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너에게 나간 것이 너에게 돌아오네
1b-12. 추(鄒)나라와 노(魯)나라가 군사적 충돌을 일으켰다. 이에 추나라의 목공(穆公)이 추나라에 돌아와 있던 맹자에게 물어 말하였다: “평소 내가 데리고 있던 고관 중에서 군대의 대장으로 나가 싸운 사람이 33명이나 전사했는데, 졸병으로 나간 인민들은 대장을 지키고 전사한 사람 이 한 명도 없소. 내가 얼마나 괘씸하다는 생각이 들겠습니까? 그래서 졸병으로 나간 인민들을 처형하려고 생각해도 너무 많아 이루 다 처형할 수도 없는 일이요, 그렇다고 처형하지 않고 방치한다면 자기의 장상(長上)이 죽는 것을 오히려 통쾌하게 바라보면서 구할 생각을 않고 못 본 체 한 꼴이니 이런 인민들을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1b-12. 鄒與魯鬨. 穆公問曰: “吾有司死者三十三人, 而民莫之死也. 誅之, 則不可勝誅; 不誅, 則疾視其長上之死而不救, 如之何則可也?” 맹자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시었다: “그런 일이 어찌 거저 일어나는 일이겠습니까? 기근(饑饉)과 악역(惡疫)이 도는 흉년이 되면 임금님의 백성 중에 늙은이와 어린이의 시신이 도랑에 뒹굴고 장성한 자들은 흩어져 사방으로 가버리는 자 수천 명인데도 임금님의 곡물창고에는 곡물이 가득 차고 재화창고에는 재화가 충만하거늘, 고관놈들은 당신께 그런 정황을 솔직히 아뢰는 자 한 새끼도 없으니, 이는 위에 있는 자들이 태만하여 아랫 백성을 잔해(殘害)하는 것이옵니다. 일찍이 증자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었습니다: ‘조심하여라! 조심하여라! 너에게서 나온 것은 반드시 너에게로 돌아가느니라!’ 백성들이 전역을 당하여서야 비로소 윗사람들에게 되갚을 수 있었던 것이니, 임금님이시여! 부디 그들을 허물치 마옵소서! 그보다는 군주께서 인정을 실천하시옵소서. 그리하면 이 백성들이 윗사람을 자기 몸처럼 생각하고, 대장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칠 것입니다.” 孟子對曰: “凶年饑歲, 君之民老弱轉乎溝壑, 壯者散而之四方者, 幾千人矣; 而君之倉廩實, 府庫充, 有司莫以告, 是上慢而殘下也. 曾子曰: ‘戒之戒之! 出乎爾者, 反乎爾者也.’夫民今而後得反之也. 君無尤焉. 君行仁政, 斯民親其上, 死其長矣.” |
참으로 위대한 맹자의 논설이요, 오늘날의 치세방으로도 적절한 명언이라 할 것이다. 여기 맹자의 논리의 위대성은 바로 ‘민중을 변호함’에 있다. 그는 변호사처럼 전 민중을 변호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변호의 이면에는 군주라도 정치를 잘못하면 인민이 군주에게 항거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라는 혁명사상이 깔려있다. 신하는 군주에게 봉록을 받아 처먹으니 전쟁에서 죽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백성은 윗사람을 먹여살릴 뿐 아무런 봉록을 받지 않는다. 현재도 국가의 재정을 국민의 혈세로 만들어가는 것일 뿐, 한 나라의 국민이라는 사실만으로 봉록을 받는 예는 없다. 따라서 군주와 인민 사이에는 인륜이나 의리가 통하지 않는다. 실제로 당시의 인민은 금수의 취급을 받았다. 기근이 들면 그들의 시체만 도랑에 뒹굴었다. 맹자는 인민이 금수 취급을 받는 존재가 아니라, 왕과 동일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보장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도 청와대에 앉는 자가 국민 모두가 자기와 동일한 존엄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뱃속 깊게 체득한 자가 과연 몇 놈이나 있을까?
앞서 「양혜왕」 하8의 ‘주일부(紂一夫)’의 논리나 「이루」 하3의 ‘신시군여구수(臣視君如寇讎)’ 논리와 상통하는 논리가 여기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앞서 말했지만 맹자는 제나라를 떠나 추나라로 돌아오는 길에 송(宋) 나라에 체류한 적이 있다. 이때 등(滕)나라의 정공(定公)의 세자가 초나라에 사신으로 가는 길에 송나라에 들러 맹자를 만난 적이 있다. 이 태자는 젊고 유능했으며 타인의 말을 들을 줄 아는 예의바른 청년이었다. 태자는 맹자가 말하는 ‘성선(性善)’과 요순의 치세를 듣고 감명을 받았다. 그래서 초나라에서 돌아오는 길에도 다시 들러 맹자의 말씀을 들었다. 그 후 얼마 안 있어 아버지 정공이 돌아가시매 그가 등극하였으니 그가 등문공이다. 정공이 돌아가셨을 때는 그는 그의 사부 연우(然友)를 맹자에게 보내 장례에 관한 정당한 예를 물었다. 그리고 국정을 도맡게 된 후로 맹자를 모셔갔다. 맹자가 등나라에 체재하는 기간 동안은 맹자는 행복했을 것이라고 생각되나, 대세는 이미 기울어갔고 등나라는 힘이 없었다. 맹자는 등문공과 함께 유토피아적인 사회주의 왕국(a utopian socialist Kingdom)을 꿈꾸었을 것이다. 그리고 또 그곳에서도 많은 사유를 개발했을 것이다.
맹자가 등나라에 체재했던 시기의 담론을 기록한 것이 「등문공」편이 다. 물론 여기 「양혜왕」편에 편입된 3장의 담론은 원래, 제인벌연(齊人伐燕)의 기사처럼, 「등문공」에 있었던 것이다. 그중에서 3장을 맛보기로 끄집어내어 편집한 것이다.
다음 장의 언어에서 특기할 사실은 맹자가 왕을 상대로 함에도 불구 하고 일인칭을 ‘오(吾)’로서 표현했다는 것이다. 제선왕에게는 ‘신(臣)’을 썼다는 것을 생각하면 매우 격이 다른 표현이다. 그러나 맹자는 제나라에서 태상경에 준하는 지위를 가졌었기 때문에 ‘신(臣)’이라는 표현을 써야만 한다. 그러나 등나라에서는 순수한 한 인간으로서 초빙되어 갔고 나이도 이미 66세였다. 그러니까 맹자는 등문공을 제자로서 대한 것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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