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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굴뚝청소부, 제6부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 : 근대 너머의 철학을 위하여 - 4. 알튀세르 : 맑스주의와 ‘구조주의’, 맑스를 위하여 본문

책/철학(哲學)

철학과 굴뚝청소부, 제6부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 : 근대 너머의 철학을 위하여 - 4. 알튀세르 : 맑스주의와 ‘구조주의’, 맑스를 위하여

건방진방랑자 2022. 3. 26.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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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를 위하여

 

 

이런 관점에서 알튀세르는 맑스로 돌아가자!”는 슬로건을 제창합니다. 물론 맑스주의자들은 누구나 맑스에 의거하고 있으니 상당히 의아한 슬로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알튀세르가 여기서 돌아가자고 주장하는 맑스는 성숙한 시기의 맑스요, 자본이란 책으로 집약된 맑스입니다. 경제학-철학 초고에서 절정에 이른 청년 맑스는 헤겔과 포이어바흐의 손 안에 있는 맑스고,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맑스란 겁니다. 과학자 맑스, 과학으로서의 맑스주의는 1845독일 이데올로기를 기점으로 시작된 그들과의 단절이후의 맑스와 맑스주의입니다.

 

이를 위해서 알튀세르는 그의 스승이었던 과학철학자 바슐라르(G. Bachelard)인식론적 단절이란 개념을 빌려옵니다. 그에 따르면, 어떠한 과학자도 이전에 있었던 개념을 가지고 사고하며 그 이데올로기적, 개념으로 작업하기 때문에, 새로운 과학적 성과를 이룩하려면 이 이데올로기적 개념과 단절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따라서 누구나 초기에는 이데올로기적 문제설정과 개념 속에서 사고하며, 이것과 인식론적 단절을 이룸으로써 과학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이는 맑스의 경우에도 그대로 해당된다고 봅니다. ‘인간’ ‘소외란 범주를 토대로 하는 인간학적 문제설정과 단절하여 인간이란 사회적 관계의 총체라고 선언함으로써, ‘인간이라는 환상적 대상과 단절하여 생산양식이라는 대상을 정립함으로써, 맑스의 역사유물론은 역사과학이란 신대륙을 발견한 것이라고 합니다.

 

또한 알튀세르는 헤겔적인 총체성 개념의 비판이 맑스주의의 중요한 성과라고 합니다. 헤겔에게 전체(총체)모순이라고 하는 하나의 본질이 표현된 것(표현적 총체성)인데, 사실 역사과학이 다루는 역사적 사정과 정세는 이처럼 하나의 (근본) 모순으로 환원될 수 없는 복합성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자본주의에서 나타나는 모든 현상을 자본/노동 사이의 모순으로 환원하려는 태도를 그는 헤겔주의적이라고 봅니다. 러시아 혁명을 예로 들면, 자본과 노동의 모순뿐만 아니라 제국주의 나라 간의 모순, 국내 지배세력과 다양한 피지배계급들의 모순 등 다수의 모순들이 중층적으로 혁명적 정세를 만들어냈다는 겁니다. 이를 그는 중층적 결정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맑스주의 이론이 과학이 되도록 해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여기서 알튀세르는 이전에는 유물론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되던 반영론으로부터 거리를 둡니다. 반영론이란 알다시피 개념이나 이론은 실재의 반영이요, 모사라고 보는 입장인데, 실재-이론이란 짝을 설정하고, 경험적인 검증에 의해 이 양자를 일치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경험주의 /실증주의와 유사합니다. 그런데 경험주의와 실증주의는 바로 알튀세르가 설정해 둔 또 하나의 중요한 타격대상이었습니다.

 

그에 따르면 예컨대 무의식이나 잉여가치는 경험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게 아니며 또한 실증주의자들 말대로 검증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무의식은 무의식이 있다는 사실조차 경험하거나 인정하지 못하도록 저항한다고 하지요. 잉여가치나 착취 역시 많이 당한 사람이 잘 알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임금이 노동의 대가로 나타나는 자본주의 사회에선 잉여가치나 착취는 경험만으로는 결코 인식될 수 없습니다. 이러한 곤란까지 지적하면서 자본주의와 착취의 작동 메커니즘을 밝혀놓은 게 바로 맑스의 업적이란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맑스의 이론을 과학으로 정립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알튀세르는 여기서 필요한 게 바로 맑스주의 철학이라고 합니다. 알튀세르에게 철학이란 대문자로 쓰는 이론’(Theory)인데, 이는 이론에 대한 이론’(이론의 이론)입니다. 즉 어떤 이론이 과학인가 아닌가, 내부적으로 올바른가 아닌가를 확인하는 활동이 철학이란 겁니다(이는 철학에 대한 초기 비트겐슈타인의 정의와 거의 유사합니다). 거칠게 말하면 진리의 보증자’ ‘과학의 보증자인 셈이지요.

 

그럼 철학은 무엇으로 보증해 줄까요? ‘검증을 통해 실재와 일치하는지 확인할 수 있다는 실증주의의 발상이 여기서 비판됩니다. 수학적 추론의 결과가 현실과 일치하는가 아닌가는 수학적 지식의 진리성을 판단하는 데 하등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현실에서 내각의 합이 180도인 삼각형을 그릴 수 있든 말든 유클리드 기하학은 그 자체로 과학이란 것입니다.

 

이는 근본적으로 현실대상과 지식대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는 “‘라는 개념은 짖지 않는다라는 스피노자의 말을 여기서 인용합니다. ‘란 개념은 현실대상인 개와 어차피 다른 것이기에 일치하는지 아닌지를 비교해서 진리 여부를 가릴 순 없다는 것이죠. 즉 지식대상과 현실대상은 근본적으로 다르며, 따라서 비교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진리란 지식대상인 개념들 간의 관계에 의해 정의되는 것이 됩니다. ‘라는 개념을 구성하는 다른 개념들 간에 일관성이 있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를 알튀세르는 지식효과라고 합니다. 지식으로 구성하며 지식으로서 작용하게 하는 효과란 뜻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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