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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김형술, 백악시단의 진시연구 - Ⅲ. 진시의 기저와 논리, 1) 자득의 학문자세와 진 추구의 정신 본문

한문놀이터/논문

김형술, 백악시단의 진시연구 - Ⅲ. 진시의 기저와 논리, 1) 자득의 학문자세와 진 추구의 정신

건방진방랑자 2019. 12. 15.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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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시(眞詩)의 기저(基底)와 논리(論理)

 

 

1. 자득(自得)의 학문자세와 진() 추구의 정신

 

백악시단의 진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백악시단 문인들의 학문 자세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들의 학문 자세는 박학(博學)’자득(自得)’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그 가운데 자득을 중시하는 학문적 자세가 ()’의 논리와 긴밀하게 연관되기 때문이다. 백악시단의 이론가들은 주자학을 정학(正學)으로 인식하고 주자학을 기반으로 자신들의 사유를 전개해갔다. 그러나 그들의 학문 자세는 주자학만을 묵수하고 여타의 학설들을 도외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독서의 범위를 대단히 넓게 가지고 있었고 그러한 박학을 통해 자기의 식견을 세우는 자득을 중시하였다. 아래의 글은 백악시단의 이론가였던 김창협과 김창흡이 학문에 있어 자득을 얼마나 중시했는지를 보여준다.

 

삼주(三洲, 김창흡)께서 쓴 묘지에, “주자의 견해라 하더라도 구차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였으니, 이는 농암과 삼연 두 유현의 위대한 안목이요, 위대한 역량이라 하겠다. 우옹(尤翁, 송시열)의 시대에 정학(正學)이 쇠미하게 되자 윤휴(尹鑴)와 허목(許穆)의 무리가 이 무렵 사설(邪說)을 제창하고 자기 무리들을 선동하여 따르게 하였다. 그러자 우옹은, “정자와 주자 이래로 의리가 크게 밝아졌다. 이분들이 드러내 지 못한 속뜻이 더 이상 없으니, 그저 높이고 믿으며 따르고 익힐 뿐, 따로 이견을 내어서는 안 된다.”하고, 목숨을 돌아보지 않고 그들을 물리쳤으니, 참으로 시의적절한 방법이었다. 그런데 이 말을 독실하게 믿는 사람들 중에는 종종 곧이곧대로 지키기만 하고 두 번 다시 강론하거나 연구하지 않는 이 들이 있다. 이 때문에 가만히 앉아 두 손을 맞잡은 채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탄식을 불러일으킨다. 농암, 삼연 두 유현이 남의 안목을 어둡게 만들기 쉽다며 세유(世儒)의 비루함에 대해 통탄한 것은 쇠퇴한 세상을 바꾸려는 데 서 나온 것이니 참으로 옳은 말이다. 연옹(淵翁)의 시에,

 

程書朱訓在 甲是乙非爭 정자 글과 주자의 가르침이 있건만
갑은 옳고 을은 그르다며 싸우네.
安在程朱後 無勞格致精 어찌 정자 주자 이후에 산다고
노력 없이 격치(格致) 공부 정밀해지리?

 

하고 또,

 

羣聖微言朱子解 뭇 성인 은미한 말 주자께서 풀었는데
朱子註脚付諸誰 주자의 주석 풀이는 누구에게 맡길 건가?
懶從心上加硏究 마음에 더 연구하길 게을리 하면서
却謂今無可致知 되려 이젠 치지(致知)할 것 없다고들 하는구나.

 

라고 하였으니, 이 시는 마땅히 제농암문(祭農巖文)및 묘지명과 더불어 미진한 부분을 서로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말이 매우 간절하여 천고(千古)를 경동(警動) 시킬 만하니 이와 같은 말은 마땅히 정자와 주자의 충성스러운 신하가 될 만하다고 하겠다三洲墓誌, ‘於朱子亦不苟爲應諾云者, 是農淵兩賢大眼目大力量也. 尤翁之世, 正學衰 微, 而鑴穆輩倡邪說於其間, 鼓其衆而從之, 尤翁以爲程朱以還, 義理大明, 更無未發之蘊’, 但當尊信服習, 不可別生異見, 舍性命而闢之, 卽隨時制宜之道也. 篤信是說者, 往往泥守印板, 不復講硏, 致端拱無爲之歎. 兩賢所謂易瞎人眼目’, 而痛恨於世儒之陋者, 亦出於承弊易變, 眞至論也. 淵翁詩亦嘗有: ‘程書朱訓在, 甲是乙非爭. 安在程朱後, 無勞格致精.’ 又云: ‘羣聖微言朱子解, 朱子註脚付諸誰. 懶從心上加硏究, 却謂今無可致知.’ 此詩當與祭農巖文及墓銘, 互相 發明, 而其言殷切, 警動千古. 如此者當爲洛建純臣也. -金昌協, 農巖別集4 諸家記述雜 錄[洪直弼, 梅山集].

 

이 글은 홍직필(洪直弼, 1776~1852)김창협의 학문적 자세를 기린 글이다. 홍직필은 김창흡의 묘지명과 추도시를 인용하며 김창협과 김창흡을 유현(儒賢)으로 받들고 자득의 자세로 학문을 궁구한 점을 높이 평가하였다. 김창흡은 김창협을 위해 쓴 묘지명에서 천지가 말하지 않은 것을 성인이 말하니 이것은 천지가 성인을 기다린 것이요, 성인의 경전 가운데 분명하지 않은 것을 대현이 풀이하니 이것은 성인의 경전이 훈고를 기다린 것이며, 훈고의 남은 함의를 후세 학자가 기다리게 하였으니, 이 또한 주자의 심오한 뜻입니다. 그런데 주자 이후로 의리 가 크게 밝아져 더 이상 강론하고 연구할 필요가 없다.’고들 하니, 이런 말은 사람들의 안목을 어둡게 만들기 쉽습니다. 만일 이런 말대로라면 주자 이후에 학문하는 자는 과연 예법만 지키고 학문은 널리 닦지 않아도 된다는 말입니까?”竊謂有天地自然之道, 有聖人經典之理, 有大賢訓詁之義. 天地之所不言, 聖人言之, 是爲天 地待聖人也; 聖經之所未晣, 大賢釋之, 是爲聖經待訓誥也; 訓誥之所留蘊, 千古是待, 亦朱子無窮之意. 有謂朱子以後, 義理大明, 無待講硏’, 此言易瞎人眼目. 若如是說, 則爲學於朱子後者, 其將有約而無博乎? -金昌協, 農巖別集2附錄·1」「祭文[金昌翕]라고 한 바 있었다. 그리고 인용된 시에서 김창흡은 주자가 성현의 뜻을 밝히기 위해 노력하였듯 후대의 학자들은 주자의 주석에 남겨진 함의를 밝히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하였다.

 

김창협은 다른 당파의 연원이 된 퇴계(退溪)와 자기 당파의 연원이 되는 율곡(栗谷)을 종합적으로 비판·성찰하며 학문적 객관성을 잃지 않았다. 퇴계가 이기(理氣)를 둘로 나누어 사유한 점은 비판하면서도 리()를 중시한 점은 수용하였고, 리는 기를 통해 발현된다는 율곡에 이기설을 따르면서도 리의 실재성이나 주재성이 약화된 측면에 대해서는 비판을 가하였다이천승, 농암 김창협의 철학사상연구, 한국학술정보, 2006, 2退栗 四端七情論綜合的 省察참조.. 이러한 비판적 고찰을 통해 자득한 견해는 그의 사단칠정설(四端七情說)로 정리되었고 더 나아가 리를 체인할 수 있는 심()의 문제로까지 철학적 논구를 확장시켜 나갔다. 인용문 두 번째 시에 나오는 종심상가연구(從心上加硏究)’는 심의 문제를 중요한 철학적 테마로 여겼던 김창협의 사상을 지적하는 것이자, 더 논구되어야 함에도 심은 기일 뿐이라며 연구를 심화시키지 않는 당대 학자들을 대비적으로 비판하는 것이다김창흡의 시 속에 언외로 설정된 비판의 대상은 호서의 노론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김창협 사후 그의 사단칠정설은 율곡의 이기설과 배치되어 분란의 소지가 있다는 권상하(權尙夏)의 지적에 따라 원집에 실리지 못하였다. 호락논쟁(湖洛論爭)이 본격화되는 상황에서 낙론측이 권상하의 요청을 따른 것은 같은 당파 안에서 학문적 반목을 막고자 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으나, 호락논쟁이 가열되면서 김창협의 문인이었던 오희상(吳熙常)은 권상하가 문집편찬 과정에 개입한 사실을 비판하기도 하였다. “農巖四端七情說, 精深微密, 發明眞蘊, 多造退栗所未臻之理, 可謂無窮者義理而前賢之所留蘊, 後賢發之也. 曾聞印集之時, 遂庵以其有參差於栗谷, 力主删去之, 論見漏於原集. 其後年譜之追刊也, 渼湖雖撮其要而附見, 終不如全文之完備, 殊可恨也. -金昌協, 農巖別集4 諸家記述雜錄[吳熙常]”. 이처럼 리의 실재성을 강조하며 심의 역할에 주목하였던 김창협의 사상적 특징은 바로 자득의 학문자세를 통해 형성된 것이었다.

 

김창흡 또한 선비는 진실로 주자를 독신(篤信)해야 한다. 그러나 주자의 전후 언설 가운데는 미정(未定)의 설과 기록자의 착오가 간혹 있으니 어찌 살펴 가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간혹 공맹(孔孟)의 뜻과 모순됨이 있을 경우 공맹을 버리고 주자를 따른다면 어찌 가까운 것으로 덮고 먼 것을 소홀히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라며 주자의 무왕(武王)에 대한 비판적 평가를 거부하고 육경의 뜻을 따르겠다는 뜻을 밝히기도 하였다爲士者固宜篤信朱子, 而然其前後言, 多或有未定之說與記者之錯, 豈可不審擇乎? 間有矛盾 於孔孟意旨, 則捨孔孟 而從朱子, 豈非蔽近 而忽遠乎? 若朱子所不滿於武王, 至曰有不待熟 而剝打’, 以太伯文王排爲上中層, 而置武王於最下. 若是者不一, 其辭何其與孔孟異旨也? 孔子贊易, 應乎天而順乎民’, 屬之湯武, 中庸以一戎衣, 天下定爲善繼文王, 則豈有一毫貶辭乎? 孟子曰一怒而安天下之民, 聞誅一夫紂, 未聞弑君’, 其可謂吾無間然矣. 然則朱子之不滿 武王, 有何所受乎? 故曰: ‘論武王 一段, 吾從孔孟而已.’ -金昌翕, 三淵集拾遺26 日錄3월 초2. 그리고 김창흡은 자득한 것이라야 이라는 인식을 피력하기도 하였다.

 

 

또 다음과 같이 말하셨다. “도체(道體)는 미묘하니 모름지기 생각을 정밀하게 하여 자득해야 한다. 그런 연후라야 지식이 참되어[] 독실하게 행하고 힘써 배울 수 있으니 한갓 앞 사람들이 만든 설을 지키는 것만으로 일삼아서는 안 된다.”

又謂: ‘道體微妙, 須精思自得, 然後知眞而行力, 不可徒守前人成說, 以爲事了也.’ -金邁淳, 臺山集13家史·」「文康公府君

 

 

이 글은 후손 김매순(金邁淳, 1776~1840)이 김창흡을 위해 쓴 전의 일부로, 김매순은 김창흡의 말을 위와 같이 인용하였다. 자득을 중시하던 김창흡의 학문자세를 언급하는 대목에서 나오는 내용인데, 김창흡은 앞선 학설을 묵수하는 것은 이 아니며 자득한 것이라야 이라는 견해를 분명하게 드러내었다. ‘자득을 연결시켜 인식하는 논리는 백악시단의 후배 문인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무릇 창작의 도는 반드시 식()을 근본으로 합니다. 그러므로 식에는 정밀함과 조잡함, 깊음과 얕음이 있고 그 문장 또한 그러합니다. 제가 일찍이 보니 관중(筦仲), 한비(韓非), 신불해(申不害), 상앙(商鞅), 장주(莊周) 등은 주나라가 쇠약해진 전국시대에 나와서 혹자는 공리(功利), 형명(刑名)의 설로 임금에게 유세하고, 혹자는 허무(虛無), 이단(異端)의 학문으로 그 무리에게 전수하였습니다. 이들의 설이 비록 인의(仁義), 중정(中正)의 도()에는 어긋난 것이지만 그 재주에 있어서는 대개 깊이 나아가 자득한 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언사에 드러난 것이 각각 그 사람과 같아 담심(湛深)한 자는 담심(湛深)한 글이 있고, 정초(精峭)한 자는 정초(精峭)한 글이 있으며, 회기(恢奇)한 자는 회기(恢奇)한 글이 있었습니다. (중략)후세의 지리멸렬한 학문과 조잡한 식견으로 자구을 조탁하고 언설을 치장하여 세상의 안목 없는 자들을 속여 명성이나 추구할 따름인 글과는 다릅니다. 나는 그래서 창작의 도는 반드시 식을 근본으로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저 몇 군자들의 경우, 그 책이 갖추어져 있어 사람들이 읽어보면 마치 해와 달 이 하늘에서 빛나고, 양자강과 황하가 대지를 가로지르며, 물고기와 용이 환영(幻影)을 바꾸고, 호랑이와 표범의 털이 빛나고 풍성한 것 같아 눈이 아찔하고 심장이 벌렁거려 갈피를 잡을 수 없으니 요컨대 모두 천하의 진문(眞文)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식이 높으면 그 문도 높고, 그 식이 넓으면 그 문 또한 넓지만, 처음부터 높이려 하고 넓히려는데 뜻을 두었던 것은 아닙니다. 각자 자기 마음에서 안 바를 말한 것이니, 흉중에서 유출된 것이 자연이 이와 같았던 것입니다.

夫爲文之道, 必以識爲本, 故識有精粗深淺, 而其文亦類焉. 僕嘗觀筦仲韓非申不害商鞅莊周輩, 出於衰周戰國之世, 或以功利刑名之說說其君, 或以虛無異端之學授其徒. 此雖詭於仁義中正之道, 於其術, 盖有深造而自得者, 故其見於言辭者, 各類其人, 湛深者有之, 精峭者有之, 恢奇者有之. (中略)非若後世徒以㓕裂之學鹵莽之識, 雕琢其字句, 粉澤其言說, 以誑世之無目者而獵取其聲譽而已. 吾故曰: ‘爲文之道, 必以識爲本.’ 彼數君子者, 其書具在, 令人讀之, 若日月之燭天江河之經地魚龍之變幻乕豹之炳蔚, 目眩心掉, 莫可端倪, 要皆 可謂天下之眞文也. 而其識高者, 其文亦高; 其識博者, 其文亦博, 初非有意於高與博, 而各道 其心之所知, 而流出胸中者自然如此. -李夏坤, 頭陀草12 與趙季禹書

 

 

이 글은 이하곤이 동학이었던 조문명(趙文命)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이다. 이하곤은 창작의 도는 식을 근본으로 한다고 전제하고는 전국시대의 제자백가를 예시하였다. 제자백가의 글은 도학의 순정함을 기준으로 보면 문제가 있지만 문장의 수준으로 보면 빼어난 성취를 거두었다고 보았는데, 성취의 핵심은 문장으로 표출된 각자의 독자성이었다. 그리고 이하곤은 이러한 독자성의 원천을 자득이라 명시하였다. 인용문 하단에서도 천하의 진문은 식의 고하에 의해 성취되는데 식은 자득에 기반한 것임을 밝혔다. ‘각자 자기 마음에서 안 바는 곧 자득의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이하곤은 진문의 요체로서 식을 상정 하고 식의 핵심으로 자득을 중시함으로써 진문자득을 연결시켜 인식하였다.

 

자득을 연결시켜 사고하는 것은 시 창작에서도 중요한 요소로 인식되었다. 아래 김시민의 편지를 보자.

 

 

30수에 대해 전후로 화답하지 못하는 것은 실로 얕은 필력이라 요령 있는 묘사를 잘 하기 어려워서가 아닙니다. 그 강산의 빼어난 풍경과 정자의 꾸며진 모습을 일찍이 한 번도 눈으로 보지 못했는데, 지금 화답하라는 명령 때문에 시를 짓는다면 완전히 진경(眞境)을 잃고 말 것이니, 그렇다면 대단히 무미(無味)할 것입니다. 조만간에 그 주인을 따라 노닐어 끝까지 찾아보고 끝까지 탐사하여 이 가슴 속에 자득한 바가 있도록 한 연후라야 비로소 한 마디 말이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三十詠之前後逋債, 匪直淺筆有難領寫汗漫. 其江山形勝 亭榭粧點, 未嘗一經眼目, 今藉令有言, 都失眞境, 則甚覺無味. 早晩從其主人遊, 窮搜極探, 使此胸中有所自̊̊, 然後方 可有一言. -金時敏, 東圃集7 與申正甫

 

 

김시민은 신정하의 시에 바로 화답하지 못하는 것이 자신의 부족한 필력 때문이 아니라 신정하가 노닌 산수를 직접 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김시 민은 실제 산수를 보지 않고 쓰는 시는 진경(眞境)’을 잃은 시라고 하였다. 그리고 산수에 나아가서도 구석구석 탐사해본 뒤라야 가슴 속에 자득한 바가 있어 시를 쓸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김시민의 이 편지는 백악시단의 산수시가 무엇을 중시하고 어떤 과정을 거쳐 창작된 것인지를 알게 하는 자료이다. 백악시단은 각답실지(脚踏實地)하여 대상의 진면목을 궁구하고 가슴 속에 자득한 바를 시로 옮겨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김시보 또한 손자 김이진(金履晉)에게 보낸 편지에서 금강산 유람을 통해 자득한 바가 많았기 때문에 필세가 분방하고 기상이 넓은 시를 쓸 수 있었다고 하면서汝於昕夕臨睨 無人之境, 而所自̊̊者多矣. 以故筆勢奔放, 氣像宏濶, 渾渾滔滔, 不覺其進之速也. 神精所感, 是固有莫之然而然者, 推此以往, 其所就將有不可量者矣. -金時保, 茅 洲集9 與履晉書 창작상의 자득의 중요성을 말하였다. 이처럼 백악시단의 문인들에게 자득이란 창작 주체가 참된 시[眞詩]’를 창작하게 하는 필수적인 요소로 중시되었다.

 

한편, ‘자득한 바를 창작한 것이라야 참된[]’ 작품이 된다는 인식은 자연스럽게 작품에 담긴 작가의 개성을 중시하는 인식으로 이어졌다.

 

 

그가 지은 시는 청원(淸遠)하고 준아(俊雅)하여 대체적으로는 당시(唐詩)에 가깝다. 그러나 종종 사람들과 수창하고 경물에 따라 서사(抒寫)한 것이 자연스럽고 담박하며 천진난만(天眞爛漫)하니, 비록 수백 편에 불과한데도 평소의 기상과 규모가 그 사이에서 드러나 지 않음이 없다. , 반드시 다른 사람의 시가 아니라 사빈(士賓) 자신의 시였던 것이다.

其爲詩淸遠俊雅, 大體近唐, 而往往與人酬酢, 隨境抒寫, 淋漓澹蕩, 天眞爛漫, 雖此數百篇 之寂寥, 而其平日氣像規模發見其間無不在焉. 卽必非他人之詩, 而士賓之詩也. -朴泰觀, 凝齋遺稿』 「題凝齋遺稿[李秉淵]

 

 

첫 번째(其一)

 

農丈淸新那諱弱 농암 어르신은 청신해도 유약한 한계가 있고
澤公工鍊未超塵 택당공은 공들여 단련했지만 속기를 못 벗었네.
不如且讀元明律 허나 원(), ()의 시를 읽는 것과는 같지 않으니
餘響渢渢尙起人 여향(餘響)이 아름다워 아직도 사람을 흥기시키네.

 

 

두 번째(其二)

 

農澤二家空眼底 농암, 택당 두 분께선 공연히 안목을 낮춰
擬於中夏躡遺塵 중하(中夏)에서 남은 먼지 밟으려 생각했건만
腥膻汗習浮華格 비리고 땀내 나는 부화(浮華)한 품격뿐이니
未必能賢左海人 반드시 조선보다 낫다고만 못하리라.

택당, 농암 두 문집과 원나라, 명나라의 시를 읽고서[讀澤堂農巖兩集及元明詩律], 李秉淵, 槎川詩選批卷下

 

 

첫 번째 인용 자료는 이병연이 그의 벗이었던 박태관의 유고(遺稿)에 붙인 서문이다. 이병연은 서문에서 박태관의 시가 대체로는 당시(唐詩)에 가깝지만 그렇다고 당시를 추수(追隨)한 시가 아니라 박태관 자신의 시로 거듭났음을 특기하였다. ‘박태관 자신의 시임을 비평의 핵심으로 삼은 것은 바로 박태관의 자득을 고평한 것이고, 자득은 곧 작가의 개성으로 연결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두 번째 인용 자료는 이병연 자신의 시로 개성적 창작에 대한 이병연의 인식을 보여준다. 이 시는 종국에는 김창협이식(李植, 1584~1647)의 시가 원(), ()의 시보다 낫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지만 김창협 시와 이식 시의 단점을 유약속기로 냉정하게 평가한다. 두 번째 수에서는 모의의 대상인 중국의 시가 김창협, 이식의 시만 못하다고 표현했지만, 이병연은 김창협과 이식의 시에 모의의 흔적이 있는 점을 비판적으로 보고 있다. 이병연의 이 시에 대해, 심노숭(沈魯崇, 1762~1837)동시대 전후로 높이고 따랐던, 가령 택당과 농암 이 두 분의 경우에도 자신을 굽히고 같아지려 하지 않았으니 선집 가운데 두 분의 시를 논한 시를 보면 알 것이다[並世前後, 推尊慕悅, 如澤農兩公者, 亦不欲折而同之, 觀於集中所論一詩可知. -沈魯崇, 孝田散稿35 槎川詩總論文字)].”라며 이병연이 개성적 창작을 중시했음을 예증하는 근거로 활용하였다. 이병연이 김창협과 이식의 시에 대해 장단을 객관적으로 비평하고, 단점에 대해 비판하는 자세는 김창협과 김창흡이 주자라도 묵수하지 않으려 한 학문 자세와 동일선상에 있는 것이다.

 

이처럼 맹목적 추수를 거부하고 자신의 시세계를 중시했던 이병연은 80여 생애 동안 자신의 색채가 분명한 개성적 시세계를 추구하였다. 자신 스스로도 쌓여있는 고지더미에서 꺼내 읽으면, 내 만년의 시인 줄 아는 이 있으리라[古紙堆中出而讀, 後有知我晩來筆 -李秉淵, 槎川詩抄卷下 除夕放筆]”라며 자신만의 개성적 시세계를 확신하였고, 이병연의 시를 선비(選批)했던 심노숭은 이병연의 시적 성취를 두고 사천시의 정()과 변(), 높고 낮음은 또한 논할 것도 없이 요컨대 동쪽사람의 시가 아님이 분명하다. 자기를 버리고 남을 따르는 것을 부끄러워하기를 시장에서 회초리 맞는 것보다 더 심하게 여겼으니 이른바 천만인 가운데도 자기의 몸이 있음을 아는 사람[槎川詩正變高卑且無論, 要之非東人之詩決矣. 捨己循人, 恥甚撻市, 所謂千萬人中知有吾身者. -沈魯崇, 같은 글]”이라 평가하였다. 심노숭이 이병연의 시를 두고 동쪽 사람의 시가 아니다라고 평가한 것은 여타의 조선 시인들과는 달리 모의를 배격하고 자신의 독창적 시세계를 구축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득은 창작에 있어 ()’, ‘개성(個性)’, ‘반모의(反模擬)’의 문제들과 연결되며 진시창작을 추동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인용

목차 / 지도

강의록 / 후기

. 서론

. 백악시단의 형성과 문학 활동

1. 백악시단의 주요 구성원

2. 동인들의 문학 활동

. 진시의 기저와 논리

1. 자득의 학문자세와 진 추구의 정신

2. 진시의 제창과 복고파·공안파의 비판적 수용

3. 성리학적 천기론의 문학적 변용

. 진시의 정신적 깊이와 미학

1. 형신을 통한 산수의 묘파

2. 민생에 대한 응시와 핍진한 사생

3. 물아교감의 이지적 흥취

4. 소통의 깊이와 진정의 울림

. 진시의 시사적 의의

.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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