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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술, 백악시단의 진시연구 - Ⅰ. 서론 본문

한문놀이터/논문

김형술, 백악시단의 진시연구 - Ⅰ. 서론

건방진방랑자 2019. 11. 30.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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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악시단(白嶽詩壇)의 진시(眞詩) 연구(硏究)

 

김 형 술

서울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국문학전공

 

 

국문초록

 

 

백악시단(白嶽詩壇)진시(眞詩)’ 창작을 목표로 1682년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여 18세기 중반을 전후로 활동이 약해진 문인 그룹으로서, 주요 구성원은 김창협(金昌協), 김창흡(金昌翕), 김부현(金富賢), 홍세태(洪世泰), 조정만(趙正萬), 김창업(金昌業), 김시보(金時保), 이해조(李海朝), 조유수(趙裕壽), 이병연(李秉淵), 권섭(權燮), 김영행(金令行), 이병성(李秉成), 이하곤(李夏坤), 박태관(朴泰觀), 신정하(申靖夏), 김시민(金時敏), 안중관(安重觀), 정내교(鄭來僑) 등이다. 이들은 사우(師友), 인척(姻戚)관계로 맺어진 결속력 높은 문학 동인(同人)으로서 시경(詩經)의 정신을 오늘에 되살려 민멸(泯滅)된 시도(詩道)를 진작하겠다는 고원(高遠)한 이상을 견지하고 있었다. 백악시단의 이러한 이상은 시를 단순히 교양의 차원에서 사고하거나 필력(筆力) 과시의 수단으로 여겼던 창작 풍토에 대한 비판적 인식에서 출발한 것으로, 백악시단은 시학(詩學)을 도학(道學)의 수준까지 궁구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이들은 활발한 동인 활동을 통해 시론(詩論)을 정비하고, 정비된 시론을 바탕으로 새로운 창작을 실천하였으며, 상호간의 비평을 통해 작품의 성취를 공유해 나갔다.

 

백악시단의 진시(眞詩)’는 폭넓은 독서와 자득(自得)의 학문정신을 근간으로 하고 있었다. 이들은 주자학(朱子學)을 근간으로 하면서도 주자학을 묵수하지 않고 다양한 학문적 성과에 개방적인 자세를 보였다. 특히 중시한 것은 폭넓은 공부를 통해 자득한 견해를 갖는 것이었는데, 이들은 자득한 것이라야 진짜[]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학문정신은 백악시단의 진시창작과 긴밀하게 연결되었다.

 

백악시단의 진시론은 전범의 재현을 복고의 방편으로 삼은 결과 작가의 개성이 사라져버린 전대 복고파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하였다. 백악시단이 보기에 복고파의 가장 큰 문제는 작품을 통해 발양되어야 할 작가의 정신은 사라져버리고 전범의 언어나 분위기만을 가져다가 자기를 포장하는 것이었다. 백악시단은 그런 복고를 가짜복고라고 여겼다. 그래서 이들은 학시(學詩)에 있어서는 시어나 수사 차원의 모의(模擬)를 지양하고 전범에 내재한 작가의 정신을 체득해야 하며, 창작에 있어서는 자득한 바를 자가(自家)의 언어로 표현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것을 실현하기 위해 부단한 학문과 수양을 중시하였다. 백악시단의 진시진시인(眞詩人)이 만유(萬有)와의 교감에서 얻은 자신의 사유와 감정을 진실하게 담아낸 시라 정의할 수 있는데, 이때 진시인(眞詩人)’은 학문과 수양을 통해 높은 정신적 경지를 갖춘 작가를 의미한다. 이처럼 주체의 고원한 역량을 중시하는 진시는 도()와 문()은 하나라는 주자학의 문학관에 뿌리를 둔 것이었다.

 

주자학에 입각하여 정신성을 강조하는 백악시단의 진시론은 명대 복고파와 공안파(公安派)진시론과 뚜렷한 차이를 보였다. 명대 복고파는 천지자연(天地自然)의 소리라는 입장에서 민간의 노래를 진시라고 여겼다. 그래서 복고파는 전범 학습을 통해 진시의 원형을 발견하고, 전범의 창작(創作) 원리(原理=)를 깨우치고자 하였다. 그러나 명대 복고파의 법은 그들이 문학을 구속한다고 여겼던 사상을 떼어버린 결과 수사(修辭) 원리(原理)로 축소되었고, ()을 절대화할수록 그들의 복고는 형식적, 수사적 복고로 흘러갔다. 명말(明末)의 공안파는 복고파의 형식적 복고를 표절(剽竊)이라 비판하면서 진시를 주장하였다. 그들은 고금(古今)을 상대적으로 인식하는 논리를 통해 복고파의 복고 당위성을 전복(顚覆)하고 작가의 성령(性靈)에서 우러나오는 시야말로 진시라고 주장하였다. 공안파의 진시는 양명좌파(陽明左派)의 심학(心學)에 뿌리를 두었기 때문에, 흉중에서 우러나오는 본능적 욕망까지도 시를 통해 표현해야 한다고 여겼다.

 

폭넓은 독서를 통해 명대 문단의 추이를 통효(通曉)하고 있었던 백악시단은 주자학에 입각하여 명대 복고파와 공안파의 문학론을 장단취사(長短取捨)하였다. 백악시단은 명대 복고파처럼 고()를 이상적 경지로 상정하면서도, 복고파가 전범에 대한 수사적 재현을 통해 고()를 실현하려 한 점에 대해서는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였다. 또한 공안파가 제시한 고금의 현실적 차이와 진실한 감정 표현에 대해서는 수긍했지만, 공안파의 진정(眞情)이 검속함이 없는데 이른 것에 대해서는 신랄한 비판을 가하였다. 이렇듯 백악시단의 진시론은 주자학을 토대로 명대 문학론을 통섭함으로써 자득한 시론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백악시단은 진시창작을 위해 그 핵심시론인 천기론(天機論)을 본격적으로 제시하였다. 천기(天機)는 송대(宋代) 도학자들에 의해 성리학의 체계로 흡인된 용어로, ‘천리(天理)의 유행(流行)이 발현되는 오묘한 곳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어 왔다. 백악시단은 이런 성리학적 천기 관념을 문학론으로 발전시켰다. 백악시단의 천기론은 창작의 필연적 두 계기인 대상과 주체의 측면에서 정교하게 다듬어졌다. 백악시단은 대상의 측면에서는 대상에 오묘하게 발현된 천기와 조우하고 그것을 통해 천리를 체인(體認)하려 하였고, 주체의 측면에서는 대상의 천기와 조우하고 천리를 체인할 수 있는 주체, 즉 학문과 수양을 통해 천부의 인격 상태에 도달한 주체를 상정하였다. 그리고 천부의 인격 상태에 도달한 주체가 만유와의 교감 속에서 자신의 사유와 정감을 진실하게 드러낸 시를 진시라 하였다. 시론으로서의 천기론은 종래의 성정론과 상합(相合)하여 다채로운 창작상의 변화를 가져왔다.

 

첫 번째로 종래의 성정론이 창작 주체의 측면을 중시한 것에 비해, 천기론은 시적 대상 그 자체의 의의를 한층 강화하였다. 천기론은 대상을 완물상지(玩物喪志)의 경계 대상이 아니라 격물치지(格物致知)의 탐구 대상으로 전환하는 논리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백악시단은 대상과의 실제 교감을 통해 대상의 진면목을 포착할 것을 중시하였고, 그것을 통해 시적 대상은 한층 더 핍진한 형상으로 그려질 수 있었다.

두 번째로 천기론은 천부의 본연한 마음으로 대상과 교감하고 거기서 발현된 사유나 정감을 꾸밈없이 형상화할 것을 주문함으로써 진솔한 창작을 중시하게 하였다.

세 번째로 천기론은 진실한 창작이 전제되면, 시인 각자의 천기가 작품에 반영된다는 논리를 통해 창작상의 개성을 중시하게 하였다.

 

백악시단은 이상의 시론을 실제 창작을 통해 구현하였다. 산수를 천기 조우의 장으로 여겼던 백악시단은 열정적인 산수 유람을 통해 산수의 진면목을 형상화함으로써 전대 산수시가 대상 산수 그 자체보다는 산수에서 느낀 작가의 흥취를 위주로 하여 대상 산수를 충분히 드러내지 못한 점을 극복하였다. 민생(民生)을 형상화한 작품들에서도 백악시단은 시적 대상인 민생의 현장에 한발 더 밀착해 들어갔다. 그렇기에 천민(天民)이 고통 받는 현실에 대해 더욱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형상화를 할 수 있었다. 또한 민생에의 밀착은 전통적 애민시를 벗어나 민생 자체의 형상화를 이끌어 내었다. 이를 통해 민()의 삶은 질박하지만 정감 있고 자신들의 세계를 스스로 개척할 수 있는 자생력을 지닌 존재로도 그려질 수 있었다. 한편, 자신들의 일상을 형상화하면서는 처정(處靜)한 삶 속에서 대상 경물과의 정신적 소통을 이지적(理智的)이고 한아(閒雅)한 흥취로 담아내었다. 또한 일상의 다양한 감정을 담아내면서는 누구나 공감하며 울고 웃을 수 있는 진정을 진솔하게 형상화하였다. 백악시단의 진시는 심오한 철리(哲理)를 형상화한 것부터 해학적 웃음을 담은 시에 이르기까지 도덕과 예술이 하나의 경지로 고양되는 유가 전통의 심미 이상을 추구한 결과였다.

 

백악시단이 내세운 창작상의 의 문제는 조선후기를 관통하며 ()’()’을 강조하는 문예론을 선도하였다. 아울러 백악시단은 시학과 창작의 가치를 도학에 버금가게 설정함으로써 교양이나 사교의 수준의 시 창작을 전문의 영역으로 끌어올렸다. 또한 대상의 의의를 중요하게 설정했던 천기론은 물성(物性)에 대한 더욱 섬세한 고찰과 형상화로 이어졌으며, 민생의 삶을 주목했던 시편들은 민요풍 한시와 이른바 조선시(朝鮮詩)’로 발전하였다. 이처럼 백악 시단의 진시창작을 위한 일련의 문학행위는 백악시단이라는 일군(一群)의 동인들이 민멸된 시도를 진작하겠다는 분명한 목적의식을 바탕으로 진시창작을 위한 시론을 정비하고, 부단한 시작(詩作)을 통해 창작상의 뚜렷한 성취를 이루었으며, 후배 문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쳐 조선후기 한시의 쇄신을 이끌었다는 점에서, 일종의 문학 운동으로 조명받기에 충분하다. 백악시단의 진시운동은 양란 이후의 동아시아적 정치 환경, 철학과 문학상의 변동에 조응하여 조선의 문인들이 선택한 문학 쇄신의 한 방향이었다.

 

 

주요어: 朝鮮後期, 白嶽詩壇, 眞詩, 天機論, 朱子學, 道文合一, 復古派, 公安派, 農巖 金昌協, 三淵 金昌翕, 槎川 李秉淵, 恕菴 申靖夏, 澹軒 李夏坤

 

 

 

. 서론

 

 

조선후기는 대체로 변화, 발전의 시기로 부각되어 왔다. 생산력의 발전을 토대로 사회계층의 분화가 가속화되고, 절대적 이념이었던 주자학을 대체할 새로운 사상이 모색되기도 하는 등 조선후기는 사회·경제적 토대로부터 이념에 이르기까지 총체적 변화의 일로에 있었고, 이러한 제 변화상들은 중세를 해체하고 자생적으로 근대로 이행하는 발전적인 징후로 간주되어 왔다. 문학사 연구 또한 유사한 시각을 보였다. 다변화된 문학담당층은 기존 사대부 중심의 문학과 한편으론 교섭하고 한편으론 그로부터 일탈해가며 문학의 다양성을 이끌었고, 사대부들은 주자학의 문학론을 벗어나 새로운 문학이론을 정립해 갔다. ‘일상성(日常性)’, ‘기속(紀俗)’, ‘()과 실()’, ‘천기(天機)’, ‘반의고(反擬古)’, ‘개성(個性)’, ‘민족문학(民族文學)’ 등등의 키워드는 조선후기 문학이 일구어낸 의미 있는 성과이자 조선후기 한문학을 규정하는 특징들로 정립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연구 성과는 한국 문학의 자생적 연속성을 뒷받침하며 확대되었다.

 

그러나 위와 같은 다각적인 조명에도 불구하고, 선행연구에서는 조선후기 한문학의 제 변화상을 고찰하는 과정에서 문학 작품이 보여준 결과적 특징만을 주목한 나머지, 그러한 변화들이 무엇을 기반으로 어떤 과정을 거쳐 산생된 것인지에 대한 논구에는 다소 소홀한 측면이 있다. 조선후기 문인들은 왜 전대 문인들을 비판하며 창작상의 변화를 도모했던 것일까? 나아가 그 변화는 과연 무엇을 위해 진행되었던 것인가? 본고가 기존 연구의 다양한 성과를 충분히 수용하면서도 다시 이 같은 질문을 던지는 것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통관할 때 조선후기 한시 작품이 보인 다양한 변화가 더욱 풍부하게 음미될 수 있고, 또한 실상에 근사한 해석이 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본고의 연구 대상인 백악시단(白嶽詩壇)은 대단히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백악시단은 17C ~18C 전반기에 걸쳐 백악을 창작의 근거지로 삼아 활동한 문인그룹으로, 창작상의 ()’의 문제를 전면적으로 내세우며 규범과 격식으로부터의 탈피’, ‘개성의 추구와 변화의 시도’, ‘진실한 표현과 사실적 묘사안대회, 18세기 한국한시사 연구(소명출판, 1999), 39~53면 참조.으로 요약될 수 있는 18세기 한시의 주요한 특징들을 선도적으로 이끌었다.

 

아울러 그들의 진시(眞詩)’운동과 천기론은 문학담당층과 장르를 넘어 조선후기에 진문예(眞文藝) 담론(談論)이 확산, 정착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그런 까닭에 백악시단의 시론과 작품을 검토하는 일은 조선후기 한시사의 변화의 실상과 쇄신의 방향을 가늠할 수 있는 긴요한 작업이 될 것이다. 이들의 창작상의 변화 모색은 문인의 개별적 지향에 그친 것이 아니라, 일군의 동인(同人)들이 이론과 작품에 대한 부단한 비평과 교감을 통해 자신들의 시적 지향을 일세에 확산시킨 운동으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후기 한시사의 전개에 있어 백악시단이 지닌 이 같은 위상에도 불구하고 백악시단은 그간의 연구에서 충분히 조명되지 못한 측면이 있다.

 

첫 번째로 지적할 것은 백악시단의 존재를 실체적으로 규명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백악사단(白岳詞壇)’이라는 명칭으로 최초의 의미부여를 시도한 최완수는 백악사단을 백악산(白岳山)인왕산(仁王山) 아래의 순화방(順化坊)에 살면서 조선성리학을 바탕으로 조선 산천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진경시문학(眞景詩文學)을 크게 부흥시킨, 삼연(三淵)과 그를 추종하던 일군의 문인들로 규정하였다최완수, 謙齋 鄭敾 眞景山水畵(범우사, 2000), 272. 이 글은謙齋眞景山水畵考(澗松文華21, 1981)을 다듬어 다시 수록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논고는 겸재 정선을 중심에 두고 정선의 교유범위를 하나의 그룹으로 묶으려 했기 때문에 백악사단의 구성원은 서울에서 활동한 서인(西人) 전체에 대응될 만큼 광범위한 인물들을 포괄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동인으로서의 백악사단은 그 구체적인 상을 파악하기 어렵게 되었다. 민병수는 한국한시사(韓國漢詩史)에서 17세기 후반에 인왕산과 북악산 사이에 시단(詩壇)을 만들고 진시운동을 벌인 일군의 시인들을 백악시단(白嶽詩壇)’이라 명명하고 주요 구성원으로 김창협(金昌協), 김창흡(金昌翕), 이병연(李秉淵), 이하곤(李夏坤), 김시민(金時敏), 김시보(金時保), 유척기(兪拓基), 홍세태(洪世泰) 등을 제시하였다민병수, 韓國漢詩史(태학사, 1996), 366~367..

 

안대회 또한 18세기 한국한시사 연구에서 18세기 한시의 새로운 경향을 선도한 인물로 김창협과 김창흡을 든 뒤 이들을 중심으로 함께 활동한 김시보, 김시민, 이하곤, 신정하(申靖夏), 조유수(趙裕壽), 이정섭(李廷燮), 정선, 조영석(趙榮祏)과 같은 문인들을 백악시단이라 명명하였지만안대회, 18세기 한국한시사 연구(소명출판, 1999), 64., 동인으로서의 실체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한편 고연희는 이들 동인을 농연(農淵) 그룹이라 지칭하고 농연 형제를 포함하여 농연의 문인들이나 자손들을 중심으로 친밀하게 교류한 문인들로 규정하였으나 역시 주요 구성원에 대한 설정 문제는 구체적으로 논의하지 않았다고연희는 처음에는 최완수가 제시한 백악사단(白岳詞壇)’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는데, 이후 본인이 주안(主眼)하는 바에 따라 명칭을 바꾸어 사용하였다. 고연희, 17C18C白岳詞壇明淸文學 受用樣相(東方學1, 1996);17C18C白岳詞壇明淸代 繪畵 畵論受用양상(東方學3, 1997)..

 

이상의 주요 연구들은 백악시단이라는 문학동인의 존재를 상정하고 있으면서도 동인의 주요 구성원, 동인으로서의 문학 활동 등에 대해서는 상세한 고찰을 결()하고 있다. 이는 백악시단을 실체적 문학 동인으로 규정하는 데 수반되는 어려움 때문이기도 하고, 연구의 목적이 이들 동인을 실체적으로 규명하는 데 있지 않았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그런 까닭에 백악시단은 존재는 인정되나 실체는 모호한 상태로 남게 되었고, 후속 연구들은 백악시단의 존재를 언급하면서도 구성원 개개인에 대한 연구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그래서 김창흡, 이하곤, 신정하, 홍세태, 이병연 등 백악시단의 개별 구성원에 대한 연구는 활발하게 진행되었지만, 새로운 시작(詩作)을 위한 이들의 노력은 각 문인의 개별적인 성취로 그치고 백악시단의 문학 운동으로 조명되지 못하였다.

 

상기하였듯, 백악시단은 조선후기 한시의 변화를 가장 영향력 있게 선도 한 문인 그룹으로 평가받는다. 이들이 역설(力說)한 창작상의 ()’의 문제가 조선 후기 문예창작의 핵심적인 화두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진시창작을 위한 이들의 노력이 운동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바로 이 점이 백악시단의 진시진시운동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이고, 주요 구성원의 시론과 창작상의 성취를 백악시단 창작운동의 성과로 수렴해야 하는 까닭이다. 따라서 본고는 기존 연구가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다루었던 백악 시단의 실체를 규명하는 것을 일차적인 과제로 삼고자 한다.

 

두 번째로 지적할 것은 백악시단의 진시진시운동의 성격을 규명하는 문제이다. 최완수는 진경시문학(眞景詩文學)을 조선성리학을 바탕으로 조선의 고유색을 드러내기 위한 문예활동의 산물로 보았다최완수 외, 진경시대·1(돌베개, 1998), 14~23면 참조.. 진경시의 산생을 그들의 사상과 연결시켜 논구하였으나 그 연결이 전도된 측면이 있다. 백악시단이 제창한 진시는 전범을 모의하면서 사라진 대상과 주체의 ()’을 회복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제기된 것으로, 진실한 시를 창작하려다 보니 자연스럽게 관념 속 중국 산수가 아니라 내 눈 앞의 실제 산수를 형상화한 것이지, 조선 산수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겠다는 민족의식을 가지고 조선 산수를 형상화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민병수는 김창협과 김창흡이 복고파를 비판하면서 그 대안으로 진시개념을 창도한 것이라 밝히고, “천기(天機진기(眞機본색(本色진색(眞色) 등의 용어를 구사하며 진솔한 감정을 자연스럽게 표현하는것을 진시라고 규정하면서 천기론을 진시창작을 위한 시론으로 연결시켰다민병수, 조선후기 詩論硏究: 18세기를 중심으로(韓國文化11, 1990), 132면 참조..

 

그러나 백악시단이 추구한 진시의 사상적 토대에 대한 고려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은 까닭에 진시진시 운동의 성격이 문예적인 것으로만 국한된 한계가 있다. ‘진시에 대한 개념은 이후 강혜선, 김남기를 거치면서 더 체계화되었다. 강혜선은 백악시단이 내세운 ()’을 대상으로서의 진경(眞境)과 주체로서의 진정(眞情)으로 나누어 구조적으로 접근하였고강혜선, 槎川 李秉淵의 금강산시 연구(한국한문학연구16, 1993), 284~286면 참조., 김남기는 김창흡이 복고의 시학을 비판하고 반성하여 얻은 결과가 진시라고 하면서 창작주체의 성정지진(性情之眞)’과 객관대상의 물태지진(物態之眞)’이 결합한 시라 하였다김남기, 삼연 김창흡의 시문학 연구(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1), 19면 참조..

 

두 연구 모두 창작의 필연적 계기인 주체와 객체간의 관계로부터 진시를 규정하면서 구조적인 접근을 이루었으나, 역시 진시의 토대가 되는 사상과 진시의 핵심 이론인 천기론의 문제를 상세히 논구하지 않음으로써 진시진시운동의 의의를 폭넓게 제시하지 못했다.

 

상기 연구들을 통해 중요하게 부각되는 문제는 진시가 주창된 사상적 토대에 대한 검토의 필요성이다. 백악시단의 진시운동은 문학상의 굴기(崛起)가 분명하지만, 그러한 운동의 태동에는 운동 주체의 세계 인식, 학문적 경향 등 문학 외적 요소들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운동 주체가 견지하고 있었던 사상의 특징적 면모를 검토하고 이를 진시운동과 연결시켜 논의하는 과정은 진시자체는 물론 조선후기 문학사에서 특징적으로 포착되는 변화의 지표들이 지닌 성격과 의미를 가늠하게 할 것이다. 아울러 진시창작의 사상적 토대에 대한 검토는 백악시단의 시론 형성에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진 명대 복고파, 공안파 등 해외 문학유파와의 관계 설정에 있어서도 비판과 긍정의 실상을 분명히 드러냄으로써 백악시단의 진시운동이 지닌 특징을 동아시아적 시각에서 조망하게 할 것이다.

 

이상의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본고는 다음과 같은 단계를 밝아 논의를 진행하려 한다. 첫 번째 단계에서는 동인으로서의 백악시단의 구체적 실체를 규명하는 작업을 진행하려 한다. 이를 위해 문헌자료를 검토하여 백악시단의 핵심인물을 선정하고, 핵심인물의 문집에서 교유인물을 추출한 뒤, 일정한 조건을 기준으로 백악시단의 주요 구성원을 선별·확정하는 방법을 취할 것이다. 그리고 선별된 인물들을 바탕으로 이들이 동인으로서 어떠한 활동을 벌였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피고자 한다. 이 작업을 통해 기존 연구가 놓친 백악시단의 구성원에 대한 객관적 근거를 확보하고, 존재는 인정되나 모호하게 인식되었던 백악시단의 실체를 명확하게 드러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백악시단의 진시운동이 지닌 성격과 의의를 밝힐 것이다. 이를 위해 먼저 백악시단의 진시가 산생된 사상적·학문적 토대를 검토하고 거기서 발견된 특징적 면모가 ()’의 문제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살필 것이다. 다음으로 진시론의 구체적인 내용을 검토하면서 백악시단의 진시론이 지닌 특징을 밝히고, 이를 명대 복고파, 공안파의 시론들과 비교함으로써 백악시단의 진시론이 지닌 성격과 의미를 한층 분명히 제시할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진시창작의 핵심 이론이 되는 천기론에 대한 검토를 진행할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 천기에 대한 백악시단 문인들의 이해 양상을 밝힐 것이며, 나아가 백악시단의 문인들이 철학으로서의 천기 개념을 어떻게 진시창작의 문학론으로 전화(轉化)시켰는지도 살피게 될 것이다.

 

세 번째 단계에서는 실제 작품을 통해 진시의 실상과 미적 성취를 규명할 것이다. 실제 작품을 분석하는 과정을 통해 진시창작을 위한 그들의 논리가 어떻게 실제 작품으로 구현되었는지를 살피고, 나아가 그들이 역설했던 창작상의 ()’이 어떤 성격을 지닌 것이었는지를 고찰하게 될 것이다. 아울러 이 과정을 통해 백악시단의 진시가 전대의 작품과는 어떤 차이점을 보이며 자신들만의 미적 성취를 이루었는지를 선보일 것이다.

 

네 번째 단계에서는 백악시단의 진시진시운동이 지닌 시사적(詩史的) 의의를 조망할 것이다. 앞서의 논의를 바탕으로 진시운동이 당대와 후대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살피고, 그 성과와 한계를 짚어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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