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삼위일체 논쟁
어두운 중세기의 시작
초기기독교는 콘스탄티누스라는, 헤겔 말을 빌리면 ‘세계사적 개인’(World-Historical Individual)을 통하여 로마를 정복하고 로마로 통한 모든 세계의 길을 정복했지만, 로마와 더불어 그 진실한 모습은 자취를 감추었을지도 모른다. 소아시아의 도시 니케아에서 300여 명의 기독교 주교들을 소집해놓고 기독교 교리에 관하여 그 입심 거센 주교들의 논쟁을 주재하고 앉아있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모습은 이미 어두운 서양 중세기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니케아 종교회의(Council of Nicaea, 325년 5월)에서 문제가 된 사안은 바로 초대교회의 센터인 알렉산드리아의 두 종교지도자간에 7·8년 동안 비판의 거센 불을 뿜은 논쟁의 조정에 관한 것이었다. 니케아 종교회의는 일반세계사에서 매우 중대한 사건으로 취급된다. 세계 3대종교의 하나로서의 오늘의 기독교의 모습을 결정한 것이 바로 이 니케아 종교회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중요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알렉산드리아 교구내의 지역적 논쟁이 불씨였다고 할 때, 알렉산드리아가 당대 기독교세계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가늠질 해볼 수 있다. 알렉산드리아의 두 지도자란 알렉산드리아의 주교(bishop) 알렉산더(Alexander, 312?~328 주교 재직)와 그에 항쟁한 아리우스(Arius, c. 250~336)목사였다【아리우스의 직책에 관해서는 ‘presbyter,’ ‘elder,’ ‘priest’ 등의 영역표현이 사용되고 있으나, 오늘날의 신부나 장로 개념에는 정확히 부합되지 않는다. 그는 정확하게 ‘안수 받은 설교자’였다. 따라서 요즈음 조직개념으로 말하면 ‘목사’라는 표현이 가장 적절하다】
알렉산드리아의 아리우스
아리우스는 리비아(구레네)에서 이주하여 온 부모 밑에서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났다. 그는 한때 분열주의자로 몰린 멜레티오스(Meletios of Lycopolis)에게 사상적으로 동조했다가 연좌·추방되어 고행의 세월을 보냈다. 그러한 고난의 기간 동안에 그는 영적 체험을 한 듯하다. 그리고는 매우 강력한 영적 설교자로 다시 등장한다.
그는 312년 봄 아킬라스(Achillas)의 교구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당시 알렉산드리아의 기독교인들의 분위기는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 245~316)와 막시미아누스(Maximianus)의 기독교박해 이후 매우 침체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혜성처럼 등장한 아리우스는 기독교인이 가장 밀집한 알렉산드리아 한복판의 바우칼리스(Baucalis) 지구의 목사로 취임하면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을 뿐 아니라, 인격적으로도 매우 존경을 받았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의 지적 분위기를 매우 잘 반영하는 인물이었으며, 다년간의 고행으로 금욕적 경건함이 체화된 인간이었고, 요즈음 말로 한다면 매우 ‘리버럴(liberal, 진보적인)’한 사상가였다.
그는 철저한 네오플라토니스트(Neo-platonist)였다. 네오플라토니즘적인 사유를 기독교의 신비적 종교체험과 결합시키려 했다. 네오플라토니즘이라는 사상 자체가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난 운동이며 알렉산드리아의 지적 분위기를 잘 반영하는 사상체계인데,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플로티누스(Plotinus, AD 204~270), 그리고 그 이전의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사상가 필로(Philo Judaeus, C. BC 15~AD 50)를 통하여 그 정체를 더듬어 볼 수 있다. 플로티누스의 사상을 잘 뜯어보면 우리가 흔히 영지주의(Gnosticism)라고 막연하게 폄하하고 곡해했던 사상의 분위기와 일맥상통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네오플라토니즘이라는 것은 플라토니즘의 초월주의, 아리스토텔레스의 현세주의와 현상세계의 계층적(hierarchical) 이해, 그리고 유대교-기독교전통을 포함하는 모든 동방세계의 종교적 신비주의를 융합한 당대의 가장 총체적 사상이었다.
네오플라토니즘
궁극적 유일자(to hen, the One)만이 모든 대립과 차별을 초월한 유일절대의 실재이며,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만물의 세계는 이 유일자로부터 유출(emanatio)되어 나오는 것이다. 물론 아무리 유출된다 해도 대립과 차별을 초월한 유일자 그 자체는 증감이나 변화가 없다. 유일자는 우리의 사유나 언어가 단절되는, 규정불가능한, 기술 불가능한 ‘불가사의’(不可思議)의 절대자이다. 유출에는 단계가 있으며, 그 유출의 단계는 ‘타락’(Fall)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그 3단계는 이성(nous), 영혼(psyche), 물질(physis)이다. 유일자로부터 가장 멀리 유출된 물질은 죄악의 정도가 가장 높다. 물질은 물리적인 3차원적 공간의 세계이며 우리의 몸을 구성한다. 이성이 영혼으로 타락하고(떨어지고), 영혼이 물질 속으로 떨어져서 물질세계 속에 갇혀버렸다는 것이 곧 죄악의 상태인 것이다. 그러나 이 3차원적 공간세계 이 자체가 유일자의 끊임없는 창조적 유출이기 때문에 그것을 전적으로 부정적으로 볼 수만은 없다. 그것 역시 모든 진·선·미의 가능성을 구유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인간은 이성·영혼·물질의 모든 계기를 다 구유하고 있는 소우주적 존재(micro-cosmos)이며, 당연히 유일자로부터 유출된 존재이며, 궁극적으로는 그 유출을 소급하여 유일자와 다시 합일이 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소유한 존재이다. 인간의 정신활동은 직관적 이성(intuitive reason), 논리적 이성(discursive reason), 감각(perception)의 3단계로 등급 매겨질 수 있는데, 궁극적으로 직관적 이성을 잘 활용하면 유일자와 합일될 수도 있다. 금욕주의적 삶을 통해 고귀한 덕성(the highest virtues)을 축적한 사람은 어느 순간에 신비적 황홀경을 통해 유일자와 합일이 되는 체험을 할 수가 있다. 영혼이 육체의 감옥을 벗어나 유일자에게로 소급하여 합일되는 신비적 체험인 것이다. 그러한 경지를 엑스타시스(ekstasis, 脫自)라고 불렀다.
플로티누스(Plotinus, AD 204~270)는 또 우주의 이성적 원리를 로고스(Logos)라고 부르고 그것을 빛(Light)이라 규정하고, 암흑(Darkness)인 물질세계와 대비시키기도 했는데 이런 언어는 요한복음의 세계관이나 영지주의의 일반적 어휘와 상통하는 것이다(나의 『요한복음강해』 제1장 해석을 보라. 101~110). 플로티누스는 신비주의적 종교사상가라고도 말할 수 있겠지만 그 종교적 요소를 철저히 논리적으로 표현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철학자로서 다룬다. 그러한 향후의 모든 기독교적 신비주의자들의 사유체계는 이 플로티누스의 사상구조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14세기초의 신비주의 사상가 마이스터 엑카르트(Meister Eckhard, c. 1260~1328)의 신비주의철학도 네오플라토니즘과의 관계를 떠나 이야기하기 힘들다【엑카르트의 사상에 관해서는 최근 길희성 교수가 깊게 천착한 역작이 있다.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영성사상』, 서울: 분도출판사, 2003.】.
아리우스의 예수인간론
당시 알렉산드리아에서 대중에게 감화를 주면서 기독교의 신앙분위기를 쇄신하고 선풍을 일으켰던 아리우스의 주장 가운데, 가장 핵심적이면서도 아리우스가 끝내 한치도 양보하지 않은 테마가 곧 ‘예수는 인간일 뿐이다’하는 것이었다. 이 말 한마디 때문에 오늘까지도 아리우스는 흉악한 이단자로 취급되고 파문과 저주의 대상이 되었고 기독교의 정통사상과 타협하기 어려운 요소가 내포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이것은 당시 개명하고도 고상한 알렉산드리아 초기기독교도들의 리버럴한 사상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대변한 사상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아리우스 사상이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직접 중재가 필요할 정도로 문제시되었을 하등의 이유가 없다. 아리우스는 당시 로마세계 전 기독교인들의 존경받는 지적 거물이었고 일반 신앙인들의 우상이었다.
‘예수는 사람일 뿐이고 하나님일 수 없다’라는 주장은 진실로 이단사상처럼 들린다. 그리고 예수를 격하시키는 발언처럼 들린다. 그러나 실제로 이러한 주장이 과연 어떠한 의미맥락에서 논파되었는지에 관한 아무런 탐색이 없이 그냥 이단으로 몰아치는 것은 매우 몰상식한 태도다. 사실 우리는 아리우스에 관하여 보다 동정적으로 깊은 이해를 할 수 있는 정확한 자료를 확보하고 있지 못하다. 그는 결국 이단으로 몰렸고 따라서 그에 관한 자료들이 모두 파기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역사에 남은 문헌들은 모두 그의 반대파의 입장에서 서술된 것이다. 이단이 된다는 것은 이처럼 서글픈 것이다.
그런데 당대의 논쟁을 살펴보아도 아리우스의 논점은 결코 반기독(Anti-Christ) 혹은 반기독교적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의 강조점은 ‘예수의 사람됨’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유일성’에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절대유일하다는 것은 창조(생산)될 수 없다는 것(agennētos, ‘underived,’ ‘ungenerated’)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어느 타자로부터 유래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시ㆍ공을 초월하는 것이며, 시ㆍ공의 변화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시ㆍ공의 변화를 창조할 수는 있으되, 시ㆍ공의 변화로부터 창조되거나 생산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예수는 분명 수육(受肉)된 존재이며, 시ㆍ공 속에서 걸어 다니는 변화의 존재이다. 사람들과 같이 말하며 느끼며 같이 먹고 마시며 같이 울고 웃는다. 예수가 사람 되었다는 것은 분명 아버지가 아들을 생산하듯이 생산되었다(gennētos, ‘begotten’)는 것을 의미한다.
복음서가 그리고 있는 예수는 분명 우리군중들의 삶 속에서 살아 움직인 변화의 주체이다. 만약 이러한 변화의 주체이며 인간의 형상을 한 인격의 주체를 또 하나의 완벽한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유일절대신(monotheism)을 신앙하는 기독교원리에 어긋난다. 그것은 신을 둘 인정하는 것이며 그렇게 되면 기독교는 그리스-로마전통에서 신봉되고 있는 것과도 같은 다신론(polytheism)의 한 형태가 되어버린다고 아리우스는 주장했다. 성부와 성자의 관계에 있어서 오직 성부(Godhead, the Father)만이 유일 절대의 하나님이며, 성자(the Son)는 결코 성부와 동일한 동격의 신성을 가질 수는 없다고 보았다. 성자는 성부에게 종속될 수밖에 없다.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대선배 신학자 오리겐(Origen, c. 185~c. 254)도 이러한 종속론(subordinationism)을 발표한 바 있었다. 아리우스는 자기의 상관인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알렉산더가 두 개의 하나님, 두 개의 ‘창조되지 않은 자’를 가르치고 있다고 비난했다.
가현설의 위험성
이러한 논의에 관하여, 하나님과 창조된 세계를 매개하는 중간자(mediator)로서의 로고스(Logos, 말씀)를 설정하고, 그 로고스가 곧 예수라고 말하는 이론이 가능하다. 아리우스도 초기에는 이러한 중간자이론을 활용하여 어떤 타협점을 생각해보려고도 한 것 같지만 결국 아주 정직하게 결론을 내려버렸다. 로고스도 창조자이거나 피조물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애매한 중간이론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예수를 신과 동일한 실체로 만들어버린다면 예수는 실제로 이 시ㆍ공의 세계에 속할 수가 없다. 창조된 존재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이 세계 속에서의 예수의 모든 활동은 극단적으로 말하면 하나의 허상이 되어버리고 만다. 막말로 하나의 유령(phantom)이 가현(假現)하여 돌아 다니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십자가 위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막 15:34)를 외치는 예수의 모습은 인간 예수의 고뇌 찬 울부짖음이 아니라, 그 장면을 보고있는 사람들을 놀려먹기 위한 유령의 장난이 되고 말 것이다. 이러한 가현설을 도세티즘(Docetism)이라고 부르는데, 아리우스는 분명 이러한 도세티즘의 위험성을 배제하려고 했다.
아리우스는 ‘예수의 사람됨’을 확실하게 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인간의 하나님됨’을 확보하고 기독교의 유일신관을 천명하려 했다. 예수를 단순히 열등하고 범용한 한 인간으로 설정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the Son of God)로서의 그의 특별한 로고스적 성격, 그러니까 네오플라토니즘적인 합일, 엑스타시스, 그리고 죽은 후의 그의 완벽한 신성의 복귀 등, 우리와 같은 인간이면서도 우리와는 다른 어떠한 가능성의 존재로서 설정함으로써 인간이 예수의 수육ㆍ죽음ㆍ부활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려고 했다. 이것이 바로 알렉산드리아의 지적 분위기였으나, 이러한 방면의 아리우스 사상에 관해서는 우리가 상고할 자료가 별로 없다. 예수를 단순한 인간으로 격하시켜버리는 현대적 합리주의 해석은 아니었을 것이다.
인간 예수의 리얼한 모습과, 인간과 신의 합일을 꾀하는 신비주의와, 하나님의 절대유일한 초월성이 종합된 매우 포괄적 체계였을 것이다. 그러나 알렉산더 주교에게는 이러한 아리우스의 주장은 예수를 단순한 인간으로 격하시킴으로써 기독교적인 독특한 유일신관의 기저를 파괴시키고, 신적인 권능으로써 인간의 죄악을 대속한다고 하는 구원론적 의미를 약화시키고, 기독교를 비의적인 수련의 방편으로서 신비주의화시키는 우려가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호모우시온
결국 니케아 종교회의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알렉산더 주교의 편을 들 수밖에 없는 분위기로 흘러갔고, 아들도 아버지와 똑같은 신격의 존재라는 신경(信經)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성자는 성부와 동일한 실체이다’(homoousion to Patri)라는 ‘호모우시온’(同體)의 니케아신경(the Creed of Nicaea)은 그후 끊임없는 반박과 수정을 거쳐야 했지만 끝내 삼위일체론(Trinity)의 정통이론이 되었고,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강압적 정책으로 아리우스파의 공식적 반박은 자취를 감추었으나, 새롭게 유럽역사에 등장한 게르만 통치자들의 입교자 중에 아리우스파가 많아 그 영향력은 역사에서 사라지지 않고 지속되었다.
오늘날에도 16세기의 합리적 종교개혁파와 매우 리버럴한 칼비니스트(Calvinist)에게서 유래한 영국ㆍ미국의 유니태리아니즘(Unitarianism)은 아리아니즘의 한 지속으로 볼 수 있다. 그들은 예수의 신성과 삼위일체론을 정면으로 거부한다. 내가 공부하던 뉴잉글랜드지역의 유니태리안 교회에 가보면, 성경과 함께 『논어』와 불경이 같이 꽂혀있다. 그 교회 목사님이나 신도들은 종교적 문제에 있어서 이성의 무제약적 활약을 극구 권장한다. 교회의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탁월한 에세이스트며 강연자였던 에머슨(Ralph Waldo Emerson, 1803~1882), 『주홍글씨』를 쓴 호손(Nathaniel Hawthorne, 1804~1864), 시민불복종 권리를 외친 써로우(Henry David Thoreau, 1817~1862) 등 미국의 정신사를 리드했던 트랜센덴탈리즘(New England Transcendentalism)의 거장들이 모두 이 유니태리아니즘과 직ㆍ간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아주 극성적인 아리아니즘의 당대의 또 한 형태로서는 펜실바니아의 알레게니에서 태어난 찰스 테이즈 럿셀(Charles Taze Russell, 1852~1916)의 조그만 성경모임(the International Bible Students Association, 1872)으로부터 출발한 ‘여호와의 증인’(Jehovah's Witness)이다. 그들은 자신을 ‘예수의 증인’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절대ㆍ유일ㆍ보편의 지고한 신은 오직 ‘여호와’(Jehovah)일 뿐이며 예수는 여호와의 피조물일 뿐이며 사람일 뿐이며 그는 대속의 도구였을 뿐이다. 그는 죽어 영이 되어 이 세계 속에 같이 하고 있을 뿐이다. 예수에게 신성을 허락하지 않는 측면에서 이들은 아리안파로 분류된다. 따라서 그들은 ‘기독교인,’ 즉 크리스챤(Christians)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그들은 스스로를 ‘증인’(Witness)이라고만 부른다. 그들은 이 세계가 완벽하게 사탄(Satan)의 지배하에 있다고 믿는 측면에서는 역사적으로 영지주의와 상통한다. 따라서 신도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이 사탄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그들은 임박한 예수의 재림을 믿는다. 럿셀은 1874년을 보이지 않는 예수의 귀환의 해로 설정하다가 1914년을 예수 재림의 해(the year of Christs Second Coming)로 지정하였다. 1914년에 아무런 휴거도 일어나지 않자 계속 연기하였는데, 요즈음은 막연하게 말세의 표징들을 과학적으로 입증하는 언사들을 동원하고 있다.
마지막 심판의 날에 여호와에게 영생을 허락받아 예수와 함께 천국화된 지상을 지배할 자는 144,000명의 소수로 지정되어 있다(요한계시록 7장과 14장의 주장: 12지파라는 숫자관념에서 비롯된 숫자), 이들은 사탄이 지배하는 이 세속의 세계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지상의 어떠한 국가에도 충성을 표시하면 안 된다. 그들에게는 내셔날리즘이나 애국심이란 있을 수 없으며, 따라서 국기에 배례하거나 병역을 복무하거나 선거에 참여하지 않는다. 수혈도 거부하고 타 종교와의 교제도 불허하며, 성직자나 일체의 조직타이틀을 허락하지 않는다. 회중만 있고 목사는 없으며 일체의 예배용 이미지도 사용하지 않는다. 이러한 그들의 철저한 신앙신조 때문에 많은 나라에서 박해를 받고 순교자를 내었고 민권운동자들의 동조를 얻었다. 그러나 아이러니는 그들은 민권 그 자체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자유를 신장하거나 민권을 통하여 지상의 복지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신권(theocracy)에 의한 심판의 준비단계로서 자신의 행동양식을 규정하고 있을 뿐이다. 여호와증인의 신념체계를 보면 초대교회의 행태에 관하여 많은 것을 연상케 한다. 그리고 지옥과도 같았던 1ㆍ2차세계대전의 참상 속에서 그들이 지켰던 신념의 순수성에 관해서는 수긍이 되는 일면도 있지만 아리우스의 신념체계는 여호와의 증인들과 같이 그렇게 폐쇄적인 말세론의 느낌은 아니었을 것이다. 보다 지성적이고 여유롭고 합리적이면서도 매우 신비적인 알렉산드리아의 분위기에 부합되는 네오플라토니즘적인 사상이었을 것이다.
동방교회의 일반적 정서
니케아 종교회의(325)에서 비록 동체(homoousios)론 조항을 집어 넣은 신경(creed)이 반포되기는 했지만, 니케아종교회의에 참석한 주교들 가운데서 서방주교는 단지 6명일 뿐이었고, 300여 명의 동방 주교의 대부분은 아리우스를 지지했다. 막강한 니코메디아(Nicomedia)의 주교 유세비우스의 열렬한 위호(衛護)가 있었고 그 회의를 실제적으로 주도해간 팔레스타인의 대도시 카이사레아의 주교 유세비우스(동명이인이므로 주의할 것), 최초의 초대기독교역사인 『교회사』와 『콘스탄티누스의 생애』를 저술한 그 유세비우스도 중도적 입장을 취하긴 했지만 아리우스의 논의의 합당함에 기울어져 있었다. 동방교회의 일반적 사상분위기는 다원론(pluralism)이었고 종속론(subordinationism)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알렉산더의 동체론ㆍ일체론을 강행하였던 것이다. 아리우스와 그에게 동조한 두 명의 성직자는 끝내 공동코뮤니케인 니케아 신경에 서명하기를 거부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이들 세 명을 동방에서 멀리 떨어진 북방의 라인강변으로 추방해버렸다. 이로써 아리우스가 패배한 것 같지만 이후 전개된 역사의 실제상황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 추방령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여동생 콘스탄티아가 아리우스를 옹호했기 때문에 콘스탄티아의 노력으로 3년 뒤에는 해제되었다. 아리우스의 진짜 적수는 알렉산더 주교가 아닌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c. 293~373)였다.
아타나시우스
아타나시우스는 이집트 사람으로, 알렉산드리아에서 성장하면서 철학과 신학을 깊게 공부한 인물로서 이미 니케아 종교회의에 알렉산더 주교를 수행한 집사(deacon)로서 참석하여 아리우스 논쟁의 현장을 목격하였다. 그런데 3년 후(328) 알렉산더 주교가 병사하자 그 후임으로 발탁되어, 젊은 나이에(35세) 알렉산드리아 주교가 되었다. 그는 주교가 되자마자 이집트와 리비아 전역을 여행하면서 자기 교구의 상황을 세밀하게 직접 관찰하였고, 나일강 유역의 콥틱어를 쓰는 수도자들과 교류하였고 그들의 지도자인 파코미우스(Pachomius)와도 교분을 확립하였다. 그리고 그때부터 리코폴리스의 주교인 멜레티우스(Meletius of Lycopolis)와 아리우스의 이론을 이단으로 휘몰아치며 니케아 신경(信經)의 동체론을 정통이론으로 확립하는 데 평생을 바치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는, 아리우스파가 그의 생애를 통하여 더 우세하였기 때문에 5번이나 유형을 당하는 비운을 겪어야만 했다(아리우스 지지파인 발렌스 황제에 의한 마지막 유형이 365년).
한편 아리우스파는 니코메디아(Nicomedia)의 주교 유세비우스와 콘스탄티아의 치밀한 복권계획에 의하여 아타나시우스를 포함한 반아리우스파들을 모두 제거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당 봉헌식에서 아리우스를 복권시킬 것을 공식적으로 결정하였다. 유세비우스는 아리우스의 복직식을 거창하게 준비했다. 아리우스는 끝내 자기의 신념이 관철되고 승리하는 것을 보면서 흥분된 가슴을 억누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콘스탄티노플의 거리를 걷다가 심장마비로 비장한 한 생애를 마감한다(336). 이미 86세의 노구였다. 그리고 1년 후 콘스탄티누스 황제도 서거한다. 그리고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뒤를 이은 황제들은 계속해서 아타나시우스를 탄압했다. 아타나시우스는 그러한 탄압 속에서 오히려 이집트 민중들의 영웅이 되었으며, 아리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을 비판하는 신학적 논문을 계속 표한다. 삼위일체 논쟁은 그동안 동체론(homoousios)을 포기해 버리고, 아버지와 아들은 같지 않다는 아노모이오스(anomoios), 아버지와 아들은 유사한 실체이다라는 호모이우시오스(homoiousios), 실체라는 애매한 개념을 생략해 버리고 그냥 아버지와 아들은 유사하다라고만 주장하는 호모이오스(homoios) 등등으로 변질되어 구질구질한 논쟁을 계속하였으나, 결국 아타나시우스의 끈질긴 논거와 설득에 의하여 원래의 동체론ㆍ일체론인 호모우시오스(homoousios)를 그 정통이론으로 다시 확립하기에 이르렀다. 호모우시오스이론은 향후 가톨릭의 역사를 지배하게 된 것이다.
이토록 1세기에 걸쳐 치열하게 싸워야만 했던 삼위일체론이란 되대체 무엇인가?
예수는 신인가? 인간인가?
예수는 사람일까 하나님일까? 우선 이런 질문에 우리가 논리적으로 맞부닥뜨리면 매우 당황케 되고 부수될 수밖에 없는 많은 논리적 문제가 부담스러워진다. 우선 예수를 완전히 하나의 사람으로만 간주해버리면, 우리와 완전히 똑같은 하나의 인간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그의 모든 특별한 규정이 의미를 상실하고 ‘역사적 예수’라고 하는 시공 속의 합리적ㆍ과학적ㆍ상식적 추론체계만 적나라하게 드러나버린다. 그렇게 되면 예수는 단순한 세속의 역사적 사건이 되어버리고 구속사적인 종교적 의미가 증발되어 버린다. 그리고 평범할 수밖에 없는 하나의 인간 위인을 그렇게 우리가 예배하고 신앙하고 따라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어진다. 복음서는 평범한 위인전기가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러한 결론은 바람직하지 못할 것이 뻔하다.
그렇다고 예수를 신이라고 말하면 어떻게 될까? 논리적으로 예수를 완전히 신과 동일시해버리면 복음서의 이야기는 신의 이야기가 될 것이므로 그것은 희랍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이야기와 다를 바가 없어진다. 즉 복음서는 단순한 신화가 되어버린다. 예수를 신이라고 존숭하는 것은 좋지만 결과적으로 예수는 우리와 동떨어진 존재가 되어버릴 것이며 인간으로서의 수난(Passion)과 부활(Resurrection)은 우리에게 아무런 감동을 주지 못한다. 헤라클레스의 수난의 역사 이야기를 읽는 것보다도 재미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헤라클레스의 투쟁이야기를 읽으면서 감동의 눈물을 흘리지도 않는다. 우리가 예수의 수난이야기를 읽으면서 눈물을 흘리고 감동을 받는 것은 오직 인간 예수로서의 수난과 부활이다. 최소한 복음서 저자들은 그러한 감동을 전하도록 우리에게 예수 이야기를 기술해주었다.
그리고 예수를 하나님과 완전히 동일시할 때, 그리고 동시에 예수에게 수육(受肉, the Incarnation)의 인성을 완벽하게 인정할 때, 인간인 예수는 곧 신이 되어버릴 것이다. 이것은 모든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는 결과를 논리적으로 초래할 수밖에 없다. 불교에서 불타는 완전한 각자(覺者)이며 따라서 윤회의 굴레를 완벽하게 벗어나 열반(涅槃, nirvāṇa)에 들어가는 존재이다. 그런데 불교의 특징은 역사적 인간 싯달타에게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성불의 가능성을 열어준다는 데에 있다. 기독교 초기에도 신인(神人)으로서의 예수의 죽음과 부활 이야기는 모든 인간이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함으로써 예수와 똑같이 신이 된다고 하는 합일 즉 엑스타시스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이야기로 해석되는 경향이 짙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 8:10~11).
이러한 바울의 이야기도 그 추상적인 성격을 극단화시켜 이해한다면 우리 인간이 예수를 매개로 하여 육신을 벗어나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 그 자체가 된다고 하는 불교적인 이야기가 되어버릴 수도 있다.
삼위일체론의 정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요 1:14)는 이야기도 예수라는 특수존재에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 일반이 될 때에는, ‘인간 = 예수 = 하나님’의 등식이 전개될 수 있는 근거 메시지가 될 수 있다. 실제로 초대교회의 분위기는 이러한 해석의 가능성이 자유롭게 허용되었고, 많은 사람이 그러한 방식으로 케리그마를 이해하고 다양한 운동과 창조적인 저술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방식은 결국 이단으로 몰릴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유대이즘의 유일신론적 사유의 틀은 인간과 하나님의 횡적인 연대성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그것을 강하게 거부한다.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설정은 궁극적으로 종적인 일방성이다. 그 일방성의 방향은 인간에서 신에로의 방향이 아니라, 철저히 신에서 인간에로의 방향이다. 따라서 예수의 신성을 말한다 해도 그것이 곧 인간의 신성을 말하는 것으로 비약될 수는 없다.
여기에 삼위일체론의 곤혹스러운 과제상황이 있는 것이다. 더구나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인간과 하나님의 횡적 연대는 있을 수 없는 이야기다. 신민에 대한 황제의 절대적 군림의 권위를 얻고자 하는 콘스탄티누스의 입장에서 보면 아리우스의 인간주의적 해석은 기독교의 초월적 유일신론의 강점을 희석시키는 위험한 이론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는 아리우스사상에 내포된 신비주의적 평등관을 두려워했다. 물론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c. 293~373)도 마찬가지였다.
마태복음은 다음과 같은 예수의 말로 끝난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마 28:19).
그리고 고린도의 교인들에게 보낸 바울의 편지는 다음과 같은 사도의 축도(apostolic benediction)로 끝난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고후 13:13).
이미 1세기 중엽부터 말에 걸쳐, 그러니까 아주 초기의 기독교교회의 리터지(liturgy, 典禮)나 기도에서 이미 삼위일체론의 원형을 이룬다고 할 수 있는 ‘아버지 – 아들 - 성령’ ‘예수 그리스도 - 하나님 - 성령’이라는 개념이 한 문장에서 병렬되어 나타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AD 100년경 전ㆍ후로 성립했다고 하는 요한복음은 이미,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성령의 다른 이름인 보혜사(保惠師, Parakletos)라는 삼자의 틀 속에서 전체적인 이론구조가 갖추어진 복음이다. 보혜사(파라클레토스)란 원래 ‘법정변호인’을 뜻하는 말인데, 아버지의 법정에서 인간을 변호해주는 존재라는 뜻으로 예수의 다른 면모를 나타내는 말이었다. 법정에서의 고소인, 검사는 디아볼로스(diabolos), 즉 악마(devil)요 사탄(Satan)이다. 보혜사는 예수의 부재시에는 예수를 대신하여 인간을 진리로 이끄는 영적 존재이다. 그리고 보혜사의 오심은 곧 예수의 재림과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나의 『요한복음강해』 388~9, 402, 408 참고).
삼위일체론은 비성서적 논쟁
그러나 이러한 세 개념의 병치가 삼위일체(Trinity)의 논쟁을 불러 일으킬 하등의 이유는 없다. ‘성부ㆍ성자ㆍ성신’이라는 말은 복음서의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가톨릭교회내에서 성립한 삼위일체 논쟁 이후의 독단론적인 교리개념일 뿐이다. 복음서의 언어는 기본적으로 ‘아버지(파테르)와 아들(휘오스)’이다.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개념은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로서의 예수의 자기이해 속에서 일차적으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가부장적인 유대인 가정 속에서 지극히 일상적으로 쓰였던 토속적인 개념일 뿐이며 예수는 아예 아람어로 ‘아바’(Abba)라고 말한다(막 14:36, 로 8:15, 갈 4:6). 어머니를 ‘엄마’라고 부르는 것과도 같은 아주 친근한 호칭이다. 아버지(파테르)는 요한복음에서 115회나 사용되고 있다.
유대인 가정이나 한국인 가정이나 매우 유사한 가부장적 가치관에 지배되고 있으므로, 우리는 아버지의 의미를 매우 쉽게 감정이입하여 이해할 수 있다. 아버지는 공경의 대상이 되는 권위로운 존재며, 아들에게 공부하라고 일하라고 명령하는 존재며, 재산을 쥐고 관리하는 존재며, 아들을 타지로 파견할 수 있는 존재이다. 그러나 예수는 아버지의 일차적 의미를 이러한 가부장적 권위의 대상으로 파악하질 않았다. 예수의 아버지는 자애로운 존재며, 모든 것을 포괄적으로 편협하지 않게 파악하는 존재며, 아들에게 무한정의 사랑을 퍼붓는 존재이다. 요즈음은 좀 악독한 아버지도 있기는 하나 우리가 자식을 기르면서 느끼는 정상적 감정을 가지고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가 간다. 우리가 자랄 때도 엄마는 매섭게 야단을 잘 치지만, 아버지는 옆에서 응석을 받아주는 자비로운 존재로 인식되었다. 누가복음의 그 유명한 탕자(Prodigal Son, 눅 15:11~32)의 비유가 아주 드라마틱하게 표현해주고 있듯이, 아들이 어떠한 잘못을 저지르고 어떠한 방탕한 생활을 했더라도 집에 돌아오기만 하면 받아주는, 천번 만번이라도 무조건적으로 용서하고 즐거워하는 아버지, 좋은 옷을 내어다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워주고, 발에 신을 신기고, 살찐 송아지를 잡아 풍류의 잔치를 열어주는 아버지가 곧 예수가 인식하는 아버지의 모습이다. 아버지는 ‘신적 존재’(Divine Being)라기보다는 ‘자비의 품’(Bosom of Benevolence)이다. 그것은 존재론적 대상이 아니라 일상적 느낌의 대상일 뿐이다. 이러한 아버지에 대하여 아들은 내가 아버지보다 못한 열등한 존재라고 느낄 수도 있고(요 14:28), 또 아버지와 동격의 존재며,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는 자신감을(요 10:30) 표현할 수도 있다. 이러한 표현 때문에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냐 둘이냐 하는 존재론적 문제가 생겨날 하등의 이유가 없다(나의 『요한복음강해』 100 참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병렬되었다 해서 이것이 하나냐 둘이냐 셋이냐 따위의 문제가 생겨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다.
아버지 하나님은 존재일 수 없다
이러한 것이 문제가 된 것은 그레코-로망의 이방세계에 기독교회가 자리를 잡으면서 헬레니즘-로마의 다신론적 세계에서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의 신관을 한결같이 유일신론이라는 배타적 틀 속에서 어필시키고 다신론적 신앙을 멸시하는 정치적 행동을 일삼게 되자(한국 기독교인들이 서낭당이나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것과 비슷한 상황), 헬레니즘의 사상가들은 결국 예수를 신이라 말하는 너희들의 유일신앙도 다신론이 아니냐고 하는 반론을 펼치게 되었고, 이에 대한 강력한 아폴로지로서 삼위일체론은 대두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가 하나님을 ‘아버지’로서 인식한 것은 사실 유일신론의 보편 논쟁에 휘말리게 되면 매우 불리한 결과를 초래한다. ‘하나의 인격신’이라는 개념 자체가 우주 전체를 포괄하는 하나의 존재라는 개념으로서 논의되기에는 너무도 이론적 하자가 많은 개념이기 때문이다. 신에게 아버지와 같은 인격성을 부여하면, 이미 그 인격성으로 인하여 신은 제약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신이 제약되면 그것은 반드시 자기 외의 타자를 인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유일성을 논리적으로 고수하기 힘들다. 그러나 예수가 하나님을 ‘아버지’로서 인식하고 자기 자신을 그 하나님 아버지의 유일한 독생자로서 인식했다고 하는 것 자체가 오히려 역설적으로 유일신관의 모든 논의를 거부할 수 있는 힘을 갖는 것이다. 예수가 믿는 아버지 하나님은 근본적으로 ‘유일신론적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유일신론’(monotheism)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하지만 그것은 매우 기독교를 천박하게 이해하는 유치한 발언이다. 예수까지 들먹이지 않아도 그 이전의 유대교전통에 있어서도 하나님은 유일신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전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이 우주를 창조하는 힘(Power)을 말하는 것이요, 의지(Will)를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주의 제1원리로서의 존재(Being)가 아니다. 창세기의 창조는 그 자체로서 우주의 존재론을 천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아담과 이브라는 인간의 이야기를 하기 위한 서막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서 구약의 하나님도 인간의 삶이나 행동과 관련되어서만 의미를 갖는 하나님이며 전 우주를 포괄하는 제1의 존재론적 실체로서 객관적으로, 인간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그 무엇이 아니다. 그러한 우주의 근원적인 존재론적 실체를 탐구하고 싶다면 우리는 신ㆍ구약 성경을 읽어서는 아니 된다. 우리는 반드시 헤라클레이토스나 파르메니데스와 같은 소크라테스 이전의 자연철학자들(Pre-Socratics)의 단편이나, 뉴튼 갈릴레오와 같은 르네상스시대의 과학자들의 논문을 읽어야 한다.
구약의 하나님, 야훼(여호와)는 사랑하고 질투하고 징벌하는 하나님이다. 끊임없이 인간의 삶 속에 자신을 드러내는 살아있는 힘이며 창조하는 의지(Creating Will)일 뿐이다. 모세에게 십계명을 줄 때에도 야훼(여호와)는 이렇게 말했다.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모시지 못한다. 나 야훼 너희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신이다.’(출 20:3~4, 신 5:7~9) 다시 말해서 야훼가 유일하다는 것은 이스라엘민족과의 계약관계에 있어서의 유일성을 말하는 것이며, 존재론적으로 야훼 이전에 다른 신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말은 아니다. 야훼 스스로 자기 이외의 타 이방의 신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이스라엘민족이 타 신을 섬기면 질투하게 된다는 것이다. 구약 자체가 다신론적 환경 속에서 야훼와의 약속을 유일한 계약으로 지켜간 역사일 뿐이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민족을 이끌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을 정복하고 정착하기 직전에도 온 이스라엘지파들을 세겜으로 소집하여 부족동맹(Amphictyony)을 맺고 야훼만을 섬기겠다는 확고한 다짐을 받아냈지만(수 24:14~28), 이스라엘민족의 역사는 끊임없이 그러한 계약을 위반한 역사였다. 구약의 역사는 유일신의 역사가 아니라 다양한 신들과의 관계 속에서 여호와신앙만을 유일하게 고수해 간 이스라엘민족의 투쟁사였다.
관계의 절대성
예수가 하나님을 ‘아버지’로서 인식한 것은 하나님이 유일하다는 것을 존재론적으로 증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탕자를 무제약적으로 사랑하고 천만번이라도 받아주는 자애로운 아버지와의 ‘관계의 절대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관계의 1차적 절대성은 하나님 아버지와 독생자 예수와의 관계의 절대성이고, 우리 인간은 독생자 예수와의 관계의 절대성을 통해서 그러한 절대적 관계로 돌입한다. 절대적 관계라는 말은 하나다 둘이다 하는 수비적(數比的) 관계를 모두 단절시킨다. 조금 위험한 비유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내가 한 여자를 사랑한다고 할 때, 내가 진정으로 절대적으로 그 여자를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그 여자와의 절대적 관계 이외의 모든 관계가 단절되는 것을 의미한다. 나의 삶의 의미체계에 있어서 그 여자는 절대적인 그 무엇이다. 그렇지만 그 상태에서도 객관적으로 타 여인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사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이러한 절대적 계약관계로써 서로에게 절대적으로 헌신하는 삶을 일생 유지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평생 기독교인으로 산다는 것은 이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물론 유일신론(monotheism)의 철학적 쟁론에 물들어 있는 사람들은 나의 이러한 논점을 매우 불쾌하게 생각할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한 여자와의 관계에 비유하다니! 그러나 예수님도 평범한 유대인 가정 속의 ‘아빠’에 그의 하나님을 비유했다. 그 아버지에 대한 절대적 인식의 역사가 내가 『요한복음강해』에서 말하고 있는 요한복음의 전체내용이다. 한 여자는 한정된 한 개체일 뿐이고, 하나님은 우주 전체와 관한 것이기 때문에 비론(比論)의 차원이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아무리 전체를 주장해도 그 전체는 오로지 나의 삶, 나의 지금 여기의 실존과의 관련 속에서만 의미를 갖는 전체이다. 우주의 4가지 힘을 하나의 통일된 개념으로 묶으려는 현대물리학의 노력과 같은 전체는 아닌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통일장론도 미완의 꿈이다. 아무리 신의 전체성ㆍ유일성을 주장한다 해도 그것을 이론적으로 주장한다면 그것은 종교전쟁만을 유발시키는 형이상학적 낭설일 뿐이다. 예수에게는 일체 그러한 형이상학이 없다. 수사학적 과장이 없다. 예수의 언어는 매우 일상적이고 구체적이며 긴박하다. 예수는 우주의 유일한 제1원리(First Principle)를 말한 적이 없다. 그러한 것들은 모두 초기기독교가 헬레니즘세계로 편입되면서 생겨난 부차적인 이론투쟁의 산물이었다.
실체라는 개념은 기독교와 무관
니케아신경에서 ‘아들은 아버지와 하나의 실체이다’(homoousion tō Patri)라고 했을 때, 실체라는 말도 전혀 복음서와는 관련이 없는 언어이다. 그것은 우시아(ousia)라는 말인데 그것은 당대에 유행하던 스토아철학을 통하여 삼위일체 논쟁에 끼어든 희랍철학의 개념으로서 피타고라스(Pythagoras, c. BC 580~500) 학파에까지 소급해 올라간다. 우시아라는 말의 실제적 함의도 매우 다양하고 애매해서 감각적 사물의 현상세계에 적용될 수도 있고, 그러한 변화의 세계(genesis, becoming)와 대비되는 그것을 초월하는 비감각적 예지계의 불변의 존재(ontos on, being)를 의미하기도 한다. 우시아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실체(substance)나 본질(essence)이라고 말할 때 해당되는 말인데,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 있어서는 모든 운동의 기저에 있으면서 그 운동들을 가능케 하는 부동(不動)의 궁극적 원인(final cause)을 의미했다.
아버지ㆍ아들ㆍ성령이 다신론이냐 유일신론이냐? 다신론적이면서도 존재론을 궁구(窮究)하는 헬레니즘풍토에서 강요된 이러한 질문에 관하여 초기교부들은 당황했다. 아버지ㆍ아들 성령이 하나라고 그 일체성(unity)만을 강조하면 그 세 의미가 가진 그 나름대로의 유니크한 다양성이 희생되고, 그것이 세 개의 다른 것이라고 말해버리면 다신론의 위험성과 유일신론의 일체적 감각이 분열될 수 있다. 그래서, 우시아(ousia) 그 실체나 본질로 말하면 하나일 뿐인데, 그 우시아가 나타나는 것은 성부ㆍ성자ㆍ성신의 유니크한 성격을 가지는 3개의 위(位, hypostasis)로서 나타난다고 주장함으로써, 일체성과 다양성을 종합하는 헬라철학적 사유를 표방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기독교는 황제교도, 존재론도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독교와는 전혀 무관한 철학적 사유의 장난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 이후에 종교권력과 정치권력이 융합된 가톨릭교회의 권위가 강요하는 교리에 의하여 기독교를 접근하면 그것은 기독교가 아니다. 내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현금(現今)의 우리나라 가톨릭교회의 교리를 전면부정한다는 말은 아니다. 지금의 가톨릭은 정치권력과 분리된 종교조직이며 과거의 가톨릭이 아니다. 가톨릭이란 원래 초대교회사에서 로칼한 지방교회들의 분열이나 이단의 발호를 막기 위해 신앙의 공통성을 기준으로 하여 자연적으로 형성해간 보편적 교회(Universal Church)란 뜻이다.
가톨릭이란 말 자체가 희랍어의 카톨리코스(katholikos)에서 온 말이며 ‘보편적’이라는 뜻이다. 그 보편교회의 무형의 중심이 처음에는 예루살렘교회였지만 세속정치권력의 중심을 따라 점점 로마교회로 옮겨갈 수밖에 없었다. 그 로마교회가 교황청으로까지 발전하여 오늘의 장대한 세계보편조직을 형성했지만, 나는 그 조직의 유지의 필요에 의하여 강요된 교리의 역사를 기독교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 354~430)의 신학도 플라토니즘을 변형시킨 것이고, 스콜라철학의 왕이라고 부르는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74)의 『신학대전(Summa theologiae)』의 전 체계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빼버리면 그 골격이 지탱될 수가 없다. 신의 존재증명을 운운하는 이러한 스콜라철학의 명제들은 더 이상 기독교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유의미한 명제들이 아니다. 기독교는 존재론이 아니다. 헬레니즘의 철학적 탐색의 연장태로서 발전한 로마가톨릭의 이론체계를 기독교로 이해할 수는 없다. 우리는 성서 그 자체로 항상 되돌아가야 한다.
요즈음의 가톨릭교회내에는 이러한 스콜라철학의 질곡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성서 그 자체를 깊게 탐구하는 사제나 사상가들이 많다. 그래서 가톨릭(구교)은 프로테스탄트(개신교)보다 보수적이라는 식의 막연한 인상을 가지고 접근하면 안 된다. 교회나 교리의 사회적 병폐를 운운한다면 오히려 개신교 사람들이 반성해야 할 테마를 더 많이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 사도 바울의 본명은 사울이다. 예수와 동시대 사람으로 소아시아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났다. 동ㆍ서의 무역교통요새였으며 국제적인 대학 도시였으며 스토아학파(Stoicism)의 본거지였다. 바울은 고등한 희랍어를 구사했으며 히브리교육에도 정통한 바리새인이었고, 율법에 정통한 랍비였고, 로마시민이었다. 당대 유대인으로서는 최고의 학식을 소유한 사람이었으며, 베냐민지파의 정통혈손으로서 자부했다. 그는 키가 크지는 않았고 못 생겼고 말도 그리 유창하지는 않았지만 강렬한 인상과 함께 영적 감화를 주었다. 모든 거친 환난을 견딜 만큼 신체적으로 강인했으며 또 사소한 일에도 새로운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매우 섬세한 감성의 소유자였다. 이방인교회는 그를 통하여 만들어졌지만, 요즈음의 성직자와는 달리 텐트 제작 등의 생업 기술로 스스로 생계를 유지했고 교회로부터 일체의 금전을 취하지 않았다. 신비로운 능력이 있었지만, 그는 인간의 상식과 인간의 연약함에 오히려 하나님의 은총이 깃든다고 확신했다. 평생 고질병으로 시달리기도 한 그는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의 실존적 의미를 끊임없이 발견해 나간 위대한 삶을 살았고, 그의 삶과 더불어 기독교는 세계종교로 발돋음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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