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정경교융 물아위일(情景交融, 物我爲一)③
屋角梨花樹 繁華似昔年 | 집 모롱이 하얗게 피어난 배꽃 화사함 지난해와 다름없구나. |
東風憐舊病 吹送藥窓邊 | 봄바람 묵은 병이 애처로운지 약 달이는 창가로 바람 보낸다. |
북창(北窓) 정렴(鄭𥖝)의 「이화(梨花)」란 작품이다. 봄기운을 타고 집 모롱이에 배꽃이 활짝 피었다. 적막하던 마당이 환하니 밝다. 꽃은 지난해와 다름없는데 주인의 쇠락은 회복될 기미가 없다. 긴 병 끝의 꽃잔치는 마음 한 구석에 애잔한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래도 아직은 실망하지 말라고, 추운 겨울을 견뎌 활짝 핀 꽃처럼 어서 빨리 회복하라고, 봄바람은 약탕관 위로 살랑살랑 바람을 보낸다. 어김없는 자연의 섭리 속에서 인간의 무상을 되새기는 정조가 애틋하고, 물아일체의 호흡이 있어 따뜻하다.
山窓盡日抱書眠 | 산창(山窓)서 하루 내내 책 안고 잠을 자니 |
石鼎猶留煮茗烟 | 돌솥엔 상기도 차 달인 내 남았구나. |
簾外忽聽微雨響 | 주렴 밖 보슬보슬 빗소리 들리더니 |
滿塘荷葉碧田田 | 못 가득 연잎은 둥글둥글 푸르도다. |
서헌순(徐憲淳)의 「우영(偶詠)」이다. 하루 종일 드러누워 책을 읽는다. 꼭 어디까지 읽어야겠다는 기필(期必)의 마음이 없고 보니, 읽다가 심심하면 차를 달여 마시고, 곤하면 가슴 위에 책을 얹고 단잠에 빠져든다. 찻물 달이던 돌솥에는 여태도 더운 기운이 남았는지 김이 오른다. 덜 깬 잠에 멍해 있는 내 후각을 자극한다. 이제 그만 정신을 차리라고 창밖에선 사분사분 빗소리가 들린다. 흐리멍 하던 정신이 그 소리에 맑아진다. 누운 몸을 일으켜 주렴을 걷어 본다. 그 비에 씻기운 이들이들한 연잎들이 연못에 하나 가득이다. 내 마음조차 푸르러진다.
화면 속의 자아는 시인 자신이면서 풍경 속의 일부인 듯 타자화되어 있다. 시인의 진술을 듣고 있다는 느낌보다는 한 폭의 산수화를 보는 느낌이 든다. 주관 정의(情意)가 객관 경물에 완전히 녹아들어 차 내음을 맡고 빗소리를 듣는 주체가 시인인지 나인지조차 모를 지경이다.
▲ 나빙, 「인물산수책(人物山水冊)」, 18세기, 24.3X30.7cm, 중국 북경고궁박물원.
연못가 화랑에 나와 동글동글 연잎과 군데군데 연꽃을 바라본다. 속이 다 시원해진다.
인용
1. 가장자리가 없다①
2. 가장자리가 없다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