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불리하기에 전쟁을 그쳐야 한다?
6b-4. 전국시대의 유명한 평화주의적 사상가였던 송경(宋牼) 이 초(楚)나라로 유세를 하러 가고 있는 도중에 맹자와 석구(石丘)에서 만났다【석구(石丘)는 송(宋)나라의 지명이라고 한다. 『일통지(一統志)』에 의하면 하남성의 옛 위휘부(衛輝府)라고 하나 자세한 것은 잘 모른다】. 6b-4. 宋牼將之楚, 孟子遇於石丘. 맹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선생(先生)【우리가 현대어에서 쓰고 있는 이 ‘선생’이라는 말은 『맹자』에서 유래된 것이다. ‘선생’은 대체로 노인교학자(老人敎學者)나 장자유덕자(長子有德者)의 칭(稱)으로 쓰였다. 조기는 같은 직하 학사(學士)로서 연장자(年長者)에게 ‘선생’이라는 칭호를 썼다고 주를 달아놓았다. 맹자는 평소 송경을 존경했기에 ‘선생’이라는 칭호를 쓴 것이다. 4a-24, 4b-31에 기출】께서는 어디로 가시고자 하시나이까?” 曰: “先生將何之?” 송경(宋牼)께서 말씀하시었다: “저는 진(秦)나라와 초(楚)나라가 서로 거병하여 싸움을 시작하려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진나라가 아직 단독으로 초(楚)나라와 싸울 만큼 강성하지는 못했다. 양양왕(梁襄王) 원년, BC 318년에 양(梁)ㆍ조(趙)ㆍ한(韓)ㆍ연(燕)ㆍ초(楚), 다섯 나라가 합종하여 진나라를 공격하였는데 함곡관에서 진(秦)에게 대패를 당한다. 그리고 초회왕(楚懷王) 17년, BC 312년에 초나라는 단독으로 진나라와 전쟁을 한다. 32세의 굴원(屈原)은 이때 제나라에 사신으로 가 있었고 돌아와 장의(張儀)를 왜 죽이지 않았냐고 통탄해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초나라도 진나라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바로 이 해에 맹자는 연(燕)나라의 비운과 반란으로 인하여 제선왕과 불화가 생겨 제나라를 뜬다. 맹자는 이때 송(宋)나라에 잠시 체재했다가 나라로 가던 중에 석구(石丘)에서 송경을 만난 것으로 사료된다. 이때 맹자의 나이가 61세였다. 송경은 이때 70세를 넘긴 노인이었다】, 초회왕(楚懷王)을 만나 설득하여 싸움을 중단케 하려 하오. 만약 초회왕이 찬성하지 않으면 진왕(秦王, 혜문왕惠文王)을 만나 설득하여 싸움을 중단하도록 만들겠소. 초왕이든 진왕이든 두 사람 중 하나는 내 의견을 들어주리라고 확신합니다.” 曰: “吾聞秦楚構兵, 我將見楚王說而罷之. 楚王不悅, 我將見秦王說而罷之, 二王我將有所遇焉.” 맹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저 가(軻)【명(名)으로 자칭하는 것은 겸칭이다. 5b-2에 기출】는 그 자세한 정황은 다 여쭙지 못하겠나이다. 원컨대 그 요지(要旨)만을 듣고자 하나이다. 어떻게 설득하려고 하시나이까?” 曰: “軻也請無問其詳, 願聞其指. 說之將何如?” 송경께서 말씀하시었다: “저는 싸우게 되면 그것이 서로에게 이롭지 못하다는 것을 말하려 합니다.” 曰: “我將言其不利也.” 맹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선생께서 지향하시는 바의 큰 뜻은 훌륭 합니다【여기서 ‘대(大)’는 ‘선(善)’과 같다】. 그러나 선생께서 추구하시는 방법론 은 너무도 문제가 많습니다【沃案: 여기 ‘호(號)’를 모두 슬로건 정도로 번역하지만, ‘호’는 말하는 방법, 설득하는 방법에 관한 것이다. 양 뿨쥔(楊伯峻)이 ‘수어용더티화(所用的提法)’라고 해석한 것은 그 정확한 뜻이다】. 曰: “先生之志則大矣, 先生之號則不可. 선생께서 진왕과 초왕을 이(利)로써 설득하시게 되면, 진왕과 초왕은 이익을 얻게 된다는 그 측면만을 기뻐 취하여 삼군(三軍)【삼군(三軍)’이란 육ㆍ해ㆍ공군의 뜻이 아니고 대군을 의미한다. 병사의 수를 가리키는 것이다. 1군이 12,500명, 제후국으로서 대국의 군대를 보통 3군이라 칭한다. 천하는 6군, 그러나 맹자의 시대는 이미 이런 규모를 훨씬 넘어섰다. 2a-2에 기출】의 대군을 일으키는 것을 그만두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삼군의 병사들도 단지 휴전된 것만을 기뻐하면서 오로지 이익만을 탐하게 될 것입니다. 신하 된 자로서 이익만을 탐하여 임금을 섬기고, 아들 된 자로서 이익만을 탐하여 아버지를 섬기고, 동생 된 자로서 이익만을 탐하여 형님을 섬기게 되면, 군신ㆍ부자ㆍ형제가 모두 인의(仁義)를 버리고 이(利)라는 측면에서만 서로 맞부딪치게 될 터이니, 이렇게 되고서도 멸망하지 않은 나라는 있어본 적이 없습니다. 先生以利說秦楚之王, 秦楚之王悅於利, 以罷三軍之師, 是三軍之士樂罷而悅於利也. 爲人臣者懷利以事其君, 爲人子者懷利以事其父, 爲人弟者懷利以事其兄. 是君臣, 父子, 兄弟終去仁義, 懷利以相接, 然而不亡者, 未之有也. 이와는 대조적으로, 지금 선생께서 인의(仁義)로써 진왕과 초왕을 설득하시게 되면, 진왕과 초왕은 인의를 기쁘게 수용하고, 그러한 도덕적 시각에서 삼군(三軍)의 대군을 일으키는 것을 중단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삼군의 병사들도 휴전된 것을 진심으로 즐거워하며 인의를 실천하는 데 기뻐 앞장서게 될 것입니다. 신하 된 자로서 인의를 가슴에 품고 임금을 섬기며, 자식 된 자로서 인의를 가슴에 품고 아버지를 섬기며, 동생 된 자로서 인의를 가슴에 품고 친형님을 섬기면, 이것은 군신ㆍ부자ㆍ형제가 모두 이(利)를 탐하는 마음을 버리고 오직 인의를 가슴에 품고 서로를 아껴주게 될 것이니, 이렇게 되고서도 천하에 왕노릇하지 않은 자는 있어본 적이 없습니다. 어찌하여 하필 이체를 말하시나이까?” 先生以仁義說秦楚之王, 秦楚之王悅於仁義, 而罷三軍之師, 是三軍之士樂罷而悅於仁義也. 爲人臣者懷仁義以事其君, 爲人子者懷仁義以事其父, 爲人弟者懷仁義以事其兄. 是君臣, 父子, 兄弟去利, 懷仁義以相接也. 然而不王者, 未之有也. 何必曰利?” |
송경(宋牼)은 송(宋)나라 사람이며 이름은 경(牼)이다. 맹자가 이 사람을 ‘선생(先生)’으로 존칭하고 있고, 자기를 ‘가(軻)’라 하여 이름으로 낮게 칭하고 있으므로 분명 맹자보다 나이가 많은 당시의 추앙받던 학자였음이 분명하다. 『장자(莊子)』 「천하(天下)」편에는 윤문(尹文)과 함께 다루어지고 있고, 『순자(荀子)』 「비십이자(非十二子)」편에는 묵적(墨翟)과 함께 취급되고 있는데 이름은 송견(宋鈃)으로 나온다. 『한비자(韓非子)』 「현학(顯學)」 편에는 ‘송영자(宋榮子)’ ‘송영(宋榮)’으로 나오고,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 편에도 ‘송영자(宋榮子)’로 나오고, 『순자(荀子)』 「정론(正論)」편에는 ‘자송자(子宋子)’로 나오고, 「천론(天論)」편에는 ‘송자(宋子)’로 나온다. 다 동일인을 가리키는 것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모든 기술을 살펴보면 공통된 것은 작은 규모의 싸움이든 대규모의 전쟁이든 근원적으로 싸움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를 인식론적인 기초로부터 설득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모욕을 당하는 것을 근본적으로 치욕으로 인식하지 않으면 싸움을 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송경은 사람들이 인간의 성정(性情)이 욕심으로 가득찬 것처럼 선전해대는데, 실상 인간의 성정은 본질적으로 욕심이 적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내면적으로는 과욕(寡欲)을 실천할 것을 주장하며 외면적으로는 공격을 금지시키고 거병(擧兵)을 철회할 것을 주장했다. 인간의 주관적 성견(별유[別囿])을 제거함으로써 만물의 평화로운 진상(眞相)을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송경과 그의 제자들은 평화의 상징으로서 위아래가 균평한 화산관(華山冠)을 쓰고 다니면서 어떠한 모욕과 노고를 무릅쓰고서라도 자신들의 소신을 설득ㆍ권유하고 다녔고, 온 천하가 그의 주장을 받아들여주지 않아도 귀가 따갑도록 떠들어대고 그칠 줄을 몰랐다. 매우 적극적인 평화주의자(Pacifist)였다. 내가 보기에, 송경은 도가의 철학적 인식론과 묵가의 비공(非攻)철학적 실천론을 결합시킨 어떠한 특유한 사상가 그룹의 리더였다.
송경은 일설에 의하면 제선왕(齊宣王) 때 직하에 내유(來遊)했던 사람이며, 맹자가 제나라에 체재하고 있을 때에 이미 직하에서 송경을 만났을 가능성이 있다.
「양혜왕」 제1장에서 상징적으로 나온 ‘하필왈리(何必曰利)’를 여기서 또다시 등장시켰다는 것은 『맹자』라는 텍스트의 사상적 주제의 일관성을 강조하기 위한 편집상의 묘미로서 간주될 수도 있겠지만, 그 말이 등장하고 있는 맥락은 「양혜왕」과 「고자」편, 양자간에 큰 차이가 있다. 우선 송경이라는 인물의 특수성이 개재되고 있다.
앞서도 말했지만 『맹자』를 읽는 사람들이 맹자라는 캐릭터 이외의 모든 인물을 모두 맹자를 빛내기 위한 부속적인 캐릭터로 간주하고 그들 자체에 대한 탐구를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응당 대접해야 할 시각을 거부함으로써 『맹자』 자체의 이해의 폭을 좁히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오류의 대표적인 주석이 주희의 집주이며, 맹자집주는 사서 중에서도 가장 졸렬한 작품으로 꼽힌다. 주희는 인간 맹자에 대한 생동(生動)하는 역사적 시각을 결하고 있다. 도학적 관심에 맹자라는 생명체의 발랄한 활동과 다양한 앙가쥬망을 종속시키고 있는 것이다.
송경은 불행하게도 그의 온전한 저작이 남아있질 않기 때문에【청나라 때 마국한(馬國翰, 1794~1857)이 집한 총서, 옥함산방집일서(玉函山房輯佚書) 속에 『송자(宋子)』 7일권이 수록되어 있다】 우리가 그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접하기는 어려우나, 그는 전국시대의 실존성이 확실한 역사적 인물이며, 당대의 유명도로 말하자면 맹자보다도 더 현학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던 큰 사상가였다. 이 두 사람이 만났다는 사건은 결코 『맹자』라는 텍스트 속에서 별 의미없는 마이너한 에피소드로서 지나칠 성격의 사태는 아니다. 맹자도 응당의 경의를 충분히 표시하고 있다.
전쟁을 말리고자 할 때 그 말림의 근원적 시각이 ‘이(利)’의 시각이 되어서는 아니 되며, 그 휴전의 바탕에는 인의(仁義)라는 도덕이 깔려있어야 한다는 맹자의 주장은 얼핏 매우 도식적인 반론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은 결코 도식적인 인의의 주장에서 그치는 문제는 아니다.
6ㆍ25전쟁은 남ㆍ북한 지도자들의 권력의 탐욕과 그를 조정하는 강대국들의 이권의 충돌이 빚은 세기적인 사건이다. 전쟁의 발발 그 자체도 남ㆍ북한의 통합된 정체구축을 갈망하던 민중의 염원을 묵살하는 지도자들의 ‘이(利)’가 앞섰기 때문이다. 모든 전쟁에는 내우외환이 재 한다. 전쟁도 ‘이(利)’에 의해서 일어났고 휴전도 국민들의 염원과는 무관하게 강대국 사이의 이권의 조정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그래서 종전(終戰)의 평화협정이 이루어지지 않고 강대국들의 이권이 상주하는 정전협정에 그친 것이다. 따라서 이권에 의한 설득의 결과는 끊임없이 그 이권을 가지고 노는 이권집단들에 의하여 악용된다는 것이 맹자의 주장이다. 남ㆍ북한의 지도체제가 아직도 자신들의 이권의 영속을 위하여 휴전상태를 사랑하고 종전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우리의 현실에 비추어보아도 맹자의 주장은 매우 리얼한, 국제 권력역학에도 적용되는 현재적 의의(contemporary significance)를 지니는 사태라고 말할 수 있다.
맹자와 송경의 만남을 통해 우리는 최소한 두 가지 측면을 확실하게 인식해야 한다. 첫째, 맹자는 당대의 중요한 사상가들과 현실적 문제에 관하여 매우 깊이있는 토론과 논쟁을 거침으로써 자신의 사상을 심화시켰다는 것이다. 둘째로는, 맹자가 자신의 왕도론이나 인정의 구상을 자기가 만나는 왕을 통해서 구현하려고 노력했을 뿐 아니라, 전국시대의 왕을 만나는 타 사상가들에게 전함으로써 간접적으로 그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이다. 맹자는 자기의 이상을 당대에 구현하기 위하여 백방으로 노력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송경은 당대에 맹자보다는 더 많은 군주들에게 친근하고 사랑을 받는 존재였다.
송경의 사상이 여기서 기술되고 있는 것처럼 단순한 ‘이(利)’의 사상은 아니라고 본다. 그에게는 보편주의적 겸애(兼愛)의 사상이 있으며, 노자적 과욕(寡欲)의 사상이 있으며, 일체평등의 무차별적 박애사상이 있었다. 『묵자(墨子)』의 「비공(非攻)」편을 보면 도스토예프스키가 쓴 소설,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꼴리니코프가 말하는 것과 똑같은 얘기가 나온다. 한 사람만 죽여도 큰 죄를 저지르는 것인데 수만 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전쟁에 승리하면 영웅대접을 받는다. 인간의 세상은 전쟁을 일삼아온 지가 너무도 오래되어 근원적으로 정의와 불의가 혼동되어 있다는 것이다. 의사가 1만 명도 넘는 사람에게 병을 치료한다고 약을 먹였는데 그 가운데 겨우 네 사람만 효과를 보았다면 그것은 도무지 양의(良醫)라 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전쟁은 모든 것을 파멸시킬 뿐이다. 몇 가지 얻는 것을 가지고 승리와 정의를 운운한다면 그것은 사기다. 전쟁은 근원적으로 백해무익하며, 인간과 귀신과 하느님에게 똑같이 불리한 것이라고 절규한다. 정의와 불의의 기준을 다시 세우는 길은 오로지 비공(非攻) 밖에는 없다고 말한다. 어떠한 경우에도 무고한 사람들을 죽여서 정의를 이룩할 수는 없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 주(誅)는 가(可)할 수 있어도, ‘공(攻)’은 불가(不可)하다. 작은 일은 분별할 줄 아는 인간들이 큰 일은 분별할 줄을 모른다. 하여튼 이러한 국가의 사상이 송경에게도 깔려있다고 하면, 송경은 맹자가 말하는 문제의 핵심을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상가였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비공」편의 내용이 비록 공리주의적 내음새를 피우고 있다 할지라도 궁극적으로 맹자의 인의사상을 포섭하는 것이다.
그리고 군대의 문제와 같은 유비(類比)관계로서 인륜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도 매우 설득력이 있다. 자식이 이익만을 탐하여 아비를 섬기고, 동생이 이익만을 탐하여 형님을 섬기게 되면, 그러한 모랄이 팽배하는 국가는 멸망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맹자의 논리는 사회과학과 윤리학을 혼동하는 논리가 아니라는 것을 오늘 우리사회의 큰 이슈가 되고 있는 재벌가의 재산분규를 둘러싼 설전만 관망하여도 쉽사리 간파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대기업은 사기업이긴 하지만 사기업의 수준을 넘어서는 퍼블릭 모랄의 장이다. 대기업의 운명이 국가의 운명이라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기업을 리드하고, 좌지우지할 수 있는 사람들의 입에서, “한 푼도 못 주겠다. 헌재(憲裁)까지라도 가겠다”든가, “아무개는 너무 탐욕스러워 형제간의 불화만을 가중시킨다. 이게 어디 헌재까지 갈 일이냐?” 운운하는 말들이 인의(仁義)의 가족공동체 내의 사적 교감이 없이 공적 언론의 장에서 토로되는 것은 퍼블릭 모랄의 에이비씨를 망각한 사태라 아니할 수 없다. 아무리 대기업의 총수의 위세가 막강하다 하더라도 그를 보필하는 사람들은 총수의 언행이 공적 장에서 정당한 도의를 갖추도록 약지이례(約之以禮)했어야 했다. 우리나라 대기업의 위기관리능력이 너무 부족하다는 것의 한 예증이다. 부자(父子), 형제(兄弟)가 인의(仁義)를 거(去)하고 이(利)를 회(懷)하여 상접(相接)하기만 한다면 망(亡)하지 아니 할 자 누가 있을소냐! 이 맹자의 외침을 오늘 우리 사회의 지도자 모두가 가슴에 품어야 한다. 최고권력자가 수없이 내뱉어내는 야비하고도 명백한 거짓말에서 비롯된 모랄 해저드 의 사회현상으로 선ㆍ불선의 가치기준이 근원적으로 흐려져 있는 오늘 한국사회를 개탄하고 우려한다. 누구인들 호곡(號哭)치 아니 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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