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   2024/04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건빵이랑 놀자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연암과 다산: 중세 ‘외부’를 사유하는 두 가지 경로 - 혁명시인의 비분강개 본문

문집/열하일기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연암과 다산: 중세 ‘외부’를 사유하는 두 가지 경로 - 혁명시인의 비분강개

건방진방랑자 2021. 7. 11. 08:58
728x90
반응형

혁명시인의 비분강개

 

 

다산은 그와 달라서 지배적인 담론에 대항하기 위하여 거대한 의미체계를 새롭게 구축한다. 연암이 그러했듯이, 그 또한 문장학의 타락을 격렬하게 비난하고 과거학의 폐해를 이단보다 심하다고 분개해 마지않았지만,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그가 제시한 대안은 그것들이 잃어버린 원초적 의미들 혹은 역사적 가치들을 다시 복원하여 역동성을 불어넣는 것이었다. 다산에게 있어 진정한 시란 역사의 거대한 흐름을 읽어내고, 세상을 경륜하려는 욕구가 충일한 상태에서 문득 자연의 변화를 마주쳤을 때 저절로 터져나오는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내용이 아니면 그런 시는 시가 아니며, 시대를 아파하고 세속을 분개하는 내용이 아니면 시가 될 수 없[不愛君憂國非詩也 不傷時憤俗非詩也]”. ‘군주시대’, ‘역사―― 그의 비평담론은 언제나 이런 거대한 기표체계를 중심으로 움직인다. 일견 전통적인 도문(道文) 일치론과 구별되지 않는 것도 핵심적 기표들의 유사성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담론은 그런 표면적 동질성을 무화시킬 만큼 강렬한 질적 차이들을 담론의 내부에 아로새긴다. 무엇보다 그는 문장이 담아야 할 내용을 수기(修己)’에서 치인(治人)’, 즉 사회적 실천에 관련된 문제로 전환시킨다. 그리고 그것은 주자학적 체계가 지닌 추상적 외피들을 파열시키기에 충분할 정도로 강렬한 것이었다. , 그가 생각한 시의 도는 도덕적 자기완성의 내면적 경지가 아니라, ‘외부로 뻗어나가 실제적 성취에 도달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게 됨으로써 도()는 선험적 원리의 차원이 아닌 구체적 실천의 범주로서 변환되었다. 말하자면 그의 맥락에서는 실천해야비로소 아는 것이다. 실천에 대한 이 불타는 열정이 그로 하여금 요, , 주공, 공자가 다스리던 선진고경(先秦古經)’의 세계로 나아가도록 인도한다. 말하자면 다산은 경학이라는 의미화의 장을 통해 기존의 담론체계와 맞서고자 했던 것이다.

 

 

아버지가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다 하여 원망하면 옳겠는가. 그것은 안될 일이다. 그러나 자식이 효도를 다하고 있는데도 아버지가 자식을 사랑하지 않기를 마치 고수가 우순을 대하듯이 한다면 원망하는 것이 옳은 일이다.

父不慈 子怨之可乎 曰未可也 子盡其孝 而父不慈 如瞽瞍之於虞舜 怨之可也

 

임금이 신하를 돌보지 않는다 하여 원망하면 옳겠는가. 그것은 안 될 일이다. 그러나 신하로서 충성을 다했는데도 임금이 돌보지 않기를 마치 회왕이 굴평을 대하듯이 한다면 원망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중략)

君不恤臣 怨之可乎 曰未可也 臣盡其忠 而君不恤 如懷王之於屈平 怨之可也

 

결국 원망이란 상대의 입장을 이해한 나머지 성인으로서도 인정한 사실이고, 충신, 효자의 입장에서는 자기 충정을 나타내는 길이다. 그러므로 원망을 설명할 수 있는 자라야 비로소 더불어 시를 말할 수 있고, 원망에 대한 의의를 아는 자라야 비로소 더불어 충효에 대한 감정을 말할 수 있다. 원원(原怨)

怨者聖人之所矜許 而忠臣孝子之所以自達其衷者也 知怨之說者 始可與言詩也 知怨之義者 始可與語忠孝之情也

 

 

원망하고 안타까워하는 힘, 이것이야말로 시를 추동하는 원동력이다. 왜냐하면 원망하는 마음은 지극히 사모하는 마음과 맞닿아 있고, 안타까워하는 마음은 세상을 구제하고자 하는 실천적 의지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유학적 전통에서는 낮게 평가되거나, 때로는 악한 것으로 간주되었던 정서의 격렬한 표출이 긍정되는 변환이 일어난다. 하지만 이런 감정의 분출은 공적이고 경세적 차원에서만 이루어져야 한다. 그로부터 벗어난 사사로운 욕망의 분출은 철저히 제어되어야 한다.

 

다산이 패시소품체를 격렬히 비난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그가 보기에 소품문들은 음탕한 곳에 마음을 두고 비분한 곳에 눈을 돌려 혼을 녹이고 애간장을 끊는 말을 명주실처럼 늘어놓는가 하면, 뼈를 깎고 골수를 에는 말을 벌레가 우는 것처럼 내어놓아, 그것을 읽으면 푸른 달이 서까래 사이로 비치고 산귀신이 구슬피 울며 음산한 바람에 촛불이 꺼지고 원한을 품은 여인이 흐느껴 우는 것 같은유의 것이다. 일단 그 타당성 여부는 차치하고, 이런 유의 과장된 수사학에는 감정 혹은 욕망에 대한 그의 태도가 분명하게 담겨 있다.

 

, 한 생각이 일어날 때, 그것이 천리의 공()’이라면 배양 확충시켜야 하겠지만, ‘인욕의 사()’에서 나온 것이면 단연 꺾어버리고 극복해야 한다. 그의 비평담론이 지닌 혁명적 내용이나 그의 작품들이 지닌 봉건적 수탈에 대한 분노, 민중적 고통에 대한 절절한 연민 등은 이런 사유의 산물이다.

 

이처럼 그가 택한 행로는 혁명적이기는 하되, 성리학적 틀과 마찬가지로 거대한 이항대립적 마디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이 안에서 소수적이고 분열적인 욕망의 흐름이 틈입할 여지는 거의 없다. 왜냐하면 그 예측불가능한 흐름들은 중심적인 의미화의 장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경세가인 다산이 엄청난 양의 시를 쓴 데 비해, 정작 문장가인 연암은 시의 격률이 주는 구속감을 견디지 못해 극히 적은 수의 시만을 남겼다. 전자가 시에 혁명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았다면, 후자는 시의 양식적 코드화 자체로부터 탈주하고자 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두 사람은 전혀 다른 신체의 파동을 지녔던 셈이다.

 

 

 

 

인용

목차

열하일기

문체반정

박지원 이력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