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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술, 백악시단의 진시연구 - Ⅱ. 백악시단의 형성과 문학 활동, 1) 백악시단의 주요 구성원 본문

한문놀이터/논문

김형술, 백악시단의 진시연구 - Ⅱ. 백악시단의 형성과 문학 활동, 1) 백악시단의 주요 구성원

건방진방랑자 2019. 11. 30.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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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악시단(白嶽詩壇)의 형성과 문학 활동

 

 

1. 백악시단의 주요 구성원

 

 

백악시단의 실체를 가늠해볼 수 있는 문헌으로는 다음과 같은 자료를 들 수 있다.

 

 

북리(北里) 문회(文會)의 성대함은 삼연(三淵, 金昌翕) 선생께서 실로 창도하고 북리의 여러 이름난 분들이 서로 겨루고 좇았으니 풍치(風致)가 남들보다 뛰어났다. 나는 어려서부터 이미 여러 공들의 이름을 외며 추앙하고 상상하기를 마치 하늘에 계신 분들처럼 여겼다. 중년이 되어 비로소 북리에 들어갔는데 지난 날 여러 공들은 이미 여러 곳으로 흩어져 붓을 고르고 먹을 갈며 술을 마시는 후미에서 한번 조용히 받들지 못했다. 다시 수십 년 뒤에는 여러 어른들께서 차례로 세상을 떠나심에 남은 풍모와 큰 운치를 다시 볼 수 없었다.

北里文會之盛, 三淵先生實爲之倡, 而里中諸名勝, 相與頡頏周旋, 標致絶人. 自余幼少時, 已誦諸公之名, 而企仰想像, 若在霄漢. 逮至中歲, 始入北里, 則向之諸公, 已落落散處, 不得一奉 從容於筆硯樽席之後. 又後數十年, 諸老次第就世, 遺風弘韻, 不可復見. -李秉成, 順菴集5 題寤齋趙尙書追悼三淵諸公詩後

 

산을 등지고 있는 거주지는 모두 이름난 구역인데, 대은암(大隱巖)이 가장 빼어나다. 처음에 남곤(南袞)이 거주하게 되면서 읍취헌(挹翠軒, 朴誾)과 같은 여러 공들이 함께 어울려 교유하였으니 사람의 깨끗함과 더러움은 비록 다르지만 그 땅은 알려지게 되었다. 중간에는 백록(白麓, 辛應時)의 소유가 되었고 농암(農巖, 金昌協), 삼연(三淵, 金昌翕) 두 선생에 이르러서는 북록(北麓)의 문채가 더욱 알려져 풀과 나무, 바위와 물이 지금도 훤한 빛을 지니게 되었으니 하물며 대은암(大隱巖)에 있어서랴! 사천(槎川) 이공(李公, 李秉淵)께서 그 뒤를 이어 일어나심에, 그 문하에서 명승을 유람하던 자들은 일세(一世)를 움직이던 사람들인데, 아회(雅會)는 모두 대은암(大隱巖)을 귀의처로 삼았다. 사천(槎川)께서 돌아가심에 백악 아래의 풍류 또한 쇠하게 되었다. 그러나 좋은 계절에 아름다운 경치가 있으면 술자리를 마련하고 벗들을 맞이하는 것은 선배들의 유풍(遺風)과 같았으니 이 시첩도 곧 그 하나이다. 대은암의 빼어남이 다시 이 시첩으로 인해 드러나게 되었으니 또한 그 옛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다.

負嶽而居者, 皆名區也, 而大隱巖最勝. 始南袞居之, 挹翠諸公並與之遊, 人之淸汚雖別, 地則顯矣. 中爲辛白麓之有, 及農淵二先生, 而北麓之文采益顯, 草樹巖泉, 至今有耿光, 況大隱哉! 槎川李公繼而作焉, 名勝之遊其門者傾一世, 而雅會則皆以大隱爲歸. 槎川下世, 而嶽下之 風流亦衰. 然良辰美景, 朋酒招邀, 猶先輩之遺風, 而是帖卽其一也. 大隱之勝, 復因之而彰, 亦 可以想見其舊也. -成大中, 靑城集8 大隱雅集帖跋

 

국조(國朝)의 시운(詩運)은 경도(京都)에서 먼저 열렸는데 경도의 시는 옛날부터 동촌(東村)과 북촌(北村)이 가장 성대했다고 일컬어졌다. 그러나 숙종, 영조 연간에는 북촌이 더욱 성대하였다. 김농암(金農巖)과 삼연(三淵) 두 선생께서 유학(儒學)으로 현저(顯著)하면서부터 시 또한 창기(倡起)함이 걸출하여 풍격(風格)이 일세(一世)를 뒤덮었으니 세상에서 시로 전해지는 자 가운데 근 백년 이래로는 이 분들보다 나은 자가 없었다. 사천(槎川) 이공께서 뒤이어 일어나 우뚝하게 사단(詞壇)에 큰 자리를 차지하고 우이(牛耳)를 잡으심에 같은 시대 모주(茅洲, 金時保), 증소(橧巢, 金信謙), 동포(東圃, 金時敏)와 같은 여러 김공과 아래로 柳下 홍세태(洪世泰)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시로써 대명(大名)을 얻었다. 이에 사람들은 누구나 북촌의 시를 높이 사지 않음이 없었다.

國朝詩運開先京都, 京都之詩, 自古稱東北二村爲最盛, 而至肅英之際, 北尤盛. 粤自金農 巖三淵二先生以儒學顯, 而詩亦倡起傑出, 風格掩一世, 世之言詩者, 近百年以來, 靡有右稱. 而槎川李公繼起矣, 嵬然大坐詞壇, 執牛耳盟, 同時有茅洲橧巢東圃諸金公, 下至於洪柳下, 皆以詩得大名. 於是人莫不高北村之詩. -兪漢雋, 自著續集3 八灘南公詩集序

 

 

첫 번째 자료는 순암(順菴) 이병성(李秉成, 1675~1735)의 글로, 오재(寤齋) 조정만(趙正萬, 1656~1739)이 지기였던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 1653~1722), 노가재(老稼齋) 김창업(金昌業, 1658~1721), 옥오재(玉吾齋) 송상기(宋相琦, 1657~1723)를 애도하기 위해 쓴 장편의 만시(輓詩)들을 읽고 붙인 것이다. 이병성은 이 글에서 북리(北里) 문회(文會)’의 성대함이 김창흡에 의해 창도되었고 이들 시회에는 여러 명공(名公)들이 함께 하여 그 풍치가 다른 사람들과는 크게 달랐다고 회억(回憶)하였는데 이 글에서 주목할 것은 이병성이 북리(北里)’ 곧 북촌(北村)이라는 공간에서 창작활동을 벌인 김창흡 중심의 문인 그룹을 실체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두 번째 자료는 청성(靑城) 성대중(成大中, 1732~1809)이 선배 문인들의 유풍을 따라 자신의 아홉 벗들과 수창한 시를 성첩(成帖)한 뒤에 붙인 글이다. 성대중은 이 글에서 김창협과 김창흡에 의해 북록(北麓)’의 문채가 더욱 세상에 현창(顯彰)되었으며 그 뒤를 사천(槎川) 이병연(李秉淵, 1671~1751)이 계승했다고 하였다. 아울러 이병연 문하의 문인들을 일세를 움직이던 사람들이라 하면서 이들이 이병연을 중심으로 아회를 이어나갔다고 하였다. 성대중의 이 글에서 주목할 것은 성대중이 대은암(大隱巖)을 중심으로 김창협, 김창흡과 이병연을 일련의 선후 관계로 파악하고 있으며 아회가 이들 핵심인물을 중심으로 왕성하게 이루어졌다고 밝힌 점이다.

 

세 번째 자료는 저암(著庵) 유한준(兪漢雋, 1732~1811)이 이병연의 문인이자 이병연의 시를 선발하기도 했던詩凡萬有三千餘首. 詩人南肅寬正叔所選者, 幾居其半.” -李秉淵, 槎川詩抄』「[洪樂純] 팔탄(八灘) 남숙관(南肅寬, 1704~1781)의 시집에 붙인 서문이다.

 

유한준은 조선초부터 융성했던 북촌의 시가 김창협과 김창흡에 이르러 그 풍격이 일세를 뒤덮었으며 이병연이 뒤를 이어 시단의 우이를 잡으면서 동시대에 교유하던 모주(茅洲) 김시보(金時保, 1658~1734), 증소(橧巢) 김신겸(金信謙, 1693~1738), 동포(東圃) 김시민(金時敏, 1681~1747), 유하(柳下) 홍세태(洪世泰, 1653~1725)가 모두 시로써 큰 명성을 얻었다고 하였다. 유한준의 이 글 또한 성대중의 기록처럼 김창협, 김창흡과 이병연을 계승 관계로 인식하고 있으며 이들의 창작과 성취가 집단적 활동에 기반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이상의 자료를 통해 우리는 몇 가지 핵심적인 면을 추출할 수 있는데, 첫째는 대은암(大隱巖)’, ‘북록(北麓)’, ‘북리(北里)’, ‘북촌(北村)’으로 지칭된 문학공간의 명칭이다. ‘대은암은 백악산 남쪽 기슭에 있는 바위 이름이고, ‘북록은 백악산을 지칭하는 명칭이며, ‘북리북촌은 백악산 아래에 형성된 마을을 통칭하는 말이다. 모두 백악과 관련된 공간인 것이다. 실제로 김창흡의 낙송루(洛誦樓)와 이병연의 취록헌(翠麓軒)은 백악 자락에 있었는데, 김창흡과 이병연을 중심으로 모여든 문인들이 부단한 창작을 통해 새로운 시풍을 선도해간 까닭에 백악이란 공간은 대단히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백악은 창작의 실제 공간이기도 하지만 그 상징성이 더 큰 공간이다. 후술을 통해 구체화될 주요 구성원들의 문학 활동을 살펴보면, 구성원에 따라 백악은 평생의 주거지인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가령 백악시단을 형성하고 이끌었던 김창흡의 경우, 그의 주된 창작 공간은 백악이 아니라 그의 은거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서 제시한 자료들이 김창흡과 백악을 긴밀하게 연결시켜 사고하는 것은, 그가 백악산 아래 낙송루(洛誦樓)를 짓고 시도(詩道) 진작을 목표로 시사(詩社)를 운영했을 때, 일군의 문인들이 그의 뜻에 동조하여 창작 의 새 방향을 모색하였고, 시사 활동이 종료된 후에도 문인들은 물리적 공간을 초월하여 시도(詩道) 진작(振作)의 창작정신을 공유하고 심화시켜 나갔기 때문이다. ‘백악이란 명칭을 물리적 공간 이름으로만 접근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고을살이나 은거를 위해 각지로 흩어져서도 자신의 시작(詩作)을 백악의 사우들과 공유하였고, 백악으로 돌아오면 백악에 남아있던 다른 사우들과 왕성한 시회를 통해 창작성과를 공유하였다. 김창흡 또한 은거지에서 백악으로 돌아오면 으레 백악에 남아있는 사우들을 찾아 시를 논하고 함께 시를 지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백악시단 구성원들의 심화된 시론이며 달라진 창작 스타일 등이 자연스럽게 확산, 공유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처럼 백악은 시도(詩道) 진작이라는 창작정신의 발원지이자 창작정신의 실천물이 구성원들에게 소통·확산되는 구심점으로서, 그 상징성이 더욱 큰 공간이라 할 수 있다..

 

둘째는 백악을 중심으로 한 문인들의 동인적(同人的) 창작활동이다. 동인적 창작활동의 구체적인 모습에 대해서는 다음 절에서 상술하겠지만, 위에 제시된 자료만으로도 이들의 시론과 창작이 시회와 같은 공동의 문학 활동 속에서 이루어졌음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셋째는 이들 문인 그룹이 김창흡을 중심으로 한 세대에서 이병연을 중심으로 한 세대로 계보적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병연의 아우였던 이병성은 자신의 선배 문인들을 김창흡을 중심으로 묶고 있으며, 이병연의 후배 문인들은 이병연을 중심으로 문인들을 그룹화하면서 이들 그룹이 김창흡 세대를 이은 것으로 인식하였다.

 

이상의 자료 분석을 통해 볼 때, 김창흡과 이병연을 중심으로 한 시대의 시 창작을 선도했던 문인 그룹은 백악시단이라 명명하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고 여겨진다. ‘백악이라는 공간이 지닌 상징적 의미는 앞서 언급한 대로이고, ‘시단이란 명칭은 앞선 자료가 보여주듯 이들 문인 그룹의 문학적 성취가 단연 시에서 두각을 보였기 때문이다백악시단이란 명칭을 기존 연구의 백악사단’, ‘농연 그룹과 비교해서 이해해 보면, ‘농연 그룹은 농암 김창협과 삼연 김창협의 문인들로서 도학(道學)과 문학에서 성취를 이룬 문인 집단을 지칭하는 명칭이고, ‘백악사단은 김창협과 김창흡의 문인들 가운데 백악을 문학창작의 근거지로 삼되 산문과 시에서 각각 성취를 이룬 문인 집단을 아울러 규정하는 명칭이며, ‘백악시단은 시문학에 있어 두각을 보인 문인 집단을 규정하는 명칭이라 할 수 있다..

 

 

이제 남은 과제는 백악시단의 주요 구성원을 설정하는 문제이다. 앞선 자료들을 통해서도 김창협, 김창흡, 홍세태, 조정만, 김시보, 이병연, 이병성, 김시민, 남숙관, 김신겸과 같은 다수의 구성원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앞에 열거한 문인들이 백악시단의 실체를 모두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일례로 김창협의 문인으로 진시의 이론을 정비하고, 백악시단 사우들의 작품을 품평하며, 시작(詩作)에 있어서도 빼어난 성취를 이룬 담헌(澹軒) 이하곤(李夏坤, 1677~1724), 서암(恕菴) 신정하(申靖夏, 1680~1715)는 백악시단의 핵심적인 구성원이라 할 수 있는데, 앞의 자료에서는 거론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하곤과 신정하를 백악시단의 주요 구성원으로 편입시키기 위해서는 객관적인 근거가 있어야 한다. 바로 이 객관성 확보가 백악시단의 구성원을 설정하는 데 있어 가장 긴요한 문제라 할 수 있다.

 

이에 본고는 백악시단의 주요 구성원을 확정함에 있어 일정한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지만 최대한의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접근해 보고자 한다. 먼저 백악시단의 핵심인물을 설정하고, 이들의 문집이나 시집에 나타난 교유인물들을 분석한 뒤, 교유의 친소(親疎)와 기간 등을 고려하여 주요 인물들을 가려내고, 그 가운데 백악이라는 문학공간과 일정한 관계를 가지고 시 창작에 매진하여 시로 명성을 얻은 인물을 백악시단의 주요 구성원으로 설정하고자 한다.

 

백악시단의 핵심인물은 앞의 자료에서 보았듯 김창흡과 이병연으로 볼 수 있는데, 김창흡과 이병연이 계보적으로 인식되고 있음에 착안하여 김창흡을 전기 백악시단의 핵심인물로, 이병연을 후기 백악시단의 핵심인물로 설정하기로 한다. 백악시단을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살피는 것은 백악시단의 형성과 전개과정에서 나타나는 변화의 모습을 살필 수 있는 이점이 있기 때문이다.

 

먼저 김창흡의 삼연집(三淵集)에 나타난 교유인물들 가운데 생애 전반에 걸쳐 10회 이상의 빈번한 교유여기서의 교유란 함께 유람을 하거나 수창(酬唱)을 한 경우를 말한다.를 보인 인물들을 선별해 보면, 장동(壯洞) 금문(金門)에서는 김창집(金昌集), 김창협(金昌協), 김창업(金昌業), 김창집(金昌緝), 김창립(金昌立) 등의 친형제김창집(金昌集)은 김창흡의 맏형이고 김창협(金昌協)은 둘째형이며 김창업(金昌業), 김창집(金昌緝), 김창립(金昌立)은 아우들이다., 김성적(金盛迪), 김성최(金盛最), 김성후(金盛後) 등의 족형제(族兄弟)김성적(金盛迪), 김성최(金盛最)는 김창흡의 족형(族兄)이며 김성후(金盛後)는 족제(族弟)이다., 김양겸(金養謙), 김치겸(金致謙), 김후겸(金厚謙), 김언겸(金彦謙), 김신겸(金信謙) 등의 자질(子姪)김양겸(金養謙), 김치겸(金致謙), 김후겸(金厚謙)은 김창흡의 아들이고 김언겸(金彦謙), 김신겸(金信謙)은 김창업의 2남과 3남이다., 김시걸(金時傑), 김시보(金時保), 김시좌(金時佐) 등의 족질(族姪)이며, 장동 김씨 이외에 교유했던 인물로는 조성기(趙聖期), 홍세태(洪世泰), 조정만(趙正萬), 송상기(宋相琦), 이희조(李喜朝), 이해조(李海朝), 유명악(兪命岳), 홍유인(洪有人), 이병연(李秉淵), 박태관(朴泰觀) 등이다.

 

김창흡의 교유 인물들에서 발견되는 특징은 교유의 범위가 자신의 가문과 인척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이다. 조성기와 조정만은 본관이 임천(林川)으로 재종(再從) 숙질(叔姪)간인데운강(雲江) 조원(趙瑗)은 전의이씨(全義李氏, 병조판서 李俊民)와의 사이에 44녀를 두었는데 장남이 조희정(趙希正), 차남이 조희철(趙希哲), 3남이 조희일(趙希逸), 4남이 조희진(趙希進)이다. 조성기는 조희진의 손자이고 조정 만은 조희일의 증손(曾孫)이다. 김창흡의 장동 김씨와는 죽음(竹陰) 조희일(趙希逸, 1575~1638)이 수북(水北) 김광현(金光炫, 1584~1647)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3남으로 김창흡에게는 종조부(從祖父)가 된다.과 사돈을 맺으면서 인척이 되었다.

송상기는 본관이 은진(恩津)으로 부친 성규렴(宋奎濂, 1630~1709)이 김창흡의 조부인 김광찬(金光燦, 1597~1668)의 사위인 관계로 김창흡에게는 고종사촌이 된다.

본관이 연안(延安)인 이희조와 이해조는 사촌간인데백주(白洲) 이명한(李明漢)은 나주박씨(羅州朴氏, 錦溪君 朴東亮)와의 사이에 41녀를 두었는데 장남이 이일상(李一相), 차남이 이가상(李嘉相), 3남이 이만상(李萬相), 4남이 이단상(李端相)이다. 이해조는 이일상의 3남이고, 이희 조는 이단상의 장남이다. 이희조의 부친인 정관재(靜觀齋) 이단상(李端相, 1628~1669)김창협과 김창흡의 스승이자 김창협의 장인인 관계로 김창협에게 이희조는 처남이 되고 이해조는 처사촌이 된다.

유명악은 본관이 기계(杞溪)로 부친인 유철(兪㯙, 1606~1671)이 김창흡의 백부인 김수증(金壽增, 1624~1701)과 사돈이 되면서 인척이 되었으며유철(兪㯙)31녀를 두었는데, 장남이 유명준(兪命舜), 차남이 유명건(兪命健), 3남이 유명악이다. 차남 유명 건이 김수증의 44녀 중 막내사위이다. 유명악은 김창흡에게서 수학하였다十六, 始受業于三淵金先生.” -兪拓基, 知守齋集13 先府君行狀.

홍유인은 본관이 남양(南陽)으로 그 의 부친인 홍문도(洪文度)가 김수증의 맏사위인 관계로 김창흡에게는 5촌 조카가 된다. 홍유인은 일찍 부친을 여읜 까닭에 어려서부터 외가에서 지낸 일이 많았는데 이를 통해 김창흡 형제와 매우 가깝게 지냈고, 특히 김창흡의 막내아우 김창립과는 시도(詩道)를 진작하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중택재시사(重澤齋詩社)을 만들기도 하였다仁甫早孤零丁, 與母歸依於世父膝下, 多在谷雲巖居與岳麓之無俗軒. 無俗軒卽我家連墻, 密邇晨夕, 一談一笑, 固無非擩染磨礲之地, 至於觸物流通, 亹亹來逼, 則吾兄弟皆所斂避. 而季弟昌立與仁甫齒比志合, 慨吾東詩道之頹而欲一振之, 遂建詩社, 曰重澤齋, 與羣彦講藝其中, 一聽鼓鑄於余, 所爲風雅之業, 斐然章且成矣.” -金昌翕, 三淵集27 洪仁甫墓誌銘.

이병연은 본관이 한산(韓山)으로 종형(從兄) 이병천(李秉天)이 김수증의 둘째 사위가 되면서 인척관계를 형성하였고 1696년 석실서원에서의 강학을 통해 김창협, 김창흡 문하의 일원이 되었다. 이처럼 김창흡이 주요하게 교유한 인물들은 대개 자기 가문의 인물이거나 혼인으로 맺어진 인척집안의 문인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밖에 교유의 기록은 많이 남아 있지 않지만, 주목해야 할 인물들로는 김창흡과 동년(同年)인 묘헌(妙軒) 이규명(李奎明)김창협, 김창흡의 문인에 속하는 홍중성(洪重聖), 정용하(鄭龍河), 이하곤, 신정하가 있다. 이규명은 김창흡이 고시(古詩)를 창도하고자 낙송루(洛誦樓) 시사(詩社)를 열었을 때 뜻을 함께하여 시사를 이끌었던 인물이다余少時從妙軒李公遊, 公家北山之下, 與三淵金公居相近. 時三淵倡爲古詩, 開洛誦樓, 以招 諸子, 而公同里並峙, 與之頡頑, 不相讓焉. 余於兩公, 卽同年生, 而一言道合, 如石投水, 許以 忘形之交, 故得遨遊兩間.” -洪世泰, 柳下集10 妙軒詩集跋.

홍중성은 어려서 김창흡을 종유하면서 시도(詩道)를 배운 인물인데 그의 시 서별낙송루제우(叙別洛誦樓諸友)(芸窩集1)를 통해 그의 낙송루시사 참여를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홍중성의 현손(玄孫)인 홍경모(洪敬謨)후계(后溪) 조유수(趙裕壽), 사천(槎川) 이병연(李秉淵),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 학암(鶴巖) 조문명(文命), 백하(白下) 윤후(尹淳), 창랑(滄浪) 홍세태(洪世泰) 등과 시사(詩社)를 결성하여 날을 잡아 주연을 갖추어 수약당(守約堂)에서 수창하였다[與趙后溪裕壽李槎川秉淵金三淵昌翕趙鶴巖文命尹白下淳洪滄浪世泰, 結爲詩社, 分日寘酒, 唱酬於守約堂. -洪敬謨, 四宜堂志』 「原敍·1].”원문은 이종묵의 사의당지, 우리 집을 말한다, 휴머니스트, 2009에서 인용함.며 시사 결성을 언급한 바 있다.

정용하는 송강(松江) 정철(鄭澈)5대손으로 결혼 후 백악산 아래의 처가에 살면서 김창흡에게 수학했던 인물인데吾友烏川鄭載文, 名龍河, 卽松江相公五世孫也. 其家在湖之忠原, 記余才成童時, 載文亦以 秀才來京師, 寓居東城之村, 余日與之馳逐閭里間, 頗以讀書課詩相樂也, 亡何? 載文㱕于家鄕, 聲光落落不相接者殆八九年矣. 其後載文從其婦家, 家于岳麓之下, 亦嘗少學於三淵金子, 與吾 亡友洪仁甫, 有同門之義焉. -魚有鳳, 杞園集28 鄭載文哀辭 이병성은 그를 추도하는 만시에서 어려서 낙송루에 노닐었는데, 기세가 진한(秦漢)을 넘어섰네[少遊洛誦樓, 氣凌秦漢際. -李秉成, 順菴集1 鄭載文挽]”라며 정용하의 낙송루시사 참여를 증언하였다.

이하곤은 김창흡의 사촌인 송상기의 사위로 일찍이 김창협에게서 수학하면서 장동 김씨 문인들과 친밀한 교우를 이어나갔으며, 신정하 또한 김창협의 문인으로 김창흡을 비롯한 백악의 문인들과 돈독한 교우관계를 유지하였다尋從農巖金先生遊, 獲聞道義之說, 立心制行, 必求第一義爲據, 聲名日起.(中略)間有大 文字著述, 輒誦在人口, 前輩如鄭相國澔金相國昌集金中丞昌翕宋尙書相琦金侍郞楺 諸公, 凡文事如謀國大議論及關係世道名敎處, 輒相就咨訪, 實有相長之益. -申暻, 直菴集15 叔父副校理恕菴先生墓碣陰記.

 

이와 같이 삼연집(三淵集)에서 확인할 수 있는 주요 문인들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 가운데서 백악이라는 문학공간과 일정한 관계를 가지고, 시도(詩道)를 진작(振作)하겠다는 의식적 지향 아래 시 창작에 매진하여, 시로 명성을 얻은 인물로는 홍세태, 이규명, 김창업, 김시보, 조정만, 김성후, 이해조, 홍중성, 정용하, 김창립, 유명악, 홍유인, 이병연, 박태관, 이하곤, 신정하, 김시민, 김신겸 등을 꼽을 수 있다.

 

 

김창흡의 제자 세대인 후기 백악시단은 이병연을 중심으로 창작활동을 지속하였는데, 세대가 내려오면서 자연스럽게 구성원이 확장되는 모습을 보인다. 이것은 이병연의 사천시초(槎川詩抄)사천시선비(槎川詩選批)에 나타난 교유 인물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병연의 시집에서 확인할 수 있는 주요 교유 인물은 홍세태, 김시보, 홍중성, 이하곤, 신정하, 박태관, 김시민, 김신겸 외에 조유수(趙裕壽), 권섭, 김상리(金相履), 심봉의(沈鳳儀), 이병성, 윤창래(尹昌來), 장응두(張應斗), 남숙관(南肅寬), 김영행(金令行), 신유한(申維翰), 안중관(安重觀), 신무일(愼無逸), 이우신(李雨臣), 이태명(李台明), 정선, 조영석, 김부현(金富賢), 정내교(鄭來僑) 등이다.

 

이 가운데 홍세태, 김시보, 홍중성, 이하곤, 신정하, 김시민, 김신겸은 김창흡에게서도 교유가 확인된 인물들이고 나머지 인물들은 교유 기록이 적게 남아있거나 없는 인물들이다. 새롭게 추가된 인물들을 살펴보면 김창흡 이후 백악시단의 특징적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데, 그것은 시인뿐만 아니라 다른 예술 장르에 장기를 지닌 인물로까지 확장되어 문예적 면모가 강화된다는 점이다. 이제 이병연의 시집에서 확인되는 교유 인물들 가운데 후기 백악시단의 특징적 면모를 보여주는 주요 인물들을 개략적으로 살피기로 한다.

 

조유수는 김창흡의 문집에서는 교유가 확인되지 않지만 앞서 본 홍경모의 기록에 김창흡 이하 백악시단의 문인들과 시사를 결성하였다는 기록이 보이고, 김창흡을 종유했던 이해조의 문집에 발문을 썼으며趙裕壽, 后溪集8 李鳴巖子東集跋 이병연의 해악전 신첩(海岳傳 神帖)에 김창흡을 이어 제사(題詞)를 남기기도 하는趙裕壽, 后溪集8 李一源海山一覽帖跋 등 백악시단의 문인들과의 지속적인 교유가 확인되는 인물이다백악시단 동인으로서의 조유수의 모습은 백악시단 문인들의 저술에 대한 제발(題跋)이나 수창한 시편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관련 기록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題洪君則丹丘詩錄(后溪集8), 李順菴秉成集跋(后溪集8), 后溪二如齋送春共賦(洪重聖, 芸窩集4), 訪新村趙后溪裕壽抽輞川韻同賦(金時敏, 東圃集5), 用亭字韻奉后溪趙毅仲(安重觀, 悔窩集3) .. 권섭, 김상리, 심봉의, 이병성은 이병연과 더불어 젊은 시절 10년 동안 시학에 매진했던 인물들로 스스로 오관건(五冠巾)’이라 부르며 강한 연대의식을 가지고 있었다小只讀唐音五七言李杜五七言而已, 又略看東方詩集而已, 與李一源李子平沈聖韶金莘老, 十年酬唱而隨興湧寫而已. -權燮, 玉所集1 詩自序”; “余自少年時, 淋漓跌 宕於槎翁, 十年五冠巾與文墨而頡頏遞 時日, 而迭有饌集匙箸 於槐里之椀榼, 賀賢助於槎翁. 晩暮京鄕與槎翁而落落, 時時舟楫鞍馬之來相就, 必然一丫鬟, 忙自內而出置精盤於我前, 每每歎. 夫人老不衰供客之手, 益歎. -權燮, 玉所集11 李槎川夫人哀辭. 아래 권섭의 글은 이들을 집단적 교유와 그 지향점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한양 성대한 도성 내외에 세 무리의 벗들이 있으니 감사(監司) 이계통(李季通, 李蓍聖), 봉조하(奉朝賀) 이여오(李汝五, 李秉常), 부학(副學) 홍혜백(洪惠伯, 洪啓迪), 승지(承旨) 권명중(權明仲, 權熀), 군수(郡守) 강사함(姜士咸, 姜啓溥)이 한 무리이고, 군수(郡守) 윤백욱(尹伯勗, 尹昌來), 승지(承旨) 윤중길(尹仲吉, 尹錫來), 삼재윤(三宰尹) 계형(季亨, 尹陽來), 봉조하(奉朝賀) 김덕유(金德裕, 金有慶), 판서(判書) 정시해(鄭時偕, 鄭亨益), 함원부원군(咸原府院君) 어성칙(魚聖則, 魚有龜), 응교(應敎) 조자이(趙子以, 趙尙健), 정자(正字) 김자경(金子敬, 金相欽), 사간(司諫) 이미백(李美伯, 李邦彦), 참판(參判) 이백첨(李伯瞻, 李喬岳), 판서(判書) 조자장(趙子章, 趙尙絅)이 한 무리이며, 정랑(正郞) 심성소(沈聖韶, 沈鳳儀), 거사(居士) 권조원(權調元, 權燮), 판결사(判決事) 이일원(李一源, 李秉淵), 현령(縣令) 김신로(金莘老, 金相履), 군수(郡守) 이자평(李子平, 李秉成)이 한 무리이다. 조원(調元)은 나이고 계형(季亨)은 공이다. 계형(季亨)과 여오(汝五)의 두 무리는 날마다 과거시험에 전력하여 좋은 성적으로 합격하니 명성이 온 도성에 가득하였다. 그런데 유독 나 조원(調元)의 무리는 방외에서 한묵(翰墨)의 모임만을 일삼은 것이 주야(晝夜)로 십년이었다.

漢陽盛都城內外有三朋: 李監司季通李奉朝汝五洪副學惠伯權承旨明仲姜郡守士咸 爲一隊; 尹郡守伯勗尹承旨仲吉尹三宰季亨金奉朝德裕鄭判書時偕魚咸原聖則趙應敎子以金正字子敬李司諫美伯李參判伯瞻趙判書子章爲一隊; 沈正郞聖韶權居士 調元李判決一源金縣令莘老李郡守子平爲一隊. 調元余而季亨公也. 季亨汝五二隊, 日以工於公車之業, 爲場屋上游, 聲名滿一都, 獨余調元一隊爲方外翰墨之會, 日夜十餘年. -權燮, 玉所稿』 「·4」 「尹三宰哀辭

 

 

권섭이 제시한 세 무리의 인물들은 모두 노론계 문인들로 각각의 무리가 폐쇄성을 지닌 집단은 아니다. 이병연의 시집에도 윤창래를 비롯하여 이병상, 윤양래, 홍계적, 강계부 등과의 교유가 확인된다. 이처럼 같은 정파의 문인들임에도 권섭이 임의로 무리를 나누어 제시한 까닭은, 넓게는 동문(同門)에 속하는 벗들이지만 그 지향점이 각기 서로 달랐음을 보이기 위해서이다. 권섭은 이기성과 이병상의 무리는 과거입격을 통한 경세에의 지향을 가지고 있어 관리로서 명성이 높아졌으나, 자신의 무리는 과거 공부는 도외시하고 방외의 인물들처럼 시 창작에만 매진하였다며 비교하여 말하였다. 이 자료는 농연의 문인들 가운데 시 창작에만 매진한 일군의 무리가 있었음을 증언하는 것으로, 곧 후기 백악시단의 특징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자료라 할 수 있다. 이병연 세대의 후기 백악시단은 김창흡 세대의 주요 구성원들이 도학과 시학을 겸장(兼掌)한 것과는 달리, 상대적으로 시학과 시 창작에 매진한 인물들이 주요 구성원으로 포진되어 있다. 권섭이 제시한 5인 외에 이병연의 시집에서 확인되는 박태관, 김시민, 남숙관남숙관은 자()가 정숙(正叔), ()가 팔탄(八灘)이며 이병연의 제자로 악하팔표기(嶽下八驃騎)’ 중 한 사람으로 거론된 인물이다[公居京白岳山下, 卽北洞. 北洞多詩畵人, 詩人以槎川爲宗匠, 其下列八驃騎, 南永春 肅寬·金新溪履坤·金都事時敏輩卽其人. -李奎象, 幷世才彦錄』「文苑錄]. 또한 그는 이병연의 만 삼천여 수의 시 가운데 반 정도를 선발하기도 하였다[詩凡萬有三千餘首. 詩人南肅寬正叔所選者, 幾居其半. -李秉淵, 槎川詩抄』「[洪樂純]] 백악시단의 일원이 분명 한 인물임에도 상고할 수 있는 문집을 확인할 수 없다. 강전섭은 그의 시집팔탄공유고(八灘公遺稿)의 존재를 언급하며, 그의 시집이 이병연에 의해 산정되었고, 수록된 191수의 작품 가운데 시조를 한역한 14수의 작품이 있다고 밝혔으나(강전섭, 弄丸齋短歌南肅寬漢譯短謠에 대하여, 한국언어문학3, 1965), 필자는 아직 팔탄공유고(八灘公遺稿)의 실물을 확인하지 못하였다., 김영행, 신무일신무일은 자()가 경소(敬所), ()가 백연(白淵)이며 졸수재 조성기의 백씨인 조원기(趙遠期)의 외손이다. 신정하 와는 외사촌간이며 이병연과는 외사촌 처남간이다. 김창협에게 수학하였으며, 신정하와 교유가 빈번하였다. 신정하는 그의 시고(詩稿)에 쓴 서문에서 목숨을 걸듯 시 창작에 매진했던 그의 모습을 특기하기도 하였다[敬所之所與共爲詩者, 顧在於余, 方其發憤肆力, 捨命以爲 也. 呻吟點染, 上下角逐, 以窮日夜, 甚至於酒鎗琴匣, 無一日而非詩會也, 眉毫口吻, 無一物而 非詩態也. -申靖夏, 恕菴集10 白淵子詩藁序], 이우신이우신은 자() 백열(伯說), ()가 십탄(十灘)이며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의 현손으로 이해조(李海朝)는 그의 삼촌이며 芝村 李喜朝는 그의 당숙이 된다. 晉菴 李天輔伯父이며 雷淵 南有容의 외삼촌이기도 하다. 유척기(兪拓基)戶曹參判李公神道碑銘(知守齋集8)에 따르면 독서를 즐기고 시에 가장 능했던(平居嗜書, 老亦不去手, 最長於詩律.) 인물로 그려져 있다. 이우신은 1732년 두 번째로 사복시주부가 된 이병연과 함께 서울의 명승을 찾거나 근무지나 그와 관련된 곳에서 시를 수창하고 사원수창록(沙苑酬唱錄)을 남기기도 하였다. 또한 이러한 경향을 강하게 보여주는 인물들이다.

 

이밖에 김부현과 정내교는 후기 백악시단의 영향력이 여항시인들에게로 한층 확대된 것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김부현은 홍세태가 외우(畏友)로 추복(推服)한 인물로 홍세태를 제외한 전기 백악시단의 주요 구성원들과는 교유가 거의 나타나지 않다가 후기 백악시단 구성원들과의 교유가 빈번하게 확인된다. 특히 이병연, 이병성 형제의 지우(知遇)가 깊어 이병연은 그를 위해 시집 항동유고(巷東遺稿)를 간행해 주었고 시집 말미에 김부현의 전()을 써서 부록하기도 하였다항동유고(巷東遺稿)』 「부록(附錄)」 「항동소전(巷東小傳). 이 밖에 홍세태는 서문을 썼고, 이병성은 서항동전후(書巷東傳後)라는 발문 성격의 글을 썼다.. 정내교는 신정하에게 시문을 배웠다巷居子鄭來僑 學詩文於余, 嘗有帆前芳草二陵來之語, 大爲時人所賞, 然特窮甚. 有一大宰 憫其窮而語僕曰: ‘世俗皆言鄭生之窮, 乃爲君所誤, 信乎?’ 僕對曰: ‘固信然. 若非僕, 公又何由 得知鄭生而憫其窮耶?’ -申靖夏, 恕菴集16雜識」「評詩文.

신정하는 여항시인인 홍세태, 정내교, 정후교 이 세 사람 가운데 정내교를 가장 먼저 알았고 홍세태와 정 후교를 차례로 알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래서 자신과 종유하며 지은 시 가운데 열에 네댓 수는 정내교와 관련된 것이고 열에 두세 수는 홍세태, 정후교와 관련된 것이라며 두터운 시교를 밝히기도 하였다委巷士之以詩名世, 而從吾遊者有三人焉, 曰滄浪洪道長鄭惠卿鄭潤卿. 三人之中, 老者 滄浪, 少者二鄭, 而潤卿獨於余爲同齒. 余之知三子也, 潤卿爲最先, 滄浪惠卿其次也. 三子之 從余遊, 俱以其詩, 而於余之詩, 其稱滄浪惠卿者, 居十二三; 而其稱潤卿者, 則獨居十四五. 其 交也舊, 故其情也特厚; 其情也厚, 故其見於詩也爲多. -申靖夏, 恕菴集10 贈鄭生來僑 序.

 

이렇듯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여항시인의 후원자 역할을 하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는데, 전기 백악시단의 김창흡-홍세태 관계가 후기 백악시단에 이르면 이병연-김부현, 신정하-정내교의 예처럼 점차 확대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관계의 확장은 백악시단의 진시가 자연스럽게 여항시단으로 확산되는 계기로 작용하였을 것으로 보인다여항시인들이 백악시단의 진시론에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나 여항시인들의 진시는 백악시단의 진시그대로 일 수 없었다. 허위로 가식하지 않는다는 진시론이 여항인들의 불평한 세계인식과 연결되면서 여항인들의 진시는 백악시단 사대부 문인들의 진시와는 일정한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신유한 또한 백악시단의 시론과 창작활동이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신유한은 서얼 출신이었지만 문장으로 이름을 날린 인물이었다. 이병연이 1732년 삼척으로 부임할 당시 신유한은 삼척 인근의 평해(平海)에서 고을살이를 하고 있었는데 이를 계기로 이병연과 신유한의 시교(詩交)가 있었다. 이병연은 삼척으로 부임하면서 신유한에게 시를 보내 함께 시를 논하길 바랐고嶺東來望更南雲, 山海蒼茫申使君. 二十年間一握手, 可能頭白重論文.” -李秉淵, 槎川詩選 批卷下 寄申平海維翰 신유한은 편지를 보내 평해에 한번 내려올 것을 청하였는데若果踐期臨枉, 可供一夕之歡. 渴望渴望. 弊邑海濱風臭, 視眞珠伯仲, 有越松望洋二名勝, 視 竹樓不敢當. 下駟客舍東隅, 有小築曰梧月樓. 是不佞所構而居之者, 僅容一琴一几, 朝暮坐瞰 田野, 挹蒼林爽氣, 亦足夜郞王自大.” -申維翰, 靑泉集3 答李三陟秉淵書, 이에 이병연은 평해로 내려가 오월루(梧月樓)에서 신유한과 시교를 나누었다. 그러나 이병연과 신유한의 시교는 일회적인 성격의 것이라 신유한을 백악시단의 주요 구성원으로 포함하기는 어렵다. 다만 신유한이 김창흡의 갈역잡영(葛驛雜詠)을 습작하기도 하고庚午秋, 崔士集寄書言: (中略)奉讀周章, 果信足下於我, 肝膽相照, 千里一席矣. 第曩 習三淵翁葛驛雜咏, 雅謂麟峽風謠, 不啻桃源, 而今承部檄, 如風雨功曺胥 史兔眼鼠首諸狀, 足令人代愁.” -申維翰, 靑泉集3 答金麟蹄光遂書, 이병연을 사조(謝眺)에 비유하기도 하는盃酒狂歌氣未衰, 手兼黃綬錦囊持. 不妨白髮稱仙吏, 且喜靑山佐客詩. 桑葚摘來參木並, 竹樓衙罷管絃宜. 澄江似練霰成綺, 謝眺宣城得句時.” -申維翰, 靑泉集2 梧月樓與三陟李 使君一源抽劍南韻 등 김창흡과 이병연을 대시인으로 추앙했던 점을 염두에 두면 백악시단의 영향력이 당색을 달리하는 후배 문인들에게도 두루 미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호가 반치(半癡)인 이태명(李台明)은 이병연과의 교유가 가장 빈번했던 인물이다. 이태 명은 이병연의 부친인 이속(李涑)에게 수학하면서李君台明子三, 卽成宗朝王子靈山君後孫, 而世居京口. 爲人豪爽慷慨, 喜讀書, 蓋嘗受學於 家大人. -李秉成, 順菴集5 贈李子三序 이병연 형제와 일찍이 교유관계를 맺었으며 시를 잘했음은 물론, 노래도 잘 불러先君子嘗閒居好客, 不肖兄弟喜爲詩, 日侍傍招呼爲文會, 是以士之抱藝落拓者多歸之. 李君台明子三, 往來最久. (中略)君於物無所嗜, 獨喜爲詩, 然不甚師古, 亦不肯自命作文 人, 只其胸中磊塊崛峍, 詩故豪逸. (中略)君素善歌, 人或來要之, 亦不遴. 時時過我, 酒酣氣振, 誦其所爲詩, 聲調若出金石, 余輒驚之. -李秉成, 順菴集5 題李子三西遊錄後 사대부 출신 가객으로 소개되기도 한 인물이다김영진, 조선후기 詩歌 관련 신자료(1)(韓國詩歌硏究20, 2006), 216면 참조..

 

시인이자 가객인 이태명의 존재는 후기 백악시단의 영역이 다른 예술장르로까지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정선과 조영석과 같은 사대부화가들과의 교유 또한 백악시단의 진시운동이 다른 예술장르와의 교섭을 통해 예술 전반으로 확장되어감을 보여주는 예로서 이러한 교유의 확대는 후대 문인들에게 문채 찬란한 盛事로 인식되기도 하였다槎川之時, 畵則趙觀我齋榮祏鄭謙齋敾, 俱居白岳下, 文采風流輝暎一時. -李德懋, 靑莊館全書32, 淸脾錄·1」 「李槎川.

 

이상에서 살펴본 김창흡의 문집과 이병연의 시집 소재 백악시단의 주요 구성원을 정리해보면, 전기 백악시단으로는 김창협, 홍세태, 이규명, 김창업, 김시보, 조정만, 김성후, 이해조를 후기 백악시단으로는 조유수, 홍중성, 정용하, 김창립, 유명악, 홍유인, 이병연, 박태관, 이하곤, 신정하, 김시민, 김신겸, 권섭, 김상리, 심봉의, 이병성, 윤창래, 장응두, 남숙관, 김영행, 신유한, 안중관, 신무일, 이우신, 이태명, 정선, 조영석, 김부현, 정내교 등의 인물을 들 수 있다.

 

산정(刪定)의 과정을 거치는 문헌기록의 특성으로 인해 백악시단의 주요 구성원은 완벽하게 재구될 수 없는 한계가 존재한다. 그런 까닭에 위에 열거한 인물들은 백악시단 전체 구성원을 재구한 것이 아니라 백악시단의 주요 구성원을 제시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위에 제시된 인물들을 일별해보면 안동 김씨, 연안 이씨, 임천 조씨, 풍산 홍씨, 기계 유씨, 한산 이씨, 평산 신씨, 안동 권씨, 파평 윤씨, 의령 남씨 등 당대 최고의 명문가들이 백악시단의 주요 구성원으로 참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안동 김씨와 인척관계, 사우관계로 맺어진 이 집단은 조선후기 정치, 사상은 물론이요, 문화에서도 단연 중심적 위치를 점하고 있었는데민병수, 조선후기 詩論硏究」 『韓國文化11, 1991, 116면 참조. 백악시단은 바로 시문학의 영역에서 당대의 시풍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문인집단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백악시단의 강력한 영향력이 그에 동조하는 수많은 문인들에게로 확장되어 갈수록 오히려 백악시단은 실체가 모호해지게 되었다. 실체를 적시할 수 없을 만큼 이들의 진시운동이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던 것인데, 바로 이 점이 백악시단의 실체를 파악하기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그러나 구성원의 실체를 완벽하게 재구할 수 없다고 해서 조선후기 새로운 시 풍을 선도했던 백악시단의 존재를 부정할 수는 없다. 이에 본고는 백악시단의 진시진시운동의 실상을 규명하기 위해 이상에 제시한 인물들을 한층 더 선별하여 연구의 대상으로 삼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연구대상을 시론이나 작품의 실상을 확인할 수 있는 문집이나 시집을 남긴 문인으로 한정하기로 한다. 이 경우 전기 백악시단에서는 이규명, 김성후가 제외되고, 후기 백악시단에서는 정용하, 유명악, 홍유인, 김상리, 심봉의, 윤창래, 장응두, 남숙관, 신무일, 이우신, 이태명이 제외된다. , 제외된 인물의 작품이 시선집이나 수창록에 실려 있는 경우, 논의의 필요에 따라 활용하기로 한다. 둘째, 상기 거명된 인물 가운데 지속적인 교유가 확인되지 않거나 교유가 편향된 인물은 배제하기로 한다. 이 경우 신유한과 김신겸이 제외된다. 신유한의 교유는 단편적 성격을 지니고, 김신겸의 경우는 김시모를 비롯한 안동 김문의 인물들과의 교유는 확인되지만, 그 밖의 인물들과는 교유가 거의 확인되지 않기 때문이다. 셋째, 김창협의 경우는 시작(詩作)에서도 높은 성취가 인정되나, 자신 스스로 시도(詩道)를 진작하기 위해 시 창작에 매진하겠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백악시단의 진시운동과 관련해서는 시 창작보다는 오히려 사상적·이론적 뒷받침이 더욱 큰 인물로 판단된다. 따라서 사상이나 시론 등의 논의는 참조하되, 시 작품은 분석 대상에서 제외하기로 한다. 넷째, 정선과 조영석은 백악시단의 주변인물 로 간주하여 논의의 필요에 따라 언급하기로 한다.

이상의 조건을 통해 선별된 연구대상을 정리하고 각 인물의 기본적인 인적 사항과 관계를 제시하면 아래와 같다.

 

성명(姓名) 생몰년(生沒年) 본관(本貫) (), () 관계(關係) / 특징(特徵)
김창협(金昌協) 1651~1708 안동(安東) 중화(仲和), 농암(農巖) 김창흡의 중형(仲兄).
김창흡(金昌翕) 1653~1722 안동(安東) 자익(子益), 삼연(三淵) 증조(曾祖):김상헌(金尙憲). ():김광찬(金光燦). (): 김수항(金壽恒). 김수항(金壽恒)3.
조정만(趙正萬) 1656~1739 임천(林川) 정이(定而), 오재(寤齋) 曾祖:趙希逸. :趙錫馨. ():조경망(趙景望). 조성기의 족질(族姪). 김창흡의 벗. 이병연의 이모부.
김창업(金昌業) 1658~1721 안동(安東) 대유(大有),노가재(老稼齋) 김창흡의 동생.
김시보(金時保) 1658~1734 안동(安東) 사경(士敬), 모주(茅洲) 증조(曾祖:김광현(金光炫, 金尙容 3). ():김수인(金壽仁). ():김성우(金盛遇). 김창흡의 족질.
이해조(李海朝) 1660~1711 연안(延安) 자동(子東), 명암(鳴巖) 증조(曾祖):이정구(李廷龜). ():이명한(李明漢).():이일상(李一相). 김창협의 처사촌.
조유수(趙裕壽) 1663~1741 풍양(豐壤) 의중(毅仲), 후계(后溪) 증조(曾祖): 조희보(趙希輔). ():조형(趙珩). ():조상변(趙相抃). 이병연의 벗. 조문명(趙文命), 조현명(趙顯命)의 당숙(堂叔). 조귀명(趙龜命)의 족숙(族叔).
홍중성(洪重聖) 1668~1735 풍산(豐山) 군칙(君則), 운와(芸窩) 증조(曾祖):홍영(洪霙, 李廷龜 맏사위). ():홍주원(洪柱元). ():홍만회(洪萬恢). 김창흡의 문인. 이병연의 이종형(姨從兄).
이병연(李秉淵) 1671~1751 한산(韓山) 일원(一源), 사천(槎川) 증조(曾祖):이준발(李畯發, 李山甫 長孫) ():이상우(李商雨). ():이속(李涑)
권섭(權燮) 1671~1759 안동(安東) 조원(調元), 옥소(玉所) 증조(曾祖):권성원(權聖源). ():권격(權格). ():권상명(權尙明, 權尙夏 동생). 이병연의 벗
김영행(金令行) 1673~1755 안동(安東) 자유(子裕), 필운(弼雲) 증조(曾祖):김수인(金壽仁). ():김성우(金盛遇). ():김시걸(金時傑, 金時保의 형) 김창흡의 족질(族姪). 이 병연의 벗.
이병성(李秉成) 1675~1735 한산(韓山) 자평(子平), 순암(順菴) 이병연의 동생
이하곤(李夏坤) 1677~1724 경주(慶州) 재대(載大), 담헌(澹軒) 증조(曾祖):이시발(李時發). ():이경억(李慶億). ():이인엽(李寅燁). 조성기의 외종손(外從孫). 송상기의 사 위. 김창협의 문인. 이병연의 인 척.
박태관(朴泰觀) 1678~1719 반남(潘南) 사빈(士賓), 응재(凝齋) 증조(曾祖):박동열(朴東說). ():박호(朴濠). ():박세표(朴世標, 李縡外叔). 김창흡의 문인. 이 병연의 벗.
신정하(申靖夏) 1681~1716 평산(平山) 정보(正甫), 서암(恕菴) 증조(曾祖):신준(申埈). ():신여정(申汝挺). 생부(生父):신완(申琓), ():신유(申瑜). 김창협의 문인. 이병연의 처사촌. 김시민의 이종사촌.
김시민(金時敏) 1681~1747 안동(安東) 사수(士修), 동포(東圃) 증조(曾祖):김광욱(金光煜, 金尙寯 장남). ():김수일(金壽一). ():김성후(金盛後). 김창흡의 족질. 이병연의 처사촌. 신정하의 이종 사촌.
안중관(安重觀) 1683~1752 순흥(順興) 국빈(國賓), 회와(悔窩) 증조(曾祖):안천건(安千健). ():안광욱(安光郁).():안후(安垕) 김창흡의 문인.
김부현(金富賢) 1648~1714 ? 예경(禮卿), 항동(巷東) 귀곡(龜谷) 최기남(崔奇男)의 손서(孫壻). 설초(雪蕉) 최승태(崔承太)의 사위. 여항인. 홍세태, 이병연등과 교유.

 

백악시단의 최초 활동은 1679년 이전 어느 시점에 있었던 김창흡과 김시보 등이 중심이 된 능한대시사(凌漢臺詩社)로 추정되나嘗與宗叔三淵公昌翕 築凌漢㙜, 倡明詩道, 自風雅楚騷古樂府, 以及乎盛唐諸家, 磨礲沈灌, 大肆力爲詞章, 一時名士慕與之遊. -金履坤, 鳳麓集4 茅洲府君行狀김이곤의 행장은 김시보의 행적을 연도순으로 서술하고 있는데 위 인용된 내용은 1679년 이전의 행적에 속한다. 또한 이시항(李時恒)의 글에도 능한대(凌漢臺)에 대한 언급이 보인다. “文字飮廼藝苑 勝事, 始見於韓文公贈張籍詩中, 而其來則盖古矣. 如劉禹錫白第之唱王昌齡旗亭之飮王弇 州雪樓之遊皆此會. 而我國亦有東嶽詩樓三淵凌漢臺, 方諸中朝詞老之會, 未知如何. 而其跌宕文酒, 酣嬉吟哢, 自得於觴詠之樂則同一風流. -李時恒, 和隱集5 和浦文字飮序 자세한 내용을 상고할 수 없고, 본격적인 활동은 김창협, 홍세태, 이규명, 김시보 등이 중심이 된 낙송루 시사로부터 시작한다고 볼 수 있다.

 

낙송루시사가 운영되었던 기간이 1682년부터 1689년까지였던 것을 염두에 두면, 전기 백악시단의 활동기간은 1682년부터 김창흡이 별세한 1722년으로 정할 수 있고, 후기 백악시단의 활동은 1722년부터 후기 백악시단의 종장이었던 이병연이 별세한 1751년까지로 정할 수 있다. 연속적으로 이루어졌던 백악시단의 활동을 이처럼 연도를 기준으로 나눈 것은, 90여 년 가까운 활동기간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변화되었던 문학적 특징을 서술하기 위한 방법적 고려이다.

 

후기 백악시단의 활동 기한을 이병연의 몰년인 1751년으로 잡은 것도 방법적 선택이다. 앞서도 언급하였듯, 후기 백악시단의 활동이 다수의 문인, 다양한 예술장르로까지 확장되면서 백악시단의 진시운동은 조선후기 문단에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었지만 실체로서의 백악시단의 결속력은 점차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또한 백악시단의 3기를 이끌어야 할 문인들의 부재도 하나의 원인이 된다. 영조조 중반 이후 안정적으로 정치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노론 문인들은 현실 정치에 참여하여 경세의 포부를 펼치거나 정치에서 물러나 학문에 매진하는 특징을 보인다. 그런데 진시론을 토대로 평생을 시 창작에 전념했던 후기 백악시단 주요 구성원의 삶은 후배 문인들에게 성대한 풍류로 인식되었지만 정작 자신이 가야할 길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요컨대 시인으로서의 삶은 집권 계층의 문인들에게 그다지 매력적인 것이 못되었던 것이다. 대신 후기 백악시단의 문인들과 같은 창작 활동은 시인으로서의 삶을 살 수 있었던 서얼이나 여항인들에게 이어졌다. 그런 의미에서 백악시단의 활동시한을 이병연의 몰년인 1751년으로 설정하는 것은 나름의 타당성을 지닌다 하겠다.

 

요컨대 백악시단은 17세기 후반인 1682년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여 18세기 중반을 전후로 활동이 약해진 문인 그룹으로서, 창작의 근거지인 백악을 중심으로 조선후기에 새로운 시풍[眞詩]을 개척하고 뿌리 내린 문인그룹이라 할 수 있다.

 

 

 

 

인용

목차 / 지도

강의록 / 후기

. 서론

. 백악시단의 형성과 문학 활동

1. 백악시단의 주요 구성원

2. 동인들의 문학 활동

. 진시의 기저와 논리

1. 자득의 학문자세와 진 추구의 정신

2. 진시의 제창과 복고파·공안파의 비판적 수용

3. 성리학적 천기론의 문학적 변용

. 진시의 정신적 깊이와 미학

1. 형신을 통한 산수의 묘파

2. 민생에 대한 응시와 핍진한 사생

3. 물아교감의 이지적 흥취

4. 소통의 깊이와 진정의 울림

. 진시의 시사적 의의

.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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