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천재(天災)는 피할 수 있으나, 인재(人災)는 피할 수 없다
2a-4. 맹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인(仁)의 정치를 실천하면 곧 나라는 번영하게 되지만 불인(不仁)한 정치를 행하면 곧 나라는 쇠퇴하고 치욕을 입게 된다. 지금 대부분의 나라들이 치욕을 싫어하면서 계속해서 불인한 정치에 안주하고 있는 것은 마치 습기를 싫어하는 관절염환자가 습지대만 쫓아다니며 사는 것과 다름이 없다. 치욕을 싫어한다면 덕행(德行을 귀하게 여기고 지식인을 존중하여, 덕행을 구비한 현자를 있어야만 할 자리에 있게 하고 능력 있는 지식인이 적합한 직무를 담당케 하는 것, 그 이상의 시급한 처방은 없다. 지금 많은 국가들이 내우외환이 없고 비교적 평온하고 한가한 시기를 맞이하고 있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정치의 기강을 세우고 형법을 공평하게 만들어 국가체제를 명료하게 정비하면, 강대국이라 할지라도 그렇게 인정을 실현하는 나라를 반드시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2a-4. 孟子曰: “仁則榮, 不仁則辱. 今惡辱而居不仁, 是猶惡溼而居下也. 如惡之, 莫如貴德而尊士, 賢者在位, 能者在職. 國家閒暇, 及是時明其政刑. 雖大國, 必畏之矣. 시(詩)【】『시경』 빈풍(豳風) 「치효(鴟鴞)」【치효는 올빼미류의 총칭. 남의 둥지를 점령하는 습관이 있다. 본 시는 첩에게 남편을 빼앗긴 여인의 절규를 읊은 노래일 수도 있는데 전통적 해석은 주공이 두 형제 관숙과 채숙을 주벌한 것과 관련하여 성왕을 깨우치기 위한 노래로 보고 있다. 별 타당성이 없어 보이나, 전통적 해석에 따라 풀이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맹자의 이 시의 이해방식이 「치효」의 전통적 해석의 맥락과 맞는다고 볼 수도 없다. 맹자는 여태까지 국풍을 인용한 적이 없다. 처음으로 국풍을 인용한 것도 특기할 만하다】에 다음과 같은 노래가 있다: ‘올빼미가 나뭇가지 위에 있는 둥지에서 말한다: 하늘이 구름에 가려 폭우가 쏟아지기 전에 뽕나무 뿌리의 껍질을 주워다가 우리 둥지 틈과 구멍을 칭칭 감아 튼튼하게 보수해 폭우에 대비하여 놓으면, 저 밑에 있는 인간들도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거야!’ 공자께서는 말씀하시었다: ‘이 시를 지은 자는 세상의 이치를 깨달은 사람일 것이다. 국가를 그렇게 잘 다스리고 환난에 대비할 수 있게 만든다면 누가 감히 그 나라를 모멸할 수 있으리오!’ 『詩』云: ‘迨天之未陰雨, 徹彼桑土, 綢繆牖戶. 今此下民, 或敢侮予?’孔子曰: ‘爲此詩者, 其知道乎!’能治其國家, 誰敢侮之? 지금 국가가 태평, 한가하다 하여 이 좋은 호기를 당하여 정신차리지 못하고 향락에 빠지고 게으르며 놀러만 다니는 타락상을 노정하면, 이것은 스스로를 자초하는 것이다. 인간의 화복이라는 것은 결국 자기 스스로 자초하지 않음이 없다. 今國家閒暇, 及是時般樂怠敖, 是自求禍也. 禍褔無不自己求之者. 시(詩)【『시경』 대아 「문왕(文王)」】에 이른다: ‘길이길이 천명에 배합이 스스로 많은 복을 구하는 길이니라.’ 그리고 또 「태갑(太甲)」【『상서(尙書)』의 편명. 매색(梅賾)의 위고문이라 하는 「태갑」중에 나온다】에 이런 말이 있다: ‘하늘이 지은 재앙은 오히려 피할 수 있으나, 스스로 지은 재앙은 도저히 도망갈 길이 없나이다.’ 바로 이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詩』云: ‘永言配命, 自求多褔.’ 「太甲」曰: 天作孽, 猶可違; 自作孽, 不可活.’此之謂也.” |
이러한 장의 말씀을 평범하게 읽을지는 모르겠으나, 참으로 맹자의 논리는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는 치열함을 계속 과시하고 있다.
인정(仁政)의 핵심은 ‘존현사능(尊賢使能)’에 있으며 현자를 바른 위에 앉히고, 능자를 바른 직에 앉히는 것이다. 작금의 우리나라 정치나 사법ㆍ행정의 인물행태를 보면 이러한 문제가 얼마나 절실한 과제상황인지 누구든지 땅을 치고 호곡해야 할 처참한 심정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객관적으로 현자와 능자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단지 권력자의 개인적 연줄이나 사적 비리의 호신용이 아니라는 전제가 있다고 한다면, 그러나 이러한 문제는 최고의 권력자의 내면적 도덕성이 확보되지 않으면 줄줄이 개판이 될 수밖에 없는 필연적 고리로 묶여있는 것이다.
『중용(中庸)』만 해도 ‘친친(親親)’과 ‘존현(尊賢)’을 같이 말했다. 그러나 맹자에게 있어서는 권력자의 ‘친친’은 부패의 온상일 뿐이다. 맹자는 ‘친친’의 네포티즘(nepotism)을 거부한다. 오직 객관적 능력자를 빨리 등용해야만 나라의 살길이 열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길흉화복’은 신비로운 자연의 영역이나 초자연적 인격자의 장 난이 아니라, 오직 인간 스스로 짓는 것이며 스스로 책임이 있다고 하는 생각은 철저히 민본사상을 인본주의적 비신화화된 세계 속에 정립하는 명쾌한 발언이다. 숙명론을 거부하는 인간의 자주정신! 이런 자주정신 이 맹자의 ‘성선(性善)’의 주장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천작얼(天作孼)’과 ‘자작얼(自作孽)’의 대비 또한 오늘날 ‘후쿠시마원전사태’를 반추해보아도 쉽게 이해가 가는 것이다. 쯔나미와 같은 끔찍한 재앙조차도 인간이 스스로 저지른 전재앙에 비하면 오히려 가벼운 것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반성해야 할 시점에 와 있다는 것이 현재 우리 인간 문명의 현주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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