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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미학산책, 언어의 감옥, 입상진의론(立象盡意論) - 10. 어부가 도롱이를 걸친다③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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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미학산책, 언어의 감옥, 입상진의론(立象盡意論) - 10. 어부가 도롱이를 걸친다③

건방진방랑자 2021. 12. 5. 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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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어부가 도롱이를 걸친다

 

 

날 향해 핀 꽃을 얘기하다

 

春風忽已近淸明 봄바람 문득 이미 청명이 가까우니
細雨霏霏晩未晴 보슬비 보슬보슬 늦도록 개이잖네.
屋角杏花開欲遍 집 모롱이 살구꽃도 활짝 피어나려
數枝含露向人傾 몇 가지 이슬 머금고 날 향해 기울었네.

 

그리하여 봄은 다시 우리 곁으로 찾아온다. 위 시는 권근(權近)춘일성남즉사(春日城南卽事)이다. 청명이 가까워진 어느 봄날 성남의 소묘이다. 굳이 두목(杜牧)’청명시절우분분(淸明時節雨紛紛)”을 말하지 않더라도, 이 시절에는 꽃 소식을 재촉하는 봄비가 대지를 촉촉히 적신다. 이른바 행화(杏花)의 시절이 온 것이다. 가을날의 근심이 덧없이 스러진 청춘의 꿈을 애상(哀喪)하는 허탈한 독백이라면, 봄날의 근심은 근심이라기보다는 무언가 알 수 없는 설레임을 동반한다. 늦도록 개지 않고 내리는 보슬비를 맞으며 뜨락으로 그는 내려선다. 집 모롱이 살구꽃은 망울이 부퍼, 이제 막 꽃망울을 일제히 터뜨릴 기세다. 그 위에 봄비의 빗방울이 얹히니, 꽃가지는 그만 제 무게를 못 이겨 기우뚱하다. 4구의 향인경(向人傾)’, 날 향해 기울었네는 말은 사실 날 향해 인사하네의 뜻이다.

 

 

 

향기를 시에 담다

 

古寺門前又送春 옛 절 문 앞에서 또 봄을 보내니
殘花隨雨點衣頻 남은 꽃, 비를 따라 옷을 점 찍네.
歸來滿袖淸香在 돌아올 제 맑은 향내 소매에 가득하여
無數山蜂遠趁人 무수한 산벌들이 먼데까지 따라오네.

 

임억령(林億齡)시자방(示子芳)셋째 수이다. 봄이 떠나는 옛 절 문 앞. 시인은 봄비에 젖어 숲을 걷는다. 가는 봄과 지는 꽃잎, 거기에 어우러진 이끼 낀 옛 절의 모습. 비는 내리고, 걷는 옷깃 위로 자꾸 묻어나는 꽃잎. 이러한 몇 개의 겹쳐진 장면 속에 봄을 보내는 울적한 심사는 어디에도 없다. 꽃잎이 묻은 소매이니 맑은 향기가 가득하고, 벌은 꽃으로 오인하여 잉잉거리며 쫓아온다. 가는 봄에 져버린 꽃은 땅에 떨어지고 마는 것이 아니다. 내가 꽃이 되고 봄이 되어 벌을 몰고 돌아오는 것이다.

 

네 구 가운데 어디에도 시인의 정은 드러남이 없다. 단지 있는 그대로를 서술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이미 많은 이야기가 독자에게 건네지고 있고, 그 경물 속에 몰입하면서 독자들은 마치 자신이 그 숲 속을 거니는 듯한 흥취를 만끽한다. 벗과 헤어져 있음을, 봄이 떠나감을, 떠나감으로 헤어짐으로 인식치 아니하고, 꽃잎이 묻은 소매로 내가 꽃이 되고 봄이 되는 인식의 갱신에서 시인은 몰아의 희열 속으로 빠져든다.

 

 

 

 

 

 

인용

목차

한국한시사

1. 싱거운 편지

2. 왜 사냐건 웃지요

3. 왜 사냐건 웃지요

4. 언덕에 오르려면 뗏목을 버려라

5. 언덕에 오르려면 뗏목을 버려라

6. 내 혀가 있느냐?

7. 내 혀가 있느냐?

8. 어부가 도롱이를 걸친다

9. 어부가 도롱이를 걸친다

10. 어부가 도롱이를 걸친다

11. 청산 위로 학이 날아간 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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