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언덕에 오르려면 뗏목을 버려라②
스승이 미처 전하지 않은 본질을 떠난 다음에 알아채다
백아(伯牙)의 절현(絶絃)은 지음(知音)이던 종자기(鍾子期)의 죽음 때문이었다. 백아가 물 흐르는 것을 생각하며 연주하면 종자기는 곁에서 “강물이 넘실대는 것 같군.” 했고, 산을 오르는 것을 생각하면 종자기는 또한 그 마음을 그대로 읽었다. 그가 죽자 백아는 거문고 줄을 끊고 평생 다시는 연주하지 않았다.
「수선조(水仙操)」란 시의 서문에는 이 백아가 처음 성련(成連)에게서 거문고를 배울 때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성련에게서 3년을 배운 백아는 연주의 대체를 터득하였으나, 정신을 텅 비게 하고 감정을 전일(專一)하게 하는 경지에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성련은 “내가 더 이상은 가르칠 수 없겠구나. 내 스승 방자춘(方子春)이 동해에 계시다.” 하고는 그를 따라 오게 하였다. 봉래산에 이르러 백아를 남겨두고 “내 장차 내 스승을 모셔 오마.”하고는 배를 타고 떠나가 열흘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백아는 너무도 슬퍼, 목을 빼어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단지 파도소리만 들려올 뿐, 숲은 어두웠고 새 소리는 구슬펐다.
그때 백아는 문득 스승의 큰 뜻을 깨달았다. 그는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며 말하였다. “선생님께서 장차 내게 정을 옮겨 주신 게로구나.”하고는 이에 거문고를 당겨 노래를 불렀다.
마지막,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깨달음은 말로는 가르쳐 줄 수가 없다. 마음으로 깨달아 가슴으로 느껴야 한다. 이른바 심수상응(心手相應)이다. 성련은 마지막 단계에서 백아가 강렬한 바램을 가지고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이게 함으로써, 말로는 도저히 전해줄 수 없었던, 마음을 전일하게 하는 최후의 심법을 전수해 주었던 것이다.
유용했던 것들을 버려야 할 때가 있다
석가가 연꽃을 따서는 제자들에게 들어 보였다. 아무도 그 뜻을 몰라 의아해 할 때 가섭만이 빙그레 웃었다. 그리하여 문자로 세울 수도 없고 가르쳐 전할 수도 없는 부처의 정법안장(正法眼藏) 미묘법문(微妙法門)은 그에게로 이어졌다. 염화시중(拈華示衆)의 미소가 바로 이것이다. 언어란 본시 부질없는 것이기에 큰 진리는 언제나 언어를 초월하여 전해지고, 깨달음은 언어의 벽을 허물어야 한다. 그래서 불가(佛家)에서는 ‘사벌등안(舍筏登岸)’의 법을 말한다. 언덕을 오르려면 뗏목을 버려라. 장자(莊子)는 ‘득어망전(得魚忘筌)’을 말한다. 고기를 얻었으면 통발을 잊어라. 또 ‘득의망언(得意忘言)’, 즉 뜻을 얻었거든 말을 잊으라고 주문한다. “지붕에 올라간 다음에는 누가 쫓아오지 못하게 사다리를 치워야 한다. 유용한 진리는, 언젠가는 버려야 할 연장과 같은 것이다.” 이것은 움베르또 에코(Umberto Eco, 1932~2016)의 말이다.
그래서 도연명(陶淵明)은 「음주(飮酒)」시에서 “이 가운데 참된 뜻이 있으나, 말하려 하니 이미 말을 잊었네[此中有眞意, 欲辨已忘言].”라 하였다.
此中有眞意 欲辨已忘言 | 이 가운데 참된 뜻이 있으나, 말하려 하니 이미 말을 잊었네. |
인용
1. 싱거운 편지
2. 왜 사냐건 웃지요①
3. 왜 사냐건 웃지요②
6. 내 혀가 있느냐?①
7. 내 혀가 있느냐?②
10. 어부가 도롱이를 걸친다③
11. 청산 위로 학이 날아간 자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