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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기독교 성서의 이해, 제1장 예수의 이적 - 이적의 여섯 가지 의미맥락 본문

고전/성경

기독교 성서의 이해, 제1장 예수의 이적 - 이적의 여섯 가지 의미맥락

건방진방랑자 2022. 2. 23.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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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적의 여섯 가지 의미맥락

 

 

첫째, 예수는 기적을 행하지 않는다. 이러한 나의 말에 놀랄 많은 기독교인들의 얼굴이 떠오르지만, 분명히 말하건대 예수는 기적을 행하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예수는 역사적 실존인물로서의 개인 예수다. 역사적 실존인물인 예수라는 개체가 주어가 되어, 그 행위의 주체가 기적을 행하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이비종교들을 주창하는 사람이나, 예수와 같은 권능을 나도 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많은 목사나 전도사들이나 부흥사들은, 바로 이 점에 있어서 성서를 왜곡하고 크게 자신의 존재를 곡해하고 참칭하는 것이다.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메시지는 바로 나 예수가 주체가 되어 너를 구원한 것이 아니라, 바로 너의 구원의 주체는 너의 믿음이라는 확증을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 행위의 주체로서의 개인 예수는 드러나지 않는다. 예수가 행한 기적은 예수라는 개인을 주부로 하는 술부적 사태가 아니라 하나님의 드러남이다. 그것은 예수라는 역사적 개인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직접 행하심이며, 예수의 행위를 통하여 드러나고 있는 하나님의 의지일 뿐이다. 예수의 기적 행함에 있어서 하나님을 보지 않고 역사적 예수라는 개인을 보는 것은 근원적으로 성서적 관점에서 이탈되는 것이다. 성서의 저자들은 역사적 예수에 관하여 우리에게 상세한 인간적인 정보를 전달하지 않는다. 근원적으로 그들은 역사적 예수에 관심이 없다. 사람 예수에 관한 관심 때문에 같은 사람이라고 예수의 기적을 나도 행하여 보겠다고 덤비는 사람들은 근원적으로 크리스챤의 자격이 없는 것이다.

 

둘째, 예수가 행하는 기적은 반드시 신앙이라는 사태와 결부되어 있다. 예수는 오로지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사태로서만 기적을 행한다. 믿음을 불러일으킬 수 없는 상황에서는 예수는 기적을 행하지 않는다. 믿음이란 마음이 가난한 자들, 마음이 비어있는 자들, 마음이 열려있는 자들에게만 가능한 사태이다. 따라서 마음이 완악하게 닫혀있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시험하기 위하여 기적을 요구했을 때 예수는 너희들에게 보여줄 기적이란 하나도 없다고 호통쳤던 것이다. 그들에게 아무리 기적을 행하여본들 그것이 그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기적으로 인지될 까닭이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예수가 기적을 행하는 것을 보고난 후에 사람들이 믿음을 일으키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실로 기적은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만 나타나는 것이다. 기적은 구경이나 평가의 대상이 아니다. 우리가 아무리 용한 마술을 본들, 마술은 마술일 뿐이다. 그것이 마술이 아니라 진짜 기적이라 해도, 그러한 마술 같은 기적들은 그냥 기적으로서 아무 의미없이 우리의 의식세계를 지나간다. 그것은 단지 희한한 구경거리였을 뿐이다. 신앙을 불러일으키는 힘이 없다면 기적은 그냥 놀라운 사건’(astonishing events)일 뿐이다. 기적의 광경은 반드시 믿음과 함께 일어나야 한다. 우리가 감지한 사태로부터 기적이라는 결론을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감지 그 자체가 기적에 참여하고 기적 그 자체를 구성하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주관론적 해석의 오류가 아니다.

 

셋째, 기적은 하나님의 존재(the existence of God)의 사실을 입증하는 보편적 사태가 아니다. 자연적 인과를 거부하는 사태만이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한다고 한다면 자연적 인과 그 자체는 하나님의 존재와 무관한 것이 되어버릴 것이다. 기적은 인식론적으로 자연적 인과를 거부하는 사태라는 데 강조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신의 전지전능함에 대한 나의 실존적 믿음이라는 데에 더 강조점이 있다. 하나님의 전지전능은 객관적 탐구의 대상은 아니다. 기적은 그 자체로서 하나님의 활동이다. 예수는 기적을 신의 의지에 귀속시킬 뿐이다. 기적을 통하여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하려고 꼬나보는 자들은 결코 기적을 볼 수가 없다. 오히려 나의 한계를 절망하는 자들에게만, 하나님께서 직접 나에게 자유롭게 말씀하실 수 있도록 나의 마음을 열어놓을 수 있을 때만이 기적은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기적에 대한 믿음은 결국 나의 주체적 삶의 신앙의 표현이다. 자연적 인과는 하나님을 나의 일상성으로부터 멀리 숨겨버린다. 그러나 기적은 하나님을 나의 실존에 가깝게 다가오게 만든다. 그것은 나의 일상성을 지배하는 자연적 인과에 대한 신념의 포기마저도 야기할 수 있는 가까움이다. 신앙은 궁극적으로 나의 모든 아집의 포기를 의미하며, 그것은 자연의 법칙성으로부터의 해방까지도 포괄하는 것이다.

 

넷째, 예수가 행한 기적은 단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인지시키기 위한 깨우침이나 협박의 수단일 뿐 아니라, 그러한 기적 속에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여기에 도래하고 있다는 사태를 선포하기 위한 징표일 뿐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미래적 사태이지만 예수는 기적을 통하여 그것을 현재적 사태로 끌어들이고 있는 것이다.

 

다섯째, 예수가 행한 기적은 인간의 실존과 관계없는 초자연적 사태의 과시가 아니라 대부분 질병의 고침이나 같이 나누어 먹음과 같은 비근한 삶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싯달타가 득도의 체험을 출발시킨 문제의식도 생로병사(生老病死)였고 그의 탐구의 종착역도 결국 생로병사였다.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는인간의 실존이야말로 모든 종교가 투쟁하지 않을 수 없는 과제상황이다. 예수의 공생애, 그의 선교활동을 지배한 기적의 행함도 결국 이러한 생로병사의 한계상황과 유리되어 있지 않다. 싯달타는 이러한 생로병사로부터 근원적인 해탈을 요구하였다면 예수도 기적을 통하여 인간에게 생로병사의 문제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하나님의 의지를 과시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이것은 율법적 사유에 대한 전면적 재고를 요구하는 것이다. 전통적인 율법적 사유에 있어서는 지나가는 사람이 벼락을 맞는 것도 하나님의 천벌일 수가 있다. 우연적 사태를 윤리적 사태로 규정하는 것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전통적 가치관에도 무의식적으로 깔려있는 생각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숙명적인 질병까지도 하나님의 징벌이나 진노로 해석하기 십상인 것이다(cf. 9:2).

 

나면서부터 소경인 사람,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인 사람, 나면서부터 손이 꼬부라지거나 기형인 사람들을 우리는 그의 불행한 운명으로 규정하고 암암리 그것을 우리보다 열등한 삶의 소유자로서 비하해 버리거나 어쩔 수 없는 신의 징벌로서 저주해버리거나 윤회의 한 고리로서 불운한 업의 결과로서 체념해버리거나 한다. 예수의 기적은 바로 이러한 모든 율법이나 윤회나 도덕적 사유를 단절시킨다. 그는 선천적 기형이거나 인간의 고질적 질병을 믿음 하나에 의거하여 치유시킴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이 즉각적으로 모든 인간에게 골고루 강림할 수 있다는 것을 과시한다. ‘고침나눔이라는 기적적 행위의 바로 그 순간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지금, 여기에 도래하고 있다는 것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기쁜 소식이요 복음인 것이다.

 

여섯째, 예수의 이적 행함은 제식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이적을 행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적을 행하기 전에 꼭 제식을 치른다. 마술을 할 때도 검은 보자기를 뒤집어 씌워놓고 수리 수리 마수리같은 주문을 외우든지, 무당도 소머리를 세우기 전에 꼭 굿을 하거나 공수를 주고받거나 한다. 예수에게는 일체 그러한 쇼적인 과정이 없다. 오천 명에게 떡을 나누어 줄뿐이며, 앉은뱅이 보고 그냥 걸어가라!”고 말할 뿐이다. 예수의 이적이 비록 특수한 전설이나 설화적 장식의 문맥 속에 가려져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소기하는 의미는 우리의 상식적인 기적에 대한 기대를 깨버리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초자연적 인과의 과시가 아닌 어떤 실존적 의미를 우리에게 강렬하게 전달하기 위한 것이다. 예수는 결코 이적을 우리에게 초자연적 사실로서 과시하는 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그 자신의 하나님과의 소통의 역사(役事)였을 뿐이다. 예수의 관심이 만약 그러한 이적과시에 머물렀다고 한다면, 기독교는 벌써 초장에 저등종교로서 윤락해버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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