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용의 일생과 시를 짓던 모습
약재유고서(若齋遺稿序)
정도전(鄭道傳)
손님이 알려준 김구용의 일생
道傳一日得亡友若齋遺稿若干卷, 泣且讀, 因濡翰書其端曰: “此東國詩人金敬之所作也.”
書未訖, 客詰之曰: “金先生學術行義, 豈但詩人而止歟? 先生生世族, 幼而聰敏, 旣就學, 與圃隱鄭公,陶隱李公及故正言李順卿, 義愛尤篤, 朝夕講論切磋不少怠, 吾東方義理之學, 蓋由數公倡之也.
國家崇重正學, 更張舊制, 增廣生員. 宰相韓山李公主盟師席, 拔薦名儒爲學官, 而先生以佗官兼直講. 諸生執經受業, 列于席前, 雖告休沐, 從而質問者相繼于家, 多所進益, 先生學術之正爲如何?
當甲寅乙卯之歲, 國家多故, 時相用事, 先生上書, 力言得失, 不報竄竹州. 例徙居母鄕驪興郡, 自號驪江漁父, 扁其所居堂曰六友(按六友, 謂江山風花雪月), 以樂江山四時之景凡七年
손님은 김구용의 공무수행 중 죽은 것을 대단하다 말하다
國家尙其風義, 召拜諫官, 尋長于成均, 言責官守, 兩無所愧.
又以先生有專對才, 行禮遼東都司, 適有朝命不許私交, 置先生雲南. 行至四川之瀘州, 得病卒于旅次(按辛禑甲子, 義州千戶曹桂龍至遼東, 都指揮梅義等紿曰: ‘我於爾國事, 每盡心行之, 爾國何不致謝耶?’ 禑以九容爲行禮使. 奉書幣往遼東, 義與摠兵潘敬等曰: ‘人臣無私交, 何得乃爾?’ 遂執歸京師. 帝命流大理衛, 行至瀘州永寧縣病卒), 先生自始行至病卒, 間關萬里, 備嘗艱難, 略無顧慮自惜之意.
臨絶曰: ‘吾在家死兒女手, 誰肯知者? 今在萬里外. 死於王事. 至使中國人知吾姓名, 可謂得死所矣.’ 無一言及家事, 先生行義之高, 又爲如何?”
시도의 흐름
道傳攬涕而言曰: “子之言誠是也. 敬之學術行義, 備諸史牒, 播於人口, 奚待予言哉?
詩道之難言久矣. 自雅頌廢, 騷人之怨誹興, 昭明之『選』行而其弊失於纖弱, 至唐聲律(聲律, 舊本作律聲)作, 詩體遂大變, 李太白ㆍ杜子美尤所謂卓然者也.
宋興, 眞儒輩出, 其經學道德, 追復三代. 至於聲詩, 唐律是襲, 則不可以近體而忽之也.
然世之言詩者, 或得其聲而遺其味, 或有其意而無其辭, 果能發於性情, 興物比類, 不戾詩人之旨者幾希. 在中國且然, 況在邊遠乎.
민사평에게 배워 시에 장점이 있던 경지
敬之外祖及菴閔公思平, 善詞學, 尤長於唐律, 與益齋ㆍ愚谷諸公相唱和. 敬之朝夕侍側, 目濡耳染, 觀感開發而自得尤多.
道傳嘗見敬之之作詩, 其思之也漠然無所營, 其得之也充然若自得. 其下筆也翩翩然如雲行鳥逝, 其爲詩也淸新流麗, 殊類其爲人, 敬之之於詩道, 可謂成矣.” 客曰: “然.” 卒書以爲序 『三峯集』 卷之三
해석
손님이 알려준 김구용의 일생
道傳一日得亡友若齋遺稿若干卷,
내가 하루는 죽은 벗 약재 김구용(金九容)의 유고 약간 권을 얻어
泣且讀, 因濡翰書其端曰:
울면서 읽고 붓을 적셔 책 머리에 썼다.
“此東國詩人金敬之所作也.”
“이 책은 동국의 시인 김경지가 지은 것이다.”
書未訖, 客詰之曰:
쓰기를 마치지 않았는데 손님이 그를 꾸짖으며 말했다.
“金先生學術行義, 豈但詩人而止歟?
“김선생의 학술과 의를 행한 것이 어찌 다만 시인에 그치겠습니까?
先生生世族, 幼而聰敏,
선생은 대대로 벼슬하는 집안【세족(世族): 여러 대에 걸쳐 나라의 중요한 자리를 맡아서 특전을 누리는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 총명하고 민첩했으며
이미 학문에 나아가선 포은 정몽주와 도은 이숭인과 고인인 정언 이순경(存吾)과 함께
義愛尤篤, 朝夕講論切磋不少怠,
의리와 아낌이 더욱 돈독하였고 아침저녁으로 강론하며 학문을 연마함에 조금도 게으르지 않았다.
吾東方義理之學, 蓋由數公倡之也.
우리나라의 의리의 학문은 대체로 몇 공으로 말미암아 그것을 제창하였다.
國家崇重正學,
국가는 정학을 높이고 중시하며
更張舊制, 增廣生員.
다시 옛 제도를 고쳐 확장했고 생원을 더하였다.
宰相韓山李公主盟師席,
재상인 한산 이공이 스승 자리의 맹주로
拔薦名儒爲學官,
이름 난 유학자를 뽑고 선발하여 학관으로 삼았고
而先生以佗官兼直講.
선생은 다른 관직에 있으며 직강까지 겸하였다.
諸生執經受業, 列于席前,
제생들이 경서를 잡고 업을 받는데 좌석 앞에 열을 지어 섰고
雖告休沐, 從而質問者相繼于家,
비록 선생이 휴가【휴목(休沐): 한(漢) 나라 때에는 5일에 하루, 당(唐) 나라 때는 10일에 하루씩 집에서 쉬며 목욕을 하게 했다. 관리를 휴가를 비유한 말이다.】를 고하여도 따라가 질문하는 사람들이 서로 집에 이어져
多所進益, 先生學術之正爲如何?
많이 진척되었으니 선생 학술의 바름이 어떠한가?
當甲寅乙卯之歲, 國家多故,
갑인(1374)년과 을묘(1375)년에 국가엔 많은 일이 있었는데
時相用事, 先生上書,
당시의 재상이 멋대로 일을 하니 선생께서 글을 올려
力言得失, 不報竄竹州.
힘써 득실을 말했지만 답을 어찌 못해 광주(廣州)의 속현인 죽주로 유배되었다.
例徙居母鄕驪興郡, 自號驪江漁父,
전례에 의하면 외가인 여흥군으로 이사해 여강어부라 자호하고
扁其所居堂曰六友(按六友, 謂江山風花雪月),
거처하는 당에 육우(육우를 살펴보니 강과 산과 바람과 꽃과 눈과 달)라 편액을 걸고
以樂江山四時之景凡七年
강산과 사시의 풍경을 즐긴 지 대체로 7년째다.
손님은 김구용의 공무수행 중 죽은 것을 대단하다 말하다
國家尙其風義,
국가가 선생의 풍모를 숭상해서
召拜諫官, 尋長于成均,
불러 간관에 제수했다가 이윽고 성균관 대사성에 제수하니
言責官守, 兩無所愧.
언책과 관리는 둘 다 부끄러울 게 없다.
又以先生有專對才, 行禮遼東都司,
또한 선생은 사신으로 전대하는 데【전대(專對): 타국에 사신 가서 군명(君名)을 완수하는 것을 말한다.】 재주가 있어 요동도사에게 예를 행하게 했는데
適有朝命不許私交, 置先生雲南.
마침 명나라 조정이 사교를 허용하지 않는다고 명함이 있어 선생을 운남에 두었다.
行至四川之瀘州, 得病卒于旅次,
가서 사천 여주에 이르러 병이 들어 여관【여차(旅次): 여행 중의 숙박을 말한다】에서 죽었다.
(按辛禑甲子, 義州千戶曹桂龍至遼東,
(살펴보니 신우가 갑자(1384)년에 의주 천호 조계룡이 요동에 이르러
都指揮梅義等紿曰:
도지휘 매의 등이 거짓으로 말했다.
‘我於爾國事, 每盡心行之,
‘내가 너희 국사에 대해 매번 마음을 다해 행하는데
爾國何不致謝耶?’
너희 나라는 어째서 극진히 감사하지 않느냐?’
禑以九容爲行禮使.
신우가 구용을 행례사로 삼았다.
奉書幣往遼東, 義與摠兵潘敬等曰:
구용이 글과 폐백을 받들고 요동에 가니 매의와 총병 반경 등이 말했다.
‘人臣無私交, 何得乃爾?’
‘남의 신하는 사교가 없는데 어찌 이러한가?’
遂執歸京師.
마침내 잡아서 경사로 돌려보냈다.
帝命流大理衛, 行至瀘州永寧縣病卒),
황제가 명하여 대리위로 유배시켰는데 가다가 노주 영녕현에 이르러 병으로 죽었다.)
先生自始行至病卒, 間關萬里,
선생이 처음 떠날 때부터 병들어 죽을 때까지 험난한 길【간관(間關): 길이 울퉁불퉁하여 걷기 곤란한 상태, 험난하다. “발을 잠깐이라도 멈칫하면 넘어지게 되니 정말 고생스러웠다[足少留輒跌, 殊間關也].” 『楓皐集』 「記奉元寺遊」】 만 리에
備嘗艱難, 略無顧慮自惜之意.
모든 어려움을 맛보았지만 대략 우려하거나 스스로 애석해하는 뜻이 없었다.
臨絶曰: ‘吾在家死兒女手, 誰肯知者?
죽음에 임박해서 말했다. ‘내가 집에서 아녀자의 손에 죽었다면 누가 기꺼이 알리오?
今在萬里外. 死於王事.
이제 만리의 밖에 있어 왕사를 행하다가 죽어
至使中國人知吾姓名,
중국 사람들에게 나의 성명을 알게 하는 데에 이르렀으니
可謂得死所矣.’
죽을 곳을 얻었다 할 만하다.’
無一言及家事,
한 마디 말도 집안 일을 언급하지 않았으니
先生行義之高, 又爲如何?”
선생의 의를 행하는 고상함이 또한 어떠한가?”
시도의 흐름
道傳攬涕而言曰: “子之言誠是也.
도전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그대의 말이 진실로 옳다.
敬之學術行義, 備諸史牒,
경지의 학술과 의를 행한 것은 역사책에 구비되어
播於人口, 奚待予言哉?
사람의 입으로 전파되니 어찌 나의 말을 기다리겠으리오.
詩道之難言久矣.
시도를 말하기 어려운 지 오래되었다.
自雅頌廢, 騷人之怨誹興,
아ㆍ송이 없어진 때로부터 시인의 원망과 비난이 일어났고
昭明之『選』行而其弊失於纖弱,
소명태자의 『문선』이 유행함에 그 폐단은 자질구레하고 위약한 데에서 잃었지만
至唐聲律(聲律, 舊本作律聲)作, 詩體遂大變,
당나라에 이르러 성률(옛 판본엔 律聲으로 쓰여 있다)이 지어지자 시체가 마침내 크게 변했으니
이태백과 두자미가 더욱 탁월했다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宋興, 眞儒輩出,
송나라가 흥함에 참된 선비들이 배출되어
其經學道德, 追復三代.
경학과 도덕이 다시 삼대(夏殷周)를 쫓을 만했다.
至於聲詩, 唐律是襲,
시에 이르면 당률을 답습하였으니
則不可以近體而忽之也.
근체시이니 그것을 소홀히 할 수 없다.
然世之言詩者, 或得其聲而遺其味,
그러나 세상에 시를 말하는 사람들은 혹 소리는 얻었지만 맛은 버리고
或有其意而無其辭,
혹 그 뜻은 있지만 말은 없으니
果能發於性情, 興物比類,
과연 성정에서 발성되어 사물에 흥기하고 비교하여
不戾詩人之旨者幾希.
시인의 지취(旨趣)에 어긋나지 않는 사람이 거의 드물다.
在中國且然, 況在邊遠乎.
중국 또한 그러한데 하물며 변두리의 먼 나라라면 오죽할까.
민사평에게 배워 시에 장점이 있던 경지
敬之外祖及菴閔公思平, 善詞學,
경지의 외할아버지인 급암 민사평은 사학을 잘하는데
더욱 당시에 장점이 있어 익재와 우곡 정이오(鄭以吾)와 서로 수창했다.
敬之朝夕侍側, 目濡耳染,
경지가 아침저녁으로 곁에서 모시고 눈으로 무젖고 귀로 물들어
觀感開發而自得尤多.
보고 느끼며 개발하여 스스로 터득한 것이 더욱 많았으리라.
道傳嘗見敬之之作詩,
나는 일찍이 경지가 시 짓는 것을 보았는데
其思之也漠然無所營,
생각하는 게 막연하여 처리할 게 없었지만
其得之也充然若自得.
얻은 것은 충만하여 자득한 것 같았다.
其下筆也翩翩然如雲行鳥逝,
붓을 쓰면 훨훨 구름이 가고 새가 나는 것 같아
其爲詩也淸新流麗,
지은 시가 맑고도 새롭고 흐르며 고우니
殊類其爲人, 敬之之於詩道, 可謂成矣.”
거의 그의 인간됨과 유사하니, 경지는 시도에 있어 완성되었다 할 만하다.”
客曰: “然.”
손님이 “그렇다.”라고 말했다.
卒書以爲序 『三峯集』 卷之三
마침내 써서 서문으로 삼는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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