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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 한반도의 단독정권 - 2장 소용돌이의 동아시아, 북방의 새로운 기운 본문

역사&절기/한국사

4부 한반도의 단독정권 - 2장 소용돌이의 동아시아, 북방의 새로운 기운

건방진방랑자 2021. 6. 14. 0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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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방의 새로운 기운

 

 

구심력이 약해지면 원심력이 작용하는 게 이치다. 소용돌이의 동아시아에도 중심인 남과 변방인 북의 분위기는 달랐다. 당나라가 기침하고 신라가 몸살을 앓으며 동아시아 남쪽의 중화세계가 무너져갈 때 비중화세계인 북쪽에서는 새로운 기운이 싹트기 시작한다. 중국의 통일제국이 약화되면 항상 장성 이북의 이민족들이 흥기했던 것은 이제 동아시아 역사에서 하나의 공식으로 자리 잡았다. 그것이 농경문명과 유목문명의 주고받음이라면 그 신호탄은 두 문명의 중간, 즉 반농반목 문명이라 할 수 있는 발해다.

 

남쪽의 신라에서 장보고의 야망과 최치원(崔致遠)의 개혁이 물거품으로 돌아갈 무렵 발해는 오히려 전성기를 맞았다. 8세기까지 아홉 명의 왕을 왕명부에 올린 것 말고는 별다른 활동이 없던 발해는 9세기 초 선왕(宣王, 재위 818~830) 대에 이르러 도약의 발판을 마련한다. 우선 영토 확장이 눈부시다. 선왕은 멀리 북쪽의 헤이룽강까지 강역을 크게 넓혀 만주 전역을 손에 넣었으며, 말갈족 중에서 유일하게 발해를 적대시하던 흑수말갈을 복속시키는 데도 성공했다. 그때부터 흑수말갈은 당에 보내는 조공을 끊었는데, 당말오대에 접어든 당보다는 가까이 있는 발해가 더 두려웠기 때문이다. 역사서에 나와 있는 이른바 51562주라는 발해의 강역은 바로 이 무렵에 형성되었으며, 신당서에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고 등재된 것도 이 시기의 발해를 가리킨다발해가 영토 확장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물론 선왕의 역량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역시 당의 국력이 약해졌다는 배경 덕택이다. 안사의 난이 일어나기 전, 그러니까 8세기 초반만 해도 발해는 헤이룽강 하구의 흑수말갈에 대한 지배권을 놓고 당나라와 싸우다가 실패한 바 있었다. 726년 무왕의 동생 대문예(大門藝)가 흑수말갈을 공력하라는 왕명을 어기고, 당나라로 도망치는 사건이 일어나자 발해는 그의 송환을 시도하다가 실패한 일이 있고, 6년 뒤에는 거란의 제의로 발해의 장군 장문휴(張文休)가 산둥을 공략했다가 물러난 적이 있었다(당시 신라는 당 현종의 명령으로 발해의 남부를 공격하러 나섰다가 폭설 때문에 퇴각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당은 신라 군대를 징발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이후 발해는 한동안 침체기에 빠졌다가 당나라가 힘을 잃는 것을 기회로 일어나게 된 것이다.

 

선왕 이후 발해의 역사는 중국 측 사서에 단편적으로 등장하는 것 이외에 상세한 내용이 알려지지 않고 왕계조차 불확실하지만 대체로 전성기의 강역을 유지하면서 만주의 패자로 군림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적어도 한반도의 신라에게 최악의 시기였던 9세기 동안 발해는 별다른 위기를 맞지는 않았던 듯하다. 그러나 건국자인 대조영(大祚榮)부터 그랬듯 이 발해는 전성기 때조차도 랴오둥을 노리지 않았는데, 그것은 발해의 운명을 위해서는 커다란 판단 미스였을 뿐 아니라 당말오대에 북방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분위기에 역행하는 것이었다. 설사 힘이 모자란다 해도 당나라가 깊은 수렁에 빠져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발해는 어떻게든 랴오둥에 진출한다는 계획을 세웠어야 했다. 만주를 근거지로 삼는 왕조로서 랴오둥을 차지하지 못한다면 결국 패망하고 만다는 것은 일찍이 고구려의 역사 전체를 통해서도 분명한 사실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발해가 만주에 안주한 것은 곧 북방에서 부는 새로운 바람의 주인공이 되지 못하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발해를 대신해서 세대교체의 선두주자로 발돋움한 것은 거란이었다. 몽골 초원의 동부 끝자락에 자리잡고 있던 거란은 당의 약화를 틈타 서서히 남쪽으로 내려오기 시작한다. 그들은 남북조시대에 북조를 지배했던 옛 선비족의 후예, 당시에는 북중국을 차지한 대신 랴오둥을 고구려에게 넘겨주었지만 발해가 고구려의 후예 노릇을 포기한 이상 랴오둥의 임자는 그들이 될 수밖에 없다. 황소의 난을 진압한 절도사 주전충(朱全忠, 852~912)이 장안의 황궁으로 들어가 환관들을 잡아죽이고 당의 마지막 황제인 애제(哀帝)애제(哀帝)’라면 슬픈 황제라는 뜻이니까 황제의 시호로는 영 이상하게 보이는데, 시호 자체가 죽은 뒤에 받는 것이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다. 중국 역사에서 비운에 죽었거나 한 왕조의 마지막이 된 황제는 대개 애제 또는 공제(恭帝)라고 부른다. 재위 중에 쿠데타가 일어나 살해당한 신라의 혜공왕, 애장왕, 민애왕 등의 시호에 ()’이나 ()’가 들어 있는 것도 그런 이유다에게서 황위를 이양받은 907, 거란의 지도자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는 드디어 랴오둥의 나라 요()를 건국한다(랴오둥을 우리식으로 읽으면 요동遼東이 된다는 것은 앞서 말한 바 있다).

 

그러나 국호는 그랬어도 야율아보기는 랴오둥에 만족하려 하지 않았다. 916년 그는 거란의 여러 부족을 통일하고 당당한 제국으로 발돋움한 요나라의 태조가 된 뒤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중원을 노린다. 그렇다면 맨먼저 할 일은 후방 다지기다. 랴오둥의 후방이라면 바로 발해가 아닌가? 과연 92512월 말에 야율아보기는 발해에 대한 대대적인 공략에 나섰다. 불과 보름 만인 926114일에 거란군은 발해의 수도 상경용천부를 장악했고, 이것으로 227년 동안 우리 역사의 일부분을 담당했던 발해는 역사의 무대에서 완전히 퇴장한다(당시 거란은 발해가 방심한 틈을 타서 싸우지 않고도 이겼다는 기록을 남겼는데, 그로 미루어 아마 심각한 내부 권력다툼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전성기 발해에 눌려 북방의 군소 민족으로 남아 있었던 거란, 그러나 현실에 만족한 토끼는 잠만 자고 있었고 거북은 꾸준히 발을 놀려 마침내 토끼를 따라잡았다. 이후 요나라가 우리 역사에 다시 등장하는 것은 고려 초기인데, 나중에 보겠지만 그때도 역시 고려는 후방 다지기 작업에 들어간 요나라에게 호되게 시달린다.

 

 

움츠림의 결과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용천부의 터다. 발해는 당말오대라는 천금의 기회를 잘 이용해서 북방의 패자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랴오둥을 끝내 포기하고 동만주에만 안주한 나머지 랴오둥에서 일어난 거란에게 결국 멸망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밖으로 뻗어나가야 할 때 안으로 움츠린 결과 발해는 개국 초부터 거창하게 내세운 구호와는 달리 끝내 고구려의 후예가 되지 못했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흔들리는 중심

두 명의 신라인

북방의 새로운 기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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