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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현 - 부벽루기(浮碧樓記) 본문

산문놀이터/조선

성현 - 부벽루기(浮碧樓記)

건방진방랑자 2019. 8. 7.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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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벽루를 중건하며

부벽루기(浮碧樓記)

 

성현(成俔)

 

 

이름의 연유

都之有樓臺, 古也, 以都邑之盛, 而無觀覽之所, 則無以慰賓旅而宣湮鬱之懷. 西都之勝甲海東, 而樓之勝, 又甲於西都. 出城數里, 錦繡山牧丹峯之下, 因崖窾構樓以遊, 而名之曰浮碧. 謂其仰憑峯巒, 俯挹江瀨, 山光水色, 嫩碧相映, 而浮動於空明中也.

 

보이는 풍경

峯斷成崖, 翠壁崢嶸, 奇巖贔屭, 支股轇葛而南蟠, 長城雉堞, 隱現於雲林叢薄之間. 澄江一帶, 觸樓之下, 燕尾分爲二派, 其中可居洲曰綾羅島, 未數里復合爲一. 溶漾演迤如白虹, 蜿蜒抱長城而流, 南通碧海, 潮汐往來, 此樓得山谿之勝也.

近則平沙斷岸, 籬落縱橫, 楊柳連堤, 桑柘蔭徑, 與夫風帆雨楫, 沙禽水鳥下上而浮沈者, 皆出乎履舃之下. 遠則平郊緬邈, 田疇綺錯, 茂林豐草, 一望無際, 遙岑群岫, 如丫如䯻, 點點脩姱, 半露雲表者, 皆在乎衽席之內

凡地之遠近高下, 壯大宏廓, 可喜可翫, 環樓之東南者, 悉莫逃於眼界.

 

풍광이 좋아

至如林花赬駁, 樹陰綠縟, 天高月白, 霜雪縞積, 而四時之景不同; 雲煙開斂, 日月出沒, 晦明變化, 光彩絢爛, 而朝暮之景不一. 探之無窮而討之不厭, 雖有智者, 不能窮其狀也. 或飮者呼呶, 歌者激裂, 吟者愁苦, 射者揖讓, 留連彷徨, 徙倚而不能去. 雖古今豪傑, 所遇之樂不同, 而得之於目, 寓之於心者, 亦各適其適.

 

보수할 것을 청하다

余嘗三赴京師, 再爲宣慰使, 凡五過城中而登陟玆樓亦非一也. 歲乙巳, 又以千秋進賀使到此, 時監司朴公楗庶尹安君璿判官鄭君叔墩來迓舟中, 仰指樓崖, 執盞謂余言曰: “高句麗三壤皆大邑, 而惟此平壤爲最阜, 檀君之所起, 東明之所居, 九梯宮之基, 卽今之永明寺. 嵒窟深而獜馬不返, 石出江心, 而朝天馬跡如舊, 靑雲白雲東西有橋, 而仙馭之遊已遠, 其神蹤誕蹟, 恍惚難信. 箕子以九疇之學, 設八條之敎, 人知禮義, 俗尙敬讓, 流風遺韻, 猶有存者. 高麗置爲西京, 以備巡幸, 五百年文物之縟, 至于今不替. 世廟來巡, 駐蹕登御, 設科取士, 親揮膚藻, 炳炳琅琅, 耀人耳目者, 垂後世而不刋. 然則都邑之雄, 城郭之壯, 閭閻之殷, 非如羅濟之遺墟也. 每歲赴京大臣與夫中華之士, 往來而不絶, 必登此樓, 樓久不葺, 棟宇將頹, 擬欲改營而侈美之, 於君意何如?”

 

부임하여 부벽루를 보수하다

 

明年丙午, 朴公見遞, 而余來代之, 因朴公規模, 鳩財僝功, 閱數月而告成. 又作長廡數間以翼其下, 郞僚有室, 泡湢有處, 樓之制作, 極壯無比. 於是因客之至, 大張絲竹而落之, 遂書形勝事蹟而鋪敍之.

丁未仲秋, 觀察使成俔, . 虛白堂文集卷之三

 

 

 

 

해석

 

이름의 연유

 

都之有樓臺, 古也, 以都邑之盛, 而無觀覽之所, 則無以慰賓旅而宣湮鬱之懷.

도읍에 누대가 있는 건 오래되었는데 도읍이 융성하지만 관람할 곳이 없다면 나그네를 위로하거나 답답한 회포를 풀어내질 못한다.

 

西都之勝甲海東, 而樓之勝, 又甲於西都.

서도(西都)평양의 옛 이름이다. 평양을 서경(西京)이나 서도, 호경(鎬京) 등으로 부른 것은 도읍을 개경(開京)으로 정한 고려 시대의 관점이 반영된 것이다. 고려 광종(光宗) 11년인 960년에 서경을 서도로 개칭하였다.의 명승지는 해동에 최고이고, 누대의 명승지도 또 서도에서 최고다이만수(李晩秀)극원유고(屐園遺稿)』 「부벽루중수기(浮碧樓重修記)에서도 기성(箕城)을 둘러싸고 10보에 누각이 하나 5보에 정자가 하나 있는데 연광정과 부벽루가 으뜸을 차지한다[環箕都十步一樓五步一亭, 練光浮碧, 居其最].”라고 하여 부벽루가 누대의 제일이라는 인식을 하고 있다..

 

出城數里, 錦繡山牧丹峯之下, 因崖窾構樓以遊, 而名之曰浮碧.

성의 몇 리를 나가면 금수산(錦繡山) 모란봉(牧丹峯) 아래 바위에 누대를 짓고 노는 곳을 부벽루라 이름지었다.

 

謂其仰憑峯巒, 俯挹江瀨, 山光水色, 嫩碧相映, 而浮動於空明中也.

봉우리에 기댄 걸 우러러보고 강물에 떠 있음을 굽어보니 산색과 물빛이 연한 파랑빛이 서로 비춰 창공의 환한 곳에서 떠서 요동친다[浮動].

 

 

 

보이는 풍경

 

峯斷成崖, 翠壁崢嶸, 奇巖贔屭, 支股轇葛而南蟠, 長城雉堞, 隱現於雲林叢薄之間.

모란봉 끊어진 곳이 벼랑을 이루어 푸른 절벽이 우뚝 솟았고[崢嶸] 기암이 삐죽 솟았으며[贔屭] 밑부분엔 칡이 엉켜 있고 남쪽으로 서려 있으며 장성(長城)삼국사기(三國史記)10 신라본기(新羅本紀)헌덕왕(憲德王)“18년 가을 7월에 우잠태수(牛岑太守) 백영(白永)에게 명하여 한산(漢山) 북쪽 여러 주군(州郡)의 거주인 1만 명을 징발하여 패강(浿江)에 장성 300리를 쌓았다.”라는 기록이 보인다.의 성가퀴는 구름과 숲 무더기 사이로 숨겨져 있거나 나타나거나 한다.

 

澄江一帶, 觸樓之下, 燕尾分爲二派, 其中可居洲曰綾羅島, 未數里復合爲一.

맑은 강 한줄기가 누대 아래에 닿아 제비꼬리 나뉘듯 두 줄기가 되고 그 가운데 거주할 만한 모래톱이 능라도(綾羅島)라 하니, 몇 리가 안 되어 다시 합해져 한 강물이 된다1910년대의 사진과 현재 북한의 축척 5만분의 1 지도를 상고해 보면, 능라도가 부벽루보다 훨씬 상류에서 시작되고 있다. 아마도 세월이 오래 지나면서 퇴적물이 능라도의 앞쪽에 더 많이 쌓인 것으로 추정된다..

 

溶漾演迤如白虹, 蜿蜒抱長城而流, 南通碧海, 潮汐往來, 此樓得山谿之勝也.

출렁이고 드넓어 흰 무지개 같아 구불구불 장성을 안고 흐르다가 남쪽으로 푸른 바다에 통해 밀물과 썰물이 오고 가니 이것이 누대가 산과 계곡의 명승지를 얻은 것이다.

 

近則平沙斷岸, 籬落縱橫, 楊柳連堤, 桑柘蔭徑, 與夫風帆雨楫, 沙禽水鳥下上而浮沈者, 皆出乎履舃之下.

가까이 평평한 모래와 깎아지른 언덕, 종횡으로 있는 촌락, 둑에 이어진 버들개지, 길에 드리워진 뽕나무, 바람 맞는 돛과 비에 젖은 노, 떴다 앉았다 하는 물가의 새들이 모두 짚신[履舃] 아래에서 나온다.

 

遠則平郊緬邈, 田疇綺錯, 茂林豐草, 一望無際, 遙岑群岫, 如丫如䯻, 點點脩姱, 半露雲表者, 皆在乎衽席之內

멀리 평평한 비단처럼 아득한 너른 들판, 비단처럼 짜인 논과 밭, 무성한 숲과 잘 자란 풀이 한 번 바라보면 끝이 없고 까마득한 봉우리와 뭇 산들은 총각머리인 듯 상투인 듯아계(丫髻): 주로 송나라 시대에 처녀와 총각이 송아지 뿔처럼 머리를 양쪽으로 틀어 올려 묶은 머리를 말한다. 여기서 산을 아계에 비유한 것은 산이 멀어 상투머리처럼 작고 푸르스름하게 보이는 것을 형용한 것이다. 점점이 빼어나 아리따운 것이 반쯤 구름 겉에 드러나 있으니 모두 앉은 자리 안에 있다.

 

凡地之遠近高下, 壯大宏廓, 可喜可翫, 環樓之東南者, 悉莫逃於眼界.

대체로 대지의 멀거나 가까거나 높거나 낮거나 웅장하고 확 트여 기뻐할 만하고 즐길 만하니 누대를 에워싼 동남 방향이 모두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풍광이 좋아

 

至如林花赬駁, 樹陰綠縟, 天高月白, 霜雪縞積, 而四時之景不同;

숲의 꽃이 붉어져 반짝이고 나무 그늘이 우거져 무늬지며 하늘은 높고 달은 밝으며 서리와 눈이 하얗게 쌓여 네 계절의 풍광이 같지 않다.

 

雲煙開斂, 日月出沒, 晦明變化, 光彩絢爛, 而朝暮之景不一.

구름과 안개가 피어났다 개며 해와 달이 나왔다 지며 어둠과 밝음이 변화하며 광채가 찬란하니 아침저녁의 풍경이 하나가 아니다.

 

探之無窮而討之不厭, 雖有智者, 不能窮其狀也.

그걸 탐구해도 무궁하고 그걸 이야기해도 싫지 않으니 비록 지혜로운 이라도 그 형상을 궁리할 수가 없다.

 

或飮者呼呶, 歌者激裂, 吟者愁苦, 射者揖讓, 留連彷徨, 徙倚而不能去.

혹 술 마시는 이는 시끄럽게 이야기하고 노래하는 이는 힘껏 부르짖고 시를 읊는 이는 괴롭게 읊조리고 활 쏘는 이는 읍하고 사양하며 가만히 있다가[留連] 방황하다가 왔다 갔다 하지만 떠나진 못한다.

 

雖古今豪傑, 所遇之樂不同, 而得之於目, 寓之於心者, 亦各適其適.

비록 예나 지금의 호걸이 만난 즐거움이 같지 않더라도 눈에 얻거나 마음에 붙은 것이 또한 각각 그 마땅한 것에 마땅해한 것이었다장자』 「대종사(大宗師)이러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할 일을 대신 처리하고 다른 사람의 즐거움을 자신의 즐거움으로 여겨 자기의 즐거움을 스스로 즐거워하지 못하는 자들이다.[是役人之役, 適人之適, 而不自適其適者也.]”라는 대목에 나오는 말이다. 소식이 이담육마도찬(李潭六馬圖贊)에서 저 가려워하는 말을 보건대 입술을 들고 목구멍을 드러내 보이네. 그 가려울 때는 비빌 수 있는 마른 나무의 등걸도 만전의 값어치가 있어 금옥을 메달아 주어도 말이 편안한 것이 아니라네. 오호, 각각 자신에게 알맞은 것을 알맞게 해서 자신의 천성을 보존하는 법이네.[相彼癢者, 舉唇見咽. 方其癢時, 槁木萬錢. 絡以金玉, 非爲所便. 烏乎! 各適其適, 以全吾天乎.]”라고 하였다..

 

 

 

 

 

보수할 것을 청하다

 

余嘗三赴京師, 再爲宣慰使, 凡五過城中而登陟玆樓亦非一也.

나는 일찍이 세 번 서울[京師]로 갔고 두 번 선위사(宣慰使)가 되었는데 대체로 다섯 번 평양성을 지나다가 이 누각에 오른 것이 한 번이 아니었다.

 

歲乙巳, 又以千秋進賀使到此, 時監司朴公楗庶尹安君璿判官鄭君叔墩來迓舟中, 仰指樓崖, 執盞謂余言曰:

을사(1485)년에 또 천추진하사(千秋進賀使)에 이곳에 이르렀는데 당시 감사 박건(朴楗)과 서윤 안선(安璿)과 판관 정숙돈(鄭叔墩)이 배 안에서 와서 맞이했고 누대의 언덕을 우러러 가르치며 술잔을 들고 나에게 말했다.

 

高句麗三壤皆大邑, 而惟此平壤爲最阜, 檀君之所起, 東明之所居, 九梯宮之基, 卽今之永明寺.

고구려의 삼양(三壤)삼양(三壤): 고구려의 중요한 근거지와 요충지였던 요양(遼陽), 평양(平壤), 한성(漢城)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37 잡지(雜誌) 백제(百濟)“13세 근초고왕(近肖古王)에 이르러 고구려의 남평양(南平壤)을 취하여 한성을 도읍으로 하였다.”라는 기록이 보이고, 동사강목(東史綱目)2 하에도 고구려 북한산군(北漢山郡)을 혹은 남평양이라고도 하는데, 지금의 한양(漢陽)이다.”라는 안정복(安鼎福)의 주석이 보인다. 그리고 김경선(金景善, 1788~1853)연원직지(燕轅直指)1 봉황성기(鳳凰城記)살펴보건대 당서안시성은 평양과의 거리가 500리이고 봉황성은 또한 왕검성(王儉城)이라 한다.’ 하였으며, 지지에는 또한 봉황성을 평양이라 한다.’ 하였다.[按唐書, 安市城, 距平壤五百里, 鳳凰城, 亦稱王儉城. 地誌, 又以鳳凰城稱平壤.]”라고 하고, 그 아래에 평양과 패수(浿水)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평양은 수도를 뜻하고 패수는 그 근처에 있는 강이라고 언급한 다음, 당시 요양현(遼陽縣)을 예전의 평양으로 비정하였다.은 모두 큰 도읍이지만 오직 이 평양만이 가장 번성했고 단군이 일으킨 곳인데다가 동명왕이 살던 곳으로, 구제궁(九梯宮)구제궁(九梯宮): 신증동국여지승람51 평안도(平安道) 평양부(平壤府)동명왕(東明王)의 궁으로 예전에 영명사(永明寺) 안에 있었다.”라고 하였다. 해동역사(海東繹史)29 궁실지(宮室志) 성궐(城闕)등 다수의 문헌에 관련 사실이 보인다.의 터가 곧 지금의 영명사(永明寺)입니다.

 

嵒窟深而獜馬不返, 石出江心, 而朝天馬跡如舊, 靑雲白雲東西有橋, 而仙馭之遊已遠, 其神蹤誕蹟, 恍惚難信.

바위굴이 깊지만 기린마(麒麟馬)는 돌아오지 않고, 조천석(朝天石)이 강 속에서 튀어나왔지만 조천하던 기린마의 자취는 예전 같으며신증동국여지승람51 평안도 평양부, 기린굴(麒麟窟)과 조천석(朝天石)에 대하여 서술하기를 기린굴은 구제궁 안 부벽루 아래에 있다. 동명왕이 이곳에서 기린마를 길렀다고 하는데, 뒷사람이 비석을 세워 기념하였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왕이 기린마를 타고 이 굴로 들어가 땅속에서 조천석으로 나와 하늘로 올라갔다 한다. 그 말발굽 자국이 지금까지 돌 위에 있다.”라고 하였다. 영조 때 제작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군현지도집인 해동지도(海東地圖)1872년에 발간된 지방지도인 평양지도(平壤地圖)에 능라도 아래 조천석이 표시되어 있다., 청운교(靑雲橋)와 백운교(白雲橋)신증동국여지승람51 평안도 평양부모두 구제궁의 터 안에 있는데, 동명왕 때의 돌계단이다. 자연히 이루어진 것이지 인간의 솜씨를 빌린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김시습(金時習)금오신화(金鰲新話)』 「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부벽정의 남쪽에 돌을 다듬어 만든 계단이 있는데 왼쪽에는 청운제(靑雲梯), 오른쪽에는 백운제(白雲梯)라고 돌에 새겨 화주(華柱)를 만들어 놓아 호사자들의 구경거리가 되었다.”라고 하였다. 그 뒤에 홍생(洪生)이 배를 타고 부벽정 아래에 와서 돌계단을 밟고 올라간 것을 보면, 부벽루와 대동강 연안 사이에 설치된 것으로 추정된다.가 동서로 있어 죽은 신선이 타던 수레[仙馭]가 놀던 게 이미 아득하니선어는 학을 타고 신선처럼 노닌다는 뜻으로, 사람이 죽는 것을 완곡하게 표현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 문장은 동명왕이 세상을 떠난 지 오래되었다는 말이다.. 그 신기한 자취와 허탄한 자취가 황홀하여 믿기 어렵습니다.

 

箕子以九疇之學, 設八條之敎, 人知禮義, 俗尙敬讓, 流風遺韻, 猶有存者.

기자(箕子)가 홍범구주(洪範九疇)의 학문으로 팔조법금(八條法禁)의 교화를 베풀어구주(九疇)의 학문은 서경에 전해 오는 홍범구주(洪範九疇)를 의미한다. 홍범구주는 우() 임금이 홍수를 다스린 뒤에 낙수(洛水)에서 나온 거북의 등에 새겨진 무늬를 보고 만든, 천하를 다스리는 아홉 조항의 대법(大法)을 말한다. 은나라가 망하게 되자 기자가 이것을 주 무왕에게 전해 주었고, 기자는 또 조선에 봉해져서 교화를 널리 폈다고 한다. 그 아홉 조항은 오행(五行), 오거(五事), 팔정(八政), 오기(五紀), 황극(皇極), 삼덕(三德), 계의(稽疑), 서징(庶徵) 및 오복(五福)과 육극(六極)이다. 서경(書經) 주서(周書) 홍범(洪範)팔조(八條)의 교화는 기자가 지었다고 하는 고조선의 법률을 말하는 것으로, 팔조금법(八條禁法)이라고도 한다. 그 가운데 현재 전해지는 것은 사람을 죽인 자는 목숨으로 배상한다[相殺償以命], 사람을 상하게 한 자는 곡물로 보상한다[相傷以穀償],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그 집의 노비로 삼는다[相盜者沒爲其家奴婢]3개 조항 등이다. 增補文獻備考 卷127 刑考 刑制팔조지교(八條之敎)에 대해서는 다소간의 이설이 있다. 사람들이 예절과 의리를 알고 풍속이 공경과 겸양을 숭상하며 남겨진 풍조와 남겨진 운치가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高麗置爲西京, 以備巡幸, 五百年文物之縟, 至于今不替.

고려 땐 서경(西京)을 설치하여 순행(巡幸)함을 대비하니 500년 문물의 화려함이 지금에 이르도록 바뀌지 않았습니다.

 

世廟來巡, 駐蹕登御, 設科取士, 親揮膚藻, 炳炳琅琅, 耀人耳目者, 垂後世而不刋.

세조(世祖)께서 순행 오시면 말 대고 벽제(辟除)하며 어전에 올라 과거를 열어 선비를 뽑았으며 친히 아름다운 문장[膚藻]세조실록61460 1016일 기사에 자세하다. 세조는 이날 문과(文科) 전시(殿試)를 설행하게 하고 부벽루에 올라 과거사후(武擧射帿)에 친림하였다. 그리고 고려 의종(毅宗)의 시를 보고 감회가 일어 칠언시 한 수를 써서 판에 새겨 달았다.을 휘갈기셨으니 찬란하고 맑아 사람들의 이목을 빛나게 한 것이 후세에 드리우도록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然則都邑之雄, 城郭之壯, 閭閻之殷, 非如羅濟之遺墟也.

그렇지만 도읍의 웅장함과 성곽의 솟음과 마을의 융성함이 산라나 백제의 남은 터와 같지 않습니다.

 

每歲赴京大臣與夫中華之士, 往來而不絶, 必登此樓, 樓久不葺, 棟宇將頹, 擬欲改營而侈美之, 於君意何如?”

매해 서울로 가는 대신과 중국의 선비들이 왕래하며 끊이지 않고 반드시 이 누대에 오르지만 누대는 오래도록 수리하지 못해 마룻대와 추녀가 허물어지려 해서 고쳐 수리하여 사치하고 아름답게 하려 하니 그대의 생각에는 어떠합니까?”

 

 

 

부임하여 부벽루를 보수하다

 

明年丙午, 朴公見遞, 而余來代之, 因朴公規模, 鳩財僝功, 閱數月而告成.

이듬해 병오(1486)년에 박건(朴楗)이 벼슬이 갈림 당하고 내가 그를 대신했는데 박공이 짜놓은 규모에 따라 재물을 모으고[鳩財] 공적을 갖춰 몇 개월을 보내고 완공을 알렸다.

 

又作長廡數間以翼其下, 郞僚有室, 泡湢有處, 樓之制作, 極壯無比.

또한 긴 회랑 몇 칸을 지어 그 아래에 날개가 편 듯하니 낭관들의 방이 있고 목욕할 곳이 있어 누대의 지어진 것이 매우 웅장해 비교할 게 없다.

 

於是因客之至, 大張絲竹而落之, 遂書形勝事蹟而鋪敍之.

이에 손님들이 옴에 따라 크게 관현악을 베풀고 낙성하였으며 마침내 명승지의 사적을 써서 그것을 논술한다.

 

丁未仲秋, 觀察使成俔, . 虛白堂文集卷之三

정미(1487)년 중추에 관찰사 성현은 기록한다.

 

 

총평

1487(성종 18) 8월 평양에 있는 부벽루의 중건 시말을 적은 기문이다. 전임 관찰사 박건(朴楗)의 뒤를 이어 성현이 완성하였는데, 저자는 누각에서 조망하는 자연 경관에 대한 묘사와 역사적 고사의 인용을 통하여 부벽루의 영건(營建) 의의를 강조하였다. 특히 구양수(歐陽脩)취옹정기(醉翁亭記)와 소식(蘇軾)적벽부(赤壁賦)에 사용된 표현 방법과 문자를 자유롭게 응용하여 그 흥취를 풍부하게 한 것이 인상 깊다. -한국고전번역원

 

 

 

 

인용

작가 / 지도

앞 글(渤海考序) / 뒷 글(逐詩魔)

우리 한시를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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