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장 5. 배천(配天)과 극천(克天)의 문화
문명을 관리하는 것은 결국 인간
지성(至聖)ㆍ왕천하(王天下)·군자(君子)·성인(聖人)이라는 말이 계속 나오고 있지요? 도가(道家)를 보면, 도가도 역시 그 근본에 있어서는 사회철학이라는 관점에서 보아야 그 내용이 풀립니다. 그런데 또 다른 측면으로 보면 가치의 근원을 문명을 넘어선 자연(스스로 그러하다)에 두기 때문에, 문명이라는 인위성이나 조작성을 최소화하자는 것이지요. 그런데 중용(中庸)에는 그런 생각이 없어요. 중용(中庸)이 계속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바로 예(禮)와 악(樂), 즉 문명의 질서를 작(作)하는 문제입니다. ‘작(作)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관심사이기 때문에 중용(中庸)은 작(作)하는 사람이 지녀야 할 덕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거예요. 결국 지성(至聖)에서 배천(配天)까지 유가(儒家)가 가장 관심을 두는 것은 궁극적으로 무엇일까요? 인간과 문명의 문제입니다.
수신(修身)에서의 신(身) 자체는 자연이지만, 신(身)이 작(作)하는 것은 인위적 문명의 세계예요. 도가(道家)에서는 자연적 존재인 ‘인간의 몸’ 이상은 인정을 안 하지만, 유가(儒家)의 인간관을 보면, 인간을 이미 문명 속에 주어진 존재로 파악하고 이 부분에 대해서 심오한 통찰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문명에서 벗어날 수가 없음을 개탄한 것일 수도 있지요.
상당히 파라독시칼(paradoxical)하죠? 인간이 문명에 갇혀서 도저히 어찌할 수 없기 때문에 문명을 관리할 방법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 문명을 그대로 내버려 둘 수가 없고 그래서 궁극적으로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고 해도 문명을 인간에게 맡기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기독교는 이 모든 것을 하느님에게로 가져갔지만, 우리 동양사상에는 그러한 하느님이 없기 때문에 문명을 관리하는 책임을 최종적으로 인간에게 부과한 것입니다. 인간에게 위탁을 하니까 문제가 복잡해진 것이죠. 문명에 대한 죄업을 인간이 지어내고 또 그 죄업을 인간이 관리하게 되었으니까요.
주자가 노불(老佛)을 까고 나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노불(老佛)은 이 문제에서 도피해버렸다는 거예요. 윤회의 바퀴를 벗어난다고 하지만 그러면 도대체 문명은 누가 관리하냐는 겁니다. 그래서 결국 유가(儒家)는 문명을 관리하는 덕성을 인간에게 부여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행위는 인간으로만 끝나는 게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단순히 문명을 관리하는 차원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인간의 문명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 천지까지 다 포괄할 수 있는 배천(配天)을 이루어야 한다는 거예요. 배천(配天)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문명을 조작하기만 하는 정도의 인간에게는 관리를 맡길 수가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천지의 화육까지도 도울 수 있는[贊天地之化育], 그러한 사람이어야만 비로소 군자가 될 수 있다는 강력한 기준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겁니다. 이러한 유교적 사상은 섬세한 생태학적 관심(ecological concern)까지도 포괄하고 있지요.
그런데 근세 서구라파 휴머니즘은 배천(配天)이 아니고 극천(克天)입니다. 천하를 극(克)한다는 거예요. 때려 망그러뜨리고 그곳에서 문명의 이기를 천지에 극대화시키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서구라파 근세 휴머니즘은 결국 파산에 이른다는 것까지를 중용(中庸)은 예고한 것입니다. 그러나 서구문명은 놀라웁게도 이렇게 거대한 문명의 틀을 만드는 데 일단 성공을 했어요. 동양문명권에서는 수학적 능력이라든가 사이언스에 기초가 되는 것들이 이러한 생각[配天] 때문에 발전이 되지 못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배천(配天)하려는 동양의 건축이념
그렇지만 한 번 봅시다. 우리는 건축을 할 때도 그 구도를 기본적으로 ‘배천(配天)’으로 하고 있습니다. 서울의 사대문을 보면 각각 인의예지(仁義禮知)와 연결해서 흥인문(興仁門)·돈의문(敦義門)·숭례문(崇禮門)·창지문(彰智門)이라고 정했거든요. 인의예지를 먼저 선택하고 거기에 따라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범위 내에서만 문명을 설정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건물을 지어도 무지막지한 것은 안 짓지요. 생각 속에 항상 ‘천지와 짝해서 산다’라는 배천(配天)의 개념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옥 구조에도 마찬가지로 배천(配天)의 사고방식이 반영되고 있습니다. 창호지로는 항상 기(氣)가 통하고, 문은 들려서 대청마루를 트이게 할 수 있고, 담은 낮아서 외계가 보이도록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옛날 담이 어디 가리는 담이었나요? 대자연과 인간 세상의 완충지역으로 설정해 놓은 약속의 개념이지, 가린다거나 차단을 뜻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여러분은 담을 자꾸만 벽(wall)으로 생각하는데, 그게 아닙니다. 담 안쪽에서 집의 구조를 살펴보면 건물과 마당이 각각 실(實)과 허(虛)가 되고, 담을 기준으로 보면 내부와 외부가 각각 실(實)과 허(虛)인 거예요. 이런 모든 인간의 문명 설정이 예전의 유교문명권에서는 배천(配天)이라는 개념과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던 것입니다.
결국 유교에서는 건축의 구조에서나 인간의 덕성에서도 철저하게 문명에 대한 인식을 지키기는 한편, 동시에 문명의 자연주의적 구조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도가(道家)나 불가(佛家)의 극단주의를 극복하고 보다 지속적으로 중국 문명을 이끌어 갈 수 있는 파워를 발휘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유교 문명도 일시에 풍미하는 수준 정도로 끝났을지도 모릅니다. 유교문명처럼 어느 한 문명을 이렇게 지속적으로 지배한 문명이 별로 많지 않습니다(서구라파 기독교 문명의 지속성도 놀라운 것이죠). 유교 문명은 앞으로도 절대 간단하게 깨지지 않을 것입니다. 배천(配天)의 개념을 통해 ‘찬천지지화육(贊天地之化育)’이라는 문구를 현대의 에콜로지 문제와 더불어 구체적으로 생각하시길 다시 한 번 강조 하면서 32장으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21장 핵심 내용 |
천도 (天道) |
22장 | 24장 | 26장 | 30장 | 31장 | 32장 | 33장 전편 요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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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人道) |
23장 | 25장 | 27장 | 28장 | 29장 |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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