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재창조의 시학
① 김부식(金富軾)의 「감로사차혜소운(甘露寺次惠素韻)」을 통해 김부식의 말년의 꿈을 들여다 보다
俗客不到處 登臨意思淸 | 속세의 손님 이르지 못하는 곳에, 오르니 마음이 맑구나. |
山形秋更好 江色夜猶明 | 산 모습은 가을에 더욱 좋고, 강빛은 밤에 오히려 분명하네. |
白鳥高飛盡 孤帆獨去輕 | 흰 새는 높이 날아 사라지고, 외로운 배 홀로 감이 가볍다. |
自慙蝸角上 半世覓功名 | 스스로 부끄러워하노라, 달팽이 뿔 위에서 반백 년 동안 공명 찾았으니, |
1. 배경지식
1) 서긍(徐兢)의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엔 김부식을 ‘살이 찌고 체구가 크며, 검은 얼굴에 눈이 튀어나옴’이라 표현함.
2) 노년에 접어든 김부식이 공문(空門)의 벗 혜소(惠素)와 자주 만나 시를 수창(酬唱)함
3) 감로사는 예성강에서 가장 이름난 절로, 이자연이 중국 윤주 감로사를 보고 돌아와 6년 후에 지은 절임.
4) 이 한 편의 노래는 김부식을 ‘피비린내 나는 정쟁 속에서 아귀다툼 하던 사람’이 아닌 ‘선경에서 노니는 신선이나 은자’가 되게 함.
5) 이제현(李齊賢)은 『동국사영(東國四詠)』을 지으면서 「시중 김부식이 나귀 타고서 강서의 혜소 스님을 방문하다[金侍中富軾騎騾 訪江西惠素上人]」를 맨 앞에 두고 그를 칭송할 정도로, 김부식이 감로사를 찾아간 일이 ‘동방의 가장 아름다운 풍류’로 기려지게 됨.
2. 1연의 특징
1) 1구는 보통 측성 2번, 평성 3번을 두나 이 시에선 촉성을 다섯 번 두어 기세가 매우 셈.
2) 1연은 10글자를 합해야 문장이 되는 연면구(聯綿句)로 감로사에 가기 위해 오봉산에 오르는 시인의 마음을 표현함(1구 전체가 2구의 부사구).
3. 2ㆍ3연의 특징
1) 2연에선 허자의 단련이 놀라움. 갱(更)을 통해선 울긋불긋한 모습을, 유(猶)를 통해선 달빛을 느낄 수 있음.
→ 언외(言外)의 뜻이 있어야 여운이 생기고, 여운이 있어야 좋은 시가 된다. (66쪽)
2) ‘송풍(宋風)은 구체적 모습을 형상 ↔ 당풍(唐風)은 대충 그린 듯하나 여러 번 읽으면 흥감이 듦’ 이 시도 상상하며 흥감이 들도록 배려함.
2 | 추상적인 거시적 경관 | 3구- 산의 모습 | 4구- 강의 모습 |
3 | 구체적인 장면 | 5구- 천천히 사라지는 유장하는 느낌, 정적 심상 | 6구- 경쾌하며 속도감 있음, 동적 심상 |
3) 3연에선 감로사에서 본 풍경을 그린 것이지만 ‘진비(盡飛)’나 ‘거경(去輕)’의 대상은 속세의 속박에서 벗어나고 싶은 시인의 의지로 읽을 수 있음.
4. 4연 감상
1) 발전된 주제를 자연스럽게 드러낼 수 있도록 함.
2) ‘청(淸)→참(慙)’으로 발전되며, ‘속객(俗客)=와각(蝸角), 공명(功名)’과 밀접한 호응을 이룸.
3) 이곳에선 『장자(莊子)』의 구절을 용사(用事)하여 자신의 일평생 공명을 다투던 일이 엄청난 게 아니었음을 통찰함.
5. 용사(用事)의 예
관료 생활 후 귀향할 때 | 도연명 인용 |
매화를 노래할 때 | 임포(林逋)【황혼(黃昏)은 곧 북송 시대 처사(處士)로 일찍이 서호(西湖)의 고산(孤山)에 은거하면서 매화와 학을 유독 사랑하여 당시 사람들로부터 매처학자(梅妻鶴子)라고까지 불렸던 임포(林逋)의 「산원소매(山園小梅)」 시에 “성긴 그림자는 맑고 얕은 물 위에 비껴 있고, 은은한 향기는 황혼 달빛 아래 부동하누나[疎影橫斜水淸淺, 暗香浮動月黃昏].”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인용 |
술에 취할 때 | 유령(劉伶) 인용 |
인생이 무상할 때 | 남가일몽(南柯一夢) 인용 |
② 옛 것을 가져와 잘 녹여내어 절창이 되다
俗客不到處 登臨意思淸 | 속세의 손님 이르지 못하는 곳에, 오르니 마음이 맑구나. |
山形秋更好 江色夜猶明 | 산 모습은 가을에 더욱 좋고, 강빛은 밤에 오히려 분명하네. |
白鳥高飛盡 孤帆獨去輕 | 흰 새는 높이 날아 사라지고, 외로운 배 홀로 감이 가볍다. |
自慙蝸角上 半世覓功名 | 스스로 부끄러워하노라, 달팽이 뿔 위에서 반백 년 동안 공명 찾았으니, |
1. 2연은 백거이(白居易)가 지은 「백화정(百花亭)」의 ‘山形如峴首 江色似桐廬’를 점화하여 완전히 다른 맛을 살림.
2. 3연은 이백(李白)의 「독좌경정산(獨坐敬亭山)」의 ‘衆鳥高飛盡 孤雲獨去閑’을 차용하여 발전시킴
이백 | 김부식 |
새 떼 사라지는 평면적 풍광 | 새 한 마리 높이 날아 사라지는 모습 |
색채 대비가 뚜렷함 | |
외로운 구름 한가히 떠가는 풍광 | 외로운 배 쏜살같이 떠가는 모습 |
정적 심상 | 역동적 심상 |
3. 용사하되 새로운 뜻을 만들다
1) 점화(點化)는 고철로 금을 만든다는 ‘점철성금(點鐵成金)’과 같은 말로 송나라 때 앞선 사람의 시구를 재조직하여 자신의 시구를 만드는 문학 이론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됨.
2) 도가에선 환골탈태(換骨奪胎)라는 말을 쓰는데 시학에서 이를 빌려와 점화와 같은 뜻으로 사용하기도 함.
3) 김부식은 위 시에서 이백의 시를 이용하여 재창조의 시학을 보여줌.
4. 위의 시를 점화의 재료로 사용한 예
1) 정사룡(鄭士龍)도 「기회(紀懷)」의 경련에서 ‘雨氣壓霞山忽暝 川華受月夜猶明’라고 써서 윗 시 제4구에 달빛 두 글자만 더하여 창조의 시학을 보여줌.
2) 아들 김돈중(金敦中)이 지은 「숙낙안군선원(宿樂安郡禪院)」의 수련(首聯)에 ‘偶到山邊寺 香煙一室開’라고 썼으니, 위의 시를 가져왔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전체적인 의미가 비슷하며 상쾌함 하나로만 본다면 김부식의 시를 넘어선다고 할 수 있다.
③ 점철성금을 비판한 이규보조차 점철성금을 활용하다
1. 점화(點化)를 불편하게 보는 사람
1) 들키지 않는 점화를 썼다 해도 ‘도둑질’을 한 것에 다름 아니라고 일반적으로 생각함.
2) 이규보(李奎報)의 경우 가장 개성적인 시를 쓰며 스스로 도둑질을 하지 않겠다고 공언하며 위의 생각에 동조함.
2. 점화에 대한 이규보의 다짐
1) 『냉재시화(冷齋詩話)』에선 “시의(詩意)는 무궁한데 사람의 재주는 유한하므로, 유한한 재주로 무궁한 뜻을 추구하려니 비록 도연명과 두보라 하더라도 공교로울 수가 없다.”고 하며 새로운 표현을 만드는 것이 불가능함을 표현함.
2) 그러나 이규보는 늘 “진부한 말에서 벗어나 교묘한 시상이 절로 나오게 해야 한다. 옛말을 훔쳐 내는 일은 죽어도 하지 않을 것이다[擺落陳腐. 自出機杼. 如犯古語死且避之].”라고 말하며 점화를 반대하는 언명을 주로 함. 『동인시화(東人詩話)』
3. 이규보(李奎報)의 「십육일차중용자시운(十六日次中庸子詩韻)」 / 「우용암사(寓龍巖寺)」란 시와 점화
羇紲不到處 白雲僧自閑 | 구속 이르지 않는 곳, 흰 구름 속에 있는 스님 스스로 한가로와. |
煙光愁暮樹 松色護秋山 | 아지랑이 빛은 석양의 나무를 괴롭게 하고, 소나무색은 가을 산을 보호하네. |
落日寒蟬噪 長天倦鳥還 | 지는 해에 추워진 매미 시끄럽고, 긴 하늘에 지친 새 돌아간다. |
病中深畏客 白晝鎖松關 | 병중에 심히 나그네를 두려워하여 백주대낮에 소나무 사립문 감궈뒀네. |
1) 이 시는 1196년 본격적으로 벼슬생활을 하기 전에 모친을 뵙기 위해 상주에 갔고 그때 낙동강을 유람하며 지은 시임.
2) 1구는 앞에서 든 김부식 시의 영향 관계를 짐직할 수 있음.
3) 2구는 이백(李白)의 「산중문답(山中問答)」 중 ‘問余何意棲碧山 笑而不答心自閑’에서 뜻을 취해 스님의 한가한 마음을 드러냄.
4) 2연은 이규보의 개성적인 창의성이 돋보인 구절로, 단풍의 붉은 빛에 소나무의 푸른빛 더해 스님이 절조를 은근하게 말함.
5) 3연의 매미소리는 세속 나그네를 비유한 것으로 볼 수 있음. 그러나 ‘권조환(倦鳥還)’은 『귀거래사(歸去來辭)』의 ‘雲無心以出岫 鳥倦飛而知還’의 구절이 떠오름.
4. 점화에 대한 이해
1) 개성적인 뜻을 강조했던 이규보 역시 앞 사람의 표현과 뜻을 적절하게 이용하며 새로운 뜻을 창조했음을 알 수 있음.
2) 점화를 했다 하여 어느 누구도 작품의 가치를 평가절하지 않으며 원천을 두고 문제 삼지도 않음.
3) 표절의 문제 여부보단 쇳덩이를 금덩이로 바꾸었는가가 중요하기에 옛 이의 표현에 자신의 개성을 녹이는 일이 중요함.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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