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즉정견경 정의핍진(卽情見景, 情意逼眞)②
平生性癖似嵇康 | 평생의 성벽이 혜강 같아서 |
懶弔人喪六十霜 | 육십 평생 초상 위문 게을렀었네. |
曾未識公何事哭 | 공을 전혀 모르는데 어찌 곡하나 |
亂邦當日守綱常 | 어지럽던 그날에 강상(綱常)을 지켜설세. |
오억령(吳億齡)은 광해 계축년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비의 논의가 있었을 때 분연히 일어나 그 부당함을 논단하였던 기개 있는 인물이었다. 뒤에 물러나서도 이따금 천정을 우러르며, “어찌 어미 없는 나라에 처하여 구차히 살겠는가?”하는 탄식을 발하였다고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은 전한다.
당초 그의 무덤은 원주(原州)에 있었는데, 무덤을 쓴 후 두 아들이 어머니보다 먼저 죽자 묘자리가 좋지 않다 하여 배천(白川) 선영으로 천장하였다. 이때는 광해의 난정(亂政)이 인조반정으로 종식되었던 때라 오억령의 천장에는 그를 사모하던 선비들이 모여 들었다. 그 자리에는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가 있었는데, 때마침 살아 생전 망자와는 일면식도 없던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이 문상을 왔다. 상주가 이정구에게 가서 “선인께서는 동악공(東岳公)과는 평소 서로 알지 못하셨는데도 조문하여 주시니 감격스럽습니다. 동악공(東岳公)은 당대의 거수(鉅手)이시니 만시로 황천길을 빛내고 싶사오나 감히 청하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이에 월사(月沙)가 동악(東岳)에게 이 뜻을 전하고 운을 불렀다. 위 시는 그때 월사(月沙)가 부른 운에 따라 동악(東岳)이 지었다는 「오참판만사(吳參判挽詞)」라는 시이다. 평소에 아는 이의 문상조차 게으르던 그가 왜 평생 면식도 없던 이를 조문 왔던가. 폭군의 서슬에 누구도 입을 다물고 있을 때, 강상(綱常)으로 제 자리를 굳게 지켰던 그 정신을 사모해서라는 것이다. 옛 선비의 늠연(凜然)한 기개가 장하다. 이 시가 나오자 그때 지은 여러 만시 중에 가장 으뜸이라 하였다. 오억령(吳億齡)의 이름 석자가 이 한 수로 세상에 더욱 드러났다. 위대할 손 시의 힘이여. 홍만종(洪萬宗)의 『시평보유(詩評補遺)』에는 오억령의 초상 때 지은 시로 잘못 나와 있다.
我兄顔髮曾誰似 | 형님의 모습이 누구와 닮았던가 |
每憶先君看我兄 | 아버님 생각나면 형님을 뵈었었네. |
今日思兄何處見 | 오늘 형님 보고파도 어데가 만나볼까 |
自將巾袂映溪行 | 의관을 정제하고 시내가로 나가보네. |
박지원(朴趾源)의 「연암억선형(燕巖憶先兄)」이다. 형님은 이제 세상에 계시지 않는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뒤로는 아버님 뵙듯 형님을 따랐는데, 이제 형님마저 훌쩍 세상을 뜨니, 어데 가서 그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인가. 가만히 의관을 갖춰 입고 시내가로 나가본다. 시내에 비친 제 모습을 비춰 보려 함이다. 덤덤한 듯 별 말하지 않았으되, 그리움이 메아리 쳐 긴 울림을 남긴다.
이상 크게 다섯 가지 경우로 나누어 한시에서의 정(情)과 경(景)의 어울림을 살펴보았다. 이들 범주 사이에 우열은 없다. 시인의 그때그때 감정 상태나 놓인 환경에 따라 선택을 달리할 뿐이다. 그래서 청(淸)의 유희재(劉熙載)는 『예개(藝槪)』에서 “시는 혹 경(景)이 앞서고 정(情)이 뒤따르거나, 혹 정(情)이 먼저고 경(景)이 나중하거나, 혹 정(情)과 경(景)이 나란히 이르기도 하는데, 서로 떨어진 듯 서로 융합하니 각기 그 묘가 있다”고 하였다. 그 미묘한 저울질에 대해 김시습(金時習)은 「학시(學詩)」란 시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客言詩可學 詩法似寒泉 | 객(客)은 시를 배울 수 있다 말을 하지만 시의 법은 차가운 샘물과 같은 거라. |
觸石多嗚咽 盈潭靜不喧 | 돌에 부딪치면 목메어 울다가도 연못에 가득차면 고요해 소리 없네. |
屈莊多慷慨 魏晉漸拏煩 | 굴원과 장자는 강개함 많았는데 위진(魏晉)에 이르러선 점차 번다해졌지. |
勦斷尋常格 玄關未易言 | 심상(尋常)한 격조야 끊어 없앤다 해도 묘한 이치 말로는 전하기 어렵다오. |
시는 찬 샘물이다[詩法似寒泉]. 시를 잘 쓰려면 물의 선변(善變)을 배워야 한다. 굴원(屈原)의 시와 장자(莊子)의 산문에는 모두 강개(慷慨)의 비분이 담겨 있다. 그러나 그 강개는 어디까지나 돌에 부딪쳐 난 여울의 소리였지, 악악대며 떠들어대는 왜가리 소리가 아니었다. 그러던 것이 후대로 내려올수록 시의 법은 점차 시끄럽고 번다하게 되어 옛 사람의 정신은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고, 수다스럽게 말하고 아프다고 끙끙대는 소리가 시의 내용으로 되고 말았다. 심상(尋常)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말아라. 그러나 진정한 시법(詩法)에 진입하려면 반드시 통과해야 할 최후의 ‘현관(玄關)’이 있다. 그 현관(玄關) 앞에 서려면 많은 과정을 거쳐야 한다. 아무도 그 문을 여는 법은 일러 줄 수가 없다.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열고 들어가야 한다.
인용
1. 가장자리가 없다①
2. 가장자리가 없다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