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을 도둑질하고 죽은 콘스탄티누스
콘스탄티누스, 그는 골(Gaul)족과의 전쟁(316~22)에서도 승리한 후, 북방 바바리안들의 왕들과 수천 명의 부하들을 함께 야수의 먹이로 던져주었다. 이러한 끔찍한 사건은 이교도들에게 깊은 충격을 주었다. 모두 기독교공인 이후의 행적들이다.
그는 기독교를 공인한 후에도 세례받기를 거부했다. 그는 요단강에 가서 직접 세례를 받겠다고 하면서 미루기만 했다. 그는 세례를 통하여 그의 죄가 사함을 얻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그의 삶의 최후의 순간까지 그가 저질러야 할 너무도 많은 죄악이 자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세례의 순간을 미루고 또 미루었다.
337년 봄,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대군을 이끌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떠나 소아시아로 갔다. 페르시아 왕국이 40년만에 로마를 상대로 다시 군사행동을 개시했기 때문이었다. 노구(老軀)의 콘스탄티누스는 지쳐 있었다. 소아시아반도의 서북단 니케아 근처의 니코메디아(Nicomedia)에 왔을 때 그만 그는 병석에 누웠다. 그곳은 그가 18세부터 30세까지 아버지를 떠나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 245~316) 황제 밑에서 그의 청춘을 보냈던 곳이다. 죽기 직전, 그는 황제의 보라색 망토를 벗고 초심자가 입는 흰 까운을 입고 세례를 받았다. 집전자는 아리우스파였던 니코메디아 주교 유세비우스였다. 그리고 죽었다. 향년 62세. 337년 5월 22일이었다. 시오노 나나미의 유머에 찬 표현대로 그는 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천국을 도둑질하고’ 죽었다.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은 절대왕정이 화려하게 꽃핀 17세기에 영국의 제임스 1세나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주장한 설로 알려져있다. 하지만 그것을 ‘현세에 대한 지배권의 신수설’로 바꿔 말하면, 17세기보다 1300년 전에 이미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씨를 뿌린 ‘사상’이었다. 지배권의 신수설이라는 ‘사상’은 그후에도 오랫동안 장수를 누렸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프랑스혁명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처럼 오랫동안 목숨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인간이 아니라 신이 통치자를 결정한다는 이 ‘사상’이 지배자에게는 정말로 편리했기 때문이다 (시오노 나나미, 『로마인 이야기』 13-350).
이것은 로마 역사에 관해서 서방의 고전학자들에게도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시오노 나나미(鹽野七生)의 통찰력 있는 언급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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