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또 한번 그의 단도직입적인 언변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다시 한번 확인하였다.
“정말 절대적 진리란 없는 것입니까?”
“절대적 진리는 없습니다. 물론 불경에 보며는 절대적이고 영원한 진리, 이따위 말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말들을 사람들이 매우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타의 깨달음이 연기(緣起)인 한에 있어서 절대적인 진리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어로 ‘앱솔루트 트루쓰’(Absolute Truth)라고 말할 때 이미 우리는 그 말이 지닌 역사적 인식의 포로가 되어버린다는 것입니다. 마치 절대적 진리가 없으면 살 수 없는 것처럼, 그리고 이 우주에는 절대적인 그 무엇이 꼭 있어야만 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어떤 공포감이나 중압감의 포로가 되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유일신론적 사유가 지어낸 서구적 발상의 일대 오류라고 생각합니다. 어저께 말씀하신 그노시스(Gnosis)에 대해서도 곰곰이 생각해보았습니다만, 그러한 영지주의 발상의 배면에도 거대한 착각이 깔려 있는 것입니다. 이 우주에는 절대적 진리가 있으며 그 절대적 진리를 매개하는 절대적 지식이 있다. 이 절대적 지식 즉 그노시스(영지)를 얻기만 하면 우주의 모든 신비를 풀 수 있는 열쇠를 얻을 수 있다. 이런 따위의 사유는 이미 절대적 진리나 절대적 지식을 실체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류의 절대론이 모든 신비주의의 함정입니다. 이것이 서구 신비주의의 한계이지요.
도대체 ‘절대적 진리’라는 말 자체를 곰곰이 생각해보지도 않고 그냥 절대적이라는 말을 우상화해버린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진리라는 것이 모든 상대적 관계를 단절시키는 절대독립적인 실체일 수가 있습니까? 이것은 저에게는 설일체유부의 삼세실유론(三世實有論)을 연상시키지만, 바로 나가르쥬나의 공론은 이러한 사유를 부정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자체가 하나의 찰나일 뿐인데, 이 잠깐동안의 삶에 있어도 뭐 그다지도 애타게 절대에 집착을 해야만 한단 말입니까? 『대반열반경』에 나오는 석가여래의 마지막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 한마디가 그의 전 생애를 마감하는 최후의 일성이었습니다【‘諸行は壞法なり.’ 『남전』7-144, ‘만들어진 것은 모두 변해가는 것이니라.’ 강기희역, 『대반열반경』, p.152.】.
불교에 있어서 구태여 절대적 진리를 말하자면 ‘공’(śūnya)이라는 한마디 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공이라는 것을 또 하나의 절대적 실체로 생각하면 그것은 공이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면 불교는 현상적 일원론입니까?”
“물론입니다. 모든 일원론은 현상론일 수밖에 없습니다. 서양철학의 한계는 애초로부터 현상 그 자체를 무시하고 들어간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 또한 기독교와 관련된 사유체계가 파생시킨 뿌리 깊은 오류이지요. 다시 말해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상은 허깨비 같은 것이며 가치 없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에 대한 뿌리깊은 경시가 모든 오류를 파생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현상 그 자체의 이해를 심도있게 해야하는 것입니다. 유식론도 결국은 현상의 심도 깊은 이해방식이라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일원론은 현상적 일원론밖에는 성립할 수가 없습니다. 본체론적 일원론이라는 것은 도무지 성립불가능한 것입니다. 본체론적 일원론, 본질적 일원론은 또 다시 이원론으로 환원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불교의 핵심은 ‘아드바야’(advaya), 즉 ‘불이’(不二)입니다.”
참으로 명쾌한 답변이었다. 나는 계속해서 물었다.
“중론적 세계관(Mādhyamika world-view)을 깔고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불교의 연기론적 세계관은 고전물리학적 세계관에 더 가까울까요? 현대물리학적 세계관에 더 가까울까요?”
“모든 사태에는 정확한 인과관계가 성립하는 시공간적인 장이 있다고 말하는 측면에서는 거시적인 맥락에서 고전물리학과 상통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태가 실체적으로 파악될 수 없으며 관계론적 기멸(起滅)에 불과하다는 측면에서는 현대물리학과 상통합니다. 퀀텀 물리학자들이 불교에 친근감을 느끼는 것도 아마 이런 연유때문이겠지요.”
나는 그의 말을 다음과 같이 매듭지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조차도 고전물리학에 속합니다. 신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라는 아인슈타인의 유명한 말은 그의 고전물리학적 사유를 대변한다 할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은 고전 물리학의 시간과 공간의 개념은 바꾸었지만 물리현상의 기술방식을 바꾸지는 않았습니다. 힘이니 운동이니 가속도니 하는 그러한 기본개념장치를 바꾸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양자역학에 오면 위치와 속도 그 자체가 불확정적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물체에 대한 이해자체가 파동함수의 기술로 바뀌게 된 것이죠. 아마도 불교적 사유는 이러한 불확정적 세계관에 더 가깝게 올 것 같습니다. 궁극적으로 비존재는 없지만 실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공입니다.”
인용
'고전 > 불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 대담 2일차 - 티벹과 중국의 미래 (0) | 2022.03.20 |
---|---|
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 대담 2일차 - 과학적 가치의 정립 (0) | 2022.03.20 |
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 대담 2일차 - 비그뱅, 절대적 진리는 없다 (0) | 2022.03.20 |
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 대담 2일차 - 불교는 심리학인가? (0) | 2022.03.20 |
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 대담 - 다 이루었다 (0) | 2022.03.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