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5. 전
전(荃)
향초(香草) 이름인데, 굴원(屈原)이 지은 「이소경(離騷經)」에 임이란 말을 전(荃)이라고 대신 썼다.
전가호(佃家戶)
전객(佃客)과 같은 말로 남의 농토를 빌어 농사짓는 사람을 말한다. 『목민심서(牧民心書)』 / 인용: 母別子(김성일)
전각(剪刻)
재단하고 조각하는 것을 말한다
전감(傳柑)
송(宋) 나라 소식(蘇軾)이 한림 학사(翰林學士)로 있을 때 지은 시 ‘상원시음루상(上元侍飮樓上)’에 “猶有傳柑遺細君”의 구절이 있는데, 자주(自注)에 “누상(樓上)에서 황제를 모시고 술을 마실 때면 귀척(貴戚)들이 다투어 근신(近臣)에게 황감(黃柑)을 주곤 하였는데, 이를 일컬어 전감(傳柑)이라 하였다.” 하였다. 『소동파시집(蘇東坡詩集)』 卷36
전감의혈기시호(戰酣蟻穴幾時好)
몽환(夢幻)과 같은 세속의 권력을 서로들 차지하려고 아귀 다툼을 벌이는 세태를 풍자한 것이다. 개미 구멍 속의 이른바 대괴안국(大槐安國) 속에 들어가 온갖 부귀 영화를 누리다가 꿈에서 깨었다는 남가일몽(南柯一夢)의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전감절(傳柑節)
상원(上元) 즉 정월 15일을 이른다. 고사(故事)에 상원일 밤에 근신(近臣)들이 임금을 모시고 술을 마시면 귀척(貴戚)들이 다투어 황감(黃柑)을 근신들에게 전해 주었던 데서 온 말이다.
전갱(籛鏗)
요(堯) 임금 때 사람으로 팽성(彭城)에 봉하였기 때문에 팽조(彭祖)라고도 하는데, 7백 67살이 되었어도 노쇠하지 않았다 한다. 『열산전(列仙傳)』
전거(氈車)
담요로 포장을 친 호인(胡人)의 수레를 말한다.
전거(轉車)
불법(佛法)을 말한 것. 먼저 부처나 뒤에 부처나 그 발자취가 굴러가는 수레와 같다는 데에서 나온 말이다. 심약(沈約), 「천불찬(千佛讚)」
전거(專車)
‘수레를 혼자 타고 다님’을 말한다. 『진서(晉書)』 「화교전(和嶠傳)」에 “교가 중서령(中書令)에 승진되자 임금이 매우 예우(禮遇)하였다. 그때 순욱(荀勖)이 감령(監令)이 되었는데, 교는 순욱의 사람됨을 비루하게 여겨 그와 수레를 함께 탈 적마다 호기를 부려 수레를 독차지하고 앉으므로, 임금이 감령으로 하여금 다른 수레를 타도록 하였다.” 한다.
전거(前車)
후인이 경계해야 할 지나간 일들. 『순자(荀子)』 「성상(成相)」에, “앞 수레가 이미 전복되었는데도 뒤에 가는 수레가 그것을 모른다면 깨달을 때는 언제일 것인가[前車已覆, 後未知更, 何覺時].” 하였다.
전거가감(前車可鑑)
전인(前人)의 실패를 보고 후인(後人)은 이를 경계로 삼아야 한다는 뜻의 고사성어다. 『순자(荀子)』 「성상(成相)」
전거지감(前車之鑑)
앞 수레를 거울로 삼음. 지난날의 실패를 교훈으로 삼아 다시는 실패하지 않도록 대비함 『순자(荀子)』 「성상(成相)」
전거후공(前倨後恭)
이전에는 거만하다가 나중에는 공손하다는 뜻으로, 상대편의 입지에 따라 대하는 태도가 상반되는 것을 비유한 고사성어다.
전격(戰格)
목책(木柵)으로 장애물을 방어하는 용도다[即戰柵. 防禦障礙物] / 인용: 潼關吏(두보)
전겸모(典兼謨)
상서(尙書)의 「요전(堯典)」, 「순전(舜典)」와 「대우모(大禹謨)」, 「고요모(皐陶謨)」 등을 가리키는바, 상서(尙書)를 가리킨다.
전겸익(錢謙益)
청(淸) 나라 정치가이자 시인. 자는 수지(受之), 호는 목재(牧齋). 우산종백(虞山宗伯)으로 시에 능하였고, 벼슬이 예부 상서(禮部尙書)에 벼슬이 이르렀다. 열조시집(列朝詩集)을 만들었는데, 고종(高宗) 때에 와서 비방(誹謗)의 내용이 많다 하여 책판(版)을 불태워버리고 간행을 금했다가 청 나라 말기에 와서야 다시 간행되었다. 저서에는 초학집(初學集)ㆍ유학집(有學集)ㆍ목재집(牧齋集)이 있고, 집록(輯錄)으로는 열조시집(列朝詩集)이 있다. 『청사(淸史)』 「전겸익전(錢謙益傳)」 / 인용: 梨花庵老僧行(최성대)
전경(錢卿)
전곤(錢昆)을 이름이다.
전경곤루의(鱣鯨困螻蟻)
한(漢) 나라 가의(賈誼)의 굴원을 조상하는 부(弔屈原賦) 끝 구에, “강과 바다에 비낀 전어와 고래가 개미에게 욕을 본다.”는 구절이 있다. 「조굴원부(弔屈原賦)」
전경인루의(鱣鯨因螻蟻)
하찮은 일로 곤욕을 치르는 데 비유한 말이다. 가의(賈誼)의 「조굴원부(弔屈原賦)」에 “강호의 고래가 진실로 개미에게 제재를 당한다[橫江湖之鱣鯨兮 固將制於螻螘]”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전계(前溪)
악부(樂府)의 이름으로, 전계곡(前溪曲) 또는 전계가(前溪歌)라고 한다.
전계(展季)
유하혜(柳下惠)를 가리킨다. 유하(柳下)는 전금(展禽)의 읍(邑)이고, 계(季)는 그의 자(字)이기 때문에 그런 별칭이 있게 되었다 한다. 『순자(荀子)』 「성상(成相)」
전계삼출(展季三黜)
노(魯)의 대부(大夫) 유하혜(柳下惠)가 사사(士師)로서 세 번씩이나 물리침을 당하고서도 노 나라를 떠나지 않았음. 그는 자(字)가 계(季)이고 이름은 획(獲)이다. 『순자(荀子)』 「성상(成相)」, 『논어(論語)』 「미자(微子)」
전곡(戩穀)
『시경(詩經)』 소아(小雅) 「천보(天保)」편에, “너로 하여금 그지없이 선하게 하리라[俾爾戩ꜘ].”라는 말이 있는데, 전(戩)은 진(盡)이요, 곡(穀)은 미(美)의 뜻이라 한다.
전곤(錢昆)
그가 외직(外職)으로 나가기를 바라고 있을 때 누가 “어느 고을을 마음에 두느냐?”고 묻자 “게(蟹)만 있고 통판(通判)이 없는 고을이면 되겠노라.” 대답했다 한다. 「귀전록(歸田錄)」
전곤(轉坤)
위급한 국면을 만회하고 새로이 개혁 정치를 펴 나가는 것을 말한다. 하늘과 땅을 되돌려 새로운 국면을 개척한다는 ‘선건전곤(旋乾轉坤)’의 준말이다.
전공(全功)
결점이 없는 완벽한 사공(事功)을 말한다.
전공두보낭(全空杜甫囊)
술 사 마실 돈도 없이 주머니가 텅 비었다는 뜻이다.
전공소혁혁(田公笑嚇嚇)
농가어(農家語)에 의하면, 섣달에 눈이 내리면 풍년이 든다고 하는데, 가문 해에는 반드시 눈이 많이 오는 것이므로, 조야첨재(朝野僉載)에 “섣달에 눈 오는 것을 보면, 농부가 껄걸 웃는다[臘月見三白 田公笑嚇嚇]” 한 데서 온 말이다.
전관호색(轉關護索)
전관(轉關)과 호색(護索)은 모두 악보(樂譜) 비파곡(琵琶曲)의 이름이다.
전괄(箭筈)
화살의 머리로서 활줄이 닿는 곳을 말한다.
전괄거상(箭筈車箱)
전괄은 화살 끝처럼 좁은 산마루를 말하고, 거상은 마치 수레의 짐칸처럼 우묵한 골짜기를 말하는데, 또는 전괄령(箭筈嶺)과 거상곡(車箱谷)의 명칭으로도 쓰는바, 두보(杜甫)의 망악시(望岳詩)에 “거상의 골짝에 들어서니 돌아갈 길이 없고 전괄로 하늘을 통하는 문 하나가 있구려[車箱入谷無歸路 箭筈通天有一門].” 한 데서 온 말이다. 『두소릉시집(杜少陵詩集)』 卷六
전광석화(電光石火)
번갯불의 섬광과 부싯돌이 부딪쳐 튀는 불똥. 매우 빠름을 말한다. 즉, 아주 빠른 동작이나 짧은 시간을 표현하는 말이다.
전구(氈裘)
① 북방의 유목민들이 입는 털가죽으로 만든 옷이다. / 인용: 答李仲存書(박지원)
② 털로 짜서 만든 갖옷인데 서북 지방의 오랑캐들이 입으므로 서강(西羗)이나 흉노의 추장을 가리킨다.
『전국책(戰國策)』
① 전국책은 나라별로 나눠 편찬한 고대 사료 총집이다. 이 책은 결코 한 사람 손에서 나온 것이 아니며, 아마 전국 혹은 진한시기 사람이 각국의 사료를 이리저리 수집하여 편찬해 만든 것일 것이다. 서한시기에 유향이 이를 정리해 나라에 따라 순서을 매기고 33편으로 편집한 후 『전국책(戰國策)』이라 이름지었다. 전국책은 주로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지모가 뛰어난 신하와 책략가들이 변설한 말을 기술했는데, 그 중에는 생생하게 사건을 서술하고 인물을 형용해낸 문장이 적지 않다.
② 중국 전한 시대의 유향(劉向)이 편찬한 서적 33권. 서주(西周)ㆍ동주(東周)ㆍ진(秦)ㆍ제(齊)ㆍ초(楚)ㆍ조(趙)ㆍ위(魏)ㆍ한(韓)ㆍ연(燕)ㆍ송(宋)ㆍ위(衛)ㆍ중산(中山)의 12책으로 이루어졌다. 서주ㆍ동주란 효왕(孝王) 이후ㆍ분열한 두 주(周)를 말하는 것으로서 춘추 이전의 주를 말한 것이 아니다. 이 책의 내용은 조ㆍ위ㆍ한 3국이 진(晋)을 분열한 데서 시작하여 제와 연과의 싸움, 유협ㆍ자객의 일, 소진, 장의 등의 합종(合從) 연횡(連橫)의 설을 기술하고 연의 멸망에서 끝난다. 기록된 것은 『사기(史記)』의 기재와 합치되는 바가 많다. 『사기(史記)』는 『전국책(戰國策)』을 중요한 사료로 삼았음은 사마천(司馬遷) 자신도 언급한 바 있는데 지금의 전국책은 또 『사기(史記)』의 글에 따라서 개정한 데가 있다고 한다. 사고전서(四庫全書)의 분류에서는 사부(史部) 잡사류(雜史類)에 속해 있는데 책 중의 종횡가의 의론과 실제의 사실과는 분별할 필요가 있다. 한(漢)의 고유(高誘)의 주는 잔결(殘缺)이나마 존재한 것을 송의 요굉(姚宏)이 교정 속주한 것이 현재 전해지고 있고 청의 황비열(黃丕烈)의 전국책찰기(戰國策札記)는 고유의 주와 속주(續注)를 구별한 것이다.
전국칠웅(戰國七雄)
춘추전국시대 중국의 패권을 놓고 대립한 7대 강국을 뜻하는 고사성어다.
전귀(全歸)
몸을 조금도 훼상(毁傷)함이 없이 그대로 죽는 것을 이른다. 공자(孔子)의 제자로 이름은 삼(參)이고 자가 자여(子輿)인 증자(曾子)가 이르기를 “부모가 온전히 낳아 주었으니, 자식이 온전히 돌아가야만 효(孝)라 할 수 있는 것이다[父母全而生之 子全而歸之 可謂孝矣].”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예기(禮記)』 「제의(祭義)」, 『소학(小學)』 「계고(稽古)」
전귀락(全歸樂)
인생은 누구나 부모가 온전히 낳아 주었으므로, 자식의 의당 한 걸음 걷는 일도 매우 조심하여 부모의 유체(遺體)를 조금도 손상함이 없이 온전하게 죽어야만이 효자라 할 수 있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예기(禮記)』 「제의(祭義)」, 『소학(小學)』 「계고(稽古)」
전귀행지면(全歸幸知免)
부모의 유체(遺體)를 조금도 훼상(毁傷)시키지 않고 그대로 간직하여 죽는 것을 이른 말이다. 증자(曾子)가 병이 났을 때 제자들을 불러 이르기를, “이불을 걷고 내 손발을 보아라. …… 지금에야 내가 몸 훼상됨을 면한 줄 알겠다[啓予足 啓予手 而今而後吾知免夫].” 하였다. 『논어(論語)』 「태백(泰伯)」
전금(田禽)
‘밭의 새’는 『주역(周易)』 「사괘(師卦)」의 “새가 밭에 와서 곡식을 먹으면 잡아도 된다.”고 한 그 ‘밭의 새’이다.
전금(展禽)
자는 계(季), 시호는 혜(惠)인 유하혜(柳下惠)를 가리킨다. 유하혜는 춘추시대(春秋時代) 노(魯) 나라의 어진 대부로, 이름은 획(獲)인데, 유하(柳下)에 살았으므로 유하혜라고 불렀다. 『맹자(孟子)』 「만장(萬章)」 下에 “유하혜는 성자(聖者)의 온화한 면을 지닌 사람이다.” 하였다.
전금출(展禽黜)
전금은 춘추시대(春秋時代) 노(盧) 나라 유하혜(柳下惠)의 이른다. 유하혜가 사사(士師)가 되었다가 세 번 쫓겨나자, 혹자가 그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이곳을 떠나야 하지 않겠는가.” 하니, 그가 대답하기를, “바른 도리로 임금을 섬기면 어디간들 세 번 쫓겨나지 않겠으며, 도를 굽혀 임금을 섬기려면 왜 굳이 조국을 떠날 것이 있겠는가.”고 한 데서 온 말이다. 『논어(論語)』 「미자(微子)」
전기(專氣)
여자와의 관계가 없는 순수한 양기(陽氣)를 이른다. 도가(道家)에서는 이를 잘 보유해야만 도를 얻어 소년ㆍ소녀와 같이 된다고 한다.
전기(錢起)
당(唐) 나라 사람, 자는 중문(仲文). 시에 뛰어났다.
전낙지(錢樂泄)
중국 남조(南朝)의 송(宋) 나라 때 사람. 혼천의(渾天儀)를 만듦.
전다육(顚茶陸)
육우(陸羽)는 당(唐) 나라 사람으로 자(字)는 홍점(鴻漸). 차를 매우 즐겨 다경(茶經) 3편을 지었으며, 차를 파는 자들은 그를 높여 다신(茶神)이라 하였다.
전다정(煎茶井)
한송정 구역에 차샘(茶泉)ㆍ돌부엌ㆍ돌절구가 있으니, 곧 술랑(述郞) 등 국선(國仙)의 무리가 놀던 곳이다.
전단(旃檀)
인도(印度)에서 나는 향나무 이른다. 조각도 하고, 뿌리와 함께 가루를 만들어 향으로 쓴다.
전단수(栴檀樹)
인도에서 나는 향목(香木)으로 향기가 아주 강렬하다.
전당(鱣堂)
강당(講堂)을 말한다. 한(漢) 나라 양진(楊震)이 강의를 하던 강당 앞에 새가 전어(鱣魚) 세 마리를 물고 날아와 머리를 조아렸다. 『후한서(後漢書)』 卷54 「양진열전(楊震列傳)」
전당(錢塘)
① 고을 이름이다. 중국 절강성(浙江省) 항주(杭州)에 있다.
② 지금의 절강성(浙江省) 절강을 말하는데, 이곳에 조수가 밤낮으로 두 차례씩 들어 주민들이 막심한 폐해를 겪어오다가 삼국(三國) 시대에 화신(華信)이 흙이나 돌 1곡(斛)을 날라오는 자에게는 1천 전을 주겠다고 상금을 내걸고 열 달 사이에 둑을 완축하였으므로 이른 말이다. 전당이라 부르는 것은 돈을 내걸고 수축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浙江
전당대소(錢塘待蘇)
송(宋) 나라 소식(蘇軾)이 절강성(浙江省) 항주(杭州)의 전당호(錢塘湖)를 수축하여 관개 사업을 한 것을 말한다. 보통 소공제(蘇公隄) 혹은 소제(蘇隄)라고 한다. 『송사(宋史)』 河渠志 7
전당려구(錢塘麗句)
연꽃으로 유명한 전당호(錢塘湖)와 관련하여 시인들이 지은 아름다운 시구를 말한다. 백낙천(白樂天)은 전당호가 있는 항주(杭州)의 자사(刺史)를 지냈고, 소동파(蘇東坡) 역시 이곳의 통판(通判)을 지냈는데, 그들의 시집을 보면 전당호에 대한 내용이 많이 나온다.
전당소(錢唐蘇)
전당(錢唐)은 항주(杭州)로서, 송(宋) 나라 신종(神宗) 때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을 반대하다 항주 통판(杭州通判)으로 나갔던 소동파(蘇東坡)를 가리킨다. 『송사(宋史)』 卷338
전당조락(錢塘潮落)
원(元) 나라가 남송(南宋)을 쳐서 멸할 때에 전당강(錢塘江)에 매일 오던 조수(潮水)가 그때에는 이르지 않았다 한다.
전당팔월조(錢塘八月潮)
전당(錢塘)은 절강(浙江)의 하류. 조수가 밤과 낮 두 번씩 드는데, 그 파도가 하늘에 치솟고 굉음이 지축을 울린다.
전대(專對)
사신이 되어 자유자재로 응대(應待)하는 것으로 『시경(詩經)』의 학문을 말한다. 공자(孔子)는 일찍이 “『시경(詩經)』 3백 편을 외도 정사를 맡길 때 제대로 하지 못하며, 사방에 사신으로 보낼 때 독단(獨斷)하여 응대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많이 안다 하더라도 무엇에 쓰겠는가?” 하였다. 『논어(論語)』 「자로(子路)」
전대미문(前代未聞)
앞 시대에 아직 들어 본 일이 없는 일. 곧, 어떤 일의 시초를 말한다.
전대중사호(專對重使乎)
전대는 사신이 외국에 나가 독자적으로 임기응변하며 응답하는 것을 말하는데, 거백옥(蘧伯玉)의 사신이 전대를 잘 하자 공자(孔子)가 훌륭한 사신[子曰 使乎使乎]이라고 두 번이나 찬탄한 고사가 전한다. 『논어(論語)』 「헌문(憲問)」
전대해위(專對奚爲)
전대는 나라의 전권대표로서 일을 처리하는 것이고, 해위(奚爲)는 쓸모 없음을 의미한다. 『논어(論語)』 「자로(子路)」에 공자가 이르기를 “시(詩) 3백 편을 외우고도 사방에 사명을 받들어 행함에 능히 나라를 대표(專對)하지 못하면 또한 무엇에 쓰겠느냐[亦奚以爲]?”고 한 것을 인용한 것이다.
전도(躔度)
별이 하늘에서 운행하는 도수(度數)를 말한다. 송사(宋史) 「천문지(天文志)」에 “28수(宿)의 전도가 많아지기도 하고 적어지기도 한다.” 하였다.
전도양양(前途洋洋)
앞길이 바다와 같음. 장래가 매우 밝음.
전도요원(前道遼遠)
앞으로 갈 길이 아득히 멂. 목적한 바에 이르기에는 아직도 멂.
전도유랑(前度劉郞)
당(唐) 유우석(劉禹錫)이 귀양갔다 와서 거듭 현도관(玄都觀)에 놀면서, “복숭아 심은 도사(道士)는 지금 어디 갔는고. 전에 왔던 유랑(劉郞) 지금 또 왔네.”란 시를 지었다.
전동정(轉動政)
정기적으로 승진ㆍ출척시키는 도목정(都目政)에 반하여 무시로 관직을 제수하는 정사.
전두(纏頭)
① 기생들에게 상품(賞品)으로 주는 비단을 말한다.
② 노래나 춤을 추는 예인(藝人)들에게 주는 재물로, 행하(行下)를 말한다.
전두문(田竇門)
전씨와 두씨(竇氏)는 모두 한(漢) 나라 때 왕실의 외척이었던 무안후(武安侯) 전분(田蚡)과 위기후(魏其侯) 두영(竇嬰)을 가리키는데, 이들은 서로 권력을 다투다가 끝내 두영은 전분의 참소에 의해 잡혀 죽었고, 전분 또한 두영의 원귀(寃鬼)에 의해 곧 죽었다. 『사기(史記)』 卷一百七 「위기무안후열전(魏其武安侯列傳)」
전둔력조양장군(前屯歷弔楊將軍)
명 나라 요동 총병관(遼東摠兵官) 양조(楊照)를 가리킨다. 양조는 자가 명원(明遠)이며, 충성스럽고 용감하였는데, 가정(嘉靖) 연간에 오랑캐와 싸우다가 죽었다. 그의 패루(牌樓)가 전둔위(前屯衛)에 있다. 『명사(明史)』 卷60 「양조열전(楊照列傳)」
전등(傳燈)
불교의 선종(禪宗)에서는 마음으로 마음을 전하는 것(以心傳心)을, 등불이 등불에 광명(光明)을 전하는 데 비유하여 전등(傳燈)이라 한다.
전랑(錢郞)
① 당 나라 시인 전기(錢起)를 이름인데 자는 중문(仲文)이요 오흥(吳興) 사람이다.
② 일반적으로 당 나라 때 십재자(十才子)의 일원인 전기(錢起)와 낭사원(郎士元)의 합칭으로 인용되는데, 고공낭중(考功郎中)벼슬을 지내고 물러났던 전기를 가리키기도 한다.
전려(傳臚)
과거(科擧)에 우등(優等)으로 급제한 것을 가리킨다.
전려(氈廬)
북쪽에 있는 흉노들은 추위를 막기 위하여 털로 휘장을 만들어 사용하므로 붙여진 이른다.
전련(顚連)
‘몹시 가난하여 의지할 데가 없음으로 어찌할 수 없다’는 말로, 곤궁한 처리를 말한다. 송(宋)나라 장재(張載)의 「서명(西銘)」에 “온 천하의 쇠잔하고 병든 자, 고아와 독거노인과 홀아비와 과부가 모두 곤궁하여 하소연할 곳 없는 나의 형제들이다[凡天下疲癃殘疾 惸獨鰥寡 皆吾兄弟之顚連而無告者也].”라는 표현이 있다. / 인용: 牧民心書序(정약용)
전로(電露)
『금강경(金剛經)』 「응화비진분(應化非眞分)」에 “일체 유위법(有爲法)은 꿈과 같고 허깨비와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으며, 또 이슬방울과 같고 번갯불과 같다[如露亦如電].”는 말이 나온다.
전룡(錢龍)
큰 뱀을 말하는데, 용(龍)의 일종이라고도 한다.
전륵(鈿勒)
‘자개를 박아서 만든 의자’를 말한다.
전모(典謨)
전(典)은 『서경(書經)』의 「요전(堯典)」ㆍ「순전(舜典)」이며, 모(謨)는 「대우모(大禹謨)」ㆍ「고요모(皐陶謨)」ㆍ「익직(益稷)」 등의 편을 가리킨다. 이것은 내용이 모두 제왕의 도리와 치국(治國)의 대도(大道)를 논하였다. 일반의 경전(經傳)을 말하기도 한다.
전모급명고(典謨及命誥)
『서경(書經)』를 읽어보면 정치하는 방법이 빈틈없이 나왔다는 뜻이다. 전은 요전ㆍ순전을 말하고, 모(謨)는 「대우모(大禹謨)」ㆍ「고요모(皐陶謨)」 등을 말하고, 명(命)은 열명(說命)을 말하고, 고(誥)는 중훼지고(仲虺之誥)ㆍ탕고(湯誥) 등을 말한다.
전목재(錢牧齋)
목재(牧齋)는 청(淸) 나라 학자 전겸익(錢謙益)의 호이다. 그는 특히 문장(文章)으로 청 나라 당대에 크게 이름을 날렸고, 초학집(初學集)ㆍ유학집(有學集) 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
전무후무(前無後無)
‘그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었다’는 뜻으로 최초의 일이라는 걸 말한다.
전문감풍생(田文感馮生)
전문(田文)은 전국시대(戰國時代) 제(齊) 나라의 정승이었던 맹상군(孟嘗君)의 이름이다. 천하의 현사(賢士)를 초청하여 식객(食客)이 3천 인을 넘었는데, 실권(失權)을 하자 그들 모두가 그 곁을 떠나갔다. 뒤에 다시 복권(復權)이 되었을 때 맹상군이 이를 한스럽게 여겨 “다시 찾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얼굴에 침을 뱉어 주겠다.”고 하였는데, 풍환(馮驩)이 “부귀해지면 선비들이 많이 모여들고 빈천해지면 친구도 적어지는 것은 사리로 볼 때 당연한 일이다.”고 하면서 시장 거리의 사람들을 예로 들어 설명하자, 맹상군이 감복을 하여 선비를 잘 대접했다고 한다. 『전국책(戰國策)』 「제책(齊策)」, 『사기(史記)』 卷七十五 「맹상군전(孟嘗君傳)」
전문루적(田文淚滴)
전문(田文)은 제(齊) 나라 맹상군(孟嘗君)이다. 제 나라 옹문에 살았던 옹문자주(雍門子周)는 본디 금곡(琴曲)에 뛰어나서 그가 거문고를 가지고 자기 마음대로 사람을 울리기도 하고 웃기기도 했는데, 그가 일찍이 맹상군 앞에서 인생의 부귀영화가 덧없음을 소재로 하여 거문고를 한 곡조 타니, 맹상군이 슬퍼서 눈물을 줄줄 흘렸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설원(說苑)』 『선설(善說)』
전문정동하(專門正東閜)
이백(李白)의 고시(古詩) 59수 중 제 3수에서 진시황(秦始皇)이 천하를 제압한 사실을 노래하면서, “함곡관(函谷關)이 동쪽으로 활짝 열렸네[函谷正東開].”라고 하였다. 진 시황이 육국(六國)을 병합하자 침략을 두려워할 일이 없어, 그동안 굳게 닫아걸었던 동쪽 관문(關門) 함곡관을 활짝 열어 두었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좌소산인 서유본이 문장 공부에 전념한다면 장차 천하를 제압하는 명가(名家)가 되리라는 격려의 뜻을 나타낸 것이다. / 인용: 贈左蘇山人(박지원)
전문체련(田文涕漣)
전문(田文)은 제(齊) 나라 맹상군(孟嘗君)의 성명. 옹문주(雍門周)라는 사람이 거문고를 타면서 부귀 공명의 무상함을 슬피 노래하자, 맹상군이 비상(悲傷)하여 눈물을 흘렸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설원(說苑)』 『선설(善說)』
전반향(篆盤香)
향(香)을 전자(篆字)처럼 만들어서 12시 백각(百刻)으로 하여 일주야(一晝夜)를 태운다.
전발(翦髮)
「개원전신기(開元傳信記)」에 “귀비가 항상 말로써 임금의 비위를 거스르자 임금이 노하여 고역사(高力士)를 시켜 짐차에 태워 사가(私家)로 내보냈다. 귀비가 머리털을 베어 역사에게 주며 ‘다른 진귀한 물건은 다 임금이 주신 바이니 드릴 만한 것이 못되고, 이것은 부모에게서 받은 바이니 첩(妾)의 연모하는 뜻을 드릴 수 있다.’ 하였다. 임금이 그 머리털을 받고는 눈물을 흘리며 바로 역사를 시켜 다시 돌아오게 했다.” 하였다.
전벽(錢癖)
금전에 대한 욕심이 강함을 말한다.
전복거후거계(前覆車後車戒)
앞에 뒤집어진 수레는 뒷 수레의 경계가 됨. 전인(前人)의 실패를 보고 후인(後人)은 경계 삼아야 함을 비유 『순자(荀子)』 「성상(成相)」
전봉(轉蓬)
다북쑥을 굴린다(轉蓬)는 말은 바람에 나부끼는 다북쑥을 의미한 것이다.
전부(銓部)
전조(銓曹), 즉 이조(吏曹)의 별칭이다.
전부습호(傳不習乎)
증자(曾子)의 일일삼성(一日三省) 중 한 가지. 배웠던 것에 대해 몸에 익도록 하지 않은 것이 있었던가? 『논어(論語)』 「학이(學而)」
전부정승(戰不正勝)
싸움에는 이길 것을 정하지 아니한다. 이 말은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 희공(僖公) 26년 조(條)에, “出師 不正反 戰不正勝”이라 보인다.
전비(田費)
한(漢) 나라가 일어난 후로 역학(易學)의 시조로 일컬어진 전하(田何)와 그의 학문을 수전(數傳) 후에 이어받은 비직(費直)을 합칭한 말이다. 『한서(漢書)』 卷八十八
전사(篆沙)
모래 위의 전자(篆字). 모래 위를 밟고 다녀서 난 발자국이 마치 전자 모양으로 된 형태를 말한 듯하다.
전사(傳舍)
역관(驛館)을 말한다. 한(漢) 나라의 합관요(蓋寬饒)가 당시의 귀족인 허백(許伯)의 새 집 지은 낙성식(落成式)에 가서 새 집을 쳐다보며, “부귀(富貴)는 무상(無常)하여 문득 사람을 바꾸는 것이니, 비유컨대, 전사(傳舍)와 같아서 사람을 많이 겪을 것이다.” 하였다.
전사(塡詞)
한시(漢詩)의 한 체(體)로서 성운(聲韻)의 평측(平仄)에 적당한 자구(字句)를 세워서 짓는 시이다.
전사계포(田舍季布)
전답 사이에 있는 농사지을 때 거처하는 집. 스스로 팔려 온 자를 사들인 주가(朱家)는 그가 계포(季布)인 것을 마음으로 의식하고 그를 그대로 전사에다 두게 하고는 그 길로 낙양(洛陽)으로 가 여음후등공(汝陰侯滕公)을 찾아 몇 날을 묵은 다음 여음후를 통해 고조(高祖)에게 간하게 하여 결국 계포를 무사하게 만들었음. 『사기(史記)』 卷100 「계포난포열전(季布欒布列傳)」
전삼후삼(前三後三)
선가(禪家)에 전삼삼ㆍ후삼삼이란 화두가 있다.
전상(典常)
언제나 지켜야 할 법도 또는 도리(道理).’전상을 붙든다.’ 함은 지도자로서의 모범이 됨을 말한다.
전상(田常)
춘추시대(春秋時代) 제(齊)의 사람. 자기 임금 간공(簡公)을 시해하고 뒤에 재상이 되어 국정을 마음대로 하였다. 『사기(史記)』 「노세가(魯世家)」
전생(錢生)
중당(中唐) 시인 전기(錢起). 대력(大歷) 10재자(才子)의 하나. 그가 과거할 때, “상수의 영이 비파를 탐[湘靈鼓瑟].”이란 시제(試題)에 지은 시 끝귀에, “곡이 끝나자 사람은 보이지 않는데, 강위에 두어 봉이 푸르르다[曲終人不見 江上叛峯靑].” 하였는데, 전기가 소시에 길을 가다가 역정(驛亭)에서 자는데, 이 글귀를 외우는 이가 있으므로 문을 열어본 즉 사람은 없었으니 아마 귀신의 글귀였다. 그 뒤에 과거 볼 때에 이 시제(試題)에 글을 짓다가 끝 귀에 이 글귀를 써넣어서 합격하였으므로 신(神)이 도와준 귀라 한다.
전생(田生)
호가 두전생(杜田生)인 한(漢) 나라의 역학자 전하(田何)를 가리킨다. 동무(東武)의 손우(孫虞)에게 『주역(周易)』을 배워 동무의 왕동(王同), 낙양(雒陽)의 주왕손(周王孫)ㆍ정관(丁寬), 제(齊)의 복생(服生) 등 4인에게 전수하였다고 한다.
전생소(田生笑)
전생(田生)은 전국시대(戰國時代) 위(魏) 나라 문후(文侯)의 스승이었던 전자방(田子方)를 가리킨다. 전자방(田子方)이, 국가를 위해 수고하던 말이 늙고 쇠하자 길가에 내다 파는 것을 보고는, 불인(不仁)한 일이라 하고 자기가 돈을 내어 속(贖)해 주었던 고사에서 유래한다. 『회남자(淮南子)』 「인간훈(人間訓)」. 『한시외전(韓詩外傳)』
전서(篆書)
대전과 소전으로 나누는데 대전은 주나라 선왕 때에 만들어져 전국(戰國)시대에 유행한 것이다. 돌에 새긴 석고문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둥글면서도 힘이 있다. 소전은 진시황(秦始皇)이 천하를 통일하고 이사로 하여금 복잡하게 발전하던 글자들을 통일하기 위하여 만들게 한 글자체라 한다. 소전은 각이 지고 굵고 가늠이 변하지 않는다.
전석(前席)
임금이 신하의 이야기를 더 잘 들으려고 앞으로 나와 앉는 것을 말한다. 진 효공(秦孝公)이 상앙(商鞅)과 대화를 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앞으로 나와 앉았다는 고사와, 한 문제(漢文帝)가 선실(宣室)에서 가의(賈誼)와 귀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의 이야기에 심취해서 자신도 모르게 그의 앞으로 바짝 다가앉아(前席) 경청했던 고사가 있다. 『사기(史記)』 「상군열전(商君列傳)」ㆍ「굴원가생열전(屈原賈生列傳)」
전선(鈿蟬)
부녀자들의 양쪽 뺨에 붙이는 매미 모양의 금화(金花)를 가리킨다.
전성(全城)
전의(全義)의 옛 이름이다.
전성(專城)
지방 장관을 이른다. 그 권력이 성(城) 하나를 전제할 만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한 성의 주인이라는 뜻으로 주목(州牧)이나 태수(太守), 사또 등을 말한다.
전성(前星)
황태자(皇太子) 혹은 왕세자(王世子)의 별칭이다. 심성(心星)을 군왕의 상징으로 삼는 데 대하여 심성의 앞에 자리한 별을 태자의 상징으로 삼은 데서 온 말이다. 황전(皇傳)에 “가운데 별은 천왕(天王)이요, 그 앞의 별은 태자며 뒤의 별은 서자(庶子)이다.” 하였다.
전성경(磚成鏡)
옛날 양선사(讓禪師)가 마조(馬祖) 앞에서 벽돌을 갈고 있으므로, 마조가 무엇을 만들려느냐고 묻자, 양선사가 거울을 만들고자 한다고 하므로, 마조가 이르기를 “벽돌을 갈아서 어찌 거울을 만들 수 있겠는가.” 하니, 양선사가 대답하기를 “벽돌을 갈아서 거울을 만들 수 없다면 좌선(坐禪)하는 것은 어떻게 부처가 될 수 있겠는가.”고 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전성백(專城伯)
하나의 성읍(城邑)을 전담하는 어른이라는 말로, 지방 장관의 별칭이다.
전성영양(專城榮養)
전성(專城)은 지방장관을 일컫는 말로서, 여기서는 수령으로 나가 어버이를 극진히 모실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전성지양(專城之養)
고을 수령이 되어 녹봉으로 부모를 봉양하는 것을 전성지양(專城之養)이라 하여 매우 영화롭게 여겼다.
전소(顚素)
당 나라 중 회소(懷素)를 이름인데 초서가 신경(神境)에 들었음. 이백(李白)의 초서가(草書歌)에 보인다.
전수(前修)
주자집주(朱子集註)에, “謂前代脩德之人”이라 하였다.
전수지(錢受之)
수지(受之)는 전겸익(錢謙益)의 자(字)이다.
전시주교(剸兕誅蛟)
한(漢) 나라 왕포(王褒)가 지은 「성주득현신송(聖主得賢臣頌)」에 “물속에서 교룡을 끊어 버리는 칼날이요, 땅 위에선 코뿔소를 잘라 버리는 칼이로다[水斷蛟龍 陸剸犀革].”라는 구절이 나온다. 『문선(文選)』 卷47
전신(傳神)
매우 사실에 가깝게 표현하여 생명력을 불어넣는 고차원의 예술 기법을 뜻하는 말인데, 진(晉) 나라의 저명한 화가인 고개지(顧愷之)가 초상화를 그려 놓고 몇 년 동안이나 눈동자에 점을 찍지 않으면서 “바로 눈동자 속에 전신의 요체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고 말한 고사가 전한다. 『세설신어(世說新語)』 「교예(巧藝)」 / 인용: 觀鄭元伯霧中畫毗盧峯(이병연)
전신(前身)
불교(佛敎)의 윤회설(輪回說)에, 사람이 죽어서 다시 후세에 태어난다 하는데, 전생(前生)은 전신(前身)이요, 후생(後生)은 후신(後身)이라 한다.
전신도시담(全身都是膽)
조자룡(趙子龍)이 적은 군사를 가지고 조조(曹操)의 대군(大軍)을 만나 싸워서 격파하였다. 유현덕(劉玄德)이 익일에, 그의 싸우던 곳을 둘러보고, “자룡은 온 몸이 모두 담(膽)이로다.” 하였다.
전신론(錢神論)
문장의 이름인데, 진(晉) 나라 때 은사인 노부(魯褒)가 시속이 돈을 탐하는 것을 슬프게 여겨, 성명(姓名)을 숨기고 전신론을 지어서 시속을 풍자했다고 한다. 『진서(晉書)』 「은일전(隱逸傳)」
전심(荃心)
전(荃)은 향풀인데 당시 상대방을 높여 부르는 말로 쓰였는바, 전심은 곧 초 나라 왕의 마음을 가리킨 것이다. 이소경에 “전은 나의 마음 헤아리지 못하고 도리어 참소하는 말을 믿고 노여워하네.” 하였다.
전악(典樂)
옛날 음악(音樂)을 맡은 벼슬 이른다. 『서경(書經)』 「요전(舜典)」
전앙(錢秧)
모내기 할 때 순전히 돈으로 품삯을 치르는 것을 돈모(錢秧)라고 하였다.
전어(前魚)
용양군(龍陽君)이 고기를 낚으며 울었다. 초왕(楚王)이 까닭을 물으매 대답하되, “신(臣)이 처음 고기를 얻었을 땐 몹시 기쁘더니, 뒤에 더욱 큰 것을 많이 잡으니 전에 잡았던 것을 버릴 생각이 나옵니다. 지금 해미에 미인이 심히 많사온데 신이 총행(寵幸)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달려오는 자가 많사오니, 신도 또한 전에 얻은 고기 같사오리이다.” 하였다.
전여유대영(傳與劉代嬴)
영씨(嬴氏)는 진시황(秦始皇)의 성(姓)이므로 진 나라를, 유씨는 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으로 한 나라를 가리킨다. 무릉도원(武陵桃源)은 본래 진 나라의 학정(虐政)을 피해 들어간 사람들이 사는 선경(仙境)인데, 진 나라가 망하고 한 나라가 선 것을 모르고 있었다 한다. 『도정절집(陶靖節集)』 卷六 「도화원기(桃花源記)」
전여천공(牋與天公)
송(宋) 나라 때 육유(陸游)의 독사유감시(讀史有感詩)에 “머리 숙이어 세상 일에 나가고 싶지 않고 전문 지어 하늘에 올리고 싶지도 않네 오직 술이나 실컷 마시고 취해 죽어서 수많은 산 깊은 곳에서 솔바람소리나 들어야지[不肯低頭就世事 亦不作牋與天公 惟須痛飮以醉死 亂山深處聽松風]” 한 데서 온 말이다. 『검남시고(劍南詩藁)』 卷四十三
전연(篆煙)
향연(香煙)이 전자(篆字)형으로 만들어진 것을 이른다. 명 나라 송렴(宋濂)의 시에 “塵暗玉階綦跡斷 香飄金屋篆煙淸”이라 하였다.
전연(顚連)
가난하고 의지할 곳 없는 것을 의미한다. 송(宋)나라 장재(張載)의 「서명(西銘)」에 “온 천하의 쇠잔하고 병든 자, 고아와 독거노인과 홀아비와 과부가 모두 곤궁하여 하소연할 곳 없는 나의 형제들이다[凡天下疲癃殘疾, 惸獨鰥寡, 皆吾兄弟之顚連而無告者也].”라고 하였다. 행장〔行狀〕 『제월당집(霽月堂集)』 / 인용: 母別子(김성일)
전예련삼첩(戰藝連三捷)
예전에 과거를 보는데 초시(初試)ㆍ회시(會試)ㆍ정시(庭試) 세 번에 모두 합격하였다는 말이다.
전오(典午)
사마(司馬)의 벼슬. 전(典)은 사(司), 오(午)는 마(馬)이다. 「촉지(蜀志)」 「초주전(譙周傳)」에, “典午忽兮 月酉沒兮 典午者 謂司馬也 月酉者 謂八月也”라고 하였다.
전오(典午)
전(典)이라는 말은 맡았다는 말이요, 오(午)라는 것은 말(馬)이니, 이것은 사마씨(司馬氏)의 사마(司馬)와 같은 말이다. 앞뒤의 전오(前後典午)라 함은 한나라 때의 『사기(史記)』를 저술한 사마천(司馬遷)과, 송나라에서 통감(通鑑)을 편찬한 사마광(司馬光)을 말함이다.
전오이상기(典午已相欺)
전은 사(司)의 뜻이고 오는 마(馬)의 뜻으로, 곧 사마씨(司馬氏)인 진(晉) 나라를 가리킨다. 서로 속였다는 것은 곧 조조(曹操)와 사마의(司馬懿)가 서로 왕위를 찬탈한 것을 말한다.
전왕(錢王)
오대(五代) 때 오월(吳越)왕 전씨(錢氏). 시조 전유(錢鏐), 그 손자 숙(叔) 송(宋)에 항복하기까지 3세(世), 5주(主) 84년간(895~978) 왕이라 일컬었다.
전요경(錢堯卿)
송(宋) 나라 사람. 자는 희재(熙載)이다.
전우(全牛)
이 글귀의 뜻은 『장자(莊子)』 「양생주(養生主)」에, “푸줏간의 백정이 칼을 놓고 대답하되, ‘처음 신(臣)이 소를 분해할 적에는 보이는 것이 모두 소 밖에 없었는데 3년 후에는 온 마리 소가 보이지 아니했습니다.’ 하였다.”는 것에 보인다.
전욱(顓頊)
① 고대 제왕의 이른다.
② 북방(北方)의 신으로, 동신(冬神)을 말한다. 『예기(禮記)』 「월령(月令)」에, “맹동(孟冬), 중동(仲冬), 계동(季冬)의 달은, 그 제(帝)는 전욱(顓頊)이고 그 신(神)은 현명(玄冥)이다.” 하였다.
전욱(顚旭)
당 나라 명필 장욱(張旭)을 이름인데 술을 좋아하여 크게 취하면 혹은 머리를 먹물에 적시어 휘둘러 초서를 썼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장전(張顚)이라 호하였다.
전원장무(田園將蕪)
‘논밭과 동산이 황무지가 됨’이란 뜻으로, 가꾸질 못해 집안살림이 망가졌음을 말한다. 「귀거래사(歸去來辭)」
전원장무하일귀(田園將蕪何日歸)
도잠(陶潛)의 「귀거래사(歸去來辭)」 첫구. “돌아가자. 전원이 장차 거칠어 가려니 어찌 안 돌아가리[歸去來兮 田園將蕪胡不歸].”
전유(羶腴)
‘노린내 나는 살진 고기’라는 뜻으로, 즉 ‘세속의 부귀 영화’를 가리킨다.
전유업(傳遺業)
당 나라 소존(蕭存)이 죽은 뒤에 아들이 없고 두 딸만이 있었는데, 한유(韓愈)가 그의 옛집을 지나다가, “중랑이 딸이 있어 능히 업을 전한다[中郞有女能傳業]”시를 지었다. 중랑(中郞)이란 한(漢)나라 채옹(蔡邕)의 벼슬로 딸 채문희(蔡文姬)가 아버지의 문학(文學)을 전하였다.
전의(前疑)
의(疑)는 벼슬이름으로 옛날 인군(人君)의 좌우전후에 네 사람의 보좌의 신하가 있었다. 그 가운데 임금의 앞쪽에 뫼신 사람을 전의(前疑)라 한다. 천자에게 직접 올림은 예가 아니므로 전의(前疑)에게 드려, 인군에게 전해지도록 했다. / 인용: 大寶箴(장온고)
전의(全義)
당 헌종(唐憲宗) 때 남조정왕(南詔靖王) 몽권이성(蒙勸利晟)의 연호이다.
전의(田衣)
승려가 입는 가사(袈裟)의 별명이다. 그 옷의 도안(圖案)이 마치 종횡으로 펼쳐진 밭고랑처럼 네모진 모양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곽진경은 아마도 승려 출신으로서, 무공을 세워 왕으로부터 진경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전의곡강유(典衣曲江遊)
주연(酒宴)을 말한다. 두보(杜甫)의 시 「곡강(曲江)」에 “퇴근하면 봄 옷을 전당 잡히고, 날마다 강변에서 곤드레만드레 취해 오네[朝回日日典春衣 每日江頭盡醉歸].”라는 구절이 있다.
전인미답(前人未踏)
‘이제까지의 세상 사람 그 누구도 가보지 못한 곳’이란 뜻이다.
전자(剪字)
종이를 오려서 자형(字形)을 만드는 것을 이른다.
전잠(田蠶)
‘농사 짓고 누에 치는 일’을 말한다.
전장(顚張)
당(唐) 나라 서예가 장욱(張旭)의 별호이다. 초서(草書)를 아주 잘 썼는데 술이 한껏 취하면 머리털에다 먹을 묻혀 미친 듯이 초서를 썼으므로 남들이 전장(顚張)이라 했다 한다. 『당서(唐書)』 卷二百二
전장(專場)
‘필적(匹敵) 할 사람이 없는 기막힌 솜씨를 소유한 것’을 말한다.
전장탈모(顚張脫帽)
당 나라 장욱(張旭)이 초서(草書)를 잘 썼는데, 그는 술을 좋아하여 취한 뒤에 붓을 휘둘렀다. 그의 행동이 광태(狂態)가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미친 장전(張顚)이라 불렀으며, 두보(杜甫)의 「음중팔선가(飮中八仙歌)」에는 장욱에 대하여, “왕공들 앞에 모자를 벗어 머리를 드러내고, 붓을 휘둘러 종이에 떨어짐이 구름이나 연기 같다[脫帽露頂王公前 揮毫落紙如雲煙].” 하였다.
전저(前箸)
한왕(漢王)이 밥을 먹고 있는데 장량(張良)이 밖에서 들어와서 일을 의논하다가 밥상의 젓가락(箸)을 빌려 들고서 계책을 헤아렸다.
전저(專諸)
춘추시대(春秋時代) 오(吳) 나라 용사. 오 나라 공자 광(公子光)이 오왕 요(吳王僚)를 죽이려고 할 적에 전저는 공자 광을 위해 구운 고기(炙魚)의 뱃속에 칼을 숨겨 가지고 오왕 앞에 나아가 대번에 오왕을 찔러 죽이고, 자신도 오왕의 측근에게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했다. 『사기(史記)』 卷八十六 「자객열전(刺客列傳)」
전저획(前筯畫)
식상(食床)에 놓인 젓가락을 가지고 수(籌)를 놓아서 계획을 세우는 것을 말한다. 『한서(漢書)』 「장량전(張良傳)」에 “신(臣)은 밥상 앞에 놓인 젓가락을 빌려서 수를 놓아보겠습니다.” 하였다.
전전(戰戰)
두려워서 떠는 모양. 『논어(論語)』 「태백(泰伯)」, 『시경(詩經)』 소아(小雅) 「소민(小旻)」
전전(塡塡)
만족한 모양, 규율이 바르고 훌륭한 모양, 거마의 수가 많은 모양, 우뢰가 울리는 모양, 북소리가 연달아 나는 모양, 독실한 모양
전전(巓巓)
오로지 한결같은 모양, 근심하는 모양, 어리석은 모양
전전(滇滇)
왕성한 모양
전전(塡塡)
우뢰 치는 소리.
전전(戔戔)
적은 모양, 수가 많은 모양
전전(傳箭)
‘전시(戰時)에 전령(傳令)할 때에 쏘는 화살’을 말한다. / 인용: 梨花庵老僧行(최성대)
전전(殿前)
중국에서 군사들의 명부를 관리하고 훈련시키는 일 등을 관장한 관서의 이름이다.
전전(剪剪)
지혜가 부족한 모양, 말솜씨가 능숙한 모양, 아첨하는 모양, 바람이 으스스 추운 모양, 마음을 한 가지로 하는 모양, 가지런한 모양
전전(悛悛)
진중하여 말이 적은 모양
전전긍긍(戰戰兢兢)
매우 두려워 벌벌 떨며(戰戰) 몸을 움츠리고 조심하는 모습(兢兢). 어떤 일에 임하여 두려워서 조심한다는 뜻이다. 『논어(論語)』 「태백(泰伯)」, 『시경(詩經)』 소아(小雅) 「소민(小旻)」
전전반측(輾轉反側)
옆으로 눕고 뒹굴고 뒤집고 다시 옆으로 누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누워서 몸을 이리 저리 뒤척임. 『시경(詩經)』 주남(周南) 「관저(關雎)」
전정만리(前程萬里)
‘나이가 젊어 장래가 유망하다’는 뜻이다.
전정후채(前丁後蔡)
송(宋) 나라 때 정위(丁謂)와 채양(蔡襄)이 서로 전후하여 맨처음 건주산(建州産) 용단다(龍團茶)를 개발해서 진상하였던 일을 가리킨 것이다.
전제(筌蹄)
① 고기를 잡는 통발(筌)과 토끼를 잡는 올무(蹄)는 목적을 위한 방편(方便)이며, 통발과 올무는 결국 고기와 토끼는 아니듯이, 언설(言說)은 진리를 말할 것이로되 끝내 진리가 아니므로 진리를 구하려면 언설을 잊어야 한다. “통발은 고기를 잡는 것이나 고기를 얻고는 통발을 잊어야 하고, 올무는 토끼를 잡는 것이나 토끼를 얻고는 올무는 잊어야 하며, 말은 뜻을 나타내는 것이나 뜻을 얻고는 말을 잊어야 한다.” 하였다.
② 효용이 없어져 쓸모 없게 된 물건을 말한다. 『장자(莊子)』 「외물(外物)」에 “물고기를 잡고 나면 통발은 생각하지 않게 되고, 토끼를 잡고 나면 그물을 잊게 마련이다[得魚而忘筌 得兎而忘蹄].”라는 말이 있다.
전제(詮諦)
불교 용어로 진제(眞諦)와 같은 말이다. 속사(俗事)의 허망한 도리인 속제(俗諦)와 구별되는 ‘진정한 도리’를 가리킨다. / 인용: 答蒼厓之二(박지원)
전조(銓曹)
이조(吏曹)나 병조(兵曹)처럼 인사 행정을 담당한 부서를 말하는데, 이조에서는 문관(文官), 병조에서는 무관(武官)의 전형(銓衡)을 맡았음.
전조(錢趙)
전(錢)은 오대(五代) 시대 오월국왕(吳越國王)인 전유(錢鏐)를 말하고, 조(趙)는 송 태조(宋太祖)인 조광윤(趙光胤)을 가리킨다.
전주(前籌)
한(漢)나라 장량(張良)이 한왕(漢王)께 뵈오니 그가 막 식사 중이라, 양(良)이 밥상의 저를 빌어 조건을 세어가면서 계책을 아뢰었다.
전중(殿中)
①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의 약칭이다. 전정(殿庭)에서 천자(天子)의 호종(扈從)을 맡는다.
② 전중감찰(殿中監察)의 준말이다.
전중낙간(殿中落簡)
조선 시대에 논의할만한 조정의 일로서 그 사실을 아는 감찰(監察)이 그 내용을 종이에 써서 옷소매에 간직하였다가 모임이 있을 때 대청(臺廳)에 떨어뜨려서, 다른 대간들이 그 내용을 보고 쓸 만하면 대론(臺論)으로 채택하여 논계하고 불가하면 인통(印筒)에 봉치(封置)하게 한 제도. 전중(殿中)은 감찰의 별칭이다.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
고려 때 어사대(御史臺)의 정6품 벼슬로, 조선의 감찰(監察)에 해당한다.
전지(塡池)
끝내 출세하지 못함을 비유한 말이다. 삼국(三國) 시대 오(吳) 나라 주유(周瑜)의 상소문에서, 유비(劉備)는 용(龍)의 자질이라 결코 지중(池中)에 오래 묻혀 있을 사람이 아니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삼국지(三國志)』 「오지(吳志)」
전지(餞遲)
두보(杜甫)의 시에 “바삐 서둘러 긴 여정(旅程)에 벌써 오르시는데, 전별 자리 미적대다 만나 뵙지도 못했네요[蒼惶已就長途往 邂逅無端出餞遲].”라는 구절이 있다. 『두소릉시집(杜少陵詩集)』 卷5 送鄭十八虔貶台州司戶
전진(前塵)
불교 용어로, 망심(妄心)의 앞에 나타나는 일체 세간의 모든 사물(六塵)을 말한다.
전차복철(前車覆轍)
앞사람의 실패를 거울삼아 주의하라는 뜻의 고사성어다. 『순자(荀子)』 「성상(成相)」
전차복후차계(前車覆後車戒)
앞에 가는 수레가 엎어지면 뒤에 가는 수레는 그것을 보고 교훈을 삼는다. 앞 사람의 실패를 교훈으로 삼는다는 뜻이다. 『순자(荀子)』 「성상(成相)」
전철(前轍)
앞에 지나간 수레바퀴의 자국으로, ‘전인(前人)의 실패나 잘못’을 비유하는 말이다.
전철유유가(前哲有遺歌)
『시경(詩經)』 위풍(衛風) 「고반(考槃)」에 “은자가 숨어살며 그의 산에서 사는 즐거움을 남에게 말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전청(轉淸)
다음. 다음으로 굴러가다. 멈추지 않고 변화해 더 나아진다는 뜻이다.
전청(田靑)
논우렁이다.
전채(錢債)
조선(朝鮮) 시대(時代)에 관(管)에서 주민들에게 이자를 받고 돈을 꿔주던 일 또는 그런 자금을 말한다. / 인용: 虎狼(이학규)
전체생원(傳遞生員)
할 일 없이 각 고을에 몰려다니며 수령들을 위협해서 민폐를 끼치는 양반들을 말한다. / 유의어: 부생원(桴生員)
전최(殿最)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근무고과점수, 혹은 그 제도와 기준이다. 조선시대 관료들의 근무상태를 조사하여 성적을 매겼는데, 이것을 전최라고 불렀다. 여기서 최상을 맞으면 최(最)가 되고, 꼴찌가 되면 전(殿)이 되었다. / 인용: 民間雜謠(윤기)
전추(前騶)
옛날 관리들이 길을 갈 때 그 앞에 서서 크게 외쳐대며 앞길을 인도하는 하인을 말한다.
전파(餞罷)
전별을 마치다는 뜻이다.
전포지라(轉胞之懶)
『문선(文選)』 「혜강여산거원절교서(嵇康與山巨源絶交書)」에 “언제나 소변이 마려워도 참고 있다가 결국 참을 수 없게 되어서야 일어나 소변을 본다.” 한 데서 온 말로, 게으름을 피운다는 뜻이다.
전품(田品)
사냥해서 수확한 것들을 등급별로 나누어 적절한 용도로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주역(周易)』 손괘(巽卦) 육사효(六四爻)에 “후회할 일이 없을 것이니, 사냥해서 잡은 것들을 세 등급으로 나눔이로다[悔亡 田穫三品].”라고 하였는데, 삼품(三品)에 대해서 주자(朱子)는 제사 음식용, 빈객 대접용, 주방 비축용이라고 해설하였다.
전해(塡海)
옛날 염제(炎帝)의 딸이 동해(東海)에 빠져 죽어 그 원혼이 정위(精衛)라는 새가 되었는데, 늘 서산(西山)의 목석(木石)을 물어다가 바다에 넣어 동해를 몽땅 메우려고 하였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태평어람(太平御覽)』 羽族部 精衛
전해석난편(塡海石難鞭)
진시황(秦始皇)이 해 뜨는 곳을 보기 위해 석교(石橋)를 만들 적에, 신인(神人)이 돌을 채찍질하여 몰아서 바다로 내려보냈는데, 돌이 빨리 가지 않을 경우 신인이 마구 채찍질을 하면 돌들이 모두 피를 흘렸다는 고사에서 온 말로서, 여기서는 곧 공을 이루기 어려움을 뜻한 말이다.
전형(錢兄)
진(晋) 나라 노포(魯褒)가 세상 사람들이 돈을 좋아하는 것을 비양하여 전신론(錢神論)을 지었는데, ‘세상 사람들은 돈을 형님이라 부른다.’는 구절이 있다.
전혜(荃蕙)
향초(香草)의 이름이다.
전혜화모(荃蕙化茅)
굴원(屈原)의 「이소경(離騷經)」에 “난초와 지초는 변하여 향기를 잃고, 전초와 혜초는 바뀌어 띠풀이 되었네. 어찌하여 옛날엔 향기롭던 이 풀들이 지금은 어찌 이처럼 쑥덤불이 되었는가[蘭芷變而不芳兮 荃蕙化而爲茅 何昔日之芳草兮 今直爲此蕭艾也].”라는 표현이 있다.
전호후랑(前虎後狼)
‘전문거호 후문진랑(前門据虎 後門進狼)’의 줄임말로, 앞문의 호랑이를 막으니 뒷문의 이리가 나온다는 말로, 하나의 재난을 피하자 또 다른 재난이 나타난다는 뜻의 고사성어다.
전홍(纏紅)
부부를 가리키는 말이다. 결혼을 주관하는 월하노인(月下老人)이 붉은 밧줄을 가지고 다니면서 부부의 인연이 닿는 사람들의 발목을 꽁꽁 묶어 놓는다는 설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속현괴록(續玄怪錄)』 卷4
전화위복(轉禍爲福)
화가 변하여 복이 된다. 화를 바꾸어 복으로 한다. 궂은 일을 당하였을 때 그것을 잘 처리하여 좋은 일이 되게 하는 것.
전환(剪鬟)
머리털을 자른다는 뜻으로, 진(晉) 나라 때 도간(陶侃)이 현리(縣吏)로 있을 때 그의 친구 범규(范逵)가 찾아왔는데, 본디 집이 가난한데다가 갑자기라서 대접할 것이 없으므로, 그의 어머니가 머리털을 잘라 팔아서 술과 안주를 사다 주어 즐겁게 마시고 놀았다. 『진서(晉書)』 卷六十六 「도간전(陶侃傳)」
전횡(田橫)
진(秦) 나라 사람으로 본래 제(齊)의 왕족이었다. 뒤에 한신(韓信)이 제왕(齊王) 전광(田廣)을 파멸(破滅)시키자, 전횡은 자립하여 왕이 되고 항우(項羽)를 섬겼었는데 한 고조(漢高祖)가 항우를 멸망시키자 전횡은 그의 무리 5백 명을 데리고 해도(海島)로 도망하였다. 고조는 사람을 보내어 부르기를 “전횡아 오라. 높은 자에게는 왕을, 낮은 자에게는 후(侯)를 주겠으며, 만일 오지 않으면 군사를 보내어 전멸시키겠다.” 하였다. 전횡은 두 객(客)과 함께 낙양(洛陽) 30리 밖에까지 와서 자살하니, 그의 객도 따라 죽었으며 해도에 있던 5백 명도 이 소식을 듣고는 모두 자살하였다. 이때문에 그들을 슬퍼하여 이 섬을 오호도(嗚呼島)라 불렀다 한다. 『사기(史記)』 卷九十四 「전담열전(田儋列傳)」
전횡도(田橫島)
한 고조(漢高祖) 때 제왕(齊王) 전횡(田橫)이 부하 5백 명을 거느리고 섬으로 들어간 후에 한 고조가 불렀으나 신하 되기를 거부하고 자결하자, 부하 5백 명도 모두 따라 죽었던 바, 한 고조가 섬 이름을 전횡도라 했다 한다. 『사기(史記)』 卷九十四 「전담열전(田儋列傳)」
전횡사(田橫士)
전횡을 따라 생사를 함께 한 의사들. 전횡은 전국시대(戰國時代) 제(齊) 나라 왕의 후예로 진말(秦末)에 제 나라 재상으로 있던 중, 한신(韓信)의 공격을 받아 나라가 망하자 제 나라 왕으로 자칭하고서 자기를 따르는 무리 5백 인을 거느리고 섬으로 도망갔다. 유방(劉邦)이 천자가 되어 사자를 보내 항복할 것을 회유하자, 전횡은 서울 낙양(洛陽)에 들어가기 직전에 한(漢) 나라의 신하가 되는 것이 부끄러워 자살하였는데, 섬 안에 남아 있던 그의 무리들이 그 소식을 듣고 역시 모두 자살하였다. 그들이 살았던 섬이 우리 나라 서해의 어딘가에 있었다고 전해 온다. 『사기(史記)』 卷九十四 「전담열전(田儋列傳)」
전후육만년(前後六萬年)
송(宋) 나라 소옹(邵雍)의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에 의하면, 천지가 순환 변천하여 원시(原始) 상태로 복귀하는 일기(一期)를 일원(一元)으로 삼고, 일원을 십이만 구천육백 년으로 추산하였으므로, 여기서 ‘앞으로 육만 년, 뒤로 육만 년’이라 한 것은 곧 그 일원의 성수(成數)인 십이만 년을 중간으로 나누어서 소옹의 재세(在世) 시기를 일컬은 말이다. 소옹의 자는 요부(堯夫)이다.
전후전오(前後典午)
부자(父子) 양대(兩代)에 걸쳐 『사기(史記)』를 완성했던 사마담(司馬談)과 사마천(司馬遷)을 가리키는데, 두 부자는 벼슬이 모두 태사령(太史令)이었다.
전휘(前徽)
전인(前人)의 아름다움. 곧 성현의 심법(心法)과 도학을 말한다.
전히(殿屎)
신음소리를 내는 것이다. 『시경(詩經)』 대아(大雅) 「판(板)」에 “백성들이 신음하고 있거늘 우리를 감히 헤아려주는 이가 없다[民之方殿屎 則莫我敢葵].” 하였다. / 인용: 田間紀事(정약용)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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