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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한시미학산책, 시(詩)와 역사(歷史): 시사(詩史)와 사시(史詩) - 10. 사시(史詩), 역사로 쓴 시②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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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미학산책, 시(詩)와 역사(歷史): 시사(詩史)와 사시(史詩) - 10. 사시(史詩), 역사로 쓴 시②

건방진방랑자 2021. 12. 8. 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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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사시(史詩), 역사로 쓴 시

 

 

명나라 사람 정민정(程敏政)이 엮어 펴낸 영사절구(咏史絶句)는 우리나라에서도 출판되어 사대부의 애호를 받았다. 이 가운데 한 수를 더 읽어 보자. 이상은(李商隱)가생(賈生)이란 작품이다.

 

宣室求賢訪逐臣 선실(宣室)에서 어진이 찾다, 쫓은 신하 만나 보니
賈生才調更無倫 가생(賈生)의 재주는 겨룰 짝이 없었다네.
可憐夜半虛前席 슬프다 한밤중에 자리 당겨 앉았지만
不知蒼生問鬼神 백성의 일 돌보잖코 귀신의 일 물었구나.

 

가의(賈誼)는 한문제(漢文帝) 때의 신하였다. 20대의 젊은 나이로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으나 대신의 미움을 사 장사왕(長沙王)의 태부(太傅)로 좌천되었다. 뒷날 문제(文帝)가 가의(賈誼)를 다시 불렀다. 이때 왕은 축복을 받느라고 선실(宣室)에 앉아 있었는데, 인하여 귀신(鬼神)의 일에 느낌이 있었으므로 가의(賈誼)에게 귀신(鬼神)에 대해 물었다. 가의가 귀신(鬼神)을 설명하는 동안 한밤중이 되었다. 문제(文帝)는 가의의 말에 빠져들어 자기도 모르게 앉아 있던 방석을 당겨 앞으로 바짝 다가앉았다. 시인은 문제(文帝)가 어진 이를 구하여 창생(蒼生) 구제의 일을 묻지 아니하고, 고작 일신의 복을 비는 귀신의 일을 물은 것이 안타까워 이 시를 지어 이때 일을 풍자한 것이다.

 

사시(史詩), 즉 영사시(詠史詩)는 역사적 사실을 테마로 해서 쓴 시이다. 차고조금(借古照今), 옛 것에서 빌려와 지금을 말하는 것은 한시의 오랜 관습이다. 시인들은 그저 맥없이 옛 일을 들추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과거 속에서 현재의 일을 바라보는 우회 통로를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 몇 수 가려 읽어본 시사(詩史)와 사시(史詩)들이 오늘 우리에게 시사하는 것은 무엇일까. 어떤 치열한 역사의식도, 현실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저항정신도 시인이 먼저 흥분해 버리면 구호가 되고 만다. 자신의 흥분을 가라앉힐수록 역사와 현실은 더욱 돌올하게 독자의 뇌리에 각인되는 것이다. 80년대 그 숱한 민중시의 홍수는 시인의 흥분은 시를 대자보로 격하시킬 뿐이라는 교훈을 우리에게 남겨 주었다. 시의 정서는 이념만으로는 되지 않는다.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시에 산사야음(山寺夜吟)이란 작품이 있다.

 

蕭蕭落木聲 錯認爲疎雨 우수수 나뭇잎 지는 소리를 성근 빗소리로 잘못 알고서
呼僧出門看 月掛溪南樹 중 불러 문 나가 보라 했더니 시내 남쪽 나무에 달걸렸네요.

 

가을날 산사의 지붕 위로 사태가 되어 떨어지는 낙엽소리가 마치 빗소리 같길래 중에게 비 오나 보랬더니, 어렵쇼! 요 사미승 녀석의 대답이 걸작이다. “시내 남쪽 나무에 달이 걸려 있는데요.” 비는 무슨 비냐는 말씀이다. 동문서답 하는 속에 언외(言外)로 전해지는 흥취가 진진한 작품이다.

 

80년대 후반, 필자는 이 작품의 감상을 요구하는 것으로 시험문제를 낸 일이 있었다. 한 답안지에 일렀으되, “부르조아적 근성에 철저히 물든 정철(鄭澈)의 봉건 착취 계급으로서의 면모가 여실히 드러난 작품이다. 창밖의 일이 궁금하면 자기가 나가서 문을 열어보면 될 일인데, 그 쉬운 일조차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어 프로레탈리아 계층이라 할 수 있는 사미승을 부려 먹고 있는 것이다.”라 하였다. 철저한 역사의식(?)이 담긴 이 답안을 필자는 오래도록 잊을 수가 없다. 이런 의식 아래서 시는 더 이상 설 자리를 잃고 만다.

 

역사란 무엇인가? 현재의 퇴적일 뿐이다. 지금 시대의 자취를 일러 뒷사람은 옛 것이라 한다. 그렇다면 굳이 지나간 옛날에 얽매일 필요가 없겠다. 오늘, 바로 지금 여기에 충실하면 그것이 곧 옛날인 것이다. 시사(詩史)가 시인이 당대를 충실히 기록한 것이 뒷날의 역사로 자리매김 된 것이라면, 사시(史詩)는 오늘의 시인이 과거의 역사에 비추어 현재를 읽으려는 노력의 산물이다. 아무리 이제부터가 옛날이라고 해도 인간의 삶은 본질적으로 변한 것이 없다. 어제의 태양은 오늘도 그대로 뜬다. 해서 지나간 역사는 오늘을 비추는 등불이 된다.

 

 

 

 

 

 

인용

목차

한국한시사

1. 할아버지와 손자

2. 할아버지와 손자

3. 시로 쓴 역사, 시사(詩史)

4. 시로 쓴 역사, 시사(詩史)

5. 변새(邊塞)의 풍광(風光)

6. 변새(邊塞)의 풍광(風光)

7. 궁사(宮詞), 한숨으로 짠 역사

8. 궁사(宮詞), 한숨으로 짠 역사

9. 사시(史詩), 역사로 쓴 시

10. 사시(史詩), 역사로 쓴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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