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6. 절
절(節)
깃발과 같은 것. 임금의 사명(使命)을 띠고 나가는 사람을 절(節)을 가지고 있다. 지방에 안렴사(按廉使)를 내 보낼 때는 임금이 절(節)을 준다.
절각(折角)
뿔을 부러뜨린다는 말로, ‘기세를 누르거나 콧대를 납작하게 만든다’는 말이다.
절각건(折角巾)
후한(後漢)의 곽태(郭泰)는 자가 임종(林宗)으로 학문이 대단하고 제자가 수천 명에 달했는데, 언젠가 비를 만나 그가 쓴 두건 한 쪽 귀가 꺾여 있었다. 그를 본 당시 사람들이 일부러 모두 그렇게 한 쪽 귀를 접어서 쓰면서 그 두건을 일러 임종건(林宗巾)이라고 하였다. 『후한서(後漢書)』 卷八十六 「곽태전(郭泰傳)」
절각담경(折角談經)
한 원제(漢元帝) 때 총신(寵臣) 오록충종(五鹿充宗)이 양구(梁九)의 『역(易)』을 배워 종횡무진 변설을 늘어놓는데도 감히 맞서서 논하는 자가 없었는데, 주운(朱雲)이 천거를 받고 들어가 웅변을 토하면서 반박을 하자, 당시 유자(儒者)들이 “오록의 긴 뿔을 주운이 꺾어 버렸다.(五鹿嶽嶽 朱雲折其角)”고 하였다. 『한서(漢書)』 「주운전(朱雲傳)」
절간(折簡)
가운데를 접은 짧은 편지를 말한다. / 인용: 檄黃巢書(최치원)
절강조수(浙江潮水)
절강(浙江)에 조수(潮水)가 특별히 맹렬한데, 사람들이 말하기를, “오자서(伍子胥)의 분기(憤氣)가 그렇게 한다.”고 한다.
절계극선(折桂郄詵)
보통 사람들보다 월등하게 뛰어난 것을 말한다. 극선이 누차 옹주 자사(雍州刺史)로 전직되었는데 진 무제(晉武帝)가 동당(東堂)에 모여 그를 송별하면서 묻기를 “경은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는가?”하니, 극선이 대답하기를 “신은 현량과 대책(賢良科對策)에서 천하의 제1위를 차지하였으니, 이는 계림(桂林)의 한 가지이고 곤륜산(崑崙山)의 한 조각 옥과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진서(晉書)』 「극선전(郄詵傳)」
절고개여석(節苦介如石)
‘절개는 돌보다 굳다’는 뜻이다.
절고진락(折槁振落)
고목을 자르고, 낙엽을 움직이게 한다. 매우 쉬운 일을 말한다.
절굉(折肱)
고어(古語)에 “세 번 자신의 팔뚝을 부러뜨려 봐야 좋은 의원이 된다[三折肱而爲良醫].”는 말이 있는데, 이는 경험을 많이 쌓아야 조예가 깊어짐을 말한다. 성어(成語)로는 삼절굉(三折肱)이라 한다.
절교서(絶交書)
삼국 시대 위(魏) 나라의 중산대부(中散大夫)를 지낸 혜강(嵇康)이 자신을 그의 후임자로 천거한 자(字)가 거원(巨源)인 산도(山濤)에게 절교하는 글을 보낸 고사가 있다. 『문선(文選)』에 그의 「여산거원절교서(與山巨源絶交書)」가 실려 있다.
절구(絶句)
한시 근체시(近軆詩)의 하나. 기(起)ㆍ승(承)ㆍ전(轉)ㆍ결(玦)의 네 구로 되어 있다.
절구의맹씨(竊屨疑孟氏)
맹자(孟子)가 등(滕) 나라에 가서 상궁(上宮)에 묵고 있을 적에, 관인(館人)이 들창 위에 신들 두었다가 잃어버리고는 맹자의 종자(從者)가 훔쳐간 것으로 의심하였던 데서 온 말이다. 『맹자(孟子)』 「진심(盡心)」 下
절극(折屐)
매우 기뻐한다는 뜻이다. 진(晉) 나라 재상(宰相) 사안(謝安)이 그의 조카 현(玄)을 보내어 진병(秦兵)을 막게 하였는데, 현(玄)이 8천 명의 군사로써 진 나라 백만 대병을 쳐부수었다. 보고하는 글이 이를 때에 사안은 한창 바둑을 두고 있었는데, 손이 소식을 물으니 사안을 기뻐하는 기색을 나타내지도 않으며, “아이들이 도적을 이미 쳐부수었군.” 하고, 바둑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손을 보내고 문안으로 들어오다가 나무신의 이(齒)가 문턱에 걸려서 부러지는 줄도 몰랐으니 그것은 매우 기뻤기 때문이었다. ☞ 희절극(喜折屐)
절극침철(折戟沈鐵)
두목(杜牧) 적벽시(赤壁詩)에 “꺾인 창 모래에 잠겼어도 쇠는 썩지 않아 그것을 가지고 전조의 일을 아누나[折戟沈沙鐵未消 自將磨洗認前朝].” 하였다.
절동(浙東)
중국 절강성(浙江省)절강 동부지역이다. 소식(蘇軾)이 절강 가흥현(嘉興縣)에 있는 보본선원(報本禪院)에 들러 그 절의 중 문 장로(文長老)를 만나 지은 “내년에는 약을 캐러 천태산에 갈 예정이라. 또한 다시 시를 써서 온 절동 퍼뜨리고파[明年採藥天台去 更欲題詩滿浙東].”라고 한 시가 있다. 『소동파시집(蘇東坡詩集)』 卷八 秀州報本禪院鄕僧文長老方丈
절등류편(截鐙留鞭)
유사(遺事)에 “요원숭(姚元崇)이 형주목(荊州牧)으로 있은 지 3년 만에 다른 곳으로 옮겨가게 되었는데, 이민(吏民)들이 흐느끼며 말머리를 둘러싸고서 떠나지 못하게 하는가 하면 등자를 끊고 채찍까지 붙잡았다. 신목(新牧)이 이를 상주(上奏)하자, 조서를 내려 미행(美行)을 칭찬하고 금(金) 1천 냥을 하사했다.” 하였다.
절람(折欖)
서한 성제(西漢成帝) 때 직신(直臣) 괴리영(槐里令) 주운(朱雲)이 성제 앞에서 칼을 청하며 간신의 머리를 베겠다고 하니 성제가 누구냐고 묻자 안창후(安昌侯) 장우(張禹)라고 하였다. 이에 성제가 크게 성내며 말하기를 “면전에서 나의 스승에게 욕을 하니 죽어야 마땅하다.” 하면서 어사(御史)에게 끌어내리도록 하였는데, 주운이 난간을 붙잡아 난간이 부러진 일이 있었다. 『한서(漢書)』 卷六十七
절람(竊藍)
청색(靑色)을 이른 말로, 호(鳸)라는 새가 여름에는 흑색이 되고, 가을에는 청색이 되고, 겨울에는 황색이 되곤 하므로, 계절에 따라 이 새를 절람ㆍ절현(竊玄)ㆍ절황(竊黃) 등으로 부른 데서 온 말이다.
절로노호(折蘆老胡)
선종(禪宗) 동토(東土)의 초조(初祖) 달마(達摩). 천축(天竺) 향지왕(香至王)의 셋째아들인 그가 양(梁) 대통(大通) 원년(527)에 인도로부터 바다를 건너 광주(廣州)에 상륙할 때까지 갈대를 꺾어 그것을 타고 왔다 한다.
절류곡(折柳曲)
고대의 악부 가운데 하나인 절양류곡(折楊柳曲)으로, 버들가지를 꺾으면서 이별하는 아쉬운 정을 노래한 것이다.
절류번포(折柳樊圃)
『시경(詩經)』 제풍(齊風) 「동방미명(東方未明)」에 있는 시로서 즉 “버들을 꺾어서 포전의 울을 막아 놓으면 미친 사람도 달리 본다[折柳樊圃 狂夫瞿瞿].”는 것을 이른다.
절류번포이구구지광(折柳樊圃而瞿瞿之狂)
『시경(詩經)』 제풍(齊風) 「동방미명(東方未明)」에, “버들가지를 꺾어 꽂아 울타리를 만들어 놓아도 미친 사람이 차마 들어오지 못하고 허둥거린다.”는 구절에서와 같이, 미친 사람도 이러한데, 하물며 정상적인 사람이 아침ㆍ저녁의 분명한 시간도 지키지 못하는가 하는 뜻이다.
절륜(絶倫)
같은 무리(동료)들 보다 훨씬 뛰어남
절리(節離)
‘끊어져 떨어지다’라는 뜻이다.
절립부(絶粒夫)
곡기(穀氣)를 끊고 신선술을 익히는 사람들을 말한다.
절마(折麻)
삼은 신마(神麻)라는 향초(香草)로서 은사(隱士)에게 꺾어주는 뜻을 부친 것인데, 『초사(楚辭)』 「구가(九歌)」 상부인(湘夫人)에 “구슬꽃 소마를 꺾어서 장차 은자에게 주련다[折疏麻兮瑤華 將以遺兮離居].” 한 데서 온 말이다.
절매(折梅)
남조(南朝) 송(宋) 나라 육개(陸凱)가 범엽(范曄)과 서로 친분이 두터워 강남에 있을 때 장안(長安)에 있는 범엽에게 매화 한 가지를 꺾어 부치면서 시 한 수를 동봉하였는데, 그 시에 “매화를 꺾다가 역사(驛使)를 만나 농두(隴頭)에 있는 그대에게 부치노니, 강남에는 아무 것도 없어 애오라지 한 가지 봄을 보낸다오.” 하였다.
절면(折綿)
모진 추위를 말한다. 강추위에는 솜옷이 얼어붙어 부딪치면 꺾어지기 때문에 생긴 말이다.
절모(節旄)
임금이 특히 칙사나 장군에게 내리는 쇠꼬리털로 장식한 깃대를 말한다. / 인용: 檄黃巢書(최치원)
절모령낙새운변(節旄零落塞雲邊)
한(漢) 나라 무제(武帝) 때 소무(蘇武)가 중랑장(中郞將)으로 있다가 흉노(匈奴)에 사신으로 갔는데, 흉노의 선우(單于)가 갖은 협박을 하면서 항복하기를 강요하였다. 그런데도 굴하지 않다가 큰 구덩이 속에 갇혀 눈을 먹고 가죽을 씹으면서 지냈다. 그러다가 다시 북해(北海)로 옮겨져서 양을 치며 지냈는데, 그때에도 한 나라의 절(節)을 그대로 잡고 있었다. 갖은 고생을 하면서 19년 동안을 머물러 있다가 소제(昭帝) 때 흉노와 화친하게 되어 비로소 한 나라로 돌아왔으며, 나중에 기린각(麒麟閣)에 화상(畫像)이 그려졌다. 『한서(漢書)』 卷54 「소무전(蘇建傳)」 소무(蘇武)
절방(截肪)
엇 벤 비계인데 아름다운 백옥(白玉)은 절방과 같다 한다.
절방초(折芳椒)
초(椒)는 향목(香木). 향목을 꺾어서 스스로 장식한다는 말이다.
절비옹(折臂翁)
신풍(新豐)에 출정함을 기피하려고 스스로 어깨를 부러뜨린 늙은이가 있었음.
절서영묘호(節序迎猫虎)
음력 12월을 가리킨다. 고양이는 쥐를 잡아먹고 범은 멧돼지를 잡아먹으므로, 옛날에 고양이와 범을 농사(農事)에 유익한 신물(神物)이라 하여 12월에 그들을 맞이하여 제사한 데서 온 말이다. 『예기(禮記)』 「교특생(郊特牲)」
절성(節性)
성을 절제한다는 뜻으로, 『서경(書經)』 소고(召誥)에는 “은(殷) 나라 관리들을 복종시켜 우리 주(周) 나라 관리들과 친근하게 하면, 그들의 성을 절제하게 되어 그들이 날로 발전할 것이다[節性惟日其邁].” 하였고, 「왕제(王制)」에는 “사도가 육례를 닦아서 백성들의 성을 절제한다[司徒修六禮 以節民性].” 하였다.
절세가인(絶世佳人)
세상에서 제일 빼어난 미인. 매우 뛰어난 미인
절속초불족(竊續貂不足)
‘재능 없는 사람이 높은 관작을 차지함’을 비유한 말이다. 진(晉) 나라 때 조왕 윤(趙王倫)의 당(黨)이 모두 경상(卿相)이 되어 노졸(奴卒)들까지 모두 작위를 탔으므로, 시중(侍中)ㆍ중상시(中常侍) 등이 쓰는 관(冠)의 장식에 쓰이는 담비 꼬리가 부족하여 개의 꼬리로 대신 장식했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절약(竊藥)
예(羿)가 서왕모(西王母)에게서 불사약(不死藥)을 얻어다 놓고 미처 먹지 못하고 집에 둔 것을 그의 처 항아(姮娥)가 훔쳐먹고 신선이 되어 달로 달아나 월정(月精)이 되었다고 한다. 『회남자(淮南子)』 「람명훈(覽冥訓)」
절약선(竊藥仙)
유궁후(有窮后) 예(羿)의 처 항아(姮娥)가 남편이 서왕모(西王母)에게서 얻어온 선약(仙藥)을 훔쳐먹고 신선이 되어 월궁(月宮)으로 달아났다. 『회남자(淮南子)』 「람명훈(覽冥訓)」
절약항아(竊藥姮娥)
달의 별칭이다. 『후한서(後漢書)』 「천문지(天文志)」에 “유궁후 예(有窮后羿)의 아내가 예의 불사약(不死藥)을 훔쳐먹고 월궁(月宮)으로 도망쳐서 항아가 되었다.” 하였다.
절양(折楊)
옛날의 속악(俗樂)으로서 소인에 비유한다.
절양류(折楊柳)
고악부(古樂府)의 이름이다.
절양류가(折楊柳歌)
절양류(折楊柳)는 악부의 이름으로, 원 내용은, 고향을 떠날 때에 버들가지를 꺾어주며 이별의 정을 노래한 것이다.
절양황화(折楊皇華)
지금의 민요와 같은 가곡(歌曲)을 이른다.
절역난빙소식진(絶域難憑消息眞)
한 무제(漢武帝) 때 절신 소무(蘇武)가 흉노(匈奴)에 사신(使臣)으로 갔다가 억류되어 갖은 고통을 겪으면서도 항복하지 않고 무려 19년 동안이나 살다 돌아왔는데, 한 소제(漢昭帝)가 즉위한 후에는 한 나라가 흉노와 화친을 맺고 소무를 돌려보내 달라고 요구하자, 흉노가 소무는 죽었다고 거짓말하였다. 그 후 한 나라 사신이 다시 흉노에 이르자, 앞서 소무를 따라 흉노에 사신으로 갔던 상혜(常惠)가 은밀히 한사(漢使)를 만나보고 소무의 현황을 자세히 일러주면서 한사로 하여금, 선우(單于)에게 “우리 천자가 상림원(上林苑)에서 사냥을 하다가 기러기를 얻어 그 발에 묶여 있는 편지를 보니 소무 등이 아무 늪(澤) 주위에 살고 있다고 씌어 있었다.” 하라고 하였다. 한사가 크게 기뻐하여 상혜의 말대로 이야기하면서 선우를 책망하니, 선우가 몹시 놀란 빛을 띠고 한사에게 사과하였다 한다. 『한서(漢書)』 卷五十四
절열(折閱)
‘값을 줄여서 팔다’는 뜻이다. 절(折)은 손(損)과 같고, 열(閱)은 매(賣)와 같다. 『순자(荀子)』 「수신(修身)」 註 / 인용: 兎山村舍 錄田父語(서거정)
절영(絶纓)
‘갓의 끈을 끊는다’는 뜻으로, ‘남에게 너그러운 덕(德)을 베푸는 것’을 비유하는 뜻의 고사성어다.
절요(折腰)
옛날 도연명(陶淵明)이 팽택현령(彭澤縣令)으로 있다가 상관(上官)으로 순찰하러온 독우에게 절하기 싫어서, “내가 어찌 닷말 쌀의 녹 때문에 어린아이에게 허리를 굽히랴.” 하고 곧 벼슬을 내던지고 유명한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읊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한다.
절요(節要)
퇴계 이황(李滉)이 주자의 서찰 중에서 중요한 것만을 발췌한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의 요약판이다.
절요부귀거(折腰賦歸去)
진(晉)의 처사(處士) 도잠(陶潛)은 팽택 영(彭澤令)이 되었었는데, 군(郡)에서 독우(督郵)를 보내자, 아전은 마땅히 정장하고 뵈어야 한다 하였다. 도잠은 탄식하면서 “나는 쌀 다섯 말의 녹봉(祿俸) 때문에 허리를 굽힐(肹腰) 수는 없다.” 하고는 벼슬을 버리고 시골로 돌아간다는 뜻으로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읊고 떠나갔다.
절요수(折腰羞)
관찰사 등 상관에게 굽신거려야 하는 딱한 처지를 말한다. 진(晉) 나라 도연명(陶淵明)이 현령(縣令)으로 나갔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쌀 다섯 말 때문에 허리를 꺾을 수는 없다[不能爲五斗米折腰].”는 이유로 벼슬을 그만두고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읊은 고사가 있다. 『송서(宋書)』 卷93 「도잠전(陶潛傳)」
절우사맹(節友社盟)
퇴계(退溪) 이황(李滉)은 그의 시 도산잡영(陶山雜泳)에서, 화단을 만들어 매죽송국(梅竹松菊)을 심고 이름을 ‘절우사’라 했다 하였으며, 또 “도연명(陶淵明)의 삼경(三徑)에도 매화가 빠졌으니 이소(離騷)만의 흠전(欠典)이 아니다.” 하였는데, 매화를 매우 사랑하였다.
절운관(切雲冠)
굴원(屈原)의 『초사(楚辭)』에서 나왔는데, 당시의 높은 관(冠)이다.
절월(節鉞)
임금이 장수를 떠나보낼 때 권위의 상징으로 내리는 부절(符節)과 부월(斧鉞)을 말한다. 장군의 진영에 꽂는 깃대와 도끼로, 전임권(專任權)을 상징한다.
절인(切人)
‘충직한 사람’을 가리킨다.
절장보단(絶長輔短)
긴 것을 잘라 짧은 것에 보강한다. 곧, 장점으로 단점을 보충함을 말한다. 『맹자(孟子)』 「등문공(滕文公)」에 “이제 등나라는 긴 부분을 잘라 짧은 부분에 보태면 장차 50리의 소국에 불과하지만, 그럼에도 오히려 좋은 나라가 될 수 있습니다[今滕, 絶長補短, 將五十里也, 猶可以爲善國].”라는 말이 있다.
절전(折箭)
‘힘을 한 군데로 합하여 서로 협력하다’란 뜻의 고사성어다.
절절(截截)구변이 좋은 모양, 성한 모양
절절(切切)
매우 정중한 모양, 근신하는 모양, 소리가 가늘게 계속되는 모양, 간절히 생각하는 모양
절절(晢晢)
밝은 모양
절절(折折)
밝은 모양
절조(折俎)
‘잔치하고나서 음식을 먹는 것’을 말한다. 『좌전(左傳)』 선공(宣公) 16년에 “왕이 사회(士會)를 불러 ‘왕의 향례(饗禮)에는 통째로 드리고, 연례(宴禮)에는 끊어서 도마에 담는다.’ 했다.”는 말이 있다.
절족(折足)
직무를 감당하지 못하여 일을 그르침. 발이 꺾인다는 것은 『주역(周易)』 鼎卦의 “솥의 발이 부러져 공의 음식을 엎어버린 것이다[鼎折覆公餗].”에서 인용한 것이다.
절종(折葼)
종풀은 남색 염료로 쓰는 풀이다. 당(唐) 나라 두생(杜生)은 점을 잘 쳤는데 한번은 종을 잃은 자가 와서 묻자 “이 길로 가다가 사자(使者)를 만날 것이니 그에게 채찍을 달라고 하면 찾게 될 것이라.” 하였다. 그 사람은 가다가 과연 사자를 만나 사실을 말하고 채찍을 청하자 사자는 “나는 채찍이 없으면 말을 몰 수 없으니 대신 종풀을 꺾어 오라.” 하였다. 그는 종풀을 꺾기 위해 종풀이 있는 곳을 가 보니 그곳에 도망한 종이 숨어 있었다. 『신당서(新唐書)』 卷二百四 「두생전(杜生傳)」
절지(折枝)
한(漢) 나라 때의 장안(長安) 사람들이 손님을 보낼 적에는 반드시 패교(霸橋)까지 배웅해 가서 버들가지를 꺾어 송별하였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절진교두류(折盡橋頭柳)
옛날 장안(長安) 사람들이 손을 배웅할 때는 반드시 파교(灞橋)까지 가서 다리 가의 버들가지를 꺾어 주어 송별(送別)을 했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절진향서지(折盡向西枝)
관서(關西) 지방 쪽으로 떠나는 길손을 전송하며 버들가지를 꺾어 이별의 정을 나누는 바람에 가지가 모두 꺾였다는 말이다. 백거이(白居易)의 시에 “도성 문 가까이 송별을 많이 하는지라, 긴 가지 모두 꺾여 봄바람이 줄었도다[爲近都門多送別 長條折盡減春風].”라는 명구(名句)가 있다. 『백락천시집(白樂天詩集)』 卷19 「청문유(靑門柳)」
절차(切磋)
절(切)은 끊는 것이며, 차(磋)는 가는 것이니, 각(角) 같은 물건을 가지고 기구를 만들려면 먼저 끊은 뒤에 다시 갈아야 한다. 이것을 공부하고 덕을 닦는 데 비유하고 또 좋은 친구들이 서로 학문을 도우는 데 비유한다. 『시경(詩經)』 위풍(衛風) 「기욱(淇澳)」과 『대학(大學)』 전3장에 “광채 나는 군자여! 잘라놓은 듯하고 간 듯하며 쪼아놓은 듯하고 갈아놓은 듯하네[有匪君子, 如切如磋, 如琢如磨]”라는 글이 있다.
절차탁마(切磋琢磨)
끊고 갈고 쪼고 다듬음. 뼈나 상아ㆍ옥ㆍ돌 등을 가공하는 과정으로 덕행이나 인품을 닦거나 학문⋅기예를 끊임없이 갈고 닦는 과정을 비유. 『시경(詩經)』 위풍(衛風) 「기욱(淇澳)」과 『대학(大學)』 전3장에 “광채 나는 군자여! 잘라놓은 듯하고 간 듯하며 쪼아놓은 듯하고 갈아놓은 듯하네[有匪君子, 如切如磋, 如琢如磨]”라는 글이 있다.
절찬의(蕝纂儀)
절찬(蕝纂)은 띠를 묶어서 위치를 표한 다음 조회하는 의식을 연습하는 것을 말한다. 『한서(漢書)』 「손숙통전(叔孫通傳)」에 “제자 1백여 명과 절찬을 만들어 야외에서 연습했다.” 하였다.
절체절명(絶體絶命)
‘몸이 끊어지고(죽고) 목숨이 끊어진다’는 말로, ‘궁지에 몰려 살아날 길이 없게 된 막다른 처지임’을 말한다.
절충(折衝)
절충어모(折衝禦侮)의 준말로, ‘적의 침입을 격파하여 모욕당하지 않게 한다’는 말이다.
절충준조(折衝樽俎)
술자리에서 외국 사신과 담소하면서 자국(自國)의 주장을 관철시켜 국위를 떨칠 만한 인재를 가리킨다.
절취(竊吹)
제 선왕(齊宣王)이 피리를 좋아하여 피리 부는 사람 3백 명을 함께 연주하게 하고 모두 후한 녹봉을 주었는데, 이때 남곽처사(南郭處士)는 피리를 불지도 못하면서 그 사이에 끼어 피리를 부는 체하고 녹봉을 받았던 데서 온 말로, 재능 없는 사람이 외람되이 높은 지위를 차지함을 비유한 말이다. 『한비자(韓非子)』 「내저설(內儲說)」
절치부심(切齒腐心)
몹시 분하여 이를 갈고 속을 썩이다. 몹시 원통하고 분한 정도가 매우 심한 모양. 몹시 노하다는 뜻이다.
절필(絶筆)
붓을 놓고 기록하지 않는 것으로 공자는 춘추(春秋)를 기록할 적에 노(魯) 나라 애공(哀公) 14년 기린을 잡은 데까지만 서술하고 그 이후는 기록하지 않았다.
절함(折檻)
‘난간을 부러뜨린다’는 말로, ‘간곡하게 충간(忠諫)한다’는 뜻의 고사성어다.
절항서(浙杭書)
홍대용(洪大容)이 영조(英祖) 41년에 사신가는 숙부를 따라 연경(燕京)에 갔을 때 절강ㆍ항주의 선비인 육비(陸飛)ㆍ엄성(嚴誠)ㆍ반정균(潘庭筠) 등을 사귀고 왔는데, 그 후에도 계속 서신 왕래가 있었다. 『담헌집(湛軒書)』 外集 「항전척독(杭傳尺牘)」, 박지원의 「홍덕보묘지명(洪德保墓誌銘)」 엄부자(嚴夫子)ㆍ육효렴(陸孝廉)ㆍ반향조(潘香祖)는 이들을 말한다.
절해(節該)
이두(吏讀)의 하나로 졋해라 읽는데 문서의 전체 요지(要旨), 핵심적인 내용을 가리킨다.
절해취(折骸炊)
『좌전(左傳)』에, 송(宋)나라가 초(楚)나라 군사에게 포위를 당하여 성중(城中)에서 자식을 바꾸어 잡아먹고 해골을 쪼개어 불을 때어 밥을 지었다 한 말이 있다.
절혹논감고(節或論甘苦)
자기 비위에 맞으면 좋아하고 맞지 아니하면 싫어하는 감탄고토(甘呑苦吐)의 혐의가 조금 있다고 은근히 풍자한 말이다.
절효(節孝)
송(宋) 나라의 효자 서적(徐積)의 시호(諡號)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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