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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미학산책, 언어의 감옥, 입상진의론(立象盡意論) - 9. 어부가 도롱이를 걸친다②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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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미학산책, 언어의 감옥, 입상진의론(立象盡意論) - 9. 어부가 도롱이를 걸친다②

건방진방랑자 2021. 12. 5.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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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어부가 도롱이를 걸친다

 

 

이색, 사립문을 닫은 까닭

 

이제 입상진의(立象盡意)의 거울에 비추어, 시 몇 수를 감상해 보자. 1팔월초십일(八月初十日)이고 2신흥(晨興)으로 다음과 같다.

 

夜冷貍奴近 天晴燕子高 차운 밤 고양이는 가까이 붙고 개인 하늘 제비는 높이 나누나.

 

殘年深閉戶 淸曉獨行庭 남은 해 깊이 문 닫아 걸고 맑은 새벽 홀로 뜰을 걸으리.

 

소문쇄록(謏聞瑣錄)에서 한적시(閑寂詩)의 대표적 예로 들고 있는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작품이다. 서늘해진 가을 밤, 고양이는 추위를 못 이겨 자꾸 사람 곁을 찾아들고, 하늘 높이 제비는 강남 가는 길을 서두른다. 시인은 고양이와 제비를 빌어 가을이 깊어 감을 말하고 있다. 유난히 추위를 타는 고양이만이 그의 곁을 지키고 있다. 외롭고 춥기야 고양이나 나나 마찬가지가 아니던가. 나뭇잎이 지듯 모든 것들은 훌훌 떠나버리고, 남은 생애도 하잘 것 없어 사립문을 닫아걸었다. 닫아 건 사립 안에서 맑은 새벽 홀로 뜨락을 거니는 시인의 심사는 안으로 잔잔한 서글픔과 허탈함을 담았으면서도, 새벽 공기처럼 맑고 깨끗하다. 그러나 세상과 어그러져 닫은 사립문은 밖에서 열기 전에는 스스로도 열 수가 없다. 사립문 속에서는 자신과의 싸움이 있고, 치열한 자기 갱신이 있다.

 

 

 

이제현, 밤새도록 내린 눈을 시로 담다

 

다음은 고려 말 이제현(李齊賢)산중설야(山中雪夜)란 작품이다.

 

紙被生寒佛燈暗 홑이불 한기 들고 불등은 희미한데
沙彌一夜不鳴鐘 사미는 밤새도록 종조차 울리잖네.
應嗔宿客開門早 나그네 일찍 문 연다 응당 투덜대겠지만
要看庵前雪壓松 암자 앞 눈이 소나무 누른 모습 보아야겠네.

 

깊은 산에 자리 잡은 암자에 손님이 찾아 들었다. 궁벽한 암자라 식구라야 스님과 심부름하는 사미승 둘이 고작인데, 예기치 않던 손님을 맞아 군불도 때지 않은 법당에다 잠자리를 마련했던 모양이다. 얇은 이불로 스물스물 스며드는 한기에 손님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시인이 잠 못 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사미승이 종을 울리지 않은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불등 희미한 법당 한 구석에서 추위에 떨고 있으려니, 날이 어서 새었으면 하는 바램이 굴뚝같았다. 그런데 사미승 녀석은 따뜻한 제 방에서 잠만 쿨쿨 자느라 종을 울리지 않으니 깜깜한 밤에 나그네는 도무지 시각을 짐작할 수 없었던 것이다.

 

춥고 괴로운 밤이 지나고 터오는 먼동이 나그네는 어느 때보다 반가웠겠다. 내다보니 밤새 흰 눈이 내려 천지는 은세계로 변해 있었다. 소담스런 눈에 덮여 눈뜨는 물상들의 조촐한 모습에 이끌린 나그네는, 간밤의 추위와 불면도 까맣게 잊고 탄성 속에 밖으로 나선다. 3구는 문을 나서면서 나그네가 혼자 하는 독백이다. 밤새 잠만 잔 사미승 녀석은 이른 새벽부터 나그네가 부산을 떨어 아침잠을 깨운다고 투덜대겠지. 네 녀석이 뭐라건 말건 이 기막히게 아름다운 설경만은 꼭 보아야겠노라는 말이다. 산중 경치에 익은 사미승이야 그깟 눈이 온댔자 눈 치울 일이 귀찮기만 할 것이다. 그러나 속세의 나그네야 어디 그런가. 나그네와 어린 사미승 사이의 보이지 않는 신경전이 절로 웃음을 자아낸다. 이 시의 흥취는 속세의 시간이 멈춰선 눈 온 아침 겨울 산사의 고즈넉한 정경과, 이를 바라보는 시인의 약간은 들뜬 시선 사이에서 내밀하게 독자에게 다가온다.

 

 

 

 

 

 

인용

목차

한국한시사

1. 싱거운 편지

2. 왜 사냐건 웃지요

3. 왜 사냐건 웃지요

4. 언덕에 오르려면 뗏목을 버려라

5. 언덕에 오르려면 뗏목을 버려라

6. 내 혀가 있느냐?

7. 내 혀가 있느냐?

8. 어부가 도롱이를 걸친다

9. 어부가 도롱이를 걸친다

10. 어부가 도롱이를 걸친다

11. 청산 위로 학이 날아간 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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