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인을 실천하는 방법
6-28. 자공이 여쭈었다: “백성들에게 널리 베풀어서 많은 사람들의 삶을 유족하게 만드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어떻겠습니까? 그 사람을 인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6-28. 子貢曰: “如有博施於民而能濟衆, 何如? 可謂仁乎?”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어찌 인한 정도이겠는가? 그 사람이야말로 반드시 성인이라 부를 만하다. 요ㆍ순도 이를 오히려 어렵게 여겼을 것이어늘! 대저 인한 자는 자기가 서고자 하면 남도 서게 하며, 자기가 달성코자 하면 남도 달성케 해준다. 능히 가까운 데서 자기 몸으로 깨달을 수 있는 것을 취할 줄 알면, 그것은 인을 실천하는 방법이라 일컬을 만하다.” 子曰: “何事於仁, 必也聖乎! 堯舜其猶病諸! 夫仁者, 己欲立而立人, 己欲達而達人. 能近取譬, 可謂仁之方也已.” |
자공의 관심은 사회의 구원에 있었다. 사회적 구제에 관하여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여 던진 질문에 공자는 충격적인 대답을 한다. 어찌 그것이 인의 수준에 그치는 문제이겠는가? 사회적 구원을 실천하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인의 단계를 넘어서서 성(聖)의 경지에 이른 것이다. 서양사람들이 말하는 성(das Heilige)과 같은 구극적 경지를 사회적 구원의 실천으로 규정한 이 공자의 말은 매우 충격적이다. 궁극적인 홀리네스(Holiness)가 많은 사람을 구원함[濟衆]일 뿐이라고 못박아 말하는 공자의 논리는 매우 명료하다. 그리고 성(聖)의 지고한 경지를 강조하기 위하여 ‘요순도 이를 어렵게 여겼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여기 성이라는 개념의 변천사를 우리는 생각해볼 수 있다. 서막에서 언급했듯이 공자의 시대에는 성(聖)이란 신탁의 소리를 듣는 인간의 능력을 가리키는 말로서 주로 무속에 관계된 언어였다. 그 함의도 그리 높지 않았다. 성인(聖人)은 거의 ‘무당’이라는 말과 동일하게 쓰였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의 ‘성(聖)’이란 거의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도덕적 완성(moral perfection)의 함의에 신적인 경지(the sacred realm)까지를 더하고 있다. 그리고 ‘요ㆍ순도 달성하기 어려운’이라는 말에서 ‘요ㆍ순’의 의미는 성인의 상징적 구현체로서 규정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용법은 공자 때에는 별로 통용되지 않았던 것이었다. 요ㆍ순의 강조는 묵가(墨家)에서 시작되어 맹자로 흡수되었다. 따라서 이 장을 맹자시대에 제나라에서 성립한 전승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자공은 제나라에서 생애를 마감하였다. 후대의 전체 『논어』 편집자에 의하여 부록으로 「옹야」의 말미에 끼워넣었을 수도 있다.
‘기욕립이립인(己欲立而立人), 기욕달이달인(己欲達而達人)’은 『큐복음서』 속의 역사적 예수를 연상시킨다. 인류공통의 보편적 지혜, 보편적 맥심(maxim)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능근취비(能近取譬)’를 보통 매우 애매하게 해석하는데 취(取)가 타동사이고 비(譬)는 취(取)의 목적어이다. 비(譬)는 ‘내 몸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것처럼 느낀다’는 의미이지, 무슨 ‘비유(parable)’와 같은 객체적 명사가 아니다. 그러니까 ‘비(譬)’는 타인의 고통을 내 몸의 고통과 같이 느낄 줄 아는 ‘심파티(sympathy)’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시(施)’는 거성이다. ○ ‘박(博)’은 넓다는 뜻이다. ‘인(仁)’은 리(理)로써 말한 것이니 상ㆍ하에 다 통하는 것이다. ‘성(聖)’은 경지로서 말한 것이니 극한에 도달한 것을 이름한 것이다. ‘호(乎)’라는 것은 의문을 품어 미정된 상태를 나타내는 어조사이다. ‘병(病)’이라는 것은 마음에서 부족함을 느낀다는 것이다. 여기까지의 대의는 이러하다. 자공의 질문내용이 어찌 인(仁)의 경지에 그치는 것이겠는가? 반드시 성인이라야 할 수 있는 것일진저! 그러한즉 요순과 같은 성인이라도 오히려 그 마음에 이러한 뭇사람의 구원에는 부족함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최고의 방법으로 인을 구하고자 한다면 더욱 어려워지고 더욱 목표에서 멀어질 것이다【그러므로 다음의 구체적인 ‘기욕립이립인(己欲立而立人)’의 말씀을 하신 것이다】
施, 去聲. ○ 博, 廣也. 仁以理言, 通乎上下. 聖以地言, 則造其極之名也. 乎者, 疑而未定之辭. 病, 心有所不足也. 言‘此何止於仁, 必也聖人能之乎! 則雖堯舜之聖, 其心猶有所不足於此也.’ 以是求仁, 愈難而愈遠矣.
‘夫’는 부(扶)라고 발음한다. ○ 자기를 가지고서 남에게 미치는 것은 인자(仁者)의 마음이다. 이를 통하여 살펴보면, 천리(天理)가 주류(周流)하여 미치지 않은 곳이 없음을 살필 수 있다. 인(仁)의 본체를 형용한 것이 이보다 더 절실한 것은 없다.
夫, 音扶. ○ 以己及人, 仁者之心也. 於此觀之, 可以見天理之周流而無閒矣. 狀仁之體, 莫切於此.
이것은 ‘부인자(夫仁者), 기욕립이립인(己欲立而立人), 기욕달이달인(己欲達而達人)’의 주석이다.
‘비(譬)’는 비유이다. ‘방(方)’은 구체적 방법이다. 가깝게 내 몸에서 취하여, 내가 원하는 바로써 타인에게 비유하는 것이니, 타인의 원하는 바가 또한 나의 원하는 바와 같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러한 후에 내가 원하는 바를 미루어 타인 에게도 미치게 하는 것이니, 이는 서(恕)의 일이요, 인(仁)의 실천방법인 것이 다. 여기서 힘쓴다면, 인(人)의 사(私)를 이겨내고 천리(天理)의 공(公)을 온전케 하는 일이 있게 될 것이다.
譬, 喩也. 方, 術也. 近取諸身, 以己所欲譬之他人, 知其所欲亦猶是也. 然後推其所欲以及於人, 則恕之事而仁之術也. 於此勉焉, 則有以勝其人欲之私, 而全其天理之公矣.
○ 정명도가 말하였다: “의서에 수족마비 현상을 불인(不仁)이라고 한다. 이 말이야말로 인을 가장 잘 형용한 것이다. 인(仁)이라고 하는 것은 천지만물과 일체가 되어 나의 몸이 아닌 것이 없는 경지이다. 모든 것이 내 몸 됨을 인식한다면 미치지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세상만사가 나에게 속하지 아니 하면 나 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마치 수족이 마비되어 기가 상통하지 않아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과도 같다. 그러므로 박시제중(博施濟衆)이란 성인의 공용(功用)이다. 그리고 인(仁)이라고 하는 것은 지극히 말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므로 ‘기욕립이립인(己欲立而立人), 기욕달이달인(己欲達而達人), 능근취비(能近取 譬), 가위인지방야이(可謂仁之方也已)’라고 말씀하시는데 그치고 만 것이다. 이는 배우는 자들로 하여금 이와 같이 관인(觀仁: 인을 살핌)하여 인의 체(體)를 얻도록 하게 하려 하심이라.”
○ 程子曰: “醫書‘以手足痿痹爲不仁’, 此言最善名狀. 仁者以天地萬物爲一體, 莫非己也. 認得爲己, 何所不至; 若不屬己, 自與己不相干. 如手足之不仁, 氣已不貫, 皆不屬己. 故博施濟衆, 乃聖人之功用. 仁至難言, 故止曰: ‘己欲立而立人, 己欲達而達人, 能近取譬, 可謂仁之方也已.’ 欲令如是觀仁, 可以得仁之體.”
정이천이 또 말하였다: “『논어』에 ‘요순기유병저(堯舜其猶病諸)’라고 말씀하신 것이 두 번 나온다(6-28, 14-45). 대저 널리 베푸는 것이 어찌 성인의 바라는 바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반드시 50세 된 자라야 비단옷을 입고 70세 된 자라야 고기를 먹을 수 있는 풍족의 단계가 있으니(『맹자』 「양혜왕」상7), 성인의 마음이야 젊은이도 비단옷 입히고 고기를 먹게 하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다만 그 공급에 부족한 바가 있기 때문에, 베푸는 것이 넓지 못함을 성인도 안쓰럽게 여긴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대중을 일시에 구원하는 것(濟衆)이 어찌 성인의 바라는 바가 아니리오? 그러나 다스림은 구주를 넘어갈 수 없다. 성인은 사해(四海) 밖의 모든 인간을 같이 구제하고 싶지 않은 바가 아니다. 그러나 다스림이 미치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그 다스림의 대상이 많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생각한 것이다. 이로써 미루어 구하면 나의 몸을 닦음으로써 백성을 편안케 한다는 것의 어려움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나의 다스림이 이미 족하다고 생각하는 자는 성인이 아니다.”
又曰: “『論語』言 ‘堯舜其猶病諸’者二. 夫博施者, 豈非聖人之所欲? 然必五十乃衣帛, 七十乃食肉. 聖人之心, 非不欲少者亦衣帛食肉也, 顧其養有所不贍爾, 此病其施之不博也. 濟衆者, 豈非聖人之所欲? 然治不過九州. 聖人非不欲四海之外亦兼濟也, 顧其治有所不及爾, 此病其濟之不衆也. 推此以求, 脩己以安百姓, 則爲病可知. 苟以吾治已足, 則便不是聖人.”
여여숙이 말하였다: “자공은 인에 뜻을 두었지만 너무 쓸데없이 고원(高遠)한 경지만을 받들어 그 구체적 방법을 알지 못하였다. 공자께서 가까운 자기로부터 취해나가는 것을 가르쳐 주셨으니, 자공이 가까운 데로부터 들어가기를 간절히 원하신 것이다. 이것이 곧 인의 실천방법이니, 박시제중(博施濟衆)이라도 이를 통하여 실천하여 나아갈 것이다.”
呂氏曰: “子貢有志於仁, 徒事高遠, 未知其方. 孔子敎以於己取之, 庶近而可入. 是乃爲仁之方, 雖博施濟衆, 亦由此進.”
정자의 말에서 옛 중화사상의 관용성과 보편성을 엿볼 수 있다. 중국의 ‘잘 삶’은 인류의 ‘잘 삶’과 연결되는 보편주의적 인류공동체의 사상을 전제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이상에 너무 미흡하게 21세기 중국의 진로가 설정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염려스럽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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