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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박순철, 한국시화에 나타난 존당파ㆍ존송파의 평론연구 - 3. 존당파 개별 시인에 대한 평론, 2) 존송파의 중국시인 평론 본문

한문놀이터/논문

박순철, 한국시화에 나타난 존당파ㆍ존송파의 평론연구 - 3. 존당파 개별 시인에 대한 평론, 2) 존송파의 중국시인 평론

건방진방랑자 2022. 10. 23. 0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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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존송파(尊宋派)의 이백(李白), 두보(杜甫), 소식(蘇軾), 황정견(黃庭堅) 평론(評論)

 

 

1. 이인로와 권응인의 존송파(尊宋派)에 대한 평론(評論)

 

조선 전기의 학자 조신(曹伸, 1450~1521?)이 쓴 소문쇄록(謏聞瑣錄)에는 (李定) “하루는 궁중의 잔치에서 술에 매우 취하여 임금 앞에 나아가 소식과 왕안석 중에 누가 더 낫습니까?’라고 하니, 왕이 대답을 하지 않고 다만 아직 잘 모르겠다.’라고 했다. 이정이 왕안석이 더 낫습니다.’라고 했다[一日侍內宴, 醉甚, 近就御前平坐, 請曰: ‘蘇與王孰優?’ 上不答, 但曰: ‘未可知.’ 永川曰: ‘荊公優矣.’].”위의 책, 1권의 謏聞瑣錄, 237는 기록이 있다. 소문쇄록(謏聞瑣錄)중종(中宗) 201521년에 만들어진 책으로 조선전기의 대표적 시화서이다. 1장에서 이미 조선전기에는 송시가 유행하였다고 언급하였는데, 이 문장을 통하여 조선초기(朝鮮初期)에 송시(宋詩)가 자못 유행을 하였고 그 중에서도 소식(蘇軾)왕안석(王安石)에 대한 선호가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조선 전기는 소식(蘇軾)을 전범(典範)으로 삼았다가 황정견(黃庭堅)진사도(陳師道)로 옮기고, 다시 선조(宣祖) 연간(年間)에 당시풍(唐詩風)으로 전환하였다고 보기 때문에 한국에서 존송파는 고려 말과 조선전기에 유행하였다.

 

 

소식과 황정견을 높이 평가한 이인로

 

존송의 시대적 상황과 소식ㆍ황정견의 시에 대하여서는 이인로(李仁老), 권응인(權應仁), 김창협(金昌協), 이의현(李宜顯)이 잘 논하였는데 아래에 고려후기의 학자 이인로(李仁老, 1152~1220)파한집(破閑集)권상 21권하 3의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문장을 다듬는 방법은 소릉(少陵)만이 유독 그 묘함을 다 발휘했다. ‘내 신세는 해와 달 아래서 조롱속의 새와 같기도 하고, 하늘과 땅 사이에서 물 위에 뜬 부평초와 같기도 하네.’십년 여름동안 민산에서 갈포옷을 입고 살았고, 삼년 가을 동안 초지방의 다듬이소리를 들었네.’와 같은 것이다. ……

소동파와 황산곡에 이르러 용사(用事)에 더욱 정교하였으며, 뛰어난 기개가 흘러넘치니 절묘함이 가히 소릉과 견줄 수 있다고 하겠다.

琢句之法, 唯少陵獨盡其妙. 日月籠中鳥, 乾坤水上萍’, ‘十年岷山葛, 三霜楚戶砧之類是已.……

及至蘇, 則使事益精, 逸氣橫出, 琢句之妙, 可以與少陵幷駕.

 

시인들은 시를 지을 때 전고를 많이 사용하는데 이것을 점귀부(點鬼簿)라고 한다.…… 요즈음 소동파와 황산곡이 우뚝 일어나서 그들의 풍조를 따르기는 하지만 언어가 더욱 정교하여 조금도 어색한 흔적이 없으니 푸른 물감이 쪽보다 더 푸르다고 할 수 있다.

詩家作詩多使事, 謂之點鬼簿; …… 近者蘇黃起, 雖追尙其法, 而造語益工, 了無斧鑿之痕, 可謂靑出於藍矣. ……

 

 

이인로는 존송파의 입장에서 한국시인과 중국시인의 작품을 많이 비교하고 소식과 황정견의 평론에 치중했는데, 첫 번째 인용문에서 두보는 조탁미가 매우 뛰어나지만 소식과 황정견은 용사와 전고를 활용하여 시를 잘 써서 감히 두보와 견줄 수 있다고 극찬하였다. 두 번째 인용문에서는 소식과 황정견의 시법을 배운 고려의 시인이 시에서 인공적인 조탁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을 만큼 우수하다고 평가하였다. 이상에서 두 가지 점을 엿볼 수 있는데 하나는 이인로가 두보를 조탁미의 전범으로 삼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소식과 황정견을 높이 평가하였다는 것이다.

 

 

동파의 시를 만당시보다 낫다고 본 권응인

 

다음으로 조선중기의 학자 권응인(權應仁, ?~?)송계만록(松溪漫錄)권하 10에서 송시와 소식에 대하여 상세하게 논하였는데 다음과 같다.

 

 

지금의 시학(詩學)은 오로지 만당(晩唐)을 숭상하고 소동파(蘇東坡) ()를 버려두고 있다. 정사룡(湖陰)이 듣고 웃으며 소동파의 시를 낮게 보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지을 수 없기 때문이다.”라 하였고, 퇴계선생 역시 소동파의 시가 과연 만당에 미치지 못하는가?”라 하였다.

나 역시 생각하기를 소동파의 시에 이른바 어찌 청주의 육종사가 오유선생이 될 줄 알았으리오? 옥루가 얼어붙어 소름이 돋을 만큼 춥고, 은해가 빛에 일렁이니 눈이 부실만큼 빛나네. 바람에 날린 눈은 장춘원에 잘못 들어오고 구름 낀 달은 불야성에 오래도록 임하네.”라는 시구가 있는데, 만당시 가운데 이처럼 기절(奇絶)한 것과 대적할만한 것이 있는지 모르겠다. 고려 시대에 과거의 방이 붙을 때마다 “33인의 소동파가 나왔다.”라고 하였다. 고려의 문장은 우리 조선보다 우수한데 그때 온 세상이 소동파를 본보기로 삼았으니, 소동파의 시를 수준 낮은 것이라 할 수 없다.

今世詩學, 專尙晩唐, 閣束蘇詩. 湖陰聞之笑曰: ‘非卑之也, 不能也.’ 退溪亦曰: ‘蘇詩果不逮晩唐耶?’

愚亦以爲如坡詩所謂豈意靑州六從事, 化爲烏有一先生’, ‘凍合玉樓寒起粟, 光搖銀海眩生花.’, ‘風花誤入長春苑, 雲月長臨不夜城’, 不知晩唐詩中有敵此, 奇絶者乎? 高麗時每榜云: ‘三十三東坡出矣.’ 麗代文章優於我朝, 而擧世師宗, 則坡詩不可謂之卑也.

 

만약 그 사람됨을 가볍게 보아서라면 만당의 시인으로 소동파보다 나은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유독 퇴계 대감은 소동파시를 즐겨 읽어 언제나 구름 흩어져 달 밝으니 그 누가 가리겠는가? 하늘색과 바다 빛은 본디 맑은 것이네.”라는 구를 외우며, 자신이 지은 시에도 소동파의 시를 끌어 쓴 것이 많다.

若薄其爲人, 則晩唐詩人賢於蘇者幾何人耶? 唯退溪相公好讀坡詩, 常誦雲散月明誰點綴, 天容海色本澄淸.’之句, 其所著詩, 使坡語者多矣.

 

 

권응인은 송계만록(松溪漫錄)에서 주로 소동파 시를 논하였고 그의 시 3인용시 맨 처음 2구는 章質夫送酒六壺, 書至而酒不遠, 戱作小詩問之라는 시이고, 두 번째 두 구는 雪後書北臺壁이라는 시이고, 마지막 두 구는 雪後到乾明寺라는 시이다.를 직접 인용하여 만당시에는 소동파와 대적할 만한 기절(奇絶)한 시가 없다고 하였다. 아울러 당시 고려 시대에는 소동파 시가 몹시 유행하여 과거시험에 합격한 사람을 ‘33명의 소동파가 나왔다.’라고 말할 정도였다고 지적하였다. 여기에서 하나 주목할 점은, 동파시가 만당시보다 뛰어나다는 것으로 그 비교 대상이 성당의 이백두보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시는 역시 성당의 시가 제일이라는 인식하에 송시의 우수성을 평가한 것이라고 보여진다.

 

 

김창협, 존송파(尊宋派)의 기본 위에 성당풍(盛唐風)

 

김창협(金昌協)농암잡지(農巖雜誌)외편 16에서 황정견과 진사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나라 시에서 황정견(黃庭堅)이나 진사도(陳師道)의 시는 한때 최고의 으뜸으로 여겼었다. 하지만 황정견(黃庭堅)의 시는 마음대로 비틀어대어 자연스럽지 못하고 진사도의 시는 앙상하며 매우 엄혹하니 이미 온화하고 두터운 뜻을 잃어버렸으며, 또한 초탈하고 구속을 받지 않는 운치도 갖추지 못하였으므로 진실로 당나라 시로부터도 멀고 두보로부터도 잘 배우지 못했으니, 색과 향기가 흐리지 않는다고 이몽양이 비판한 것은 참으로 정확한 주장이다.

진여의(陳與義)는 비록 기가 조금 막힌 바가 있지만 두보의 음절을 얻었고, 육유(陸游)는 비록 격조(格調)가 조금 낮지만 시인의 풍치를 다하였다. 황정견(黃庭堅)이나 진사도(陳師道)를 배우는 것보다는 차라리 진여의(陳與義)나 육유(陸游)를 취하는 것이 나은데 이들이 그나마 시도(詩道)에 가깝다.

宋詩如山谷後山, 最爲一時所宗尙, 然黃之橫拗生硬, 陳之瘦頸嚴苦, 旣乖溫厚之旨, 又乏逸宕之致; 於唐固遠, 而於杜亦不善學, 空同所譏不色香流動者, 誠確論也.

簡齋雖氣稍詘, 而得少陵之音節; 放翁雖格稍卑, 而極詩人之風致. 與其學山谷后山, 無寧取簡齋放翁, 以其去詩道猶近爾.

 

 

농암은 우선 황정견(黃庭堅)과 진사도(陳師道)를 한 때 최고의 시인으로 여겨졌음을 인정한 후, 황정견의 횡요생경(橫拗生硬)진사도의 수경엄고(瘦頸嚴苦)한 단점을 비평하고 당시와 멀어져 있기 때문에 황정견(黃庭堅)과 진사도(陳師道)의 시보다는 차라리 진여의(陳與義)와 육유(陸游)의 시를 배우라고 하였다. 그 이유는 당시(唐詩)의 여운(餘韻)이 있는 사람의 시()를 학습(學習)하라는 것으로 진여의(陳與義)와 육유(陸游)는 두보(杜甫)의 음절(音節)과 시인(詩人)의 풍치(風致)가 있어서 시도(詩道)가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하나 주목할 점은, 농암이 당시(唐詩)를 최고로 여기고 두보를 표준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농암이 당시와 송시를 겸존하였다고 하지만 이는 당시(唐詩) 전체가 아닌 성당시(盛唐詩)를 최고로 인정한 바탕 위에서 송시(宋詩)의 장점(長點)을 평가한 것으로 봐야 한다. 성당시(盛唐詩)가 아닌 초당(初唐)ㆍ중당(中唐)ㆍ만당시(晩唐詩)는 송시(宋詩)보다 못한 점도 있다는 것인데 이 점은 권응인(權應仁)송계만록(松溪漫錄)에서 만당시(晩唐詩)가 소식(蘇軾)의 시()만 못함을 말할 때 이미 지적하였다. 또한 농암은 송시의 전체적인 변화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소식이나 황정견 이전에 있었던 구양수나 왕안석 같은 사람들은 비록 당나라 시만큼 순수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율시나 절구 등의 시체는 당나라 시의 격조를 크게 변화시키지는 않았다.

하지만 구양수는 너무 유창하였고 왕안석은 너무 정밀하고 적절하였으며 또한 의론이나 옛이야기와 같은 누가 있었을 따름이다. 소식이 나오면서 비로소 한차례 변화가 있었으며, 황정견이나 진사도가 나오면서 또 한 차례 큰 변화가 있었다.

黃以前, 如歐陽荊公諸人, 雖不純乎唐, 而其律絶諸體, 猶未大變唐調.

但歐公太流暢, 荊公太精切, 又有議論故實之累耳. 自東坡出而始一變, 至山谷后山出, 則又一大變矣.

 

 

농암(農巖)은 송시(宋詩)소식(蘇軾)과 황정견(黃庭堅)ㆍ진사도(陳師道)에 이르러 한 번씩 변했다고 하였다. 이는 소식(蘇軾)에 이르러 한 번 크게 변하여 고실(故實)과 의론(議論) 즉 산문화(散文化), 의론화(議論化), 용사(用事)의 중용(重用)이라는 송시(宋詩)의 특징이 갖춰졌고, 황정견(黃庭堅)과 진사도(陳師道)에 이르러 다시 한 번 변하여 점철성금(點鐵成金)탈태환골(奪胎換骨)을 기치로 하는 강서시파(江西詩派)가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일찍이 엄우(嚴羽)창랑시화(滄浪詩話)에서 소동파(蘇東坡)와 황산곡(黃山谷)에 이르러 비로소 자신의 의견을 가지고 시를 써서 당의 시풍이 변하였다[東坡山谷, 始自出己意以爲詩, 唐人之風變矣].”라고 하고, 이어서 시풍(詩風)에 대해서는 소식(蘇軾)과 황정견(黃庭堅)문자(文字)로 시를 쓰고, 재학(才學)으로 시를 쓰고, 의론(議論)으로 학문을 삼았다[以文字爲詩, 以才學爲詩, 以議論爲學.].”라고 하였는데, 농암(農巖)이 송시(宋詩)에서 변화가 일어났다고 한 것은 바로 엄우(嚴羽)가 말한 시의 산문화, 의론화, 용사의 추구 등을 지적한 것으로 엄우(嚴羽)와 견해가 비슷함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하여 창랑시화(滄浪詩話)의 영향을 짐작할 수 있고 송시(宋詩)는 소식(蘇軾)과 황정견(黃庭堅)에서 완성되었으며 이들을 송시(宋詩)의 대표자로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최자, 보한집에서 존송(尊宋)의 가치를 드러내다

 

위에서 살펴본 내용 이외에도 존송파로서 송시의 뛰어남을 평론한 문인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고려후기의 학자 최자(崔滋, 1188~1260)는 존송파로서 보한집(補閒集)권중 20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소식 시의 짙푸른 못은 마치 내 용기를 시험해 보는 것 같고, 흰 탑은 마치 나를 부르는 것 같네.”라는 시구를 들어 이 시구가 참신한 뜻[新意]이 있다이는 소동파 시구의 신의(新意)에 대하여 최자가 유숭단의 말을 인용하여 비평한 것이다..

予嘗謁文安公, 有一僧持東坡集,質疑於公, 讀至碧潭如見試, 白塔若相招一聯, 公吟味再三, :“古今詩集中, 罕見有如此新意.

 

뜻이 가는대로 즉석에서 지은 시로는 이백의 버들눈은 황금색으로 부드럽고, 이화는 백설처럼 희어 향기가 나네[柳色黃金嫩, 梨花白雪香.].”라는 시구 같은 것이니, 이는 곱고 아름답고 정교하여 거의 머물러 생각했거나 애써 괴로이 구한 것이 아닐 것이다.

詩率意立成者, 如李太白柳色黃金嫩, 梨花白雪香婉麗精巧, 略無留思苦求者.

 

보한집은 다만 본조 고려의 시만을 싣고자 하였다. 그러나 시를 말함에 있어서 두보를 언급하지 않은 것은 유학을 말하면서 공자를 이야기하지 않는 것과 같으므로 이 글의 끝에 간략하게 언급했다.

무릇 시를 다듬고 연마함에 있어서 두보와 같이 한다면, 묘하기는 묘할 것이다. 그러나 솜씨가 서투른 자가 시를 다듬고자 하여 수고를 하면 할수록 오히려 졸렬하고 난삽하게 되며 그것이 더욱 심하면 헛되이 애만 태울 따름이다. 그러니 어찌 각자 자신의 재주에 따라 천연스럽게 뱉어내어 갈고 줄질한 흔적이 없는 것과 같으리오?

補閑, 只載本朝詩, 然言詩不及杜, 如言儒不及夫子, 故編末略及之.

凡詩琢鍊如工部, 妙則妙矣, 彼手生者, 欲琢彌苦, 而拙澀愈甚, 虛雕肝賢而已; 豈若各隨才局, 吐出天然, 無礱錯之痕?”

 

 

첫 번째 인용문인 권중 20에서는 소식의 신의(新意)이백의 재빠른 작시솜씨에 대하여 말하였다. 신의(新意)는 송시의 한 특징이기도 한데 그 의미는 고인(古人)의 말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不襲古人語] 새로운 뜻을 지어내는 것[創出新意]으로 작시자(作詩者)가 자신의 개성을 살려서 새로운 의경(意境)을 표현해 내는 것이다. 이 점이 바로 소식의 특징이지 송시의 특징 중에 하나라는 것이다. 이백이 시를 생각나는 대로 즉석에서 짓는 솜씨에 대하여는 엄우(嚴羽)창랑시화(滄浪詩話)에서도 일찍이 이백(李白)은 천재(天才)로 호매(豪邁)하여 시어가 대부분 재빠르게 이루어진 것이다[太白天才豪邁, 語多卒然而成者].”라고 평하였는데, 최자 또한 염동수(閻東叟, 고려 문인, 미상)의 말을 인용하여 이 점을 지적한 것이다.

 

이어서 두 번째 인용문인 권중 34에서는 보한집의 한계는 고려조의 시만을 실은 것이라고 인정하고, 권하 12에서는 학시(學詩)의 문제를 제기하여 두보의 조탁미가 뛰어나긴 하지만 서투른 솜씨로 배우면 오히려 좋지 않으니 자신의 재주와 역량에 따라 쓴 시가 더 좋다고 하였다. 최자는 고려중ㆍ후기 사람으로 보한집은 고종 411254년에 완성되었다. 그는 이 책에서 고려시인을 평가할 때 중국시인 및 시작과 서로 비교하였다. 고려후기는 송시를 추존한 시기로 최자 또한 존송파이므로 그 입장에서 학시(學詩)의 문제(問題)를 제기하고 무조건 두보를 배우는 것은 지양하는 것이 옳다고 본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의현, 존송파(尊宋派)임에도 두보를 시의 정맥으로 보다

 

고려 말의 학자 이제현(李齊賢, 1287~1367)역옹패설(櫟翁稗說)에서 두보는 시의 표현이 절묘하고위의 책, 1권의 櫟翁稗說, 144, “杜少陵有地偏江動蜀, 天遠樹浮秦……方知此句少陵爲, 蜀傳神, 而妙處正在阿堵中也.” 동파의 시는 호탕하다위의 책, 1권의 櫟翁稗說, 158東坡云: 火色上騰雖有數, 急流勇退豈無人? 又豪宕可人.”고 하였는데 이는 소식 시에 나타나고 있는 호탕한 풍격을 평한 말이다.

 

 

두보를 정점으로 삼은 이의현

 

한편 이의현(李宜顯)도곡잡저(陶谷雜著)40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시는 성정을 말하는 것으로 시경삼백 편에 비록 정()과 변()이 있을지라도 대략 온유돈후라는 네 글자를 벗어나지 않았으니, 이것이 천고(千古)에 시를 논하는 표준인 것이다.……

당대(唐代)에 이르러서 더욱 정련되어 모든 시체가 두루 갖추어졌고 두릉(杜陵)이 집대성하였다. 이것이 또한 시가의 정맥이다. 시를 지음에 있어서 이런 규칙을 벗어나면 시라고 할 수 없다. 송나라 사람은 비록 스스로 기축(機軸)을 냈을지라도 또한 각자가 그 성정을 잃지 않아서 오히려 진실한 뜻이 넘치는 것이 있다.……비유하자면 시경(詩經) 삼백 편과 초사(楚辭), 한대(漢代)와 위대(魏代)의 시()로부터 성당(盛唐)의 이백과 두보 등 여러 사람에 이르기까지는 그 재주가 비록 차등이 있을지라도 모두 옥인데 옥에 또한 품질의 고하(高下)가 있는 까닭이다. ()은 옥돌과 같고 명()은 수정과 유리 등속이다.

詩以道性情. 詩經三百篇, 雖有正有變, 大要不出溫柔敦厚四字, 此是千古論詩之標的也. ……

至唐益精鍊, 衆體克備, 而杜陵集大成, 此又詩家正脉然也. 爲詩而偭此矩, 則不可謂之詩矣. 宋人雖自出機軸, 亦各不失其性情, 猶有眞意之洋溢者. …… 譬之則三百篇ㆍ초사(楚辭),漢魏以至盛唐李杜諸公, 其才雖有等差, 而皆是玉也. 玉亦有品之高下故也. 宋則珉也, 明則水晶琉璃之屬也.

 

 

이의현은 인용문에서 시의 정의, 시의 표준을 제시한 다음, 그 기준인 성정의 표현과 온유돈후한 풍격에 의거하여 역대 시를 평가하여 두보가 집성자이자 시의 정맥이라고 하였다. 아울러 송시도 성정을 잃지 않고 진실한 뜻이 표현되어 있어서 평가할 만하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하나 주목할 점은 이의현은 존송파임에도 불구하고 두보를 시의 정맥으로 인정한 바탕위에서 송시의 가치를 인정했다는 사실이다.

 

 

존송파는 당시를 인정한 상태에서 송시를 얘기하다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존송파는 이백에 대하여는 표현적 측면에서 시작의 자연스러움과 재빠름[詩率意立成者], 두보에 대하여는 표현적 측면에서 절묘(絶妙), 조탁미(彫琢美), 소식에 대하여는 표현적 측면에서 기절(奇絶), 용사(用事)의 묘용(妙用), 신의(新意), 풍격(風格)의 측면에서 기개(氣槪), 호탕(浩蕩), 황정견에 대하여는 표현적 측면에서 용사(用事)의 묘용(妙用), 환골탈태(換骨奪胎), 횡요생경(橫拗生硬), 풍격의 측면에서 기개(氣槪) 등에 대하여 평론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존송파의 시론과 시평을 볼 때 주목해야 할 점은 그들의 평론을 피상적으로 보면 모두 존당파와 같은 느낌이 들고 그 평론 속에 이백과 두보의 우수한 점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존송파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존송파는 존당파에 비하여 송시의 특징을 더욱 높게 평가하고 인정하였다. 따라서 존송파는 송시(宋詩)를 추존하고 소식과 황정견의 시를 높이 평가하여 이인로는 소식과 황정견을 두보와 비견할 수 있다고까지 하였지만, 당시(唐詩)에 비해 모든 면에서 뛰어나다는 관점은 아니다. 다시 말하면 소식과 황정견의 시가 모든 면에서 당시(唐詩)보다 뛰어난 것이 아니고 당시보다 뛰어난 점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바로 소식과 황정견이 두보, 이백보다 모든 면에서 뛰어나다는 것이 아니라 이백과 두보보다 뛰어난 점이 있다는 것이다. 존송파 역시 존당파가 파악했던 당시(唐詩)의 우수성을 인정하여 최고의 시인으로 이백과 두보, 특히 두보를 상정하고 평론을 전개하였다. 이는 황산곡이 두보를 대단히 추존한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송시(宋詩)가 당시(唐詩)보다 뛰어난 점은 학문을 바탕으로 한 의론과 용사와 전고의 정확한 활용이고 다음으로는 환골탈태법을 통한 조어(造語)와 련자(鍊字)이다. 이에 대하여 존송파는 존당파보다 더욱 높게 평가하였고 한국에서 고려말과 조선초기에 송시, 즉 소식과 황정견의 시가 추존한 주된 원인이었다고 사료된다.

 

 

 

 

인용

목차 / 지도

1. 시화라는 명칭의 등장과 흐름

2. 한국시화(韓國詩話)의 당송시(唐宋詩)에 대한 총론(總論)

3. 존당파(尊唐派)ㆍ존송파(尊宋派)의 개별(個別) 시인(詩人)에 대한 평론(評論)

1) 존당파의 이백, 두보, 소식, 황정견 평론(評論)

2) 존송파의 이백, 두보, 소식, 황정견 평론(評論)

4.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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