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 중시의 기독교와 깨달음 중시의 불교
“불교가 인간을 종교로부터 해방시켜준다라는 도올선생의 말씀은 제 가슴을 깊게 후려치는 명언입니다. 저는 모든 사람들이 종교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인류가 모두 종교적 신앙을 가져야만 더 나은 미래가 보장되리라는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종교에 대한 도올선생의 부정적 언급이나 저의 긍정적 언급이나 모두 말장난일 뿐 그 근원에 있어서는 상통되는 어떠한 진리를 말하고 있다는 것을 저는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씀하신 예수의 신비가설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생각한 것은 그것이 근원적으로 ‘역사적 예수’에 관한 논의를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렸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는 것입니다. ‘역사적 예수’를 탐색하려는 집요한 노력들이 좀 황당해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우리 불교에서는 아무리 그러한 논의가 치밀하게 전개된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전적으로 환영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불교적 신앙의 체계에 하등의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불교의 가장 원초적 출발이 싯달타라는 역사적 개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싯달타라는 인간이 구현하려고 했던 진리에 있기 때문입니다. 불교는 근원적으로 불타의 색신(色身, rūpa-kāya)보다는 법신(法身, dharma-kāya)을 중요시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색신에 대한 어떠한 논의도 법신의 의미를 경감시키지 않습니다. 법신은 법이며, 법은 곧 진리입니다.
도올선생의 말씀을 들으면서 재미있다고 생각한 것이 있었습니다. 즉 기독교의 예수에 관한 논의가 너무 지나치게 사건중심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이 예수가 동정녀 마리아에게 낳았고 갈릴리 바다를 잠재우고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을 행하였으며 로마인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또 부활하였다 하는 범상치 않은 사건 때문에 믿는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불교에서는 그러한 사건을 말하지 않습니다. 불타가 행한 어떠한 기적적 사건 때문에 불교가 형성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아무래도 좋은 것입니다. 불교가 문제삼는 것은 불타라는 인간이 우리에게 전한 법이며 진리입니다. 이 법이라는 것도 경전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그것 자체로 무오류적이고 고정불변의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의 깨달음의 한 계기로서의 방편에 불과한 것입니다. 부처님은 하나의 법이라도 상황에 따라 다양한 표현을 썼습니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기독교와 달리 바이블이라 할 수 있는 경전에 대해 전혀 절대적인 권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거대한 대장경 그 모두가 우리에게 깨달음을 전달하기 위한 방편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인간들의 깨달음의 기록이며, 깨달음을 유발시키기 위한 계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기독교가 유일신관을 포기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기독교의 이해 자체를 사건중심에서 법(다르마) 중심으로 그 축을 이동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축의 이동이 없으면 기독교는 앞으로 급속도의 쇠락의 길을 걸어갈 것입니다. 최소한 로마제국의 권력이 날조해낸 리터랄리스트의 사기로부터 벗어나지 않으면 더 이상 생명력을 지탱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 과학의 시대에 있어서 동정녀탄생이나 육신부활의 비인과적인 신화적 사태를 사실로서 강요할 수 있단 말입니까? 신화는 신화로서 족한 것이 아닙니까? 이미 서구사회에 있어서 기독교는 점차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으며, 미국에서도 상류층이나 지식인이나 지도층보다는 흑인이나 소외된 보수세력의 지지기반 속에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국과 같은 샤마니즘적 성향이 강렬한 제3세계나 기독교 전통을 새롭게 수용한 신생국가에서 오히려 그 발랄한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불교가 그 발상지인 인도에서는 암베드까르 박사의 개종운동이 상징하듯이 최하층민인 불가촉천민의 종교인 듯한 인상을 주고 있고, 한국에서도 개화된 상류층의 트레이드 마크가 기독교일 수는 있어도 불교이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비하면 재미있는 현상은 미국사회에서는 이러한 이미지가 완전히 역전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미국사회에서는 오히려 하층부의 사람들은 햄버거나 스테이크를 잔뜩 먹고 뚱뚱하며 기독교의 영성에 사로잡혀 있는 반면, 개명한 상층부의 사람들은 비만형의 인간들이 별로 없고 채식주의자들이 많으며 불교도라는 트레이드 마크를 달고 일본 스시집에를 잘 간다는 것이죠. 아~참! 여기와 보니깐 인도에서는 천민들은 비만형의 사람들이 전무한데, 아름다운 샤리를 걸친 상층부의 사람들은 예외없이 뚱뚱하더군요. 하여튼 불교는 홀쭉한 사람들을 잘 따라 다니는 것 같습니다.”
▲ 암베드까르의 흉상과 그를 사랑하는 하리잔 아동들, 아우랑가바드의 한 동네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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