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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술, 백악시단의 진시연구 - 1. 서론 & 2. 백악시단의 형성과 문학 활동 본문

한문놀이터/논문

김형술, 백악시단의 진시연구 - 1. 서론 & 2. 백악시단의 형성과 문학 활동

건방진방랑자 2019. 11. 30.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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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악시단(白嶽詩壇)의 진시(眞詩) 연구(硏究)

 

김 형 술

서울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국문학전공

 

 

국문초록

 

 

백악시단(白嶽詩壇)진시(眞詩)’ 창작을 목표로 1682년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여 18세기 중반을 전후로 활동이 약해진 문인 그룹으로서, 주요 구성원은 김창협(金昌協), 김창흡(金昌翕), 김부현(金富賢), 홍세태(洪世泰), 조정만(趙正萬), 김창업(金昌業), 김시보(金時保), 이해조(李海朝), 조유수(趙裕壽), 이병연(李秉淵), 권섭(權燮), 김영행(金令行), 이병성(李秉成), 이하곤(李夏坤), 박태관(朴泰觀), 신정하(申靖夏), 김시민(金時敏), 안중관(安重觀), 정내교(鄭來僑) 등이다. 이들은 사우(師友), 인척(姻戚)관계로 맺어진 결속력 높은 문학 동인(同人)으로서 시경(詩經)의 정신을 오늘에 되살려 민멸(泯滅)된 시도(詩道)를 진작하겠다는 고원(高遠)한 이상을 견지하고 있었다. 백악시단의 이러한 이상은 시를 단순히 교양의 차원에서 사고하거나 필력(筆力) 과시의 수단으로 여겼던 창작 풍토에 대한 비판적 인식에서 출발한 것으로, 백악시단은 시학(詩學)을 도학(道學)의 수준까지 궁구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이들은 활발한 동인 활동을 통해 시론(詩論)을 정비하고, 정비된 시론을 바탕으로 새로운 창작을 실천하였으며, 상호간의 비평을 통해 작품의 성취를 공유해 나갔다.

 

백악시단의 진시(眞詩)’는 폭넓은 독서와 자득(自得)의 학문정신을 근간으로 하고 있었다. 이들은 주자학(朱子學)을 근간으로 하면서도 주자학을 묵수하지 않고 다양한 학문적 성과에 개방적인 자세를 보였다. 특히 중시한 것은 폭넓은 공부를 통해 자득한 견해를 갖는 것이었는데, 이들은 자득한 것이라야 진짜[]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학문정신은 백악시단의 진시창작과 긴밀하게 연결되었다.

 

백악시단의 진시론은 전범의 재현을 복고의 방편으로 삼은 결과 작가의 개성이 사라져버린 전대 복고파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하였다. 백악시단이 보기에 복고파의 가장 큰 문제는 작품을 통해 발양되어야 할 작가의 정신은 사라져버리고 전범의 언어나 분위기만을 가져다가 자기를 포장하는 것이었다. 백악시단은 그런 복고를 가짜복고라고 여겼다. 그래서 이들은 학시(學詩)에 있어서는 시어나 수사 차원의 모의(模擬)를 지양하고 전범에 내재한 작가의 정신을 체득해야 하며, 창작에 있어서는 자득한 바를 자가(自家)의 언어로 표현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것을 실현하기 위해 부단한 학문과 수양을 중시하였다. 백악시단의 진시진시인(眞詩人)이 만유(萬有)와의 교감에서 얻은 자신의 사유와 감정을 진실하게 담아낸 시라 정의할 수 있는데, 이때 진시인(眞詩人)’은 학문과 수양을 통해 높은 정신적 경지를 갖춘 작가를 의미한다. 이처럼 주체의 고원한 역량을 중시하는 진시는 도()와 문()은 하나라는 주자학의 문학관에 뿌리를 둔 것이었다.

 

주자학에 입각하여 정신성을 강조하는 백악시단의 진시론은 명대 복고파와 공안파(公安派)진시론과 뚜렷한 차이를 보였다. 명대 복고파는 천지자연(天地自然)의 소리라는 입장에서 민간의 노래를 진시라고 여겼다. 그래서 복고파는 전범 학습을 통해 진시의 원형을 발견하고, 전범의 창작(創作) 원리(原理=)를 깨우치고자 하였다. 그러나 명대 복고파의 법은 그들이 문학을 구속한다고 여겼던 사상을 떼어버린 결과 수사(修辭) 원리(原理)로 축소되었고, ()을 절대화할수록 그들의 복고는 형식적, 수사적 복고로 흘러갔다. 명말(明末)의 공안파는 복고파의 형식적 복고를 표절(剽竊)이라 비판하면서 진시를 주장하였다. 그들은 고금(古今)을 상대적으로 인식하는 논리를 통해 복고파의 복고 당위성을 전복(顚覆)하고 작가의 성령(性靈)에서 우러나오는 시야말로 진시라고 주장하였다. 공안파의 진시는 양명좌파(陽明左派)의 심학(心學)에 뿌리를 두었기 때문에, 흉중에서 우러나오는 본능적 욕망까지도 시를 통해 표현해야 한다고 여겼다.

 

폭넓은 독서를 통해 명대 문단의 추이를 통효(通曉)하고 있었던 백악시단은 주자학에 입각하여 명대 복고파와 공안파의 문학론을 장단취사(長短取捨)하였다. 백악시단은 명대 복고파처럼 고()를 이상적 경지로 상정하면서도, 복고파가 전범에 대한 수사적 재현을 통해 고()를 실현하려 한 점에 대해서는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였다. 또한 공안파가 제시한 고금의 현실적 차이와 진실한 감정 표현에 대해서는 수긍했지만, 공안파의 진정(眞情)이 검속함이 없는데 이른 것에 대해서는 신랄한 비판을 가하였다. 이렇듯 백악시단의 진시론은 주자학을 토대로 명대 문학론을 통섭함으로써 자득한 시론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백악시단은 진시창작을 위해 그 핵심시론인 천기론(天機論)을 본격적으로 제시하였다. 천기(天機)는 송대(宋代) 도학자들에 의해 성리학의 체계로 흡인된 용어로, ‘천리(天理)의 유행(流行)이 발현되는 오묘한 곳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어 왔다. 백악시단은 이런 성리학적 천기 관념을 문학론으로 발전시켰다. 백악시단의 천기론은 창작의 필연적 두 계기인 대상과 주체의 측면에서 정교하게 다듬어졌다. 백악시단은 대상의 측면에서는 대상에 오묘하게 발현된 천기와 조우하고 그것을 통해 천리를 체인(體認)하려 하였고, 주체의 측면에서는 대상의 천기와 조우하고 천리를 체인할 수 있는 주체, 즉 학문과 수양을 통해 천부의 인격 상태에 도달한 주체를 상정하였다. 그리고 천부의 인격 상태에 도달한 주체가 만유와의 교감 속에서 자신의 사유와 정감을 진실하게 드러낸 시를 진시라 하였다. 시론으로서의 천기론은 종래의 성정론과 상합(相合)하여 다채로운 창작상의 변화를 가져왔다.

 

첫 번째로 종래의 성정론이 창작 주체의 측면을 중시한 것에 비해, 천기론은 시적 대상 그 자체의 의의를 한층 강화하였다. 천기론은 대상을 완물상지(玩物喪志)의 경계 대상이 아니라 격물치지(格物致知)의 탐구 대상으로 전환하는 논리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백악시단은 대상과의 실제 교감을 통해 대상의 진면목을 포착할 것을 중시하였고, 그것을 통해 시적 대상은 한층 더 핍진한 형상으로 그려질 수 있었다.

두 번째로 천기론은 천부의 본연한 마음으로 대상과 교감하고 거기서 발현된 사유나 정감을 꾸밈없이 형상화할 것을 주문함으로써 진솔한 창작을 중시하게 하였다.

세 번째로 천기론은 진실한 창작이 전제되면, 시인 각자의 천기가 작품에 반영된다는 논리를 통해 창작상의 개성을 중시하게 하였다.

 

백악시단은 이상의 시론을 실제 창작을 통해 구현하였다. 산수를 천기 조우의 장으로 여겼던 백악시단은 열정적인 산수 유람을 통해 산수의 진면목을 형상화함으로써 전대 산수시가 대상 산수 그 자체보다는 산수에서 느낀 작가의 흥취를 위주로 하여 대상 산수를 충분히 드러내지 못한 점을 극복하였다. 민생(民生)을 형상화한 작품들에서도 백악시단은 시적 대상인 민생의 현장에 한발 더 밀착해 들어갔다. 그렇기에 천민(天民)이 고통 받는 현실에 대해 더욱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형상화를 할 수 있었다. 또한 민생에의 밀착은 전통적 애민시를 벗어나 민생 자체의 형상화를 이끌어 내었다. 이를 통해 민()의 삶은 질박하지만 정감 있고 자신들의 세계를 스스로 개척할 수 있는 자생력을 지닌 존재로도 그려질 수 있었다. 한편, 자신들의 일상을 형상화하면서는 처정(處靜)한 삶 속에서 대상 경물과의 정신적 소통을 이지적(理智的)이고 한아(閒雅)한 흥취로 담아내었다. 또한 일상의 다양한 감정을 담아내면서는 누구나 공감하며 울고 웃을 수 있는 진정을 진솔하게 형상화하였다. 백악시단의 진시는 심오한 철리(哲理)를 형상화한 것부터 해학적 웃음을 담은 시에 이르기까지 도덕과 예술이 하나의 경지로 고양되는 유가 전통의 심미 이상을 추구한 결과였다.

 

백악시단이 내세운 창작상의 의 문제는 조선후기를 관통하며 ()’()’을 강조하는 문예론을 선도하였다. 아울러 백악시단은 시학과 창작의 가치를 도학에 버금가게 설정함으로써 교양이나 사교의 수준의 시 창작을 전문의 영역으로 끌어올렸다. 또한 대상의 의의를 중요하게 설정했던 천기론은 물성(物性)에 대한 더욱 섬세한 고찰과 형상화로 이어졌으며, 민생의 삶을 주목했던 시편들은 민요풍 한시와 이른바 조선시(朝鮮詩)’로 발전하였다. 이처럼 백악 시단의 진시창작을 위한 일련의 문학행위는 백악시단이라는 일군(一群)의 동인들이 민멸된 시도를 진작하겠다는 분명한 목적의식을 바탕으로 진시창작을 위한 시론을 정비하고, 부단한 시작(詩作)을 통해 창작상의 뚜렷한 성취를 이루었으며, 후배 문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쳐 조선후기 한시의 쇄신을 이끌었다는 점에서, 일종의 문학 운동으로 조명받기에 충분하다. 백악시단의 진시운동은 양란 이후의 동아시아적 정치 환경, 철학과 문학상의 변동에 조응하여 조선의 문인들이 선택한 문학 쇄신의 한 방향이었다.

 

 

주요어: 朝鮮後期, 白嶽詩壇, 眞詩, 天機論, 朱子學, 道文合一, 復古派, 公安派, 農巖 金昌協, 三淵 金昌翕, 槎川 李秉淵, 恕菴 申靖夏, 澹軒 李夏坤

 

 

 

. 서론

 

 

조선후기는 대체로 변화, 발전의 시기로 부각되어 왔다. 생산력의 발전을 토대로 사회계층의 분화가 가속화되고, 절대적 이념이었던 주자학을 대체할 새로운 사상이 모색되기도 하는 등 조선후기는 사회·경제적 토대로부터 이념에 이르기까지 총체적 변화의 일로에 있었고, 이러한 제 변화상들은 중세를 해체하고 자생적으로 근대로 이행하는 발전적인 징후로 간주되어 왔다. 문학사 연구 또한 유사한 시각을 보였다. 다변화된 문학담당층은 기존 사대부 중심의 문학과 한편으론 교섭하고 한편으론 그로부터 일탈해가며 문학의 다양성을 이끌었고, 사대부들은 주자학의 문학론을 벗어나 새로운 문학이론을 정립해 갔다. ‘일상성(日常性)’, ‘기속(紀俗)’, ‘()과 실()’, ‘천기(天機)’, ‘반의고(反擬古)’, ‘개성(個性)’, ‘민족문학(民族文學)’ 등등의 키워드는 조선후기 문학이 일구어낸 의미 있는 성과이자 조선후기 한문학을 규정하는 특징들로 정립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연구 성과는 한국 문학의 자생적 연속성을 뒷받침하며 확대되었다.

 

그러나 위와 같은 다각적인 조명에도 불구하고, 선행연구에서는 조선후기 한문학의 제 변화상을 고찰하는 과정에서 문학 작품이 보여준 결과적 특징만을 주목한 나머지, 그러한 변화들이 무엇을 기반으로 어떤 과정을 거쳐 산생된 것인지에 대한 논구에는 다소 소홀한 측면이 있다. 조선후기 문인들은 왜 전대 문인들을 비판하며 창작상의 변화를 도모했던 것일까? 나아가 그 변화는 과연 무엇을 위해 진행되었던 것인가? 본고가 기존 연구의 다양한 성과를 충분히 수용하면서도 다시 이 같은 질문을 던지는 것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통관할 때 조선후기 한시 작품이 보인 다양한 변화가 더욱 풍부하게 음미될 수 있고, 또한 실상에 근사한 해석이 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본고의 연구 대상인 백악시단(白嶽詩壇)은 대단히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백악시단은 17C ~18C 전반기에 걸쳐 백악을 창작의 근거지로 삼아 활동한 문인그룹으로, 창작상의 ()’의 문제를 전면적으로 내세우며 규범과 격식으로부터의 탈피’, ‘개성의 추구와 변화의 시도’, ‘진실한 표현과 사실적 묘사안대회, 18세기 한국한시사 연구(소명출판, 1999), 39~53면 참조.으로 요약될 수 있는 18세기 한시의 주요한 특징들을 선도적으로 이끌었다.

 

아울러 그들의 진시(眞詩)’운동과 천기론은 문학담당층과 장르를 넘어 조선후기에 진문예(眞文藝) 담론(談論)이 확산, 정착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그런 까닭에 백악시단의 시론과 작품을 검토하는 일은 조선후기 한시사의 변화의 실상과 쇄신의 방향을 가늠할 수 있는 긴요한 작업이 될 것이다. 이들의 창작상의 변화 모색은 문인의 개별적 지향에 그친 것이 아니라, 일군의 동인(同人)들이 이론과 작품에 대한 부단한 비평과 교감을 통해 자신들의 시적 지향을 일세에 확산시킨 운동으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후기 한시사의 전개에 있어 백악시단이 지닌 이 같은 위상에도 불구하고 백악시단은 그간의 연구에서 충분히 조명되지 못한 측면이 있다.

 

첫 번째로 지적할 것은 백악시단의 존재를 실체적으로 규명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백악사단(白岳詞壇)’이라는 명칭으로 최초의 의미부여를 시도한 최완수는 백악사단을 백악산(白岳山)인왕산(仁王山) 아래의 순화방(順化坊)에 살면서 조선성리학을 바탕으로 조선 산천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진경시문학(眞景詩文學)을 크게 부흥시킨, 삼연(三淵)과 그를 추종하던 일군의 문인들로 규정하였다최완수, 謙齋 鄭敾 眞景山水畵(범우사, 2000), 272. 이 글은謙齋眞景山水畵考(澗松文華21, 1981)을 다듬어 다시 수록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논고는 겸재 정선을 중심에 두고 정선의 교유범위를 하나의 그룹으로 묶으려 했기 때문에 백악사단의 구성원은 서울에서 활동한 서인(西人) 전체에 대응될 만큼 광범위한 인물들을 포괄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동인으로서의 백악사단은 그 구체적인 상을 파악하기 어렵게 되었다. 민병수는 한국한시사(韓國漢詩史)에서 17세기 후반에 인왕산과 북악산 사이에 시단(詩壇)을 만들고 진시운동을 벌인 일군의 시인들을 백악시단(白嶽詩壇)’이라 명명하고 주요 구성원으로 김창협(金昌協), 김창흡(金昌翕), 이병연(李秉淵), 이하곤(李夏坤), 김시민(金時敏), 김시보(金時保), 유척기(兪拓基), 홍세태(洪世泰) 등을 제시하였다민병수, 韓國漢詩史(태학사, 1996), 366~367..

 

안대회 또한 18세기 한국한시사 연구에서 18세기 한시의 새로운 경향을 선도한 인물로 김창협과 김창흡을 든 뒤 이들을 중심으로 함께 활동한 김시보, 김시민, 이하곤, 신정하(申靖夏), 조유수(趙裕壽), 이정섭(李廷燮), 정선, 조영석(趙榮祏)과 같은 문인들을 백악시단이라 명명하였지만안대회, 18세기 한국한시사 연구(소명출판, 1999), 64., 동인으로서의 실체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한편 고연희는 이들 동인을 농연(農淵) 그룹이라 지칭하고 농연 형제를 포함하여 농연의 문인들이나 자손들을 중심으로 친밀하게 교류한 문인들로 규정하였으나 역시 주요 구성원에 대한 설정 문제는 구체적으로 논의하지 않았다고연희는 처음에는 최완수가 제시한 백악사단(白岳詞壇)’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는데, 이후 본인이 주안(主眼)하는 바에 따라 명칭을 바꾸어 사용하였다. 고연희, 17C18C白岳詞壇明淸文學 受用樣相(東方學1, 1996);17C18C白岳詞壇明淸代 繪畵 畵論受用양상(東方學3, 1997)..

 

이상의 주요 연구들은 백악시단이라는 문학동인의 존재를 상정하고 있으면서도 동인의 주요 구성원, 동인으로서의 문학 활동 등에 대해서는 상세한 고찰을 결()하고 있다. 이는 백악시단을 실체적 문학 동인으로 규정하는 데 수반되는 어려움 때문이기도 하고, 연구의 목적이 이들 동인을 실체적으로 규명하는 데 있지 않았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그런 까닭에 백악시단은 존재는 인정되나 실체는 모호한 상태로 남게 되었고, 후속 연구들은 백악시단의 존재를 언급하면서도 구성원 개개인에 대한 연구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그래서 김창흡, 이하곤, 신정하, 홍세태, 이병연 등 백악시단의 개별 구성원에 대한 연구는 활발하게 진행되었지만, 새로운 시작(詩作)을 위한 이들의 노력은 각 문인의 개별적인 성취로 그치고 백악시단의 문학 운동으로 조명되지 못하였다.

 

상기하였듯, 백악시단은 조선후기 한시의 변화를 가장 영향력 있게 선도 한 문인 그룹으로 평가받는다. 이들이 역설(力說)한 창작상의 ()’의 문제가 조선 후기 문예창작의 핵심적인 화두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진시창작을 위한 이들의 노력이 운동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바로 이 점이 백악시단의 진시진시운동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이고, 주요 구성원의 시론과 창작상의 성취를 백악시단 창작운동의 성과로 수렴해야 하는 까닭이다. 따라서 본고는 기존 연구가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다루었던 백악 시단의 실체를 규명하는 것을 일차적인 과제로 삼고자 한다.

 

두 번째로 지적할 것은 백악시단의 진시진시운동의 성격을 규명하는 문제이다. 최완수는 진경시문학(眞景詩文學)을 조선성리학을 바탕으로 조선의 고유색을 드러내기 위한 문예활동의 산물로 보았다최완수 외, 진경시대·1(돌베개, 1998), 14~23면 참조.. 진경시의 산생을 그들의 사상과 연결시켜 논구하였으나 그 연결이 전도된 측면이 있다. 백악시단이 제창한 진시는 전범을 모의하면서 사라진 대상과 주체의 ()’을 회복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제기된 것으로, 진실한 시를 창작하려다 보니 자연스럽게 관념 속 중국 산수가 아니라 내 눈 앞의 실제 산수를 형상화한 것이지, 조선 산수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겠다는 민족의식을 가지고 조선 산수를 형상화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민병수는 김창협과 김창흡이 복고파를 비판하면서 그 대안으로 진시개념을 창도한 것이라 밝히고, “천기(天機진기(眞機본색(本色진색(眞色) 등의 용어를 구사하며 진솔한 감정을 자연스럽게 표현하는것을 진시라고 규정하면서 천기론을 진시창작을 위한 시론으로 연결시켰다민병수, 조선후기 詩論硏究: 18세기를 중심으로(韓國文化11, 1990), 132면 참조..

 

그러나 백악시단이 추구한 진시의 사상적 토대에 대한 고려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은 까닭에 진시진시 운동의 성격이 문예적인 것으로만 국한된 한계가 있다. ‘진시에 대한 개념은 이후 강혜선, 김남기를 거치면서 더 체계화되었다. 강혜선은 백악시단이 내세운 ()’을 대상으로서의 진경(眞境)과 주체로서의 진정(眞情)으로 나누어 구조적으로 접근하였고강혜선, 槎川 李秉淵의 금강산시 연구(한국한문학연구16, 1993), 284~286면 참조., 김남기는 김창흡이 복고의 시학을 비판하고 반성하여 얻은 결과가 진시라고 하면서 창작주체의 성정지진(性情之眞)’과 객관대상의 물태지진(物態之眞)’이 결합한 시라 하였다김남기, 삼연 김창흡의 시문학 연구(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1), 19면 참조..

 

두 연구 모두 창작의 필연적 계기인 주체와 객체간의 관계로부터 진시를 규정하면서 구조적인 접근을 이루었으나, 역시 진시의 토대가 되는 사상과 진시의 핵심 이론인 천기론의 문제를 상세히 논구하지 않음으로써 진시진시운동의 의의를 폭넓게 제시하지 못했다.

 

상기 연구들을 통해 중요하게 부각되는 문제는 진시가 주창된 사상적 토대에 대한 검토의 필요성이다. 백악시단의 진시운동은 문학상의 굴기(崛起)가 분명하지만, 그러한 운동의 태동에는 운동 주체의 세계 인식, 학문적 경향 등 문학 외적 요소들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운동 주체가 견지하고 있었던 사상의 특징적 면모를 검토하고 이를 진시운동과 연결시켜 논의하는 과정은 진시자체는 물론 조선후기 문학사에서 특징적으로 포착되는 변화의 지표들이 지닌 성격과 의미를 가늠하게 할 것이다. 아울러 진시창작의 사상적 토대에 대한 검토는 백악시단의 시론 형성에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진 명대 복고파, 공안파 등 해외 문학유파와의 관계 설정에 있어서도 비판과 긍정의 실상을 분명히 드러냄으로써 백악시단의 진시운동이 지닌 특징을 동아시아적 시각에서 조망하게 할 것이다.

 

이상의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본고는 다음과 같은 단계를 밝아 논의를 진행하려 한다. 첫 번째 단계에서는 동인으로서의 백악시단의 구체적 실체를 규명하는 작업을 진행하려 한다. 이를 위해 문헌자료를 검토하여 백악시단의 핵심인물을 선정하고, 핵심인물의 문집에서 교유인물을 추출한 뒤, 일정한 조건을 기준으로 백악시단의 주요 구성원을 선별·확정하는 방법을 취할 것이다. 그리고 선별된 인물들을 바탕으로 이들이 동인으로서 어떠한 활동을 벌였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피고자 한다. 이 작업을 통해 기존 연구가 놓친 백악시단의 구성원에 대한 객관적 근거를 확보하고, 존재는 인정되나 모호하게 인식되었던 백악시단의 실체를 명확하게 드러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백악시단의 진시운동이 지닌 성격과 의의를 밝힐 것이다. 이를 위해 먼저 백악시단의 진시가 산생된 사상적·학문적 토대를 검토하고 거기서 발견된 특징적 면모가 ()’의 문제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살필 것이다. 다음으로 진시론의 구체적인 내용을 검토하면서 백악시단의 진시론이 지닌 특징을 밝히고, 이를 명대 복고파, 공안파의 시론들과 비교함으로써 백악시단의 진시론이 지닌 성격과 의미를 한층 분명히 제시할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진시창작의 핵심 이론이 되는 천기론에 대한 검토를 진행할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 천기에 대한 백악시단 문인들의 이해 양상을 밝힐 것이며, 나아가 백악시단의 문인들이 철학으로서의 천기 개념을 어떻게 진시창작의 문학론으로 전화(轉化)시켰는지도 살피게 될 것이다.

 

세 번째 단계에서는 실제 작품을 통해 진시의 실상과 미적 성취를 규명할 것이다. 실제 작품을 분석하는 과정을 통해 진시창작을 위한 그들의 논리가 어떻게 실제 작품으로 구현되었는지를 살피고, 나아가 그들이 역설했던 창작상의 ()’이 어떤 성격을 지닌 것이었는지를 고찰하게 될 것이다. 아울러 이 과정을 통해 백악시단의 진시가 전대의 작품과는 어떤 차이점을 보이며 자신들만의 미적 성취를 이루었는지를 선보일 것이다.

 

네 번째 단계에서는 백악시단의 진시진시운동이 지닌 시사적(詩史的) 의의를 조망할 것이다. 앞서의 논의를 바탕으로 진시운동이 당대와 후대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살피고, 그 성과와 한계를 짚어볼 것이다.

 

 

 

 

. 백악시단(白嶽詩壇)의 형성과 문학 활동

 

 

1. 백악시단의 주요 구성원

 

 

백악시단의 실체를 가늠해볼 수 있는 문헌으로는 다음과 같은 자료를 들 수 있다.

 

 

북리(北里) 문회(文會)의 성대함은 삼연(三淵, 金昌翕) 선생께서 실로 창도하고 북리의 여러 이름난 분들이 서로 겨루고 좇았으니 풍치(風致)가 남들보다 뛰어났다. 나는 어려서부터 이미 여러 공들의 이름을 외며 추앙하고 상상하기를 마치 하늘에 계신 분들처럼 여겼다. 중년이 되어 비로소 북리에 들어갔는데 지난 날 여러 공들은 이미 여러 곳으로 흩어져 붓을 고르고 먹을 갈며 술을 마시는 후미에서 한번 조용히 받들지 못했다. 다시 수십 년 뒤에는 여러 어른들께서 차례로 세상을 떠나심에 남은 풍모와 큰 운치를 다시 볼 수 없었다.

北里文會之盛, 三淵先生實爲之倡, 而里中諸名勝, 相與頡頏周旋, 標致絶人. 自余幼少時, 已誦諸公之名, 而企仰想像, 若在霄漢. 逮至中歲, 始入北里, 則向之諸公, 已落落散處, 不得一奉 從容於筆硯樽席之後. 又後數十年, 諸老次第就世, 遺風弘韻, 不可復見. -李秉成, 順菴集5 題寤齋趙尙書追悼三淵諸公詩後

 

산을 등지고 있는 거주지는 모두 이름난 구역인데, 대은암(大隱巖)이 가장 빼어나다. 처음에 남곤(南袞)이 거주하게 되면서 읍취헌(挹翠軒, 朴誾)과 같은 여러 공들이 함께 어울려 교유하였으니 사람의 깨끗함과 더러움은 비록 다르지만 그 땅은 알려지게 되었다. 중간에는 백록(白麓, 辛應時)의 소유가 되었고 농암(農巖, 金昌協), 삼연(三淵, 金昌翕) 두 선생에 이르러서는 북록(北麓)의 문채가 더욱 알려져 풀과 나무, 바위와 물이 지금도 훤한 빛을 지니게 되었으니 하물며 대은암(大隱巖)에 있어서랴! 사천(槎川) 이공(李公, 李秉淵)께서 그 뒤를 이어 일어나심에, 그 문하에서 명승을 유람하던 자들은 일세(一世)를 움직이던 사람들인데, 아회(雅會)는 모두 대은암(大隱巖)을 귀의처로 삼았다. 사천(槎川)께서 돌아가심에 백악 아래의 풍류 또한 쇠하게 되었다. 그러나 좋은 계절에 아름다운 경치가 있으면 술자리를 마련하고 벗들을 맞이하는 것은 선배들의 유풍(遺風)과 같았으니 이 시첩도 곧 그 하나이다. 대은암의 빼어남이 다시 이 시첩으로 인해 드러나게 되었으니 또한 그 옛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다.

負嶽而居者, 皆名區也, 而大隱巖最勝. 始南袞居之, 挹翠諸公並與之遊, 人之淸汚雖別, 地則顯矣. 中爲辛白麓之有, 及農淵二先生, 而北麓之文采益顯, 草樹巖泉, 至今有耿光, 況大隱哉! 槎川李公繼而作焉, 名勝之遊其門者傾一世, 而雅會則皆以大隱爲歸. 槎川下世, 而嶽下之 風流亦衰. 然良辰美景, 朋酒招邀, 猶先輩之遺風, 而是帖卽其一也. 大隱之勝, 復因之而彰, 亦 可以想見其舊也. -成大中, 靑城集8 大隱雅集帖跋

 

국조(國朝)의 시운(詩運)은 경도(京都)에서 먼저 열렸는데 경도의 시는 옛날부터 동촌(東村)과 북촌(北村)이 가장 성대했다고 일컬어졌다. 그러나 숙종, 영조 연간에는 북촌이 더욱 성대하였다. 김농암(金農巖)과 삼연(三淵) 두 선생께서 유학(儒學)으로 현저(顯著)하면서부터 시 또한 창기(倡起)함이 걸출하여 풍격(風格)이 일세(一世)를 뒤덮었으니 세상에서 시로 전해지는 자 가운데 근 백년 이래로는 이 분들보다 나은 자가 없었다. 사천(槎川) 이공께서 뒤이어 일어나 우뚝하게 사단(詞壇)에 큰 자리를 차지하고 우이(牛耳)를 잡으심에 같은 시대 모주(茅洲, 金時保), 증소(橧巢, 金信謙), 동포(東圃, 金時敏)와 같은 여러 김공과 아래로 柳下 홍세태(洪世泰)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시로써 대명(大名)을 얻었다. 이에 사람들은 누구나 북촌의 시를 높이 사지 않음이 없었다.

國朝詩運開先京都, 京都之詩, 自古稱東北二村爲最盛, 而至肅英之際, 北尤盛. 粤自金農 巖三淵二先生以儒學顯, 而詩亦倡起傑出, 風格掩一世, 世之言詩者, 近百年以來, 靡有右稱. 而槎川李公繼起矣, 嵬然大坐詞壇, 執牛耳盟, 同時有茅洲橧巢東圃諸金公, 下至於洪柳下, 皆以詩得大名. 於是人莫不高北村之詩. -兪漢雋, 自著續集3 八灘南公詩集序

 

 

첫 번째 자료는 순암(順菴) 이병성(李秉成, 1675~1735)의 글로, 오재(寤齋) 조정만(趙正萬, 1656~1739)이 지기였던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 1653~1722), 노가재(老稼齋) 김창업(金昌業, 1658~1721), 옥오재(玉吾齋) 송상기(宋相琦, 1657~1723)를 애도하기 위해 쓴 장편의 만시(輓詩)들을 읽고 붙인 것이다. 이병성은 이 글에서 북리(北里) 문회(文會)’의 성대함이 김창흡에 의해 창도되었고 이들 시회에는 여러 명공(名公)들이 함께 하여 그 풍치가 다른 사람들과는 크게 달랐다고 회억(回憶)하였는데 이 글에서 주목할 것은 이병성이 북리(北里)’ 곧 북촌(北村)이라는 공간에서 창작활동을 벌인 김창흡 중심의 문인 그룹을 실체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두 번째 자료는 청성(靑城) 성대중(成大中, 1732~1809)이 선배 문인들의 유풍을 따라 자신의 아홉 벗들과 수창한 시를 성첩(成帖)한 뒤에 붙인 글이다. 성대중은 이 글에서 김창협과 김창흡에 의해 북록(北麓)’의 문채가 더욱 세상에 현창(顯彰)되었으며 그 뒤를 사천(槎川) 이병연(李秉淵, 1671~1751)이 계승했다고 하였다. 아울러 이병연 문하의 문인들을 일세를 움직이던 사람들이라 하면서 이들이 이병연을 중심으로 아회를 이어나갔다고 하였다. 성대중의 이 글에서 주목할 것은 성대중이 대은암(大隱巖)을 중심으로 김창협, 김창흡과 이병연을 일련의 선후 관계로 파악하고 있으며 아회가 이들 핵심인물을 중심으로 왕성하게 이루어졌다고 밝힌 점이다.

 

세 번째 자료는 저암(著庵) 유한준(兪漢雋, 1732~1811)이 이병연의 문인이자 이병연의 시를 선발하기도 했던詩凡萬有三千餘首. 詩人南肅寬正叔所選者, 幾居其半.” -李秉淵, 槎川詩抄』「[洪樂純] 팔탄(八灘) 남숙관(南肅寬, 1704~1781)의 시집에 붙인 서문이다.

 

유한준은 조선초부터 융성했던 북촌의 시가 김창협과 김창흡에 이르러 그 풍격이 일세를 뒤덮었으며 이병연이 뒤를 이어 시단의 우이를 잡으면서 동시대에 교유하던 모주(茅洲) 김시보(金時保, 1658~1734), 증소(橧巢) 김신겸(金信謙, 1693~1738), 동포(東圃) 김시민(金時敏, 1681~1747), 유하(柳下) 홍세태(洪世泰, 1653~1725)가 모두 시로써 큰 명성을 얻었다고 하였다. 유한준의 이 글 또한 성대중의 기록처럼 김창협, 김창흡과 이병연을 계승 관계로 인식하고 있으며 이들의 창작과 성취가 집단적 활동에 기반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이상의 자료를 통해 우리는 몇 가지 핵심적인 면을 추출할 수 있는데, 첫째는 대은암(大隱巖)’, ‘북록(北麓)’, ‘북리(北里)’, ‘북촌(北村)’으로 지칭된 문학공간의 명칭이다. ‘대은암은 백악산 남쪽 기슭에 있는 바위 이름이고, ‘북록은 백악산을 지칭하는 명칭이며, ‘북리북촌은 백악산 아래에 형성된 마을을 통칭하는 말이다. 모두 백악과 관련된 공간인 것이다. 실제로 김창흡의 낙송루(洛誦樓)와 이병연의 취록헌(翠麓軒)은 백악 자락에 있었는데, 김창흡과 이병연을 중심으로 모여든 문인들이 부단한 창작을 통해 새로운 시풍을 선도해간 까닭에 백악이란 공간은 대단히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백악은 창작의 실제 공간이기도 하지만 그 상징성이 더 큰 공간이다. 후술을 통해 구체화될 주요 구성원들의 문학 활동을 살펴보면, 구성원에 따라 백악은 평생의 주거지인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가령 백악시단을 형성하고 이끌었던 김창흡의 경우, 그의 주된 창작 공간은 백악이 아니라 그의 은거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서 제시한 자료들이 김창흡과 백악을 긴밀하게 연결시켜 사고하는 것은, 그가 백악산 아래 낙송루(洛誦樓)를 짓고 시도(詩道) 진작을 목표로 시사(詩社)를 운영했을 때, 일군의 문인들이 그의 뜻에 동조하여 창작 의 새 방향을 모색하였고, 시사 활동이 종료된 후에도 문인들은 물리적 공간을 초월하여 시도(詩道) 진작(振作)의 창작정신을 공유하고 심화시켜 나갔기 때문이다. ‘백악이란 명칭을 물리적 공간 이름으로만 접근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고을살이나 은거를 위해 각지로 흩어져서도 자신의 시작(詩作)을 백악의 사우들과 공유하였고, 백악으로 돌아오면 백악에 남아있던 다른 사우들과 왕성한 시회를 통해 창작성과를 공유하였다. 김창흡 또한 은거지에서 백악으로 돌아오면 으레 백악에 남아있는 사우들을 찾아 시를 논하고 함께 시를 지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백악시단 구성원들의 심화된 시론이며 달라진 창작 스타일 등이 자연스럽게 확산, 공유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처럼 백악은 시도(詩道) 진작이라는 창작정신의 발원지이자 창작정신의 실천물이 구성원들에게 소통·확산되는 구심점으로서, 그 상징성이 더욱 큰 공간이라 할 수 있다..

 

둘째는 백악을 중심으로 한 문인들의 동인적(同人的) 창작활동이다. 동인적 창작활동의 구체적인 모습에 대해서는 다음 절에서 상술하겠지만, 위에 제시된 자료만으로도 이들의 시론과 창작이 시회와 같은 공동의 문학 활동 속에서 이루어졌음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셋째는 이들 문인 그룹이 김창흡을 중심으로 한 세대에서 이병연을 중심으로 한 세대로 계보적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병연의 아우였던 이병성은 자신의 선배 문인들을 김창흡을 중심으로 묶고 있으며, 이병연의 후배 문인들은 이병연을 중심으로 문인들을 그룹화하면서 이들 그룹이 김창흡 세대를 이은 것으로 인식하였다.

 

이상의 자료 분석을 통해 볼 때, 김창흡과 이병연을 중심으로 한 시대의 시 창작을 선도했던 문인 그룹은 백악시단이라 명명하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고 여겨진다. ‘백악이라는 공간이 지닌 상징적 의미는 앞서 언급한 대로이고, ‘시단이란 명칭은 앞선 자료가 보여주듯 이들 문인 그룹의 문학적 성취가 단연 시에서 두각을 보였기 때문이다백악시단이란 명칭을 기존 연구의 백악사단’, ‘농연 그룹과 비교해서 이해해 보면, ‘농연 그룹은 농암 김창협과 삼연 김창협의 문인들로서 도학(道學)과 문학에서 성취를 이룬 문인 집단을 지칭하는 명칭이고, ‘백악사단은 김창협과 김창흡의 문인들 가운데 백악을 문학창작의 근거지로 삼되 산문과 시에서 각각 성취를 이룬 문인 집단을 아울러 규정하는 명칭이며, ‘백악시단은 시문학에 있어 두각을 보인 문인 집단을 규정하는 명칭이라 할 수 있다..

 

 

이제 남은 과제는 백악시단의 주요 구성원을 설정하는 문제이다. 앞선 자료들을 통해서도 김창협, 김창흡, 홍세태, 조정만, 김시보, 이병연, 이병성, 김시민, 남숙관, 김신겸과 같은 다수의 구성원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앞에 열거한 문인들이 백악시단의 실체를 모두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일례로 김창협의 문인으로 진시의 이론을 정비하고, 백악시단 사우들의 작품을 품평하며, 시작(詩作)에 있어서도 빼어난 성취를 이룬 담헌(澹軒) 이하곤(李夏坤, 1677~1724), 서암(恕菴) 신정하(申靖夏, 1680~1715)는 백악시단의 핵심적인 구성원이라 할 수 있는데, 앞의 자료에서는 거론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하곤과 신정하를 백악시단의 주요 구성원으로 편입시키기 위해서는 객관적인 근거가 있어야 한다. 바로 이 객관성 확보가 백악시단의 구성원을 설정하는 데 있어 가장 긴요한 문제라 할 수 있다.

 

이에 본고는 백악시단의 주요 구성원을 확정함에 있어 일정한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지만 최대한의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접근해 보고자 한다. 먼저 백악시단의 핵심인물을 설정하고, 이들의 문집이나 시집에 나타난 교유인물들을 분석한 뒤, 교유의 친소(親疎)와 기간 등을 고려하여 주요 인물들을 가려내고, 그 가운데 백악이라는 문학공간과 일정한 관계를 가지고 시 창작에 매진하여 시로 명성을 얻은 인물을 백악시단의 주요 구성원으로 설정하고자 한다.

 

백악시단의 핵심인물은 앞의 자료에서 보았듯 김창흡과 이병연으로 볼 수 있는데, 김창흡과 이병연이 계보적으로 인식되고 있음에 착안하여 김창흡을 전기 백악시단의 핵심인물로, 이병연을 후기 백악시단의 핵심인물로 설정하기로 한다. 백악시단을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살피는 것은 백악시단의 형성과 전개과정에서 나타나는 변화의 모습을 살필 수 있는 이점이 있기 때문이다.

 

먼저 김창흡의 삼연집(三淵集)에 나타난 교유인물들 가운데 생애 전반에 걸쳐 10회 이상의 빈번한 교유여기서의 교유란 함께 유람을 하거나 수창(酬唱)을 한 경우를 말한다.를 보인 인물들을 선별해 보면, 장동(壯洞) 금문(金門)에서는 김창집(金昌集), 김창협(金昌協), 김창업(金昌業), 김창집(金昌緝), 김창립(金昌立) 등의 친형제김창집(金昌集)은 김창흡의 맏형이고 김창협(金昌協)은 둘째형이며 김창업(金昌業), 김창집(金昌緝), 김창립(金昌立)은 아우들이다., 김성적(金盛迪), 김성최(金盛最), 김성후(金盛後) 등의 족형제(族兄弟)김성적(金盛迪), 김성최(金盛最)는 김창흡의 족형(族兄)이며 김성후(金盛後)는 족제(族弟)이다., 김양겸(金養謙), 김치겸(金致謙), 김후겸(金厚謙), 김언겸(金彦謙), 김신겸(金信謙) 등의 자질(子姪)김양겸(金養謙), 김치겸(金致謙), 김후겸(金厚謙)은 김창흡의 아들이고 김언겸(金彦謙), 김신겸(金信謙)은 김창업의 2남과 3남이다., 김시걸(金時傑), 김시보(金時保), 김시좌(金時佐) 등의 족질(族姪)이며, 장동 김씨 이외에 교유했던 인물로는 조성기(趙聖期), 홍세태(洪世泰), 조정만(趙正萬), 송상기(宋相琦), 이희조(李喜朝), 이해조(李海朝), 유명악(兪命岳), 홍유인(洪有人), 이병연(李秉淵), 박태관(朴泰觀) 등이다.

 

김창흡의 교유 인물들에서 발견되는 특징은 교유의 범위가 자신의 가문과 인척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이다. 조성기와 조정만은 본관이 임천(林川)으로 재종(再從) 숙질(叔姪)간인데운강(雲江) 조원(趙瑗)은 전의이씨(全義李氏, 병조판서 李俊民)와의 사이에 44녀를 두었는데 장남이 조희정(趙希正), 차남이 조희철(趙希哲), 3남이 조희일(趙希逸), 4남이 조희진(趙希進)이다. 조성기는 조희진의 손자이고 조정 만은 조희일의 증손(曾孫)이다. 김창흡의 장동 김씨와는 죽음(竹陰) 조희일(趙希逸, 1575~1638)이 수북(水北) 김광현(金光炫, 1584~1647)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3남으로 김창흡에게는 종조부(從祖父)가 된다.과 사돈을 맺으면서 인척이 되었다.

송상기는 본관이 은진(恩津)으로 부친 성규렴(宋奎濂, 1630~1709)이 김창흡의 조부인 김광찬(金光燦, 1597~1668)의 사위인 관계로 김창흡에게는 고종사촌이 된다.

본관이 연안(延安)인 이희조와 이해조는 사촌간인데백주(白洲) 이명한(李明漢)은 나주박씨(羅州朴氏, 錦溪君 朴東亮)와의 사이에 41녀를 두었는데 장남이 이일상(李一相), 차남이 이가상(李嘉相), 3남이 이만상(李萬相), 4남이 이단상(李端相)이다. 이해조는 이일상의 3남이고, 이희 조는 이단상의 장남이다. 이희조의 부친인 정관재(靜觀齋) 이단상(李端相, 1628~1669)김창협과 김창흡의 스승이자 김창협의 장인인 관계로 김창협에게 이희조는 처남이 되고 이해조는 처사촌이 된다.

유명악은 본관이 기계(杞溪)로 부친인 유철(兪㯙, 1606~1671)이 김창흡의 백부인 김수증(金壽增, 1624~1701)과 사돈이 되면서 인척이 되었으며유철(兪㯙)31녀를 두었는데, 장남이 유명준(兪命舜), 차남이 유명건(兪命健), 3남이 유명악이다. 차남 유명 건이 김수증의 44녀 중 막내사위이다. 유명악은 김창흡에게서 수학하였다十六, 始受業于三淵金先生.” -兪拓基, 知守齋集13 先府君行狀.

홍유인은 본관이 남양(南陽)으로 그 의 부친인 홍문도(洪文度)가 김수증의 맏사위인 관계로 김창흡에게는 5촌 조카가 된다. 홍유인은 일찍 부친을 여읜 까닭에 어려서부터 외가에서 지낸 일이 많았는데 이를 통해 김창흡 형제와 매우 가깝게 지냈고, 특히 김창흡의 막내아우 김창립과는 시도(詩道)를 진작하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중택재시사(重澤齋詩社)을 만들기도 하였다仁甫早孤零丁, 與母歸依於世父膝下, 多在谷雲巖居與岳麓之無俗軒. 無俗軒卽我家連墻, 密邇晨夕, 一談一笑, 固無非擩染磨礲之地, 至於觸物流通, 亹亹來逼, 則吾兄弟皆所斂避. 而季弟昌立與仁甫齒比志合, 慨吾東詩道之頹而欲一振之, 遂建詩社, 曰重澤齋, 與羣彦講藝其中, 一聽鼓鑄於余, 所爲風雅之業, 斐然章且成矣.” -金昌翕, 三淵集27 洪仁甫墓誌銘.

이병연은 본관이 한산(韓山)으로 종형(從兄) 이병천(李秉天)이 김수증의 둘째 사위가 되면서 인척관계를 형성하였고 1696년 석실서원에서의 강학을 통해 김창협, 김창흡 문하의 일원이 되었다. 이처럼 김창흡이 주요하게 교유한 인물들은 대개 자기 가문의 인물이거나 혼인으로 맺어진 인척집안의 문인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밖에 교유의 기록은 많이 남아 있지 않지만, 주목해야 할 인물들로는 김창흡과 동년(同年)인 묘헌(妙軒) 이규명(李奎明)김창협, 김창흡의 문인에 속하는 홍중성(洪重聖), 정용하(鄭龍河), 이하곤, 신정하가 있다. 이규명은 김창흡이 고시(古詩)를 창도하고자 낙송루(洛誦樓) 시사(詩社)를 열었을 때 뜻을 함께하여 시사를 이끌었던 인물이다余少時從妙軒李公遊, 公家北山之下, 與三淵金公居相近. 時三淵倡爲古詩, 開洛誦樓, 以招 諸子, 而公同里並峙, 與之頡頑, 不相讓焉. 余於兩公, 卽同年生, 而一言道合, 如石投水, 許以 忘形之交, 故得遨遊兩間.” -洪世泰, 柳下集10 妙軒詩集跋.

홍중성은 어려서 김창흡을 종유하면서 시도(詩道)를 배운 인물인데 그의 시 서별낙송루제우(叙別洛誦樓諸友)(芸窩集1)를 통해 그의 낙송루시사 참여를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홍중성의 현손(玄孫)인 홍경모(洪敬謨)후계(后溪) 조유수(趙裕壽), 사천(槎川) 이병연(李秉淵),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 학암(鶴巖) 조문명(文命), 백하(白下) 윤후(尹淳), 창랑(滄浪) 홍세태(洪世泰) 등과 시사(詩社)를 결성하여 날을 잡아 주연을 갖추어 수약당(守約堂)에서 수창하였다[與趙后溪裕壽李槎川秉淵金三淵昌翕趙鶴巖文命尹白下淳洪滄浪世泰, 結爲詩社, 分日寘酒, 唱酬於守約堂. -洪敬謨, 四宜堂志』 「原敍·1].”원문은 이종묵의 사의당지, 우리 집을 말한다, 휴머니스트, 2009에서 인용함.며 시사 결성을 언급한 바 있다.

정용하는 송강(松江) 정철(鄭澈)5대손으로 결혼 후 백악산 아래의 처가에 살면서 김창흡에게 수학했던 인물인데吾友烏川鄭載文, 名龍河, 卽松江相公五世孫也. 其家在湖之忠原, 記余才成童時, 載文亦以 秀才來京師, 寓居東城之村, 余日與之馳逐閭里間, 頗以讀書課詩相樂也, 亡何? 載文㱕于家鄕, 聲光落落不相接者殆八九年矣. 其後載文從其婦家, 家于岳麓之下, 亦嘗少學於三淵金子, 與吾 亡友洪仁甫, 有同門之義焉. -魚有鳳, 杞園集28 鄭載文哀辭 이병성은 그를 추도하는 만시에서 어려서 낙송루에 노닐었는데, 기세가 진한(秦漢)을 넘어섰네[少遊洛誦樓, 氣凌秦漢際. -李秉成, 順菴集1 鄭載文挽]”라며 정용하의 낙송루시사 참여를 증언하였다.

이하곤은 김창흡의 사촌인 송상기의 사위로 일찍이 김창협에게서 수학하면서 장동 김씨 문인들과 친밀한 교우를 이어나갔으며, 신정하 또한 김창협의 문인으로 김창흡을 비롯한 백악의 문인들과 돈독한 교우관계를 유지하였다尋從農巖金先生遊, 獲聞道義之說, 立心制行, 必求第一義爲據, 聲名日起.(中略)間有大 文字著述, 輒誦在人口, 前輩如鄭相國澔金相國昌集金中丞昌翕宋尙書相琦金侍郞楺 諸公, 凡文事如謀國大議論及關係世道名敎處, 輒相就咨訪, 實有相長之益. -申暻, 直菴集15 叔父副校理恕菴先生墓碣陰記.

 

이와 같이 삼연집(三淵集)에서 확인할 수 있는 주요 문인들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 가운데서 백악이라는 문학공간과 일정한 관계를 가지고, 시도(詩道)를 진작(振作)하겠다는 의식적 지향 아래 시 창작에 매진하여, 시로 명성을 얻은 인물로는 홍세태, 이규명, 김창업, 김시보, 조정만, 김성후, 이해조, 홍중성, 정용하, 김창립, 유명악, 홍유인, 이병연, 박태관, 이하곤, 신정하, 김시민, 김신겸 등을 꼽을 수 있다.

 

 

김창흡의 제자 세대인 후기 백악시단은 이병연을 중심으로 창작활동을 지속하였는데, 세대가 내려오면서 자연스럽게 구성원이 확장되는 모습을 보인다. 이것은 이병연의 사천시초(槎川詩抄)사천시선비(槎川詩選批)에 나타난 교유 인물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병연의 시집에서 확인할 수 있는 주요 교유 인물은 홍세태, 김시보, 홍중성, 이하곤, 신정하, 박태관, 김시민, 김신겸 외에 조유수(趙裕壽), 권섭, 김상리(金相履), 심봉의(沈鳳儀), 이병성, 윤창래(尹昌來), 장응두(張應斗), 남숙관(南肅寬), 김영행(金令行), 신유한(申維翰), 안중관(安重觀), 신무일(愼無逸), 이우신(李雨臣), 이태명(李台明), 정선, 조영석, 김부현(金富賢), 정내교(鄭來僑) 등이다.

 

이 가운데 홍세태, 김시보, 홍중성, 이하곤, 신정하, 김시민, 김신겸은 김창흡에게서도 교유가 확인된 인물들이고 나머지 인물들은 교유 기록이 적게 남아있거나 없는 인물들이다. 새롭게 추가된 인물들을 살펴보면 김창흡 이후 백악시단의 특징적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데, 그것은 시인뿐만 아니라 다른 예술 장르에 장기를 지닌 인물로까지 확장되어 문예적 면모가 강화된다는 점이다. 이제 이병연의 시집에서 확인되는 교유 인물들 가운데 후기 백악시단의 특징적 면모를 보여주는 주요 인물들을 개략적으로 살피기로 한다.

 

조유수는 김창흡의 문집에서는 교유가 확인되지 않지만 앞서 본 홍경모의 기록에 김창흡 이하 백악시단의 문인들과 시사를 결성하였다는 기록이 보이고, 김창흡을 종유했던 이해조의 문집에 발문을 썼으며趙裕壽, 后溪集8 李鳴巖子東集跋 이병연의 해악전 신첩(海岳傳 神帖)에 김창흡을 이어 제사(題詞)를 남기기도 하는趙裕壽, 后溪集8 李一源海山一覽帖跋 등 백악시단의 문인들과의 지속적인 교유가 확인되는 인물이다백악시단 동인으로서의 조유수의 모습은 백악시단 문인들의 저술에 대한 제발(題跋)이나 수창한 시편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관련 기록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題洪君則丹丘詩錄(后溪集8), 李順菴秉成集跋(后溪集8), 后溪二如齋送春共賦(洪重聖, 芸窩集4), 訪新村趙后溪裕壽抽輞川韻同賦(金時敏, 東圃集5), 用亭字韻奉后溪趙毅仲(安重觀, 悔窩集3) .. 권섭, 김상리, 심봉의, 이병성은 이병연과 더불어 젊은 시절 10년 동안 시학에 매진했던 인물들로 스스로 오관건(五冠巾)’이라 부르며 강한 연대의식을 가지고 있었다小只讀唐音五七言李杜五七言而已, 又略看東方詩集而已, 與李一源李子平沈聖韶金莘老, 十年酬唱而隨興湧寫而已. -權燮, 玉所集1 詩自序”; “余自少年時, 淋漓跌 宕於槎翁, 十年五冠巾與文墨而頡頏遞 時日, 而迭有饌集匙箸 於槐里之椀榼, 賀賢助於槎翁. 晩暮京鄕與槎翁而落落, 時時舟楫鞍馬之來相就, 必然一丫鬟, 忙自內而出置精盤於我前, 每每歎. 夫人老不衰供客之手, 益歎. -權燮, 玉所集11 李槎川夫人哀辭. 아래 권섭의 글은 이들을 집단적 교유와 그 지향점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한양 성대한 도성 내외에 세 무리의 벗들이 있으니 감사(監司) 이계통(李季通, 李蓍聖), 봉조하(奉朝賀) 이여오(李汝五, 李秉常), 부학(副學) 홍혜백(洪惠伯, 洪啓迪), 승지(承旨) 권명중(權明仲, 權熀), 군수(郡守) 강사함(姜士咸, 姜啓溥)이 한 무리이고, 군수(郡守) 윤백욱(尹伯勗, 尹昌來), 승지(承旨) 윤중길(尹仲吉, 尹錫來), 삼재윤(三宰尹) 계형(季亨, 尹陽來), 봉조하(奉朝賀) 김덕유(金德裕, 金有慶), 판서(判書) 정시해(鄭時偕, 鄭亨益), 함원부원군(咸原府院君) 어성칙(魚聖則, 魚有龜), 응교(應敎) 조자이(趙子以, 趙尙健), 정자(正字) 김자경(金子敬, 金相欽), 사간(司諫) 이미백(李美伯, 李邦彦), 참판(參判) 이백첨(李伯瞻, 李喬岳), 판서(判書) 조자장(趙子章, 趙尙絅)이 한 무리이며, 정랑(正郞) 심성소(沈聖韶, 沈鳳儀), 거사(居士) 권조원(權調元, 權燮), 판결사(判決事) 이일원(李一源, 李秉淵), 현령(縣令) 김신로(金莘老, 金相履), 군수(郡守) 이자평(李子平, 李秉成)이 한 무리이다. 조원(調元)은 나이고 계형(季亨)은 공이다. 계형(季亨)과 여오(汝五)의 두 무리는 날마다 과거시험에 전력하여 좋은 성적으로 합격하니 명성이 온 도성에 가득하였다. 그런데 유독 나 조원(調元)의 무리는 방외에서 한묵(翰墨)의 모임만을 일삼은 것이 주야(晝夜)로 십년이었다.

漢陽盛都城內外有三朋: 李監司季通李奉朝汝五洪副學惠伯權承旨明仲姜郡守士咸 爲一隊; 尹郡守伯勗尹承旨仲吉尹三宰季亨金奉朝德裕鄭判書時偕魚咸原聖則趙應敎子以金正字子敬李司諫美伯李參判伯瞻趙判書子章爲一隊; 沈正郞聖韶權居士 調元李判決一源金縣令莘老李郡守子平爲一隊. 調元余而季亨公也. 季亨汝五二隊, 日以工於公車之業, 爲場屋上游, 聲名滿一都, 獨余調元一隊爲方外翰墨之會, 日夜十餘年. -權燮, 玉所稿』 「·4」 「尹三宰哀辭

 

 

권섭이 제시한 세 무리의 인물들은 모두 노론계 문인들로 각각의 무리가 폐쇄성을 지닌 집단은 아니다. 이병연의 시집에도 윤창래를 비롯하여 이병상, 윤양래, 홍계적, 강계부 등과의 교유가 확인된다. 이처럼 같은 정파의 문인들임에도 권섭이 임의로 무리를 나누어 제시한 까닭은, 넓게는 동문(同門)에 속하는 벗들이지만 그 지향점이 각기 서로 달랐음을 보이기 위해서이다. 권섭은 이기성과 이병상의 무리는 과거입격을 통한 경세에의 지향을 가지고 있어 관리로서 명성이 높아졌으나, 자신의 무리는 과거 공부는 도외시하고 방외의 인물들처럼 시 창작에만 매진하였다며 비교하여 말하였다. 이 자료는 농연의 문인들 가운데 시 창작에만 매진한 일군의 무리가 있었음을 증언하는 것으로, 곧 후기 백악시단의 특징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자료라 할 수 있다. 이병연 세대의 후기 백악시단은 김창흡 세대의 주요 구성원들이 도학과 시학을 겸장(兼掌)한 것과는 달리, 상대적으로 시학과 시 창작에 매진한 인물들이 주요 구성원으로 포진되어 있다. 권섭이 제시한 5인 외에 이병연의 시집에서 확인되는 박태관, 김시민, 남숙관남숙관은 자()가 정숙(正叔), ()가 팔탄(八灘)이며 이병연의 제자로 악하팔표기(嶽下八驃騎)’ 중 한 사람으로 거론된 인물이다[公居京白岳山下, 卽北洞. 北洞多詩畵人, 詩人以槎川爲宗匠, 其下列八驃騎, 南永春 肅寬·金新溪履坤·金都事時敏輩卽其人. -李奎象, 幷世才彦錄』「文苑錄]. 또한 그는 이병연의 만 삼천여 수의 시 가운데 반 정도를 선발하기도 하였다[詩凡萬有三千餘首. 詩人南肅寬正叔所選者, 幾居其半. -李秉淵, 槎川詩抄』「[洪樂純]] 백악시단의 일원이 분명 한 인물임에도 상고할 수 있는 문집을 확인할 수 없다. 강전섭은 그의 시집팔탄공유고(八灘公遺稿)의 존재를 언급하며, 그의 시집이 이병연에 의해 산정되었고, 수록된 191수의 작품 가운데 시조를 한역한 14수의 작품이 있다고 밝혔으나(강전섭, 弄丸齋短歌南肅寬漢譯短謠에 대하여, 한국언어문학3, 1965), 필자는 아직 팔탄공유고(八灘公遺稿)의 실물을 확인하지 못하였다., 김영행, 신무일신무일은 자()가 경소(敬所), ()가 백연(白淵)이며 졸수재 조성기의 백씨인 조원기(趙遠期)의 외손이다. 신정하 와는 외사촌간이며 이병연과는 외사촌 처남간이다. 김창협에게 수학하였으며, 신정하와 교유가 빈번하였다. 신정하는 그의 시고(詩稿)에 쓴 서문에서 목숨을 걸듯 시 창작에 매진했던 그의 모습을 특기하기도 하였다[敬所之所與共爲詩者, 顧在於余, 方其發憤肆力, 捨命以爲 也. 呻吟點染, 上下角逐, 以窮日夜, 甚至於酒鎗琴匣, 無一日而非詩會也, 眉毫口吻, 無一物而 非詩態也. -申靖夏, 恕菴集10 白淵子詩藁序], 이우신이우신은 자() 백열(伯說), ()가 십탄(十灘)이며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의 현손으로 이해조(李海朝)는 그의 삼촌이며 芝村 李喜朝는 그의 당숙이 된다. 晉菴 李天輔伯父이며 雷淵 南有容의 외삼촌이기도 하다. 유척기(兪拓基)戶曹參判李公神道碑銘(知守齋集8)에 따르면 독서를 즐기고 시에 가장 능했던(平居嗜書, 老亦不去手, 最長於詩律.) 인물로 그려져 있다. 이우신은 1732년 두 번째로 사복시주부가 된 이병연과 함께 서울의 명승을 찾거나 근무지나 그와 관련된 곳에서 시를 수창하고 사원수창록(沙苑酬唱錄)을 남기기도 하였다. 또한 이러한 경향을 강하게 보여주는 인물들이다.

 

이밖에 김부현과 정내교는 후기 백악시단의 영향력이 여항시인들에게로 한층 확대된 것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김부현은 홍세태가 외우(畏友)로 추복(推服)한 인물로 홍세태를 제외한 전기 백악시단의 주요 구성원들과는 교유가 거의 나타나지 않다가 후기 백악시단 구성원들과의 교유가 빈번하게 확인된다. 특히 이병연, 이병성 형제의 지우(知遇)가 깊어 이병연은 그를 위해 시집 항동유고(巷東遺稿)를 간행해 주었고 시집 말미에 김부현의 전()을 써서 부록하기도 하였다항동유고(巷東遺稿)』 「부록(附錄)」 「항동소전(巷東小傳). 이 밖에 홍세태는 서문을 썼고, 이병성은 서항동전후(書巷東傳後)라는 발문 성격의 글을 썼다.. 정내교는 신정하에게 시문을 배웠다巷居子鄭來僑 學詩文於余, 嘗有帆前芳草二陵來之語, 大爲時人所賞, 然特窮甚. 有一大宰 憫其窮而語僕曰: ‘世俗皆言鄭生之窮, 乃爲君所誤, 信乎?’ 僕對曰: ‘固信然. 若非僕, 公又何由 得知鄭生而憫其窮耶?’ -申靖夏, 恕菴集16雜識」「評詩文.

신정하는 여항시인인 홍세태, 정내교, 정후교 이 세 사람 가운데 정내교를 가장 먼저 알았고 홍세태와 정 후교를 차례로 알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래서 자신과 종유하며 지은 시 가운데 열에 네댓 수는 정내교와 관련된 것이고 열에 두세 수는 홍세태, 정후교와 관련된 것이라며 두터운 시교를 밝히기도 하였다委巷士之以詩名世, 而從吾遊者有三人焉, 曰滄浪洪道長鄭惠卿鄭潤卿. 三人之中, 老者 滄浪, 少者二鄭, 而潤卿獨於余爲同齒. 余之知三子也, 潤卿爲最先, 滄浪惠卿其次也. 三子之 從余遊, 俱以其詩, 而於余之詩, 其稱滄浪惠卿者, 居十二三; 而其稱潤卿者, 則獨居十四五. 其 交也舊, 故其情也特厚; 其情也厚, 故其見於詩也爲多. -申靖夏, 恕菴集10 贈鄭生來僑 序.

 

이렇듯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여항시인의 후원자 역할을 하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는데, 전기 백악시단의 김창흡-홍세태 관계가 후기 백악시단에 이르면 이병연-김부현, 신정하-정내교의 예처럼 점차 확대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관계의 확장은 백악시단의 진시가 자연스럽게 여항시단으로 확산되는 계기로 작용하였을 것으로 보인다여항시인들이 백악시단의 진시론에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나 여항시인들의 진시는 백악시단의 진시그대로 일 수 없었다. 허위로 가식하지 않는다는 진시론이 여항인들의 불평한 세계인식과 연결되면서 여항인들의 진시는 백악시단 사대부 문인들의 진시와는 일정한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신유한 또한 백악시단의 시론과 창작활동이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신유한은 서얼 출신이었지만 문장으로 이름을 날린 인물이었다. 이병연이 1732년 삼척으로 부임할 당시 신유한은 삼척 인근의 평해(平海)에서 고을살이를 하고 있었는데 이를 계기로 이병연과 신유한의 시교(詩交)가 있었다. 이병연은 삼척으로 부임하면서 신유한에게 시를 보내 함께 시를 논하길 바랐고嶺東來望更南雲, 山海蒼茫申使君. 二十年間一握手, 可能頭白重論文.” -李秉淵, 槎川詩選 批卷下 寄申平海維翰 신유한은 편지를 보내 평해에 한번 내려올 것을 청하였는데若果踐期臨枉, 可供一夕之歡. 渴望渴望. 弊邑海濱風臭, 視眞珠伯仲, 有越松望洋二名勝, 視 竹樓不敢當. 下駟客舍東隅, 有小築曰梧月樓. 是不佞所構而居之者, 僅容一琴一几, 朝暮坐瞰 田野, 挹蒼林爽氣, 亦足夜郞王自大.” -申維翰, 靑泉集3 答李三陟秉淵書, 이에 이병연은 평해로 내려가 오월루(梧月樓)에서 신유한과 시교를 나누었다. 그러나 이병연과 신유한의 시교는 일회적인 성격의 것이라 신유한을 백악시단의 주요 구성원으로 포함하기는 어렵다. 다만 신유한이 김창흡의 갈역잡영(葛驛雜詠)을 습작하기도 하고庚午秋, 崔士集寄書言: (中略)奉讀周章, 果信足下於我, 肝膽相照, 千里一席矣. 第曩 習三淵翁葛驛雜咏, 雅謂麟峽風謠, 不啻桃源, 而今承部檄, 如風雨功曺胥 史兔眼鼠首諸狀, 足令人代愁.” -申維翰, 靑泉集3 答金麟蹄光遂書, 이병연을 사조(謝眺)에 비유하기도 하는盃酒狂歌氣未衰, 手兼黃綬錦囊持. 不妨白髮稱仙吏, 且喜靑山佐客詩. 桑葚摘來參木並, 竹樓衙罷管絃宜. 澄江似練霰成綺, 謝眺宣城得句時.” -申維翰, 靑泉集2 梧月樓與三陟李 使君一源抽劍南韻 등 김창흡과 이병연을 대시인으로 추앙했던 점을 염두에 두면 백악시단의 영향력이 당색을 달리하는 후배 문인들에게도 두루 미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호가 반치(半癡)인 이태명(李台明)은 이병연과의 교유가 가장 빈번했던 인물이다. 이태 명은 이병연의 부친인 이속(李涑)에게 수학하면서李君台明子三, 卽成宗朝王子靈山君後孫, 而世居京口. 爲人豪爽慷慨, 喜讀書, 蓋嘗受學於 家大人. -李秉成, 順菴集5 贈李子三序 이병연 형제와 일찍이 교유관계를 맺었으며 시를 잘했음은 물론, 노래도 잘 불러先君子嘗閒居好客, 不肖兄弟喜爲詩, 日侍傍招呼爲文會, 是以士之抱藝落拓者多歸之. 李君台明子三, 往來最久. (中略)君於物無所嗜, 獨喜爲詩, 然不甚師古, 亦不肯自命作文 人, 只其胸中磊塊崛峍, 詩故豪逸. (中略)君素善歌, 人或來要之, 亦不遴. 時時過我, 酒酣氣振, 誦其所爲詩, 聲調若出金石, 余輒驚之. -李秉成, 順菴集5 題李子三西遊錄後 사대부 출신 가객으로 소개되기도 한 인물이다김영진, 조선후기 詩歌 관련 신자료(1)(韓國詩歌硏究20, 2006), 216면 참조..

 

시인이자 가객인 이태명의 존재는 후기 백악시단의 영역이 다른 예술장르로까지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정선과 조영석과 같은 사대부화가들과의 교유 또한 백악시단의 진시운동이 다른 예술장르와의 교섭을 통해 예술 전반으로 확장되어감을 보여주는 예로서 이러한 교유의 확대는 후대 문인들에게 문채 찬란한 盛事로 인식되기도 하였다槎川之時, 畵則趙觀我齋榮祏鄭謙齋敾, 俱居白岳下, 文采風流輝暎一時. -李德懋, 靑莊館全書32, 淸脾錄·1」 「李槎川.

 

이상에서 살펴본 김창흡의 문집과 이병연의 시집 소재 백악시단의 주요 구성원을 정리해보면, 전기 백악시단으로는 김창협, 홍세태, 이규명, 김창업, 김시보, 조정만, 김성후, 이해조를 후기 백악시단으로는 조유수, 홍중성, 정용하, 김창립, 유명악, 홍유인, 이병연, 박태관, 이하곤, 신정하, 김시민, 김신겸, 권섭, 김상리, 심봉의, 이병성, 윤창래, 장응두, 남숙관, 김영행, 신유한, 안중관, 신무일, 이우신, 이태명, 정선, 조영석, 김부현, 정내교 등의 인물을 들 수 있다.

 

산정(刪定)의 과정을 거치는 문헌기록의 특성으로 인해 백악시단의 주요 구성원은 완벽하게 재구될 수 없는 한계가 존재한다. 그런 까닭에 위에 열거한 인물들은 백악시단 전체 구성원을 재구한 것이 아니라 백악시단의 주요 구성원을 제시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위에 제시된 인물들을 일별해보면 안동 김씨, 연안 이씨, 임천 조씨, 풍산 홍씨, 기계 유씨, 한산 이씨, 평산 신씨, 안동 권씨, 파평 윤씨, 의령 남씨 등 당대 최고의 명문가들이 백악시단의 주요 구성원으로 참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안동 김씨와 인척관계, 사우관계로 맺어진 이 집단은 조선후기 정치, 사상은 물론이요, 문화에서도 단연 중심적 위치를 점하고 있었는데민병수, 조선후기 詩論硏究」 『韓國文化11, 1991, 116면 참조. 백악시단은 바로 시문학의 영역에서 당대의 시풍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문인집단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백악시단의 강력한 영향력이 그에 동조하는 수많은 문인들에게로 확장되어 갈수록 오히려 백악시단은 실체가 모호해지게 되었다. 실체를 적시할 수 없을 만큼 이들의 진시운동이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던 것인데, 바로 이 점이 백악시단의 실체를 파악하기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그러나 구성원의 실체를 완벽하게 재구할 수 없다고 해서 조선후기 새로운 시 풍을 선도했던 백악시단의 존재를 부정할 수는 없다. 이에 본고는 백악시단의 진시진시운동의 실상을 규명하기 위해 이상에 제시한 인물들을 한층 더 선별하여 연구의 대상으로 삼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연구대상을 시론이나 작품의 실상을 확인할 수 있는 문집이나 시집을 남긴 문인으로 한정하기로 한다. 이 경우 전기 백악시단에서는 이규명, 김성후가 제외되고, 후기 백악시단에서는 정용하, 유명악, 홍유인, 김상리, 심봉의, 윤창래, 장응두, 남숙관, 신무일, 이우신, 이태명이 제외된다. , 제외된 인물의 작품이 시선집이나 수창록에 실려 있는 경우, 논의의 필요에 따라 활용하기로 한다. 둘째, 상기 거명된 인물 가운데 지속적인 교유가 확인되지 않거나 교유가 편향된 인물은 배제하기로 한다. 이 경우 신유한과 김신겸이 제외된다. 신유한의 교유는 단편적 성격을 지니고, 김신겸의 경우는 김시모를 비롯한 안동 김문의 인물들과의 교유는 확인되지만, 그 밖의 인물들과는 교유가 거의 확인되지 않기 때문이다. 셋째, 김창협의 경우는 시작(詩作)에서도 높은 성취가 인정되나, 자신 스스로 시도(詩道)를 진작하기 위해 시 창작에 매진하겠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백악시단의 진시운동과 관련해서는 시 창작보다는 오히려 사상적·이론적 뒷받침이 더욱 큰 인물로 판단된다. 따라서 사상이나 시론 등의 논의는 참조하되, 시 작품은 분석 대상에서 제외하기로 한다. 넷째, 정선과 조영석은 백악시단의 주변인물 로 간주하여 논의의 필요에 따라 언급하기로 한다.

이상의 조건을 통해 선별된 연구대상을 정리하고 각 인물의 기본적인 인적 사항과 관계를 제시하면 아래와 같다.

 

성명(姓名) 생몰년(生沒年) 본관(本貫) (), () 관계(關係) / 특징(特徵)
김창협(金昌協) 1651~1708 안동(安東) 중화(仲和), 농암(農巖) 김창흡의 중형(仲兄).
김창흡(金昌翕) 1653~1722 안동(安東) 자익(子益), 삼연(三淵) 증조(曾祖):김상헌(金尙憲). ():김광찬(金光燦). (): 김수항(金壽恒). 김수항(金壽恒)3.
조정만(趙正萬) 1656~1739 임천(林川) 정이(定而), 오재(寤齋) 曾祖:趙希逸. :趙錫馨. ():조경망(趙景望). 조성기의 족질(族姪). 김창흡의 벗. 이병연의 이모부.
김창업(金昌業) 1658~1721 안동(安東) 대유(大有),노가재(老稼齋) 김창흡의 동생.
김시보(金時保) 1658~1734 안동(安東) 사경(士敬), 모주(茅洲) 증조(曾祖:김광현(金光炫, 金尙容 3). ():김수인(金壽仁). ():김성우(金盛遇). 김창흡의 족질.
이해조(李海朝) 1660~1711 연안(延安) 자동(子東), 명암(鳴巖) 증조(曾祖):이정구(李廷龜). ():이명한(李明漢).():이일상(李一相). 김창협의 처사촌.
조유수(趙裕壽) 1663~1741 풍양(豐壤) 의중(毅仲), 후계(后溪) 증조(曾祖): 조희보(趙希輔). ():조형(趙珩). ():조상변(趙相抃). 이병연의 벗. 조문명(趙文命), 조현명(趙顯命)의 당숙(堂叔). 조귀명(趙龜命)의 족숙(族叔).
홍중성(洪重聖) 1668~1735 풍산(豐山) 군칙(君則), 운와(芸窩) 증조(曾祖):홍영(洪霙, 李廷龜 맏사위). ():홍주원(洪柱元). ():홍만회(洪萬恢). 김창흡의 문인. 이병연의 이종형(姨從兄).
이병연(李秉淵) 1671~1751 한산(韓山) 일원(一源), 사천(槎川) 증조(曾祖):이준발(李畯發, 李山甫 長孫) ():이상우(李商雨). ():이속(李涑)
권섭(權燮) 1671~1759 안동(安東) 조원(調元), 옥소(玉所) 증조(曾祖):권성원(權聖源). ():권격(權格). ():권상명(權尙明, 權尙夏 동생). 이병연의 벗
김영행(金令行) 1673~1755 안동(安東) 자유(子裕), 필운(弼雲) 증조(曾祖):김수인(金壽仁). ():김성우(金盛遇). ():김시걸(金時傑, 金時保의 형) 김창흡의 족질(族姪). 이 병연의 벗.
이병성(李秉成) 1675~1735 한산(韓山) 자평(子平), 순암(順菴) 이병연의 동생
이하곤(李夏坤) 1677~1724 경주(慶州) 재대(載大), 담헌(澹軒) 증조(曾祖):이시발(李時發). ():이경억(李慶億). ():이인엽(李寅燁). 조성기의 외종손(外從孫). 송상기의 사 위. 김창협의 문인. 이병연의 인 척.
박태관(朴泰觀) 1678~1719 반남(潘南) 사빈(士賓), 응재(凝齋) 증조(曾祖):박동열(朴東說). ():박호(朴濠). ():박세표(朴世標, 李縡外叔). 김창흡의 문인. 이 병연의 벗.
신정하(申靖夏) 1681~1716 평산(平山) 정보(正甫), 서암(恕菴) 증조(曾祖):신준(申埈). ():신여정(申汝挺). 생부(生父):신완(申琓), ():신유(申瑜). 김창협의 문인. 이병연의 처사촌. 김시민의 이종사촌.
김시민(金時敏) 1681~1747 안동(安東) 사수(士修), 동포(東圃) 증조(曾祖):김광욱(金光煜, 金尙寯 장남). ():김수일(金壽一). ():김성후(金盛後). 김창흡의 족질. 이병연의 처사촌. 신정하의 이종 사촌.
안중관(安重觀) 1683~1752 순흥(順興) 국빈(國賓), 회와(悔窩) 증조(曾祖):안천건(安千健). ():안광욱(安光郁).():안후(安垕) 김창흡의 문인.
김부현(金富賢) 1648~1714 ? 예경(禮卿), 항동(巷東) 귀곡(龜谷) 최기남(崔奇男)의 손서(孫壻). 설초(雪蕉) 최승태(崔承太)의 사위. 여항인. 홍세태, 이병연등과 교유.

 

백악시단의 최초 활동은 1679년 이전 어느 시점에 있었던 김창흡과 김시보 등이 중심이 된 능한대시사(凌漢臺詩社)로 추정되나嘗與宗叔三淵公昌翕 築凌漢㙜, 倡明詩道, 自風雅楚騷古樂府, 以及乎盛唐諸家, 磨礲沈灌, 大肆力爲詞章, 一時名士慕與之遊. -金履坤, 鳳麓集4 茅洲府君行狀김이곤의 행장은 김시보의 행적을 연도순으로 서술하고 있는데 위 인용된 내용은 1679년 이전의 행적에 속한다. 또한 이시항(李時恒)의 글에도 능한대(凌漢臺)에 대한 언급이 보인다. “文字飮廼藝苑 勝事, 始見於韓文公贈張籍詩中, 而其來則盖古矣. 如劉禹錫白第之唱王昌齡旗亭之飮王弇 州雪樓之遊皆此會. 而我國亦有東嶽詩樓三淵凌漢臺, 方諸中朝詞老之會, 未知如何. 而其跌宕文酒, 酣嬉吟哢, 自得於觴詠之樂則同一風流. -李時恒, 和隱集5 和浦文字飮序 자세한 내용을 상고할 수 없고, 본격적인 활동은 김창협, 홍세태, 이규명, 김시보 등이 중심이 된 낙송루 시사로부터 시작한다고 볼 수 있다.

 

낙송루시사가 운영되었던 기간이 1682년부터 1689년까지였던 것을 염두에 두면, 전기 백악시단의 활동기간은 1682년부터 김창흡이 별세한 1722년으로 정할 수 있고, 후기 백악시단의 활동은 1722년부터 후기 백악시단의 종장이었던 이병연이 별세한 1751년까지로 정할 수 있다. 연속적으로 이루어졌던 백악시단의 활동을 이처럼 연도를 기준으로 나눈 것은, 90여 년 가까운 활동기간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변화되었던 문학적 특징을 서술하기 위한 방법적 고려이다.

 

후기 백악시단의 활동 기한을 이병연의 몰년인 1751년으로 잡은 것도 방법적 선택이다. 앞서도 언급하였듯, 후기 백악시단의 활동이 다수의 문인, 다양한 예술장르로까지 확장되면서 백악시단의 진시운동은 조선후기 문단에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었지만 실체로서의 백악시단의 결속력은 점차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또한 백악시단의 3기를 이끌어야 할 문인들의 부재도 하나의 원인이 된다. 영조조 중반 이후 안정적으로 정치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노론 문인들은 현실 정치에 참여하여 경세의 포부를 펼치거나 정치에서 물러나 학문에 매진하는 특징을 보인다. 그런데 진시론을 토대로 평생을 시 창작에 전념했던 후기 백악시단 주요 구성원의 삶은 후배 문인들에게 성대한 풍류로 인식되었지만 정작 자신이 가야할 길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요컨대 시인으로서의 삶은 집권 계층의 문인들에게 그다지 매력적인 것이 못되었던 것이다. 대신 후기 백악시단의 문인들과 같은 창작 활동은 시인으로서의 삶을 살 수 있었던 서얼이나 여항인들에게 이어졌다. 그런 의미에서 백악시단의 활동시한을 이병연의 몰년인 1751년으로 설정하는 것은 나름의 타당성을 지닌다 하겠다.

 

요컨대 백악시단은 17세기 후반인 1682년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여 18세기 중반을 전후로 활동이 약해진 문인 그룹으로서, 창작의 근거지인 백악을 중심으로 조선후기에 새로운 시풍[眞詩]을 개척하고 뿌리 내린 문인그룹이라 할 수 있다.

 

 

 

2. 동인(同人)들의 문학 활동

 

백악시단의 본격적 출범을 알린 것은 낙송루시사(洛誦樓詩社)였다. 낙송루시사는 1682년에 결성되어 1689년에 해체되었는데, 그 결성과 해체 과정은 홍세태의 다음 글에 자세하다.

 

 

나는 젊은 시절에 묘헌(妙軒) 이공(李公, 李奎明)을 종유하였는데 공의 집은 북산 아래에 있어 삼연 김공의 거처와 서로 가까웠다. 그때 삼연께서 고시를 창도하여 낙송루를 열고 여러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공은 같은 마을에서 나란히 우뚝하여 삼연과 더불어 겨루며 서로 양보하지 않았다. 나는 두 공과 같은 해에 태어났는데 한마디로 도가 합치되는 것이 마치 돌을 물에 던져 넣는 것 같아 망형지교(忘形之交)를 허락한 까닭에 두 공 사이에서 마음껏 종유할 수 있었다. (중략)당시에 우리 세 사람은 나이는 어렸지만 의기는 높아 세간의 일체의 사물에 대해서는 애호하는 바가 없고 오직 시만 좋아함이 대단히 심했는데 하루라도 만나지 않은 날이 없었고, 서로 만나면 반드시 시를 남겼다. 성기(聲氣)의 소감(所感)이 김석(金石)이 번갈아 연주되듯 화락하면서도 조화로워 천지간에 어떤 즐거움이 또 이것과 바꿀 수 있을지 모를 정도였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공께서 세상을 떠났고, 또 몇 년 되지 않아 삼연께서는 깊은 골짜기로 물러나서는 다시는 나오지 않으셨다. 이로부터 시사에서 종유하던 즐거움은 마침내 끝나고 말았다.

余少時從妙軒李公遊, 公家北山之下, 與三淵金公居相近. 時三淵倡爲古詩, 開洛誦樓, 以招諸子, 而公同里並峙, 與之頡頑, 不相讓焉. 余於兩公, 卽同年生, 而一言道合, 如石投水, 許以忘形之交, 故得遨遊兩間. (中略)當此之時, 吾三人年少氣高, 於世間一切事物, 無所愛好, 而唯嗜詩特甚, 無日不相見, 相見則必有詩. 聲氣所感, 金石迭奏, 融融乎渢渢乎, 不知天壤間, 復有何樂可以易此也. 曾未幾何, 而公下世矣; 又未數年, 而三淵遯居窮峽不復出矣. 自是而詩社從遊之樂遂廢. -洪世泰, 柳下集10 妙軒詩集跋

 

 

삼연연보에 따르면, 김창흡이 낙송루를 지은 것은 1682, 곧 김창흡, 이규명, 홍세태가 30세 되던 해였다. 낙송루시사를 연 목적은 고시를 창도하기 위한 것이었다. 김창흡의 제자였던 유척기는 題沛筑散響後라는 글에 서 부친 유명악이 1682년 김창흡에게 나아가 배웠는데, 그 때 김창흡으로부터 받은 가르침을 장차 풍아(風雅)를 고취하고 한위(漢魏)의 시를 뒤쫓아 후대 시의 얕고 비루한 것을 단번에 씻어버리고 곧바로 삼백편의 뒤로 말달려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我先君 子之就學于三淵先生, 實在壬戌. 先生哭先君詩所云北山重澤齋, 奇哉欝詞林. 晨昏 洛誦樓, 揚扢子長書者是也. 重澤洛誦, 俱先生齋樓名. 是時先生之所設敎, 盖將以皷發風雅, 追蹤漢魏, 一洗後世之膚陋, 而掉鞅直造于 三百篇之後也. -兪拓基, 知守齋集15 題沛筑散響後].’라고 하였으니 이들의 목표는 시경의 정신을 되살려 후대의 재주나 자랑하는 창작 풍토를 쇄신하겠다는 것이었다.

 

요컨대 민멸(泯滅)된 시도(詩道)를 다시 진작하겠다는 것이 낙송루시사의 목적이었다. 김창흡의 초기 시에 자주 보이는 악부가행체(樂府歌行體)의 고시와 사언(四言) 시경체(詩經體) 시는 낙송루시사의 목표의식이 실천된 작품들이라 할 수 있다김남기, 삼연 김창흡의 시문학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1, 25면 참조.

 

낙송루시사에는 김창흡, 이규명, 홍세태 외에 약간 후배였던 조정만, 김창업, 김시보 등이 참여하였으며 10여세의 나이차를 보이는 막내아우 김창립, 유명악, 홍유인, 홍중성, 정용하, 여항인 최동표(崔東標) 등도 함께 하였다. 이는 낙송루시사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시사의 동인이 점차 확대된 결과였다김남기, 洛誦樓詩社의 활동과 詩社의 의의, 漢文學報25, 2011, 145면 참조..

 

이들은 독서와 강론, 창작과 품평을 주된 활동으로 삼아 시사를 운영해 나갔다. 홍세태의 기록처럼, 이들은 세상 명리를 모두 잊고 오로지 시작(詩作)에만 매달렸고 지은 시를 서로 읊조릴 때면 세상 어떤 즐거움도 대신할 수 없을 만큼 창작에의 열정이 대단하였다. 낙송루시사는 어느 하루도 빠짐없이 서로 모여 시를 지을 정도로 열정적으로 운영되었으나 1686년 시사의 핵심인물인 이규명이 세상을 떠나고 1689년 김창흡이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영평(永平)에 은거하면서 활동이 종료되었다.

 

낙송루시사와 관련하여 주목할 모임은 중택재시사(重澤齋詩社)이다. 중택재는 김창흡의 막내 동생이었던 김창립이 세운 집으로, 김창흡의 기록에 따르면 김창립 또한 이곳에서 시사를 운영하였다고 한다. 아래 김창흡의 김수재전(金秀才傳)을 살펴보자.

 

 

창립은 나면서부터 영특했고 큰일을 하는데 과감하여 나이 15세에 고문에 뜻을 두자 머리를 숙이고 잠심하여 말의 발이 몇 개인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그 형 창흡은 그 뜻을 가상히 여겨 그에게 시경을 주면서 대아(大雅)로 인도하였는데 창립 또한 그 형이 악착같지 않음을 좋아하여 사모하며 기쁘게 본받는 것이 대단히 심했으니 저절로 형제간에 지기(知己)를 얻었다고 할 만하였다. 창흡의 집은 백악산 아래의 영경전(永慶殿) 동남쪽에 있었는데 그곳에 누각을 지어 낙송루라 이름 짓고 그 위에 올라가 책을 읽었다. 창립 또한 그 왼편에 집을 지어 마주하고는 중택재라고 이름 짓고 들어가면 연구하고 송독하며, 나오면 누각 아래에서 학문에 열중하였다. 차츰 마을 사람들을 데려다 더불어 일삼으니 비로소 마을 사람들 가운데 방탕하여 배우지 않던 자들도 그 성망(聲望)을 사모하여 다투어 모여들었고 이에 중택재가 더욱 가득하게 되었다. 창립은 이에 소리 높여 말하기를, “사람이 부질없이 죽어 문채로 세상에 드러나지 못한다면 사람이 아니요, 글을 지음에 고()를 본받지 않는다면 또한 이른바 글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인하여 풍아(風雅)의 원류 및 고금 시의 정()과 사()가 다르게 된 원인에 대해 극론하고는 말하기를, “시가 시답지 못한 것이 오래되었다. 고려조의 비루함을 우리 왕조가 잉습하여 아득한 천백년 사이에 정시(正始)의 길은 막히고 말았다. 홀로 고시(古詩)가 있음을 조금 안 자는 근래에 정두경 한 사람뿐이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는 한갓 진부한 자취에 빠져 진벌(津筏)을 넘어 언덕 위로 오르지 못하였다. 대저 시라는 것은 투철(透徹)하고 영롱(玲瓏)해야 한다. 우리들이 의당 힘써야 할 바가 생각을 정밀하게 하고 운용을 절묘하게 하는 데 있지 않겠는가!라고 하자 듣는 자가 모두 깨우치게 되었으니 를 따름에 신속하고 사람들을 잘 개유(開諭)함이 이와 같았다. (중략)유독 좋아한 것은 그의 벗 홍유인, 유명악, 그리고 여항인 최동표 등과 더불어 시사에서 노니는 것이었는데 대단히 자적(自適)하였다.

昌立生而英特, 敢於有爲, 年十五則志于古文, 屈首浸淫, 殆不知馬之幾足. 其兄昌翕奇其志, 授以詩, 引之大雅, 昌立亦竊好其兄不齷齪, 其慕悅倣效特甚, 自以得弟兄間知己. 昌翕家白岳 山下永慶殿東南, 作樓而名之曰洛誦’, 登其上讀書; 昌立亦於其左, 作室而對之, 重澤齋’, 入而硏誦, 出則考業於樓下. 稍引里中子, 與共事, 始里中子猖披不學者慕其聲爭麇至, 於是齋中 益充斥. 昌立乃抗言曰: ‘人而徒死, 不能文彩表章於世, 非人也; 爲文而不稟於古, 亦非所謂文也.’ 因極論風雅源流及古今雅鄭之所以別, : ‘詩之不爲詩久矣. 高麗之陋, 我朝仍之, 莽莽千百年, 正始之路堙焉. 獨稍知有古者, 近鄭斗卿一人耳. 惜乎! 其徒泥陳迹, 不能超津筏而上之. 夫所謂詩, 正欲其透徹玲瓏也. 我輩之所宜勉, 其不在精思而妙運乎!聞者莫不醒然, 其銳於追古而善開人如此 中略獨喜與其友洪有人兪命岳及市人崔東標等遊於詩社甚適也. -金昌翕, 三淵集26 金秀才傳

 

 

이 글은 김창흡이 18세의 나이로 요절한 막내아우 김창립을 위해 쓴 전의 일부이다. 김창립은 김창흡의 제자이기도 했는데 김창흡을 대단히 존모하여 따랐던 것으로 보인다. 김창흡을 따라 중택재시사를 열자 유명악, 홍유인, 홍중성, 정용하, 최동표 등이 시사의 동인으로 함께 했는데 이들이 김창립과 함께 낙송루시사에도 출입했던 사실을 염두에 두면, 중택재시사는 낙송루시사에 참여했던 나이 어린 동인들이 자기들끼리 따로 모여 강학하고 창작했던, 일종의 낙송루시사 내의 소모임적 성격이 강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중택재시사는 김창립이 이듬해인 1684년에 세상을 떠남으로써 와해되었고 중택재시사의 동인들은 낙송루시사로 다시 편입되었다김남기, 앞의 논문, 145~146면 참조.. 짧은 기간 존속했지만 중택재시사는 백악시단 초기의 시론과 시적 지향이 후배문인들에게 전파되는 데 매개 역할을 한 의의가 있다.

 

위 글에 인용된 김창립의 발언에는 백악시단의 시적 지향이보다 구체화 되어 있다. 김창립 또한 시도(詩道)가 막힌 현실을 비판하며 고시의 학습을 주장하였는데홍중성은 兪淸州君四命岳挽」 『芸窩集2에서 중택재 가운데서 시사가 열리자, 일찍이 젊은이들 함께 어울렸었지. 깊은 사귐 맺은 건 종병(宗炳), 뇌차종(雷次宗)보다 가까웠고, 걸구(傑句)의 근원은 한위(漢魏)에서 나왔지[重澤齋中詩社開, 憶曾年少共徘徊. 深交契比宗雷密, 傑句源從漢魏來.]”라며 중택재시사에서의 교유를 회억했는데, 여기서도 그들의 시가 한위(漢魏) 고시(古詩)를 전범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고시를 통해 섭취하려 한 것은 전범에 녹아있는 정신이었다. 정두경에 대한 지적은 그의 복고가 고()의 정신을 체득하지 못한 채 모의에 그치고 만점을 비판한 것이다. 그러면서 김창립은 시가 지녀야할 바람직한 모습으로 투철영롱(透徹玲瓏)’을 제시하였다. ‘투철영롱은 송나라 엄우(嚴羽)창랑시화(滄浪詩話)에서 성당의 시인들은 오직 흥취에 주력하여 영양(羚羊)이 뿔을 나무에 걸은 것과 같아서 자취를 찾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그 절묘한 부분은 투철하고 영롱하니 근접할 수 없다. 마치 공() 속의 음(), () 속의 색(), 물속의 달, 거울 속의 상()과 같아 말은 다함이 있지만 뜻은 무궁하다[盛唐諸人, 惟在興趣, 羚羊掛角, 無跡可求, 故其妙處透徹玲瓏, 不可湊泊, 如空中之音相中之色水中之月鏡中之象, 言有盡而意無窮. -嚴羽, 滄浪詩話)』 「詩變].”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영양이 뿔을 건 듯 자취를 찾을 수 없다[羚羊掛角, 無跡可求]’는 말은 작가의 흥취가 자연스럽게 시 속에 발현되어 모의와 같은 인위적 수사가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이요, ‘투철하고 영롱하다[透徹玲瓏]’는 말은 작품 안에 담긴 작가의 높은 정신적 정수(精髓)를 의미하는 것이다. 요컨대 김창립의 발언은 전범 학습을 통해 전범에 담긴 작가의 정신적 경지를 자득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김창립의 주장은 아래 김창흡의 견해와 흡사하여 주목된다.

 

 

송나라 시대 이정(二程), 주자(朱子)의 의리와 구양수(歐陽脩), 소식(蘇軾)의 문장은 모두 정미하고 지극한 데에 들어가 남은 아쉬움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유독 시학(詩學)만은 적막해서 수백 년 동안에 사람들의 마음속에 들어온 것은 모두 하등한 시마(詩魔)였으니 이른바 물속의 달과 거울 속의 꽃처럼 영롱하고 투철한 절묘함이 더 이상 없었다.

宋時程·朱之義理·蘇之文章, 皆能入微造極, 殆無餘憾. 而獨其詩學寥寥, 數百年間入人 肝脾者皆下劣詩魔, 所謂水月鏡花玲瓏透徹之妙, 無復存者. -金昌翕, 三淵集36 漫錄 庚子

 

 

김창흡은 이 글에서 송나라의 도학과 문장은 지극한 수준에 도달했지만 시학만은 허술한 채로 방치되어 송시 이후로는 성당시(盛唐詩)처럼 영롱하고 투철한 절묘함이 없다고 하였다. 김창흡 또한 시학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고 진단하면서 엄우의 영롱투철을 절묘한 시적 경지로 원용하였는데 이 점이 김창립의 발언과 거의 같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바로 이 글이 쓰인 시점이다. 이 글은 1720년에 쓰인 것으로 김창흡의 생애를 고려하면 가장 만년에 속하는 기록이라 할 수 있다. 한편, 김창흡이 김창립의 전을 쓴 시점은 1684년이다. 시간의 편차가 37년이나 되는데도 두 글이 주장하는 바가 거의 같다물론 김수재전속의 발언은 김창립의 것이다. 그러나 김창립이 김창흡을 스승으로 삼았던 점을 염두에 두면, 김창립의 발언은 기실 김창흡의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이는 허술한 시학을 제대로 궁구하여 시도를 진작하자는 의식이 김창흡의 초년에서 만년에까지 변함없이 유지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전기 백악시단은 시사 활동을 통해 창작의 지향점을 분명히 하며 자신들의 시론을 정비하였고, 이들의 시에 대한 원대하고 확고한 목표의식은 다른 문인들을 강하게 견인하는 힘이 되었다.

 

후기 백악시단의 시사 운영과 관련한 기록으로는, 홍양호(洪良浩)가 자신의 조부였던 홍중성의 생애를 서술하면서 최창대(崔昌大), 이병연, 조유수, 홍세태 등과 시사를 결성한 사실을 언급하고當世名流如崔昆侖昌大李槎川秉淵趙后溪裕壽洪滄浪世泰爭與定交, 結爲詩社, 風流翰 墨, 照暎一世. -洪良浩, 耳溪集32 祖考郡守贈吏曹參判府君墓誌, 조유수의 생애를 서술하면서는 송석헌(松石軒) 송성명(宋成明)의 집에서 조유수, 홍중성, 이병연, 최주악(崔柱岳), 조하기(曹夏奇), 정선이 시사를 결성 한 사실을 언급한 바松石軒宋公成明退居東湖, 輕舟小驢, 聯翩來往, 與芸窩公曁李槎川秉淵崔溪西柱岳曹橋 西夏奇鄭謙齋敾約成詩社. -洪良浩, 耳溪集30 后溪趙公墓碣銘 있으나, 관련 자료가 확인되지 않아 실체를 상고할 수 없다. 다만, 이들의 시사는 낙송루시사처럼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운영되었다기보다는 시회의 성격에 가까웠을 것으로 보인다. 아래 김영행의 시는 이러한 성격을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强參詩社會 深荷故人憐 시사의 모임에 억지로라도 참여한 건
벗의 어여삐 여기심을 후히 입어서라네.
飯畢胡無酒 囊空愧乏錢 밥을 다 먹었으니 어찌 술이 없으랴만
부끄럽게도 시주머니 비었고 돈도 없구나.
艾宜雪裡採 梅吐臘前姸 쑥은 눈 속에서 캐온 것일 테요
매화는 섣달 전 고운 자태 토하고 있으니
多少諸公詠 淋漓滿彩牋 여러 공들 허다한 시편
빛깔 고운 시전지에 흥건하게 채워지네.

11월에 사천의 집에서 쑥탕을 차렸기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다 함께 짓다[復月設艾湯於槎川家, 會話同賦], 金令行, 弼雲詩稿2

 

이 시는 1736, 이병연이 66, 김영행이 64세 되던 11월 어느 날에 지어진 작품이다. 아마 이병연이 자신의 취록헌(翠麓軒)에 벗들을 불러 모았던 듯한데, 벗을 부른 건 매화가 피었기 때문이었다. 김영행은 자신을 불러 준 후의에 감사를 표하고 매화 아래서 시를 짓는 모습을 그렸다. 백발의 시인들이 매화시를 읊조리면 그것을 시전지에 받아 적는데 모두들 빼어난 시인들이라 붓 고를 틈이 없을 정도로 난만하다고 하였다. 김영행은 시의 첫 구에서 시사(詩社)’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는데, 이때의 시사는 시회와 크게 구별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후기 백악시단은 전기 백악시단이 마련한 창작의 방향을 실제 창작을 통해 작품으로 구현해내는 데 활동의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그래서 낙송루 시사처럼 목적의식이 뚜렷한 시사를 운영하진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대신 부정기적이었던 시회를 통해 창작의 장을 공유하며 작품의 질적 제고를 도모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시회는 시사 못지않게 백악시단 문인들의 중요한 동인활동 중의 하나였다. 이들은 시회를 통해 동인으로서의 결속을 다졌는데, 아래 조정만의 시에는 그러한 자부가 나타나 있다.

 

西林詞客爛如雲 서림(西林)의 문인들 구름처럼 난만하지만
幽淡爲詩孰似君 유담(幽淡)하게 시 짓는 건 누가 그대와 같으랴?
蘭蕙含風帶微馥 바람 맞은 난초 혜초 은은한 향 띠는 듯
芙蓉挹露吐奇芬 이슬 맺힌 연꽃이 기이한 향 토하는 듯
人言諸作皆超古 남들은 작품들이 모두 고금에 으뜸이라 칭찬하지만
我愛高才獨出羣 나는 높은 재주가 홀로 무리에서 우뚝한 것을 좋아했으니
大抵吾儕盛文會 대저 우리들 성대한 시회는
雪樓之後未曾聞 백설루의 시회 뒤로 일찍이 듣지 못한 것이었지.

가재 김대유가 죽은 뒤 시사의 대변을 만나 애도하는 글 을 다듬어 곡하지 못했고 또 무덤 앞에서 영결하지 못하였다. 이에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의 사귐과 잊을 수 없는 유상(遊賞)의 모임을 떠올리며 운자의 순서를 따라 나누어 20편의 칠언율시를 지어 길이 떠난 혼을 위로하고 또한 지기를 잃은 슬픔을 토로하노라[稼齋金大有之歿, 値時事大變, 旣未操 文而哭, 又失臨壙而訣. 玆就其交契之自幼至老遊賞之會心難 忘者, 隨其韻序, 分占二十章長律, 用慰長逝之魂, 且洩斷絃之悲], 趙正萬, 寤齋集2

 

김대유(金大有)는 김창업을 가리킨다. 김창업이 죽은 뒤에 만난 시사(時事)의 대변(大變)신임사화(辛壬士禍)를 가리킨다. 신임사화로 노론 사대신이 사사되는 정국의 동요 속에서 조정만은 지기의 죽음조차 영결하지 못하였다. 이에 조정만은 두 사람의 사귐을 회억하며 20편의 칠율(七律) 만시를 지어 추도하였는데, 이 시는 그 가운데 열두 번 째 수로 풍계시회(楓溪詩會)’를 읊은 것이다. 청풍계가 있던 인왕산에는 구름이 변화하듯 솜씨가 빼어난 시인들이 많지만 깊고도 담박한 맛의 시를 쓰는 사람이 없다며 김창업의 시풍을 언급한 뒤, 김창업 시의 성취를 난혜(蘭蕙)와 부용(芙蓉)을 들어 비유적으로 밝혔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시적 성취만을 고평하지만 자신은 뭇 사람들과는 확연히 다른 높은 재주를 아낀다고 하였다. 그리고 미련에서 조정만은 자신들의 시회가 이반룡이 중심이 되었던 백설루(白雪樓)의 시회만큼이나 성대한 것이었다고 평가하였다.

 

백설루는 후칠자(後七子)후칠자(後七子): 이반룡(李擊龍), 왕세정(王世貞), 사진(謝秦), 종신(宗臣), 양유예(梁有譽), 서중행(徐中行), 오국륜(吳國倫)의 영수였던 이반룡(李攀龍)의 누각으로 이반룡은 이곳을 거점으로 복고운동을 펼쳐나갔다. 조정만이 청풍계의 시회를 이반룡의 백설루 시 회와 비교한 것은 자신들의 시회가 한갓 여흥이나 사교를 위한 것이 아니었음을 피력하는 것이다. 이것은 곧 이반룡이 백설루 시회를 중심으로 복고운동을 펼쳤듯 자신들도 후칠자에 버금가는 시 운동을 펼쳤다는 의식을 드러낸 것으로, 청풍계시회를 통해 펼친 시 운동은 곧 진시운동을 가리킨다. 수련의 유담(幽淡)’한 창작이나 함련의 은은한 향기로 비유된 작품의 성취는 곧 형식적 수사보다는 작품 속에 진실한 시적 주체의 내면을 담아야 한다는 백악 시단의 진시론과 깊이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자신들의 시회를 일종의 유파 운동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백악시단 문인들의 작품에 보이는 열정적인 시회활동의 모습은 이들이 시회를 단순한 사교가 아니라 시풍 쇄신의 실천 공간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이 모인 시회 장소로 가장 애호된 곳은 김시보의 집이 있던 청풍계(淸風溪)였다. 청풍계는 본래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의 별업이 있던 곳으로 북쪽으로는 백악산, 서쪽으로는 인왕산이 솟아있고 사이로는 청계(淸溪)가 흐르는 도성의 명승지였다. 그런데 김상용이 이은(吏隱)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던 이곳은 김상용의 순절 뒤로는 수려한 경관에 충절(忠節)의 이미지까지 더해진 도성의 명소가 되었다. 기사환국 등을 거치며 일시적으로 쇠락하기도 하였지만, 노론이 다시 정권을 차지하고 1682년 김시보가 청풍계를 다시 수리한 이후로, 청풍계는 백악시단 의 문사들이 왕성한 시회를 통해 진시창작을 실천해가는 진시운동의 근거지로 부활하였다강혜선, 인왕산 청풍계의 문학적 전통, 漢文學報25, 2011, 53~68면 참조. 청 풍계의 역사와 문학 공간으로서의 의의에 대해서는 이 논문을 참조할 것.. 청풍계에서 이루어진 백악시단의 시회 기록은 대단히 풍부한데, 그 가운데 대표적인 작품을 통해 당시 시회의 분위기를 가늠해보기로 한다.

 

一尊佳會古名亭 한 잔 술 좋은 모임 이름난 옛 정자에서 열리니
亭下百年雙檜靑 정자 아래엔 수백 년 된 두 그루 회나무 푸르네.
秋色淺深紅樹岸 가을 빛 얕고 깊은, 붉은 나무 솟은 언덕
水聲高下碧苔庭 물소리 높고 낮은, 푸른 이끼 돋은 정원.
霜淸苦竹元同操 맑은 서리와 참대는 본래부터 지조를 함께하니
風入踈松不厭聽 성긴 솔에 부는 바람 실컷 듣노라.
珍重主人留後約 진중하신 주인께서 훗날 기약 남기시니
豈辭閑日更携甁 한가한 날 술병 들고 다시 올 일 마다하겠소.

 

태고정에서 김사경(金士敬) 등 여러 문인들과 함께 운자를 불러 짓다[太古亭同金士敬諸人呼韻賦之], 趙正萬, 寤齋集1

 

청풍계의 맑고 빼어난 경치 속에서 조정만은 맑고 곧은 정신을 노래하였다. 수련의 두 그루 회나무는 청풍계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실제의 고목이면서 충절과 지조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그 밖에도 맑은 서리, 참대, 솔바람 등의 소재들이 모두 맑고 곧은 절조의 이미지로 시적 정조를 구현하고 있는데, 이 시는 백악시단의 문인들이 시회를 단순하게 시흥(詩興)이나 푸는 모임으로 인식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백악시단의 문인들은 시회에서 시를 짓기도 하고, 서화를 감상하기도 하였다. 특히 시회에서 서화를 감상하는 것은 시회의 청흥(淸興)을 더욱 고조시키는 아취 넘치는 행위였다. 그런 데 다음 김시민의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듯, 이병연과 김시민이 시사를 개탄하며 조속(趙涑)의 그림을 펼쳐보고 송시열의 품평을 음미하는 모습은 이들의 서화 감상이 단순히 흥취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山月虛明, 荷花送香’, 此華陽翁題品滄老語也. 書畫夫豈足以論人? 而今見此老三絶, 其意致韻格疎散澹蕩, 烱炯楮墨間, 亦可以得其人髣髴也. 公卽丙 子後高士, 華陽之褒, 盖亦有意. ! 今之世, 其可復得哉? 北報一來, 都下鼎沸. 適到槎川李兄座, 相與語, 及時事, 俯仰憂歎, 主人出示此帖. 余重爲之慨然與感, 而書于帖尾. -金時敏, 東圃集7 題槎川趙滄江三絶帖後.

 

청풍계 외에 이들이 시회를 즐긴 장소는 백운동金時敏, 東圃集5 白雲洞與一源莘老諸人作會有杯盤絲竹醉中口呼; 金令行, 弼雲稿1 白雲洞與尹伯勖李一源會話憶主人., 삼청동權燮, 玉所稿』「·1」「季秋月夜與聖韶莘老一源子平會于三淸洞中翌日乃還唱酬得 六律用東坡韻; 李秉成, 順菴集1 三淸洞同伯氏調元及沈聖韶金莘老金聖期正 魯次樊川韻., 경복궁洪世泰, 柳下集3 同李一源彝叔兄弟金若虛遊景福宮; 金時敏, 東圃集1 故宮與李一源李載大夏坤道長諸益抽老杜韻共賦; 金時敏, 東圃集2 故宮煮艾與 一源道長作會次道長韻; 李夏坤, 頭陀草3 同道長一源金道以時佐金士修時 敏諸人遊景福宮次杜子美韵各賦., 옥류동權燮, 玉所稿』「·1」「玉流洞呼韻韶源平共賦; 李秉成, 順菴集1 玉流洞 雨後次唐人韻. 등 도성 안 명승이었다. 이 장소들은 모두 자신들의 거처인 백악과 근밀했던 곳으로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도성 안 명승을 지척에서 즐길 수 있었다. 또한 이들은 백악 인근의 동인들의 집에서 시회를 열기도 하고, 자신들이 근무하던 서울 관아에서權燮, 玉所稿』「·1」「閏三月初吉李一源携其弟子平我姨叔金公希魯任君玉璟李季 通潗李汝五秉常李汝受秉鼎吳明仲晉周金仲禮在魯李幼久李君賓上北營童子李秉 大金演萬金演昌金福錫老人李涵詩吏任璜從余乘夕追往攀次諸公韻[훈련도감]; 洪世泰, 柳下集6 太僕李主簿遣騎邀余與金莘老安國賓朴士賓金士修鄭惠卿鄭潤卿登君子亭呼韻共賦.[사복시의 군자정]; 洪重聖, 芸窩集4 社壇齋舍與曺雅仲趙麟 之趾彬諸人分韻共賦[사직단] . 시회를 열기도 하였다.

 

동인들의 활동 가운데 시회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비평 교유이다.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시회를 통해서나 아니면 시찰(詩札)을 통해서 자신의 작품을 알리고 동인들로부터 품평을 구하였는데, 이런 비평 교유를 통해 이들은 창작의 수준을 제고하는 기회로 삼았다. 동인간의 비평 교유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예는 이해조의 현산삼십영(峴山三十詠)에 대한 김창흡의 화운(和韻)에서 보인다. 양양부사로 나간 이해조는 양양의 명승 30곳을 정하여 각각에 대한 시를 지었는데거론된 30경은 다음과 같다. 雪岳晴光, 漢水春波, 洛伽觀日, 天吼聞風, 義相異蹟, 觀音神像, 繼祖舊窟, 飛仙層潭, 權金殘堞, 河趙空㙜, 峴首待月, 春巖賞花, 巫山雲雨, 鹿門烟樹, 芝山靈草, 蓴池嫩莖, 太平歌管, 海廟香火, 竹島仙臼, 草湖龍耕, 祥雲松林, 大堤楊柳, 鳳頂孤塔, 沙林斷碑, 西嶺采蕨, 北津觀漁, 冷泉故居, 黔洞荒墟, 灝堂望海, 靈穴尋僧., 시를 지을 당시부터 김창흡과의 수창을 염두에 두었다. 그리하여 완성된 초고를 김창흡에게 보냈고 김창흡은 자신의 비평을 담은 편지와 화운시로 답하였다. 이들 시편은 각각의 문집에 모두 수록되어 있다. 특히 이해조 의 문집에는 이해조의 시와 김창흡의 시가 함께 수록되어 있어 시교의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게 한다. 먼저 이해조는 현산삼십영(峴山三十詠)의 서론격인 글에서 명산과 바다가 함께 어우러지고 골골에 명승이 있는 양양이야말로 글로 포장되어야 할 곳인데도 단편적인 제영밖에 없다고 한 뒤, 자신이 양양의 명승 30곳을 전체적으로 제영하겠다면서 김창흡에게 매 수마다 화운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리고는 자신의 시와 김창흡의 시를 한데 묶어 독립적인 감상물로 사용했다고 하였다山水之難於兼備, 猶人才之不能通該. 雖一丘一壑一水一石, 尙難兼有而幷觀, 而况於江山之大, 而况巨海名嶽之相値而具美者乎? 我邦嶺東八景, 惟高襄二境, 背嶽臨海. 襄之雪岳, 世稱小金剛, 而洛伽之天造神創, 望海宏豁, 又可與高城之海山亭, 爭其甲乙. 此眞山海之具美者, 而且其邑號適符於中華勝區, 峴山漢水, 雖倣古立名, 山翁叔子之風流餘韻, 顧名興懷, 想像而不可忘. 其粧點湖山, 賁飾物態者, 可謂增價百倍矣, 邑舊無誌, 樓館寺刹, 間有寂寥篇詠, 而只記一時一區之景而已, 曾無搜剔一州之勝觀著錄而表章者, 余甚惜焉. 迺攷勝覽所載, 且訪邑中 耆舊, 編爲峴山三十景, 各附短章, 略記其勝, 仍要百淵金子益和之. ! 永州溪山, 特是窮荒絶徼, 黃茆苦竹間, 尋常一淙崢, 而自經子厚題品, 得與名山大湖幷傳而齊美, 至今讀其記者, 不覺窅然神遊. 而今此溟岳仙區, 瓌覽異蹟, 無人發揮, 山水之亦有遇不遇者, 豈不信哉! 顧余無文, 不可謂山水遇其人, 而余之遇山水則幸矣. 姑以拙詠及和章, 揭諸屛間, 以俟後來者之因此闡發焉. -李海朝, 鳴巖集4 峴山三十詠. 이에 김창흡은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삼십영(三十詠)을 물러나 누워 느긋하게 화운하였습니다. 화운을 마친 후에 원편(原篇)과 함께 읽어보니 원편과 화운한 것의 공졸(工拙)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원본에는 극명(極命)한 도가 경치를 따라 꾸며졌으니 (현산이) 지우를 만나지 못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또한 그 제목을 상세하게 하고 제목에 맞추어 엮은 곳이 가지런하게 견주어져 곡절하게 의미가 있으니 비로소 형의 마음이 퇴고를 등한시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시격을 논한다면 갱장준려(鏗鏘俊麗)함은 미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또한 얕고 깊은 가운데 법도에 어긋나지 않아 더욱 귀히 여길 만함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제가 지은 것은 모두 빛나지 않고 설명적인 것에 관계되어 부끄럽습니다. 그러나 하나는 회남왕의 도통한 닭과 개요, 하나는 산동 농사꾼의 말이니 각 기 하나의 체격이 되어도 무방할 듯합니다. 성편(盛篇)에 망령되이 평점을 찍었으니 기왕에 주시고자 하신다면 또한 이 예로써 거친 시편을 점말(點抹)하려 합니다. “죽도선구(竹島僊臼)”는 사적이 기이하고 환상적인 것이라 그것으로 초호유주(草湖游舟)”의 짝으로 삼는 것은 그다지 서로 어울리지 않습니다. 우연히 초호(草湖)를 기록한 것에 용경(龍耕)으로 점년(占年)한다는 일이 있어 그것을 취해 엮었더니 자못 공교롭고 절묘합니다. 그래서 문득 한 편을 지어 보냅니다. 노형의 뜻에도 맞는다면 고쳐서 삽입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三十詠, 戱於頹卧中趁趁和了. 旣和之後, 幷原篇通讀, 則毋論彼此工拙, 在峴山原本, 極命之道逐境粧點, 不可謂不遭遇也. 且詳其題目, 對屬整比, 曲有意味, 始見兄用意推敲, 不是等 閒. 而若論詩格, 則不惟鏗鏘俊麗之難及, 而亦覺淺深得中, 不失矩度, 尤爲可貴. 弟作全未玲 瓏, 多涉言詮爲可愧. 然一則劉安雞犬, 一則山東農談, 不害爲各一體格耶. 盛篇妄有評點, 旣 欲博粲, 亦欲以此例點抹蕪篇也. ‘竹島僊臼’, 事迹奇幻, 以之配草湖游舟’, 太不相倫. 偶記草 湖, 有龍耕占年之事, 取爲對屬, 頗爲巧妙, 故輒作一篇以呈. 兄意相叶, 則改賦以揷入如何? -金昌翕, 三淵集19 與李子東

 

삼십영(三十詠)을 거듭 읽으며 자세하게 풀어내보니 편편이 모두 가작입니다. 그러나 비평을 허용할 곳도 있으니 모름지기 얼굴을 마주하고 토론하여 생각을 다 펼쳤으면 합니다. “봉정유각(鳳頂遺刻)”봉정고탑(鳳頂孤塔)”으로 고쳐야 어그러지는 오류를 면할 것 같아 아울러 맞추어 엮었습니다.

三十咏申讀細繹, 篇篇皆佳. 而猶有可容評者, 要須面討可盡意也. ‘鳳頂遺刻’, 改作孤塔’, 可免乖謬, 而兼叶對屬矣. -金昌翕, 三淵集拾遺16 答李子東

 

 

두 자료 모두 김창흡이 현산삼십영(峴山三十詠)에 대해 비평한 편지이다. 첫 번째 편지에서 김창흡은 제목을 상세하게 하여 충분한 정보를 주는 것, 제목과 시의 긴밀함, 시격이 법도에 맞는 것 등을 들어 이해조의 원본 시를 높게 평가하였다. 그리고 나서 김창흡은 원본에 30경으로 명명한 것 가운데 초호유주(草湖游舟)’초호용경(草湖龍耕)’으로 바꾸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었다. 김창흡의 생각에, ‘죽도선구(竹島僊臼)’ 다음의 초호유주(草湖游舟)’는 너무 밋밋하여 앞의 시와 잘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창흡은 초호유주(草湖游舟)유주(游舟)’ 대신 제목에 부기된 설명 가운데 나오는 용경(龍耕)’이라는 말로 제목을 바꿀 것을 제안하였다. 실제로 이 해조의 문집에 실린 최종본은 김창흡의 견해를 받아들여 초호용경(草湖龍耕)’으로 되어 있다. 두 번째 편지에도 비슷한 내용의 제안이 실려 있다. 편지 내용으로 볼 때 이해조가 애초에 붙인 제목은 봉정유각(鳳頂遺刻)’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역시 문집에는 김창흡의 견해대로 봉정고탑(鳳頂孤塔)’으로 바뀌어 실려 있다. 이 가운데 초호용경이라는 작품을 살펴보기로 한다.

 

 

청초호의 용갈이(草湖龍耕)

쌍성호(雙成湖)는 일명 청초호(靑草湖)라고도 한다. ()의 북서쪽 10리 간성 경계에 있는데 주위가 수십 리이다. 매번 겨울철에 물이 얼고 나면 얼음이 홀연 비늘처럼 일어나는데 북쪽 가에서 남쪽 가까지 쟁기로 판 것 같은 형상이 있으니 시골 사람들이 용갈이[龍耕]라 부르고 이것으로 풍흉을 점친다고 한다.76)

草湖龍耕: 雙成湖, 一名靑草湖, 在府北四十里杆城界, 周數十里. 每冬月合凍後, 氷忽鱗起, 自北岸至南岸, 有若犂破狀. 村人謂之龍耕, 以此占年云. -李海朝, 鳴巖集4

 

雪裏種瑤草 知有呼龍仙 눈 속에 요초(瑤草)를 경작하니
용선(龍仙)을 부르는 줄 알겠네.
長湖爲十畒 耕氷如耕烟 너른 호수 10무나 되는데
얼음을 간 것이 마치 안개를 갈아놓은 듯.
霜鱗乍閃暎 雲耜何蹁躚 서리 비늘 언뜻언뜻 반짝이는데
구름 쟁기는 어찌 그리 너울대는지.
自耕又自雨 何憂不豊年 제 스스로 갈고 제 스스로 내리는 비인데
어찌 흉년들까 걱정하는가?

초호(草湖)의 용갈이[草湖龍耕], 李海朝, 鳴巖集4

 

潛龍變化熟 在淵若在田 잠룡(潛龍)의 변화가 난숙해서
못에 있어도 밭에 있는 것 같네.
存身有餘力 耕罷氷腹堅 몸을 보존하면서도 여력이 남았는지
갈기를 마쳤어도 얼음 복판 견고하네.
犂痕隨闊狹 湖岸占來年 쟁기 자국 넓고 좁음에 따라
호숫가에서 내년 농사 점친다네.
炎天又行雨 龍兮幾時眠 찌는 듯한 날씨엔 또 비를 내려야 하리니
용이여 어느 때나 잠들 수 있으려나?

김창흡의 和韻

 

용갈이 풍습을 제재로 한 시이다. 용갈이는 겨울철 얼음이 깨지는 방향을 보고 한 해의 풍흉을 점치는 것을 말한다. 편지에서 확인했듯 이해조의 원 제목은 초호유주(草湖游舟)’였다. 그런데 시의 내용을 살펴보면 어느 부분도 유주(游舟)를 연상할 수 있는 곳이 없다. , 이 작품은 제목만 바꾼 것이 아니라 김창흡의 권유대로 바뀐 제목을 따라 시를 다시 지은 것이다. 현산삼십영(峴山三十詠)의 완성에 김창흡의 의사가 전면적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양상을 미루어 볼 때 현산삼십영은 이해조와 김창흡이 서로 의견을 교류해가며 완성해간 공동작의 성격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현산삼십영은 이해조가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창흡의 편지에 이해조가 퇴고를 등한시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 것이나 국문시가(國文詩歌)현산별곡(峴山別曲)도 지었다는 정황에서 그러한 추정이 가능하다. 현재까지 현산별곡의 모습을 확인할 순 없지만 그와 관련한 김창흡의 편지가 남아 있어 현산별곡의 존재를 증명해주고 있다현산별곡(峴山別曲) 이것은 또한 곡보(曲譜)를 잘 알지 못한다면 어찌 그 사이에 품평을 허용하겠습니까? 정철 노인의 별곡에 비교하자면 부화한 소리가 많은 듯하고 깊은 맛이 자못 부족합니다. ‘백동제(白銅鞮)’백접라(白接罹)’는 마땅히 본색에 맞는 말을 써야 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방식으로 밋밋하게 배치하여 번신(翻身)하는 기세가 없으니 점환(點換)하여 착락(錯落)한 것을 요랑(寥朗)하게 바꾸어야 절묘할 듯합니다. 마지막에 고사를 인용한 것은 또한 지나치게 번잡하니 혹 잘라내고 간략하게 할 수 있는지요? ‘척촉(躑躅)’ 구절은 정철 노인의 말을 답습한 것이니 다른 사람의 점검을 받을까 걱정입니다. 나머지는 직접 만나 토론하길 기다리며 우선 돌려보냅니다[峴山別曲, 此亦不閒於曲譜, 豈容評隲於其間哉? 窃嘗較諸鄭老, 則浮響似多, 而幽衷頗乏. ‘銅鞮接罹’, 固當用本色語. 而一串平排, 無翻身之勢, 似宜點換, 使錯落寥朗爲妙. 末端引古事, 亦太繁猥, 或可裁削就簡否? ‘躑躅句襲鄭老語, 恐被人點檢也. 餘俟面討, 姑且還之. -金昌翕, 三淵集拾遺16 答李子東]. 김창흡은 편지에서 현산별곡의 여러 문제점을 지적하였는데 그 가운데 고사를 인용한 것이 너무 번잡하다는 지적은 이해조의 시 전반을 비평하는 데도 적용될 수 있다. 이해조는 위에 예시된 시처럼 산문과 시를 결합하여 작품을 창작했기 때문에 시의 의미를 깊게 하는 방법으로 전고 사용을 즐겨하였다. 그런데 이 방법은 전고 사용 이 그 적실함을 잃게 되면 질박함과 진실함이 훼손되고 마는 단점도 안고 있다. 그래서 김창흡은 다른 편지에서 새기고 지운 흠이 있으니 꾸미고 곱게 하는 데서 벗어나지 못하고 시의 잡다한 것에 빠진 것이 왕왕 있습니다. 모름지기 질박한 뜻을 붙여 그것을 바로 잡아야 비로소 높은 경지에 오를 수 있을 것입니다[往往刻畫塗抹之過, 却不免脂粉纖嫰, 而墮於詩餘者, 須著蒼朴意思而矯之, 始可高蹈矣.]”金昌翕, 三淵集拾遺16 答李子東라고 비평하기도 하였다.

 

김창흡과 이해조의 예에서 확인되듯,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자신의 창작을 동 인에게 보내어 적극적인 비평을 요구하였고 타당한 비평일 경우에는 또한 동인의 평가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이러한 예는 백악시단의 다른 구성원들 간에도 빈번하게 확인된다. 김창협은 아우 김창흡에게 보낸 편지에서 기행시 수 십 편을 써서 보내네. 이 시들은 대부분 대상과 감정을 서술하고 형상하는 데 주력하느라 태반이 조급히 지어 미처 다듬지도 못한 것이네. 의치(意致)는 혹 볼 만 할지 몰라도 격조(格調)는 매우 형편없는 것 같으니 이래도 괜찮은지 모르겠네. 이 모든 편에 비평을 해주되, 뜻대로 비점을 찍고 수정을 하여 잘되고 못된 점을 보여주어도 괜찮네.”紀行詩數十篇錄去. 大抵主於抒寫事情, 太半潦草, 不暇鍊琢, 意致雖或可觀, 而格調殊似猥下, 不知似此固無妨否. 試爲評來諸篇, 隨意點抹, 使見瑕瑜亦可. -金昌協, 農巖集11 與子益-丙子라며 수정까지 허용하는 비평을 구한 바 있다. 그리고 신정하는 홍세태에게 보낸 편지에서 시의 장단을 논하고, 구체적인 시어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였으며, 창작 수준을 제고하기 위한 조언을 하기도 하였고,然鄙意亦不無一二可疑者, 如燕行贈別中長城煤山二絶, 能不失滄浪本色, 又結句儘佳. 而其外數作, 筆勢未免衰颯. ‘貧招’‘懶失等語, 則又似甚俚俗. 鄙意去此一絶, 但用上三作寄去爲好. 未知如何. 此必是滄浪牽率之作, 不大段着力而致然, 此自古人之間所不免者. 但恐老氣日以低垂, 詩鋒日以摧頹, 信筆寫去, 亦自謂無復難事, 則雖欲時自刻力以發警意, 有未可得. 鄙意欲 令滄浪別更尋看少年時所覽文字, 亦漸收藏筆頭, 待其不得不發而後發之, 則所得要必是奇語. 未知如何. -申靖夏, 恕菴集9 與洪世泰 권섭과 이병연 또한 서로의 시와 시어에 대해 구체적인 비평을 가하고 시어에 대한 조언을 구하기도 하였다來詩上篇, ‘留燈不如作懸燈’, ‘葑葅不如作菁葅’. 結梢無力又未稳. 下篇還空署, 未分曉, 而此外無病. 兩篇押霜字, 皆佳耳. 弟今日又有關心事, 晩始屬思, 聊用仰塞. 未知高評又何如也. 曉出難更奉可歎. -戊子抄秋一源書- -權燮, 玉所稿』「朋遊唱酬錄·2”; “洞深春起晏, 朝日 明柴扉. 朋至席猶靜, 馬鳴寒更微. 看氣候, 嘯咏玩-動字如何-心機. 相過隔林麓, 不堪還 獨歸. --” “送客欲出-此字以平看之, 至望至望-, 相携還入扉. 高行腰散病, 遙坐意傳微. 登臨爭地勢, 去住各天機. 不須嫌春早, 猶堪踏雪歸. -- -權燮, 玉所稿』「朋遊唱酬錄·2」 「無題. 특히 권섭의 경우에는 벗들과 주고받은 시편들을 따로 모아붕유창수록(朋遊唱酬錄)을 편찬하기도 하였다. 백악시단의 구성원들이 보인 왕성한 비평 교유의 모습은 이들이 동인으로서의 신뢰를 바탕으로 작품의 질적 제고를 위해 함께 고민하고 노력했음을 실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동인의 작품을 공동으로 포장(襃獎)해주기도 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이병연이 소장했던 해악전신첩(海岳傳神帖)이다. 이병연은 김화(金化)에 부임한 지 두 해가 지난 17128, 아버지 이속(李涑), 동생 이병성, 그리고 벗 장응두(張應斗), 정선과 함께 두 번째 금강산 유람을 하게 되었다. 이병성의 기록에 따르면 이병성은 부친 이속(李涑)을 모시고 장응두, 정선과 함께 서울을 출발하여 김화(金化)에서 이병연을 만난 뒤, 내금강을 유람하고 동해를 따라 16숙부인 이집(李潗)의 흡곡(歙谷) 임소(任所)까지 유람하였다起壬辰八月陪家大人自京發行, 會家兄金化任所, 入楓岳遵東海, 止於十六叔潗歙谷任所. 鄭元伯敾張弼文同. -李秉成, 順菴集2 東遊錄. 이렇게 두 차례의 금강산 유람을 마친 이병연은 금강산을 유람하면서 쓴 자신의 시와 정선의 그림을 합하여 해악전신첩이라는 시화첩을 만들고, 이 시화첩을 백악시단의 동인들에게 선보였다. 먼저 스승인 김창흡에게 보여 제사(題詞)를 받았고 1713년 흡곡현령(歙谷縣令)으로 부임하던 길에 김화(金化)에 들른 조유수에게 제사를 받았으며趙裕壽, 后溪集8, 李一源海山一覽帖跋 1714년 금강산 유람을 위해 이곳에 들른 이하곤에게도 제사를 받았다李夏坤, 頭陀草14, 題一源所藏海岳傳神帖. 이들은 이병연의 시와 정선 그림의 한 편 한 편을 따라 제사를 남겼는데, 한 예를 보이면 다음과 같다.

 

 

[삼부연(三釜淵)]

거대한 절벽 시커먼 못에 삼단으로 폭포가 이루어져

용은 그 아래 칩거하고 선비는 그 위에 깃들어 살며

그 덕이 같기를 바랐으나 끝내 그 이름만 훔치고 말았던가!

巨壁玄潭, 三級成瀑, 龍蟄于下, 士棲于上, 庶同其德, 而終竊其號而已耶!” -金昌翕, 三淵集25 題李一源海嶽圖後

 

삼연자께서 백담에 복거하면서 이곳은 버려진 곳이 되었다. 허자(許子)는 한 개의 표주박 소리도 번거롭게 여겼거늘, 삼단 폭포가 이미 시끄러운데 또 어찌 백 굽이 물가로 옮기셨던가? 시험 삼아 삼연자께 보인다.

三淵子旣卜百潭, 此爲前魚矣. 許子尙以一瓢爲煩, 三瀑之已閙, 而又何百曲爲哉? 試擧似三 淵子. 右三釜淵 -趙裕壽, 后溪集8 李一源海山一覽帖跋三釜淵

 

삼부연은 기이함이 대단한데 일원의 이 시는 삼부연보다 더욱 기이하다. 시는 다음과 같다.

 

위 가마 물은 가운데 가마로 떨어지고

물이 넘쳐 아래 가마에 걸려있네.

올려다보면 모두 하나의 절벽일 뿐인데

그 누가 세 못이 뚫린 줄 알겠는가?

태곳적 용이 움켰다 생각했는데

천년 세월 물방울만 뚫려있음을 보겠네.

조화를 물을 길 없어

지팡이에 기댄 채 홀로 망연해지네.

 

반복하여 읊조려보면 절벽이 하늘에 매달린 채 흩날리는 물줄기가 뿜어져 나오는 모습이 늠름하게 눈에 선하니 문득 그림은 또한 하나의 군더더기임을 알겠다.

三釜淵奇甚, 一源此詩更奇於三釜淵矣. 詩曰: ‘上釜落中釜, 波濤下釜懸. 仰看全一壁, 誰得 竅三淵. 太始思龍攫, 千年驗溜穿. 無由問造化, 倚杖獨茫然.’ 反復諷詠, 則絶壁天懸飛流噴 薄之狀凜然在目, 便覺丹靑絹素, 又一贅疣也. -李夏坤, 頭陀草14 題一源所藏海岳傳神 帖三釜淵

 

 

위에 제시한 세 자료는 해악전신첩삼부연시와 그림에 붙인 제사들이다. 첫 번째 자료는 김창흡의 제사로, 삼부연에 복거했던 자신의 과거 행적을 떠올리며 쓴 것이다. 김창흡은 27세 되던 1679년 겨울, 가족들을 이끌고 삼부연 상류의 용화촌에 복거한 바 있다. 생애 첫 은거지였던 삼부연은 평생 은일의 삶을 살았던 김창흡에게 마치 정신적 고향 같은 곳이었다이승수, 三淵 金昌翕 硏究, 한양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7, 60~62면 참조.. ‘삼연(三淵)’이라는 자호(自號)가 이를 보여준다. 김창흡의 제사는 객관적인 자기 체험을 서술하면서도 마지막에 절묘한 뜻을 붙였다. 김창흡은 폭포 아래 칩거한 용이 자신을 감춘 채 우주의 조화에 참여하듯, 은거지에서 부단한 학문과 수양을 통해 삶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다. 그러나 과연 현재의 자신은 어떠한가? 스스로 삼연이란 호를 취한 것 외에 아무 이룬 것이 없다며 겸손의 뜻을 붙였으나, 이는 은거의 초심을 떠올리며 자신을 부단히 경계하는 것이자 제자 이병연을 위한 가르침의 뜻을 붙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조유수는 김창흡의 제사가 담고 있는 의미를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었다. 그래서 김창흡을 이어 은거의 의미에 대해 말하였다. 조유수가 제사를 붙일 무렵, 김창흡은 설악산 영시암(永矢庵)에 은거하고 있었다. 인용문의 첫 부분은 이것을 말한다. 조유수는 이어 삼부연 복거와 백담(百潭) 복거의 의미에 대해 오묘한 뜻을 붙였다. ‘허자는 요()임금이 구주(九州)를 맡기자 기산(箕山) 영수(穎水)에 귀를 씻었던 허유(許由)를 가리킨다. 허유는 물 마실 그릇이 없어 손으로 물을 움켜 마셨는데 어떤 사람이 표주박 하나를 보내주자 물을 떠 마실 수 있었다. 그런데 물을 마신 뒤 나무에 걸 어둔 표주박이 바람에 달그락거리자 시끄럽다며 마침내 표주박을 버렸다고 한다許由隱箕山, 無盃器, 以手捧水飮之. 人遺一瓢, 得以操飮, 飮訖, 挂于木上, 風吹瀝瀝有聲. 由以爲煩, 遂去之. -蒙求集註卷上. 조유수는 은자의 표상인 허유를 들며 김창흡의 백담으로의 이거(移居)에 의문을 표하였는데, 그것은 김창흡이 삼부연을 버리고 백담으로 간 이유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김창흡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김창흡의 설악산 은거는 기사환국으로 부친이 사사되는 참혹한 가화를 겪으면서 절속(絶俗)의 의지를 실현한 것이었다. 이를 잘 알고 있었던 조유수는 치세(治世)의 은자인 허유와 난세(亂世)의 은자인 김창흡을 대비하였다. , 허유는 표주박 달그락거리는 소리도 시끄럽다고 여겼지만, 김창흡은 시비성(是非聲)을 차단하기 위해 삼부연 폭포로도 모자라 백 굽이 물소리가 울리는 백담으로 옮겨갈 수밖에 없었다. 이 점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던 조유수는 의문의 형식을 통해 자신의 이해를 행간에 붙였다. 이하곤의 제사는 이병연의 시적 성취에 초점을 맞추었다. 시적 대상인 삼부연도 기이하지만 그것을 형상화한 이병연의 시는 더욱 기이하다고 평가한 뒤, 그림이 필요 없을 정도로 형사를 통한 전신의 묘를 이루었다며 이병연의 시를 부각시켰다.

 

해악전신첩과 그에 붙인 제사들은 백악시단의 동인적 면모를 뚜렷하게 보여준다. 해악전신첩자체가 시와 그림이라는 두 종의 예술이 만나 이루어진 공동작의 특성을 보인다는 점해악전신첩(海岳傳神帖)속 이병연의 시와 정선의 그림은 교섭 양상이 일반적인 제화시(題畵詩)나 시의도(詩意圖)와는 확연하게 구별된다. 이병연과 정선은 함께 금강산을 유람하며 한쪽에서는 시로, 한 쪽에서는 그림으로 금강산을 형상화한 뒤, 이 둘을 묶어 해악전신첩을 완성하였다. 이런 까닭에 해악전신첩에 실린 이병연의 시는 엄밀히 말하면, 제화시가 아니라 산수시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에 관한 상세한 논의는 졸고, 「『해악전신첩(海嶽傳神帖)에 나타난 시화(詩畵) 교섭의 새 양상, 한국한문학연구45, 2010을 참조할 것.이 그러하고, 이러한 예술적 성취를 둘러싼 사우들의 평가 또한 그러하다. 앞서 보았듯해악전신첩에 붙은 제사들은 시 화첩에서 얻은 각자의 감회가 개별적, 고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제사자(題詞者)와 작가, 그리고 제사자들간의 관계가 섬세하게 고려되어 대단히 유기적인 모습을 띠고 있다.

 

이처럼 이병연의 해악전신첩은 시명이 자자했던 이병연과 당대 최고의 화가였던 정선의 그림을 한데 모은 데다 김창흡, 조유수, 이하곤의 제사가 더해지면서 명실공히 최고의 걸작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이러한 예술적 성취는 다른 동인들에게는 일종의 쾌사(快事)로 여겨졌다. 그래서 김창업은 신정하에게 보낸 시에서 정선의 그림과 일원(一源)의 시, 금강산이 있은 뒤로 이런 기품(奇品)은 없었지. 정보가 이제 좋은 솜씨를 가지고 떠나니, 어찌 승사(勝事)를 그들에게만 양보하겠소?”鄭生之畵一源詩, 自有金剛無此奇. 正甫今携好手去, 寧將勝事讓他爲. -金昌業, 老稼齋集5 送申正甫赴北幕라는 말로 이들의 예술적 성취를 높이 평가하면서 북평사로 가는 길에 금강산을 들를 예정이었던 신정하에게 이병연과 정선이 이룬 예술적 성취를 다시 기대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동인의 예술적 성취를 공동으로 포장하면서 시단의 위상을 제고시켜 나가는 한편, 창작의 자극제로 삼아 창작의 질적 수준을 높여 나갔다.

 

이상에서 백악시단의 동인적 면모가 잘 드러나는 문학 활동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들은 낙송루시사의 경우처럼 민멸된 시도(詩道)를 진작시키겠다는 확고한 목적을 가지고 시사를 운영하였으며, 자신들의 진시운동을 실제 창작을 통해 심화시키고 확산시키기 위해 열정적으로 시회활동을 이어갔다. 또한 작품에 대한 적극적 비평과 소통을 통해 창작의 질적 수준을 제고시켜 나갔으며, 동인들이 이룬 예술적 성취에는 집단적인 포장을 통해 시단의 위상을 높여갔다. 백악시단은 이러한 동인 활동을 통해 내적으로는 자신들의 진시운동을 정비하고 외적으로는 진시창작의 확산을 추동해 갔다. 18세기 한시가 보인 다양한 변화가 백악시단에 의해 선도될 수 있었던 것도 뛰어난 개별 작가 몇몇의 영향력보다 동인들의 시단 활동에 힘입은 바 크다 할 것이다. 백악시단은 자신들의 창작 운동에 공감하는 문인들을 지속적으로 끌어안았고, 시단의 규모가 커질수록 진시운동은 더 넓게 확산될 수 있었다.

 

 

 

 

인용

목차 / 지도

강의록 / 후기

. 서론

. 백악시단의 형성과 문학 활동

1. 백악시단의 주요 구성원

2. 동인들의 문학 활동

. 진시의 기저와 논리

1. 자득의 학문자세와 진 추구의 정신

2. 진시의 제창과 복고파·공안파의 비판적 수용

3. 성리학적 천기론의 문학적 변용

. 진시의 정신적 깊이와 미학

1. 형신을 통한 산수의 묘파

2. 민생에 대한 응시와 핍진한 사생

3. 물아교감의 이지적 흥취

4. 소통의 깊이와 진정의 울림

. 진시의 시사적 의의

.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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