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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한글역주, 공손추장구 상 - 2. 부동심ㆍ호연지기ㆍ지언, 그리고 공자 본문

고전/맹자

맹자한글역주, 공손추장구 상 - 2. 부동심ㆍ호연지기ㆍ지언, 그리고 공자

건방진방랑자 2022. 12. 16. 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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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부동심ㆍ호연지기ㆍ지언, 그리고 공자

 

 

2a-2. 공손추가 물어 말하였다: “만약 선생님께서 제나라의 경상(卿相)이라는 최고의 자리에 거하시게 되어 뜻하시는 바 왕도의 정치를 구현하는 포부를 실천하실 수 있다면, 그 포부를 통해 제왕 패자로 만들든 왕자로 만들든 결국 그것은 선생님의 역량에 의한 것이므로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바가 없을 것 같습니다주희의 해석을 따랐다. 조기는 선생님의 도움으로 제왕이 패자나 왕자가 되면 그들은 고대의 이상적 패자나 왕자와 다를 바 없는 훌륭한 인물이 될 것이다라는 식으로 해석한다. 주희가 문맥상 더 자연스럽다. 그러한 지위에 계속 계시게 된다면 책임부담도 많을 것이고 또 권세도 많을 것이니 마음이 흔들리는 일이 있지 않겠습니까?”
2a-2. 公孫丑問曰: “夫子加齊之卿相, 得行道焉, 雖由此霸王不異矣. 如此, 則動心否乎?”
 
맹자께서 말씀하시었다: “그런 일은 절대 있을 수 없다. 나는 40세 에이미 부동심의 경지에 달했다.”
孟子曰: “. 我四十不動心.”
 
공손추가 말하였다: “그렇다면 선생님의 경지는 용맹스럽기로 유명 했던 제나라의 고대 용사(勇士) 맹분(孟賁)()나라 사람이라는 설도 있음의 경지를 뛰어넘어도 한참 뛰어넘으셨습니다그려.”
: “若是, 則夫子過孟賁遠矣.”
 
말씀하시었다: “야 이놈아! 그게 뭐가 어렵다고 그렇게 호들갑을 떠냐! 고자(告子)실제로 이 인물이 맹자에 많이 등장하지만 역사적으로 그 전기를 상고(詳考)할 길이 없다. 묵자(墨子)의 제자로서 상당히 높은 수준의 학문경지를 개척한 사람으로 보인다. 인간의 본성은 근원적으로 선악으로 규정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맹자가 고자를 매우 비판하는 듯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고자를 존경했다. 고자를 맹자의 제자로서 보는 견해는 모두 틀린 것이다. 고자는 맹자보다 윗세대의 사람이며 직하에서 같이 살았을 것이다. 그래서 제나라에 있을 동안 왕래가 많았고 논쟁도 많이 하면서 서로를 계발시켰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선생만 해도 나보다 먼저 부동심(不動心)의 경지에 달하신 분이다.”
: “是不難, 告子先我不動心.”
 
공손추가 말했다. “부동심을 기르는 좋은 방법이 있습니까?”
: “不動心有道乎?”
 
맹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암 있구말구. 우선 북궁유(北宮黝)가 용기를 기르는 방법을 들 수 있겠다북궁유는 제나라 사람으로 전설적인 검객이었던 것 같은데 역시 상고할 길이 없다. 그는 칼이 피부를 갈라도 기가 꺾이지 않고, 눈을 찔려도 눈동자를 반듯이 노려보고 까딱하지 않았다. 털 끝만한 작은 일로 사람에게 모욕을 당해도 시장 한복판 대중이 보는 앞에서 채찍질을 당한 것처럼 생각했다. 아무리 미천(微賤)한 갈관박(褐寬博)느슨한 갈포를 두른 사람이라는 뜻으로 맹자 당대에 유행했던 어법이며 비천한 인간이라는 뜻이다이라도 그를 모욕하면 용서치 아니하며, 아무리 지체 높은 만승의 군주라도 그를 모욕하면 용서치 아니한다. 만승의 군주를 칼로 찔러 죽이는 것을 마치 미천한 갈부를 칼로 찔러 죽이는 것과 똑같이 여기며, 천하에 그가 두려워하는 제후는 한 사람도 없다. 어느 제후든지 그에게 험담을 말하면 반드시 보복하고야 만다. 이것이 북궁유의 용기이다.
: “. 北宮黝之養勇也, 不膚撓, 不目逃, 思以一豪挫於人, 若撻之於市朝. 不受於褐寬博, 亦不受於萬乘之君. 視刺萬乘之君, 若刺褐夫. 無嚴諸侯. 惡聲至, 必反之.
 
다음에 또 제나라 용사 맹시사(孟施舍)이 사람에 관해서는 정보가 전혀 없다. 성이 맹이고 이름이 시사라는 설, 성이 맹시라는 복성(復姓)이고 이름이 사라는 설이 있다 스타일의 용기를 기르는 방법이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적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이길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돌진해야 한다. 전술에 능하다는 사람들은 보통 적의 형편을 잘 계산해보고 난 후에야 진격하고, 이길 수 있다는 계산이 든 후에야 합전에 임한다. 이것은 삼군(三軍)과 같은 대군을 만나면 아무리 전술이 탁월해도 반드시 공포에 떨어 깨지고 만다. 나는 이런 비겁을 싫어한다. 어찌 나라고 어느 상황에서든지 필승한다는 법이 있을까보냐? 그러나 나는 어느 상황에도 적을 두려워하지 않고 돌진한다. 그것으로 나의 최선을 다할 뿐이다.’
孟施舍之所養勇也, : ‘視不勝猶勝也. 量敵而後進, 慮勝而後會, 是畏三軍者也. 舍豈能爲必勝哉? 能無懼而已矣.’
 
내가 생각컨대 맹시사의 용기는 증자(曾子)에 가깝고, 북궁유의 용기는 자하(子夏)에 가깝다어느 맥락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증자는 주관주의적 성향이 강하고, 자하는 객관주의적 성향이 강하다는 맥락에서 비유될 수 있을지 모른다. 여기 자하(子夏)를 자로(子路)의 오자로 보아야 한다는 재미있는 설도 있다. 이 두 사람의 용기 중에서 과연 어느 쪽이 더 현명한지는 판단키 어려운 문제이지만, 그래도 맹시사의 지키는 바가 훨씬 더 요령을 얻고 있다.
孟施舍似曾子, 北宮黝似子夏. 夫二子之勇, 未知其孰賢, 然而孟施舍守約也.
 
옛날에 증자께서 자기의 문인(門人) 자양(子襄)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신 적이 있단다. ‘너는 용기를 좋아하느냐? 나도 우리의 공자 선생님께 대용(大勇)에 관하여 문의해본 적이 있다. 선생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지. 자기 내면을 반성해보아 바르지 못하면 갈관박 앞에서도 벌벌 떨게 되며, 자기 내면을 반성해보아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으면 비록 천군만마(千軍萬馬)의 대군이 밀어 닥쳐도 용왕매진(勇往邁進)할 수 있다고.’ 맹시사가 기()를 지키는 방법은 증자가 자기 내면을 지키는 방법 만큼 요령을 얻고 있지 못하다.”
昔者曾子謂子襄曰: 子好勇乎? 吾嘗聞大勇於夫子矣: 自反而不縮, 雖褐寬博, 吾不惴焉; 自反而縮, 雖千萬人, 吾往矣. 孟施舍之守氣, 又不如曾子之守約也.”
 
공손추가 물었다: “감히 또 묻겠습니다만, 선생님의 부동심과 고자의 부동심의 차이에 관하여 들어볼 수가 있겠습니까?”
: “敢問夫子之不動心, 與告子之不動心, 可得聞與?”
 
맹자께서 친절히 대답하여 주신다: “고자가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남의 말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을 때 그것을 말로서 끝내지 않고, 그것을 천착하여 내 마음을 괴롭히는 짓을 하지 말라. 남의 마음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때 그것으로 상심 받아 내 몸의 기를 괴롭혀서는 아니 된다. 그러다 보면 점점 부동심이 달성된다. 이 말 중에서 후자인 남의 마음 때문에 내 몸의 기를 괴롭히지 말라는 얘기는 그런대로 옳은 얘기이지만, 전자인 남의 말을 내 마음에 천착하여 무리하게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말라는 얘기는 별로 옳지 못하다. 인간의 말은 모르는 것이 있으면 이해할 수 있는 데까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부동심과 별로 관계가 없다.
告子曰: 不得於言, 勿求於心; 不得於心, 勿求於氣. 不得於心, 勿求於氣, ; 不得於言, 勿求於心, 不可.
 
내가 생각하는 부동심의 핵심은 지()의 문제에 있다. 대저 지()는 기()의 통솔자이다. 그리고 기()는 우리 몸에 꽉 차있는 본원적인 에너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지()가 가는 곳에는 기()가 자연스럽게 따라붙는다. 그러므로 지()를 잘 조절하여 기가 난폭하게 흐트러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나는 말하는 것이다.”
夫志, 氣之帥也; , 體之充也. 夫志至焉, 氣次焉. 故曰: ‘持其志, 無暴其氣.’”
 
공손추가 말했다: “선생님! 방금 ()가 가는 곳에는 기()가 자연 스럽게 따라 붙는다고 말씀하시고는 또 새삼 ()를 잘 조절하여 기()가 난폭하게 흐트러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씀하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旣曰 志至焉, 氣次焉’, 又曰 持其志無暴其氣, 何也?”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으음, 참 좋은 질문이다. 내가 말하려 한 뜻은 지()와 기()는 일방적 관계가 아니라 쌍방적 교호작용이 있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우선 지()가 전일하게 잘 콘트롤되면 기()를 잘 움직일 수 있다. 그런데 기()가 전일하게 집중되어도 지()를 움직일 수 있다. 후자는 별로 바람직하지 않다. 지금 어떤 사람이 달려가다가 넘어졌다고 하자! 이것은 넘어지려는 의지가 작동한 것이 아니고 단지 무의식적 기()의 주기적 작동 리듬이 깨져서 생긴 사건일 뿐이다. 그런데 이런 경우 자빠지고 상처가 나면 곧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칠정(七情)이 상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부동심이 이루어지기 어렵다.”沃案: 이 단의 해석에 관하여 매우 다양한 갈래가 있으며, 아주 추상적 언어로 요약되어 있어 그 진정한 논리의 흐름을 명백하게 드러내기가 어렵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애매하게 해석하고 넘어가는 것을 나는 매우 명료하게 처리하였다. 나의 해석이니 참고할 지어다. 타인의 해석을 참고해도 좋으나 문제는 그들의 해석은 논리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 “志壹則動氣, 氣壹則動志也. 今夫蹶者趨者, 是氣也, 而反動其心.”
 
공손추는 또 물었다: “대강 알아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감히 또 여쭙겠습니다. 선생님께서 잘하시는 것은 어느 방면의 것들 입니까?”
敢問夫子惡乎長?”
 
맹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내 장기는 지언(知言)남의 말을 잘 분석하여 알아듣는 능력에 있고, 또 나의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줄 안다는 것이다.”
: “我知言, 我善養吾浩然之氣.”
 
말한다: “감히 묻겠나이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호연지기(浩然之氣)란 과연 무엇입니까?”
敢問何謂浩然之氣?”
 
말씀하신다: “정말 그것은 인간의 언어로 설명하기가 어려운 것이 다. 그것의 기()됨이 지대(至大)하고 지강(至剛)하여, 정의감에 의하여 배양되고 사악함에 의하여 상해 받지 않는다면 6척 단신의 기라 할지라도 천지지간(天地之間)에 꽉 들어차는 것이다. 그 기()됨이란 항상 의()와 배합되며 도와 더불어 하는 것이니, 인간에게 이것이 결여되면 그 인간은 활력이 없어지고 시들어버린 쭉정이가 되고 만다. 그러기 때문에 호연지기라는 것은 의로움에 의하여 일상적으로 축적되어 인간 내면에서 온양ㆍ배양되는 것이지, 어떤 돌발적인 정의감의 우발적 행동에 의하여 취득되는 그런 것이 아니다. 인간이 행동을 하고, 그 행동을 마음에 돌이켜 볼 때 꺼림직 하거나 뒤가 켕기는 구멍이 있으면 그 인간은 결국 시들어버리고 만다. 호연지기가 상실되어 활력이 없는 인간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 “難言也. 其爲氣也, 至大至剛, 以直養而無害, 則塞于天地之閒. 其爲氣也, 配義與道; 無是, 餒也. 是集義所生者, 非義襲而取之也. 行有不慊於心, 則餒矣.
 
그래서 나는 항상 말하기를 고자(告子)라는 분이 의()를 미처 알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다. 그 분은 의()를 심외(心外)의 어떤 것으로 생각하시기 때문이다고자의 인내의외(仁內義外)’의 설()고자4를 참고할 것. ()는 외재적 존재일 수 없으며, 인간이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하는 행동으로부터는 생겨나지 않는다. 반드시 호연지기를 배양하는 노력을 끊임없이 하면서도 그 노력의 결과를 예기(豫期)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끊임없이 마음속으로 의()를 배양한다고 하는 큰 목적을 잊어서는 아니 되지만, 빨리 효과를 얻기 위해 조장(助長)하는 짓을 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송()나라 사람들이 하는 짓을 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다.
我故曰, ‘告子未嘗知義, 以其外之也.’必有事焉而勿正, 心勿忘, 勿助長也. 無若宋人然:
 
송나라에 자기 밭에 파종한 싹이 영빨리 자라나지 않는 것을 심히 걱정한 나머지, 밭에 가서 싹을 일일이 다 조금씩 뽑아 올려놓은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아주 지칠 대로 지친 모습으로 돌아오면서 그 부인에게 자랑스럽게 말했다: ‘오늘 정말 피곤하다! 내가 싹이 자라 올라오는 것을 일일이 다 도와주었다. 그래서 그 아들이 깜짝 놀라 밭으로 달려가보니, 아뿔싸 싹들은 이미 다 시들어버리고 말았다. 이런 얘기가 송나라 사람들의 우화 같고 남의 얘기 같지만, 실은 천하의 모든 사람이 조장(助長)을 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싹이 자라나는 것을 도와주는 것은 무익하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기()를 배양하는 것에 근원적으로 관심을 갖지 않고 방기하는 것은, 밭에 잡초가 우거지도록 내버려두는 것과도 같다. 그러나 호연지기를 기른다고 하면서 무리하게 빨리 조장하는 것은앞에서 예로 든 북궁유나 맹시사의 용기 같은 것, 밭의 싹을 뽑아 올리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그것은 게으름으로 무익하다고 할 수준의 것이 아니라, 근원적으로 해악을 끼치는 것이요, 인간 존재를 망가뜨리는 것이다.”
宋人有閔其苗之不長而揠之者, 芒芒然歸. 謂其人曰: ‘今日病矣, 予助苗長矣.’其子趨而往視之, 苗則槁矣. 天下之不助苗長者寡矣. 以爲無益而舍之者, 不耘苗者也; 助之長者, 揠苗者也. 非徒無益, 而又害之.”
 
공손추가 묻는다: “아까 말씀하신 지언(知言)에 관하여 여쭙겠습니다.”
何謂知言?”
 
말씀하신다: “치우쳐서 공정하지 못한 말[詖辭]을 들으면 나는 그 인간이 무엇에 씌워져 있는지를 간파할 수 있다. 음란하게 씨부렁거리는 말[淫辭]을 들으면 나는 그 인간이 무엇에 빠져 있는지를 간파할 수 있다. 사악한 말[邪辭]을 들으면 나는 그 인간이 정도로부터 얼마나 멀어져 있는지를 간파할 수 있다. 교묘하게 피하려고만 하는 말[遁辭]을 들으면 나는 그 인간이 어떤 막다른 골목에 도달해 있는지를 간파할 수 있다. 이 네 가지 말, 피사(詖辭)ㆍ음사(淫辭)ㆍ사사(邪辭)ㆍ둔사(遁辭)가 위정자의 마음에서 생겨날 때에는 반드시 그것이 말에 그치지 아니 하고 그 정치에 해악을 끼치며, 정치 과정 중에서 그런 말이 나오게 되면 그것이 말에 그치지 아니 하고 반드시 그 나라의 모든 사업에 해악을 끼친다. 이것은 너무도 중요하다! 옛 성인께서 지금 다시 출현하신다 해도 이 나의 말을 수긍하실 것이다.”
: “詖辭知其所蔽, 淫辭知其所陷, 邪辭知其所離, 遁辭知其所窮. 生於其心, 害於其政; 發於其政, 害於其事. 聖人復起, 必從吾言矣.”
 
공손추는 또 묻는다: “옛날에 공자의 문하에서 재아와 자공은 변설(辯舌)에 뛰어났으며, 염우(冉牛)염경冉耕, 자는 백우伯牛)ㆍ민자(閔子)민손(閔損)자는 자건(子騫)ㆍ안연은 덕행으로 뛰어났습니다논어(論語)11-2에 나오는 평가와 놀랍게도 일치한다. 공자는 이 양 측면을 다 겸비하신 분이신 것 같은데, 스스로 솔직하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말하는 데는 별 재주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맹자 선생님께서는 호연지기의 덕도 쌓으셨고 또 지언의 장기도 갖추셨으니 선생님이야말로 진짜 성인의 경지에 도달하신 분이 아니시겠습니까?”
宰我子貢善爲說辭, 冉牛閔子顔淵善言德行. 孔子兼之, : ‘我於辭命則不能也.’然則夫子旣聖矣乎?”
 
말씀하신다: “데끼놈! 너 뭔 말을 하고 있는 거냐? 옛적에 자공이 공자에게 여쭈어 말하였다: ‘선생님은 성인이시죠?’ 공자님께서 말씀하시었다: ‘내가 어찌 성인을 자처할 수 있으랴! 성인은 나의 능력 밖이니라. 나는 그저 배우는 데 싫증내지 아니 하고 사람들을 가르치는 데 게으름이 없을 뿐이로다.’ 그러자 자공이 말하기를, ‘배우는 데 싫증내지 아니 함은 지()의 명증이요, 가르치는 데 게으름이 없는 것은 인()의 명증이올습니다. ()하고 또 지()하면, 선생님이야말로 이미 성인이 아니고 또 무엇이겠나이까?’이상의 대화는 정확하게는 논어(論語)에 나오지 않지만 대략 7-33과 상통한다. 당시의 로기온파편들이 같은 주제에 다양한 형태로 산재했음을 알 수 있다. 맹자는 오늘 우리가 말하는 논어를 읽은 사람은 아니다. 대저 성인에 관하여서는 공자께서도 자처하시지 않으셨는데, 네가 날 보고 성인이라니 뭔 무엄한 말을 하고 있는 게냐?”
: “! 是何言也? 昔者子貢, 問於孔子曰: ‘夫子聖矣乎?’ 孔子曰: ‘聖則吾不能, 我學不厭而敎不倦也.’子貢曰: ‘學不厭, 智也; 敎不倦, 仁也. 仁且智, 夫子旣聖矣!’夫聖, 孔子不居, 是何言也?”
 
공손추는 또 묻는다: “옛적에 제가 들은 바가 있는데, 자하(子夏)ㅣ자유(子游)ㆍ자장(子張)은 모두 공자라는 성인의 한 면만을 구현한 사람들이고, 염백우ㆍ민자건ㆍ안연은 성인의 전체를 구현하기는 했는데 조금 미흡하다고 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어떠한 인물이라고 평가하십니까?”
昔者竊聞之: ‘子夏子游子張皆有聖人之一體, 冉牛閔子顔淵則具體而微.’敢問所安.”
 
말씀하신다: “야 이놈! 말을 너무 막하는구나! 그런 질문은 좀 삼 가는 게 좋겠다!”
: “姑舍是.”
 
그러니까 또 묻는다: “그렇다면 백이(伯夷)와 이윤(伊尹)에 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伯夷伊尹何如?”
 
말씀하신다: “각기 걸어간 길이 다르다. 섬길 만한 군주가 아니면 섬기지를 않고, 다스릴 만한 백성이 아니면 다스리지 않고, 천하가 잘 다스려지면 벼슬하고 어지러워지면 은퇴하는 스타일의 인간이 백이(伯夷)였다. 어떠한 임금이라도 섬기며, 어떠한 백성이라도 다스리며, 천하가 잘 다스려져도 벼슬하고 개판이라도 벼슬하는 적극적 스타일의 인간이 이윤(伊尹)이었다. 그러나 출사할 만하다 할 때는 출사하고, 은퇴하는 것이 좋을 만하다 할 때는 은퇴하고, 오래 체재할 만하다 할 때는 오래 체재하고, 빨리 떠나야 할 만하다 할 때는 지체없이 빨리 떠나는 분이 공자(孔子)이시었다. 3인은 모두 옛적의 위대한 성인이시다. 나는 이 세 분의 어느 측면도 충실하게 다 실천하지 못하지마는, 내가 소망하는 바는 곧 공자님의 인격을 배우는 것이다.”
: “不同道. 非其君不事, 非其民不使; 治則進, 亂則退, 伯夷也. 何事非君, 何使非民; 治亦進, 亂亦進, 伊尹也. 可以仕則仕, 可以止則止, 可以久則久, 可以速則速, 孔子也. 皆古聖人也, 吾未能有行焉; 乃所願, 則學孔子也.”
 
공손추는 궁금해서 계속 묻는다: “선생님, 그렇다면 백이(伯夷)와 이윤(伊尹)도 공자와 같은 반열의 성인입니까?”
伯夷伊尹於孔子, 若是班乎?”
 
말씀하신다: “아니다! 인간이 이 땅위에 생겨난 이래로 공자와 같은 위대한 인간은 있어본 적이 없다.”
: “. 自有生民以來, 未有孔子也.”
 
묻는다: “그렇지만 세 분 다 옛날의 성인이라고 명하신 이상에는 뭔가 세 분에게 공통점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 “然則有同與?”
 
말씀하신다: ‘! 그렇구말구. 겨우 사방 백리의 작은 땅을 얻어 임 금이 되어도 세 사람 다 사방의 제후들을 조공케 하고, 천하를 보유하는 왕업을 성취하실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하나의 불의라도 행하여, 하나의 무고한 인민의 생명이라도 죽여 설사 천하를 얻으실 수 있다 해도 그런 짓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세 분은 공통이다.”
: “. 得百里之地而君之, 皆能以朝諸侯有天下. 行一不義, 殺一不辜而得天下, 皆不爲也. 是則同.”
 
말한다: “이제 감히 묻겠나이다. 세 분의 다른 점은 무엇입니까?”
: “敢問其所以異?”
 
맹자께서 마지막으로 힘주어 말씀하신다: “공자의 문인인 재아(宰我)ㆍ자공(子貢)ㆍ유약(有若)은 모두 그 지혜가 출중한 사람들로서 성인을 알아볼 만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 인물됨의 그릇이 조금 작다고는 해도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 대하여 아첨하는 그런 말을 할 사람들은 아니다. 이 세 사람이 공자를 존경하여 평한 말들을 한번 살펴보기로 하자. 이들의 말을 통해 공자가 백이와 이윤과는 동급의 인물이 아니라는 것이 명백해질 것이다.
: “宰我子貢有若智足以知聖人. , 不至阿其所好.
 
재아는 말했다: ‘나의 눈으로 공자 선생님을 바라보았을 때 공자는 분명 요임금ㆍ순임금을 훨씬 뛰어넘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자공은 이와 같이 말했다: ‘한 나라의 예제를 관찰하면 그 나라의 정치의 현주소를 파악할 수 있다. 한 나라의 음악을 들어보면 그 나라의 도덕의 현주소를 파악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부터 백세대 이후에 백 세대 연간에 등장한 임금들의 정치를 다 관찰한다 해도 그들의 정치는 공자가 세운 원칙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공자의 위대함을 알 수 있지 않을까? 이 땅위에 인간이 생겨난 이래 우리 선생님 같은 분은 없으셨다.’
宰我曰: ‘以予觀於夫子, 賢於堯舜遠矣.’子貢曰: ‘見其禮而知其政, 聞其樂而知其德. 由百世之後, 等百世之王, 莫之能違也. 自生民以來, 未有夫子也.’
 
유약이 또 이와 같이 말하였다: ‘우리가 동류(同類)라고 말해도, 동류 속에 차등이 있는 것은 비단 인간세계 속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기린은 땅위를 달리는 동물 중에 뛰어난 것이며, 봉황은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 중에 뛰어난 것이며, 태산은 이 땅위의 언덕 중에서 뛰어난 것이며, 황하나 황해는 흐르는 물 중에서 뛰어난 것이다. 같은 류이지만 그것들은 특출난 것이다. 성인과 백성도 또한 같은 류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같은 류 속에서 뛰어나고, 또 모든 성인들 중에서 뛰어남이, 이 땅위에 인간이 생겨난 이래로 공자처럼 지극한 성덕을 지닌 유례가 있지 않았다.’”
有若曰: ‘豈惟民哉? 麒麟之於走獸, 鳳凰之於飛鳥, 太山之於丘垤, 河海之於行潦, 類也. 聖人之於民, 亦類也. 出於其類, 拔乎其萃, 自生民以來, 未有盛於孔子也.’”

 

맹자전체 260장 중에 긴 장이 3장이 있다. 양혜왕71,313 자로서 가장 길고, 그 다음이 등문공4, 1,118자로서 두 번째 길 고, 그 다음이 본장이다. 1,095자이다.

 

맹자의 논의가 단순한 정치상의 왕도론을 넘어서 인간의 심성의 문제를 파고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나라에서 여러 학자들과 교류하면서 생겨난 새로운 국면이라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 본장의 주제는 크게 부동심과 호연지기(浩然之氣), 지언(知言), 그리고 공자에 대한 로얄티의 표방, 이 세 테마로 압축된다고 볼 수 있다. 호연지기는 서양철학사에서 본다면 신비주의(mysticism)에 속하는 수양론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으나, 서구인들은 항상 인간의 문제에 관하여 우주적 영역을 신에게 귀속시켰기 때문에 진정한 인간과 우주의 교섭에 대하여 올바른 발상을 할 수가 없다. 우리의 신비는 초월적 신비가 아니라 상식적 신비이며, 우리의 몸으로 달성될 수 있는 혼연의 우주적 일체감이다. 지금은 서양사람들이 동방의 무술을 잘 익히고 있지만, 내가 어릴 적만 해도 동방의 꽁후우에 관해서는 서양인들은 매우 신비로운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그만큼 몸의 단련에 관한 우주론적 인식이 없었다. 여기서 말하는 호연지기는 우리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보편적 어휘이기도 하지만 맹자의 인품을 잘 나타내주는 말이기도 하다. 맹자는 참으로 호연지기의 인간이었다.

 

그리고 언어에 대한 맹자의 생각은 당시 변론을 일삼는 소피스틱한 명 가의 성향에 대하여 그 정치적 기능과 윤리적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 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말을 만들어 내고 있는 인간의 마음의 윤리성이 더 궁극적인 과제상황이라는 것이다. 공손추의 질문의 진지하고 집요한 추적, 그리고 그에 대처하는 맹자의 치열하면서도 여유있는 논리는 고대 문답의 극상의 한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희랍인들의 너저분한 논리와 만연체의 낭비에 비한다면 그 압축된 느낌이 압권이라 할 수 있다.

 

호연지기는 이 장에서만 나오고 딴 곳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맹 자의 호연지기는 부동심(不動心)’ ‘조장(助長)’의 주제와 유기적 일체를 이루며, 특히 여민동락(與民同樂)’의 사회정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아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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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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