가 세상의 동쪽 끝이라 믿었고, 인도를 정복하면 아시아의 주인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가 히말라야를 넘기는 어려웠겠지만 혹시 인도를 침공한 뒤에도 동방 원정을 계속했더라면 전국시대 말기 한창 강성했던 진(秦) 제국과 한판 승부를 벌였을지도 모른다【하지만 그는 동쪽 끝을 정복한 뒤 말머리를 돌려 멀리 세상의 서쪽 끝인 에스파냐를 정복할 계획이었다. 그러던 차에 기원전 323년 병사하게 된다】.
알렉산드로스는 보병 3만과 기병 5000의 군대로 동방 원정을 출발해 불과 7년 만인 기원전 327년에 인도의 서북부까지 진출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인도 역사에서 연대가 정확하게 알려진 최초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미 북아프리카를 손에 넣고 동방의 강국인 페르시아를 무찌른 알렉산드로스에게 인도는 적수가 되지 못했다. 오히려 그의 적은 내부에 있었다. 인도 서북 방면의 탁실라(Taxila)와 제룸(Zerum), 두 나라를 간단히 제압하고 라비 강변에서 10만에 달하는 인도 연합군의 방어망까지 뚫는 데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북인도 전역을 노려볼 즈음 오랜 원정에 지친 병사들이 더 이상 진군을 원치 않았다. 할 수 없이 알렉산드로스는 인도의 변방만 건드려보고 철군했다.
알렉산드로스의 인도 침공은 펀자브의 일부에 불과했고 점령 기간도 짧았지만, 인도로서는 처음으로 외부 세계를 접한 것이었으니 영향은 엄청났다. 드디어 인도는 서양 세계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동양과 서양은 비로소 교류를 시작했으며(여기서의 동양이란 아직 중국까지 포함하는 것은 아니고 오리엔트 세계만을 가리킨다), 알렉산드로스의 원정로는 육해상의 교통로가 되었다.
특히 알렉산드로스의 원정이 초래한 커다란 문화사적 사건은 간다라 예술이다. 간다라는 펀자브 지역의 한 지방인데, 알렉산드로스의 침공을 계기로 헬레니즘 문화가 유입되었다. 고대 그리스의 발달한 조각 기술이 인도 예술에 원용된 것은 이 시기부터다.
▲ 청년 알렉산드로스. 알렉산드로스는 3만 5000명의 병력으로 이소스 전투에서 페르시아의 대군을 물리쳤다. 그는 당면한 숙적 페르시아를 무찔러야 한다는 일념으로 전투에 임했지만, 자신의 정복 전쟁이 장차 세계사에 지대한 영향을 가져올지는 알지 못했다.
가장 주목할 만한 변화는 인도에서 처음으로 불상이 제작된 것이다. 불교의 발생과 더불어 불교 예술도 발달했지만, 원래 인도에서는 부처의 모습을 조각상으로 만드는 것을 불경스럽게 여겼다. 그래서 인도의 초기 불교 예술가들은 부처를 인간의 형체가 아니라 발자국이나 빈 의자 따위로 묘사했다. 그런데 그리스인들은 달랐다. 그들은 자신들이 믿는 신을 마음대로 인간과 똑같이 묘사했다(세속과 거리를 둔 부처와 달리 그리스 신들은 인간처럼 사랑도하고 화도 내고 질투로 속도 끓이는 인격신이었던 탓이 크다).
처음 만드는 불상이니 모델이 필요했다. 그리스인들은 불상의 영감도 주었지만 기법도 제공했다. 그리스 조각상이 좋은 모델이 되었다. 그 때문에 처음 등장한 불상은, 웅장하고 이상적인 묘사를 중시한 당시 인도의 전통 미술과는 달리 옷 주름 하나하나까지 섬세하게 표현해내는 그리스식 조각 기술로 제작되었다. 이것이 간다라 미술인데, 이후 이 양식은 불교와 더불어 동아시아 일대에 전해졌다. 신라 석굴암의 불상이 곱슬머리에다 고대 그리스 신과 같은 의상을 입은 것은 바로 간다라 양식의 영향을 받은 탓이다.
세계사적 관점에서는 간다라 미술이 더 큰 관심사일지 모르지만, 사실 당시 인도인들은 알렉산드로스의 침공으로 인해 예술적인 측면보다 사회적인 측면에서 더 큰 변화를 겪었다. 외부의 침략을 받아본 나라는 대개 그렇듯이, 무엇보다 인도인들은 그 사건을 계기로 민족적 자각성을 일깨우게 되었다. 이런 원동력은 곧이어 인도에 최초의 통일 국가가 들어서는 계기로 작용했다.
알렉산드로스의 군대가 물러가자 옛 마가다의 영토는 난다 가문이 잠시 지배했다. 그러나 이내 마가다의 크샤트리아 계급 출신인 찬드라굽타(Chandragupta, 재위 기원전 321년경~기원전 298년경)가 난다 왕조를 무너뜨리고 왕위를 빼앗았다. 찬드라굽타가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알렉산드로스의 침공으로 인도 국민의 민족적 자각성이 일어난 데에 힘입은 바도 있지만, 알렉산드로스가 철군함으로써 인도 서북부에 힘의 공백이 생긴 탓이 컸다.
하지만 탄약이 장전되어 있어도 방아쇠가 없으면 탄알은 발사되지 않는다. 지역의 패자를 노리고 처음부터 상비군을 육성한 찬드라굽타는 20여 년에 걸쳐 60만 명의 대규모 군대로 북인도를 통일하고 마우리아 제국을 세웠다. 인도 역사상 최초의 강력한 제국인 마우리아는 얼마 안 가 아프가니스탄에서 벵골 만에 이르는 대제국으로 발전했다. 이때부터 인도의 역사는 세계사의 일부로 확실히 자리 잡게 된다.
▲ 간다라 양식. 지금까지 존재하는 고대의 모든 불상은 간다라 시대 이후의 것들이다. 헬레니즘 시대 이전까지는 불상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앞서의 고행하는 불상과 대비되는 이 잔잔한 모습의 불상은 간다라 양식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섬세하고 부드러운 옷 주름과 몸의 굴곡은 그리스 신상과 닮았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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