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능한 군주들이 일군 전성기
역사에 이름을 남긴 뛰어난 군주는 대개 한 측면에서만 위대하다는 평가를 받지 않는다. 아크바르도 역시 대외 정복이나 정치와 행정 같은 제국의 하드웨어에서만 성과를 거둔 게 아니라 문화와 예술 같은 소프트웨어에서도 치적을 남긴 군주였다(그가 해결한 종교 문제는 일반적으로 제국의 소프트웨어에 속하겠지만 인도의 경우에는 하드웨어로 보아야 한다). 또한 그는 호화로운 궁전에서 각종 화려한 행사를 주최해 절대 권력과 권위를 과시하면서도 매일 이른 아침에 창문을 열고 백성들의 인사를 직접 받을 정도로 여론에 민감했다. 그런 자질을 갖추었기에 아크바르는 정복 군주이자 문화 군주라는 보기 드문 선례를 보여주었다.
전통과 첨단을 매끄럽게 접합하는 아크바르의 솜씨는 종교만이 아니라 문화에서도 빛났다. 전통적인 힌두 양식과 당시 첨단에 해당하는 이슬람 양식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그 시대의 건축은 그가 두 문화를 융합하려는 자세를 가졌기에 가능했다. 게다가 그는 유럽의 그리스도교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의 궁정화가들은 유럽에서 발달한 사실주의 기법은 물론 원근법까지 차용해 동양의 정신에 서양의 기법이 접목된 독특한 ‘무굴 양식’을 개발했다. 아크바르의 치세에 인도는 유럽보다도 이르게 계몽주의 시대를 맞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훌륭한 소프트웨어는 튼튼한 하드웨어가 있어야만 성능을 발휘하는 법이다. 비록 중앙집권과 관료제가 이루어졌다고는 하지만, 무굴 제국 역시 중국의 역대 제국들에 비하면 토대가 취약했다. 무굴이 한동안 잘나갈 수 있었던 이유는 제도가 미비해도 인물로 보완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즉 전성기 무굴 제국의 번영은 유능한 군주들이 계속 출현한 덕분이 컸다. 강력한 군주인 아크바르가 죽은 뒤 아들 자한기르(Jahangir, 1569~1627)의 치세에 제국은 잠시 정치적 혼란을 겪었으나 그의 아들 샤 자한(Shah Jahan, 1592~1666)이 즉위하면서부터는 다시 궤도에 올라섰다.
샤 자한은 모계가 힌두 왕비였기 때문에 힌두의 피를 타고난 인물이었다. 그런 탓인지 샤 자한은 예술을 매우 사랑했고, 역대 인도 왕들 가운데 손꼽히는 낭만적인 군주였다. 특히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왕비 뭄타즈 마할(Mumtaz Mahal, 1593~1631)을 추모하며 지은 무덤 궁전인 타지마할은 오늘날까지 당당한 위용과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하는 세계적 건축물이다.
문화를 사랑한 낭만 군주라고 해서 샤 자한이 심약한 군주였던 것은 아니다. 그는 남쪽으로 데칸 일대의 소국들을 병합해 영토를 늘렸고, 북쪽으로는 왕조의 고향에 해당하는 아프가니스탄의 칸다하르까지 정복했다. 그의 사후에 아들들이 권력다툼을 벌였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고 이내 또다시 걸출한 지배자가 제위를 계승했다.
샤 자한의 아들인 아우랑제브(Aurang zeb, 1618~1707)는 1658년 마흔 살에 제위에 올라 50년 가까이 인도를 지배했는데, 몇 대째 이어져온 문화 군주의 전통은 일단 그에게서 끊겼다. 그는 아버지와 달리 무자비하고 잔혹한 정복자였고 권력욕도 대단히 강했기 때문이다. 아크바르가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고, 샤 자한이 백성들의 사랑을 받았다면, 아우랑제브는 백성들에게 두려움을 안겨주었다. 그는 진지하고 경건한 데다 냉혹하고 무자비하면서도 열정적이었다. 하지만 인도와 무굴 제국의 입장에서 보면 그는 그 시기에 꼭 필요한 군주였다.
아우랑제브는 한동안 중단한 정복 사업을 재개해 데칸과 남인도의 소국들을 차례로 점령했다. 아우랑제브의 치세에 이르러 무굴 제국의 영토는 사상 최대를 자랑했다. 그러나 그가 남쪽의 인도 중부와 남인도를 경략하는 동안 북부의 상황이 어수선해졌다. 북인도를 거점으로 하는 모든 인도 제국의 공통적인 문제점이었다. 북인도는 사방이 트인 지역이기 때문에 마치 풍선처럼 한쪽을 누르면 다른 쪽이 부풀기 때문이다. 아우랑제브가 증조부 아크바르의 종교적 탕평책(蕩平策)을 포기한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개인적으로 신앙심이 독실한 이슬람교도이기도 했지만 복잡한 정치적 변수들을 완벽하게 처리할 수 없다고 판단한 아우랑제브는 결국 철저한 이슬람 중심주의 노선으로 전환했다. 한동안 지배적이었던 종교적 절충주의는 그의 시대에 이르러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되었고(지즈야를 부활시킨 사람은 바로 그다), 힌두 동화 정책도 뒷전으로 물러났다. 아우랑제브는 고위직 관료들을 이슬람교도로만 충당했으며, 많은 힌두 사원을 파괴하고 모스크로 대체했다. 11세기 마흐무드의 인도 침략을 능가할 정도의 가혹한 종교 탄압이었다.
▲ 순백의 궁전 ‘낭만 군주’ 샤 자한이 서른아홉 살에 죽은 왕비를 추모해 지은 대리석의 묘지 궁전 타지마할은 인도 중세의 최대 건축물로 꼽힌다. 돔형의 건물을 받치고 있는 기단은 사방 56미터의 정사각형 모양이다.
그러나 무굴의 전성기를 가져온 유능한 군주들은 아우랑제브에게서 대가 끊겼다. 공교롭게도 최대 강역을 자랑하던 그의 치세 이후 무굴 제국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실은 음으로 양으로 무굴 제국에 힘을 실어주던 힌두인들이 인도의 이슬람화를 진심으로 환영할 리 없었다. 관료제의 실무자인 이들이 황제에 반감을 품으면서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도 무너지기 시작했다. 중앙 권력이 약화되자 그간 무굴의 지배하에 있던 소국들도 조공만 계속할 뿐 예전과 같은 충성심은 보이지 않았다.
이런 내부 정세 이외에 바깥에서도 무굴의 목줄을 죄는 환경이 조성되었다. 데칸 지방에서는 마라타(Maratha)가 크게 일어나 델리 근방을 자주 침략했다. 마라타족은 산악 지방 특유의 강인함과 기동성을 갖추고 유격전에도 능해 대단히 까다로운 상대였다. 1761년 마라타의 대공세 앞에 속수무책이었던 무굴 제국은 급기야 왕조의 고향인 아프가니스탄에 도움을 청했다. 그 덕분에 파니파트 전쟁에서 간신히 마라타를 물리칠 수 있었지만, 약효는 오래가지 않았다. 그 사건을 계기로 가뜩이나 쇠퇴 일로에 있던 무굴 제국은 붕괴 상태에 이르렀다. 마라타와 아프가니스탄이 대치하고 있는 가운데 북인도는 서서히 정치적 공백 상태로 빠져들었다. 이후 영국이 힘들이지 않고 무굴 제국을 거의 접수하는 형식으로 손에 넣게 되는 것은 이미 그런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 이슬람의 철권 군주 샤 자한이 낭만 군주였다면 그의 아들 아우랑제브(가마에 탄 인물)는 ‘냉혹 군주’였다. 그는 아버지처럼 낭만을 위해 재정을 낭비하지 않고, 그전까지 힌두 - 이슬람의 절충 정책을 취한 무굴을 완전한 이슬람 제국으로 만들었다. 이로 인해 강력한 그의 재위 기간 중에도 힌두인들의 반란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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