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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한글역주, 고자장구 하 - 3. 원망해야 할 때 본문

고전/맹자

맹자한글역주, 고자장구 하 - 3. 원망해야 할 때

건방진방랑자 2022. 12. 31. 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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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원망해야 할 때

 

 

6b-3. 공손추가 맹자께 여쭈어 말하였다: “고자(高子)고자(高子)’라는 이름은 여기 외로도 2b-12, 7b-21, 7b-22에 나온다. 조기는 고자(高子)가 제나라 사람으로 맹자의 문하생이라고 했는데 이 장을 제외한 타 3장에서는 그 분위기가 잘 어울린다. 그러나 본 장의 고자는 고노인[高叟]’으로 표현되었으며, 맹자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시경학의 대가인 듯한 느낌을 준다. 육덕명(陸德明)경전석문(經典釋文)서록(序錄)에 의하면 시의 전수과정이 자하(子夏)가 고행자에게 전수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라고 했다. 여기 고자가 바로 이 고행자일 것이라고 하나 맹자의 나이와도 워낙 많은 차이가 난다. 하여튼 이장의 고자를 고행자(高行子) 계열의 어떤 사람으로 보고, 타장의 고자를 이 장의 고자의 동생으로서 맹자의 문하생이 된 사람으로 보자는 견해가 있으나 단정지을 수는 없다께서 소반(小弁)이라는 시를 소인의 시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6b-3. 公孫丑問曰: “高子曰: 小弁, 小人之詩也.”
 
맹자께서 말씀하시었다: “고자께서는 어이하여 그렇게 생각하신다더냐?”
孟子曰: “何以言之?”
 
공손추가 말하였다: “원망이 너무 심하게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라 고 하는군요.”
: “.”
 
맹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어허~참 고루하구나! 고노인[高叟]의 시 해석 은! 여기 한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가 먼 지방의 나라 사람이 원한에 가득 차 활을 당겨 사람을 죽이려고 했다는 얘기를 하는데, 매우 심각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담소하면서 가볍게 이야기한다면, 그 이유는 별 것이 아니다. 바로 그 월나라 사람이 자기에게서 소원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 친형이 원한에 가득차 활을 당겨 사람을 죽이려고 했다는 얘기를 할 적에는 콧물ㆍ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애절하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별 것이 아니다. 형은 너무도 가까운 육친(肉親)이기 때문이다. 소반(小弁)이라는 노래에 표현된 원망이라는 것은 가까운 사람을 친하게 사랑하는 감정에서 나온 것이다. 가까운 사람을 친하게 여기는 것은 대적적인 원망이 아니라 미묘한 인의 감정이다. 너무 고루하고 편협하구나! 고노인[高叟]의 시를 해석하는 태도는!”沃案: 나의 해석은 기존의 해석들과 매우 다르다. ‘사지(射之)’()’를 모두 그 말하는 사람 본인으로 보나, 월나라 사람이 그를 쏜다는 것은 도무지 어불성설이다. 지역적으로 월나라에서 쏜다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이야기이고, 또 가까운 데서 자기를 쏘려고 하는데 웃으면서 이야기한다는 것은 말이 되질 않는다. 모두 객관화된 어떤 사태를 원망이라는 감정과 관련지어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 “固哉, 高叟之爲詩也! 有人於此, 越人關弓而射之, 則己談笑而道之; 無他, 疏之也. 其兄關弓而射之, 則己垂涕泣而道之; 無他, 戚之也. 小弁之怨, 親親也. 親親, 仁也. 固矣夫, 高叟之爲詩也!”
 
공손추가 또 여쭈었다: “개풍(凱風)의 노래도 효자들의 심정을 읊은 노래인데 어찌하여 그 노래에는 원망이 전혀 나타나고 있질 않은 것일까요?”
: “凱風何以不怨?”
 
맹자께서 말씀하시었다: “개풍 노래 속에서는 부모(엄마)의 과실이 작고, 소반 노래 속에서는 부모(아버지)의 과실이 크다. 부모의 과실이 큰데도 원망하지 않으면 그것은 감정의 단절이 생겨 점점 소원하게 되는 것이다. 부모의 과실이 작은데도 원망을 일삼으면, 그것은 너무도 민감하게 반응해서는 아니 되는 상황이다沃案: 여기 제일 마지막 구문인 시불가기(是不可磯)’는 해석이 매우 어렵다. ‘()’는 본시 격류의 여울목에 있는 바윗돌이다. 조기는 ()라는 것은 격()하는 것이다. 과실이 작은데도 효자가 너무도 과민하게 감격하여 곧 그 부모에 대한 원망을 일삼으면 이것 또한 불효일 수밖에 없다[, 激也. 過小耳, 而孝子感激, 輒怨其親, 是亦不孝].’라고 했는데 정론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주희는 이를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는 물이 돌에 부딪히는 것을 말한 것이다. 불가기(不可磯)라 한 것은 조금만 격()하여도 자식들이 대번에 노함을 말한 것이다[, 水激石也. 不可磯, 言微激之而遽怒也].’ 그러나 이러한 주희의 해석은 실제로 불가(不可)’를 해석하지 않은 것이며 문구해석상에 매우 어려움이 많다. 혹자는 ()’()’으로도 훈()될 수 있으므로 친근함을 나타낸 것이라 한다. 그러면 모자 사이에 친근한 정이 없어지게 된다의 뜻이 될 것이다. 부모와 자식 사이가 점점 소원하게 되는 것도 불효이며, 너무 민감하게 반응해서는 아니 된다고 말할 정도로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도 또한 불효이다.
: “凱風, 親之過小者也; 小弁, 親之過大者也. 親之過大而不怨, 是愈疏也; 親之過小而怨, 是不可磯也. 愈疏, 不孝也; 不可磯, 亦不孝也.
 
그래서 공자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었다: ‘()이야말로 정말 지극한 효도를 다하시는 분이시로다. 나이 50이 되어도 자기를 학대한 부모를 원망하는 심정이 없을 수는 없겠지만, 지극히 사모하는 심정으로 일관하시었다.’”
孔子曰: ‘舜其至孝矣, 五十而慕.’”

 

소반(小弁), 시는 현재 시경소아 소반8개의 스탄자로 이루어져 있다. 모시(毛詩)에 의하면 이 시는 유왕(幽王)을 처음 풍자한 것으로 태자 의구(宜臼)의 사부가 지은 것이라고 한다. 서주(西周)의 마지막 폭군인 유왕(幽王)에 신()나라의 여자를 취()하여 의구(宜臼)를 낳아 그를 태자로 세웠다. 그 후에 애첩 포사(褒姒)를 후궁으로 얻어 지극히 총애하여 아들 백복(伯服)을 낳자, 신후(申后) 태자 의구(宜臼)를 폐()하고 포사에서 낳은 백복을 태자로 세운다. 그리고 의구를 죽이려고 한다. 이 시는 의구의 사부가 폐위된 태자 의구의 애통, 박절한 심정을 읊은 시라고 한다. 그러나 삼가시(三家詩)에 의하면 이 시는 주선왕(周宣王) 때의 명신(名臣)인 윤길보(尹吉甫)의 아들인 백기(伯奇)가 지은 것이라고 한다. 윤길보가 후처를 취하여 아들 백방(伯邦)을 낳았는데, 후처는 길보에게 본처 소생 백기(伯奇)를 참소(讒訴)하여 황야로 내쫓게 했다. 백기는 황야에서 이 시를 지어 원통한 심정을 나타냈다는 것이다. 두 설이 다르나 전처의 소생이 후처의 간계로 들판으로 쫓겨나가 그 애통한 심경을 읊었다는 점에서는 상통된다. 그러나 이러한 시의 해석은 노래를 역사적 인물의 상황과 억지로 꿰맞춘 것이며 별 신빙성이 없다. 이 소아(小雅)의 시는 소아에 속하지만 매우 국풍적인 성격의 것이며, 현재의 시경학의 연구자들은 그냥 소박하게 첩에 의하여 남편의 사랑을 상실한 한 정실 여인의 애절한 심정을 읊은 것으로 본다. 하여튼 재미있는 것은 맹자가 이 시를 후대의 해설가들처럼 역사적 사건과 관련짓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냥 불운에 처한 자식이 부모를 원망하는 노래 정도로 보고 있다.

 

 

개풍(凱風)은 산들바람이라는 뜻인데 국풍에 속하는 노래이다. 패풍(邶風)에 실려있다. 일곱 아들이 엄마의 고생스러운 삶을 생각하면서 위로의 정을 표현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모시(毛詩)에 보면, ‘개풍은 효자를 찬미한 시이다. 위나라의 풍속이 문란하여 일곱 아들을 둔 엄마였지만, 오히려 그 집을 편안히 여기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일곱 아들들이 효도를 다하여 그 어머니의 마음을 위로하여 그 뜻을 이룬 것을 찬미한 것이다[凱風, 美孝子也. 衛之淫風流行, 雖有七子之母, 猶不能安其室. 故美七子能盡其孝道, 以慰其母心而成其志爾].’라고 그 성격이 규정되어 있다.

 

여기 불능안기실(不能安其室)’이라는 표현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것이 문제인데, 바람을 피운다든가, 남편이 죽은 후에 재가(再嫁)를 하려고 한다든가, 혹은 그 어머니가 본시 계모였다든가 하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마지막의 성기지(成其志)’는 일곱 자식들이 효도를 다하여 그 마음을 가라앉혔다, 즉 그 집을 떠나지 않도록 했다는 뜻이다. 일곱 아들까지 둔 여자가 바람을 피운다든가, 재가를 한다든가 하는 것을 보면 당시의 성모랄이나 풍속이 매우 자유로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시를 잘 분석해보면, 그러한 엄마의 품성에 관한 것보다는, 오히려 품성들이 나빠 양육하기 어려운 자식들을 훌륭하게 키워놓은 엄마의 자애를 찬미하는 시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나의 견해이다. 하여튼 공손추나 맹자는 당시 엄마의 작은 과실에 대하여 원망을 품지 않고 자식들이 효도를 다한 것을 찬미한 시로 보고 있다.

 

 

시경에 대한 해석을 둘러싼 논의는 지극히 난해하다. 왜냐하면 옛 노래에 대한 맹자 당대의 이해방식을 정확히 재구(再構)하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또 그 시의 원래 의미를 정확히 복원하는 것은 항상 논란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가장 권위를 지녀왔던 시서(詩序)의 해석이야말로 대체로 부정확하다는 것은 사계의 일치된 견해이다. 맹자의 시해석도 단장취의(斷章取義)의 위험성은 항상 있지만 최소한 ()이전의 전국시대 사람들의 발랄한 논의라는 측면에서 자료적 가치가 높다.

 

맹자의 시에 관한 해석에 관하여 구질구질한 논쟁을 할 필요가 없다. 단지 맹자가 얼마나 예술 일반을 발랄하고 중층적으로 이해하고 있는가, 그의 예술관의 탁월성을 인정하는 것으로 족하다. 고자의 원망[]’에 대한 규정성이 너무도 예술의 중층성(中層性)을 파악하지 못한 일면적 규정이라는 것을 맹자는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맹자는 인간의 원망의 심리는 원망 그 자체로서 나쁜 것일 수 없으며, 그것이 어떠한 맥락에 처하는가에 따라 다양한 감정의 색조를 지니는 것이므로 일방적ㆍ일면적 규정성은 저차원적 인간 이해라는 것이다. 맹자는 인간의 감정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그리고 감정이야말로 인의 자리라고 보고 있다.

 

영어에 앰비밸런스(ambivalence)’라는 말이 있는데 서구적 심리학에서는 이를 너무 병리학적 측면에서 다루는 경향이 있지만, 동방인들의 감정구조에는 항상 이렇게 대립되는 양가적 측면을 긍정적으로 포섭하는 측면이 있다. ‘()’은 원망으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면에는 ()’의 감정이 항상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을 파악한다는 것은 이러한 양가적 전해야만 하는 것이다. 사랑과 증오, 원망과 사태를 사모, 아름다움과 추함, 선과 악은 모두 같은 차원의 동시적 포섭적 가치일 뿐이다. 이러한 감정의 미묘함의 표현이 일상적 삶에서 사라지게 되면 인간은 메마르게 되며, 인간관계 또한 논리적일지는 모르나 각박하고 냉혹하게 되며 중층적 깊이를 상실한다. 오늘날 서구적 합리주의의 한계가 바로 이러한 감정의 중충성을 전관(全觀)하는 시각을 상실한 데서 오는 인간학의 사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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