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봐도, 두 번 봐도 모르니 조급해하지 말라
『소화시평』 권상 73번 박상 시를 할 때 해동강서시파의 특징을 제대로 음미해봤었다. 여러 책을 참고하거나 ‘한국한시약사(韓國漢詩略史)’를 보다 보면 16세기에 이르러 15세기 후반에 중국에서 유행하던 강서시파의 시풍을 본받아 박은ㆍ이행ㆍ박상ㆍ정사룡ㆍ노수신ㆍ황정욱이 강서시를 수학했고, 박은ㆍ이행ㆍ정사룡을 해동강서시파라 부르게 됐다는 설명이 나온다. 그러면서 이들의 시풍에 대해 흔히 ‘기괴(奇怪), 난삽(難澁)’이라 평하고는 한다는 말이 덧붙여 있다. 그만큼 그들의 시는 머리를 온통 쥐어 짜네 늘상 습관적으로 써 오던 관습을 집어 던지고 전혀 새로운 전고를 쓴다던지, 기존에 쓰던 전고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쓴다던지, 문장을 비틀어버린다던지 했던 것이다. 그래서 박상 시를 해석할 때 무척 헤맸던 기억이 생생하다.
擁山爲郭似盤中 | 산을 둘러 성곽이 되니, 소쿠리 안과 비슷한데, |
暝色初沈洞壑空 | 어둠에 막 잠기자 골자기는 텅 비었네. |
峯頂星搖爭缺月 | 묏 봉우리의 별은 흔들리면서 이지러진 달과 다투고 |
樹顚禽動竄深叢 | 나무 끝의 새가 움직여 깊은 숲으로 숨누나. |
晴灘遠聽翻疑雨 | 갠 여울소리 멀리서도 들리니 문득 비 오나 싶고 |
病葉微零自起風 | 시든 잎사귀 지자 절로 바람이 일어나네. |
此夜共分吟榻料 | 이 밤에 함께 시를 읊조린 침대값은 함께 나눠 내겠지만, |
明朝珂馬軟塵紅 | 내일 아침이면 말방울 소리 나고 붉은 먼지 날리겠지. |
『소화시평』 권상 81번의 정사룡의 시는 이미 『우리 한시를 읽다』에서 읽은 적이 있어 박상 시보단 훨씬 수월하게 접근할 수 있었다. 난해하긴 해도 어렵다는 생각까지는 못했는데 교수님과 함께 보다 보니 역시나 또 한 번 깨달았다. 내가 본 것은 그저 글자를 따라 가며 해석하는 정도에 그쳤을 뿐이지 이 시를 제대로 이해하며 본 것은 아니라고 말이다.
예전에 임용을 공부할 때도 분명히 느꼈던 것이지만 오랜만에 다시 공부를 하다 보니 더 크게 느껴지는 게 있다. 그건 뭐니 뭐니 해도 작품에 대한 이해에 대한 얘기다. 분명히 개인 공부를 하면서는 ‘잘 이해했고 이 정도면 그래도 어느 정도 이 작품에 대해 알게 됐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스터디를 해보거나 다른 누군가에게 그와 관련된 질문을 들으면 머리가 새하얘지면서 하나도 모르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이 그렇다. 그래서 매번 ‘이렇게 공부해봤자 또 도루묵이다’라는 절망에 빠지기도 했던 것이다. 바로 그런 절망적인 사태가 이번에도 발생한 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교수님과 스터디를 하는 중에는 절망보단 희망이 어렸다. 내가 봐온 걸 ‘전부다’라고 생각했는데 실력이나 전문지식이 앞선 사람이 앞에 서서 메아리만 쳐줘도 나에겐 안심이 되며 이 길을 충분히 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덧붙여 내가 문장을 아직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피상적으로 따라가는 것도 어찌 보면 매우 당연한 일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학문엔 천천히 가다보면 거기서 비약적으로 뛰어오르게 되는 활연관통이 있을 뿐이지, 내가 욕심낸다고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른 대각선적이거나 계단식의 꾸준한 성장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문 공부에 대해서도 좀 더 생각을 다르게 먹을 필요가 있다. 오늘 봐도 내일이면 까먹을 것이고, 나중엔 안 본 것과 똑같이 된다 할지라도, 그렇게 하나하나의 기반을 만들어간다는 생각으로 해나가는 것이다. 그렇게 고군분투하다가 어느 날 교수님이나 같이 공부를 하는 친구들이 한 구석을 탁 쳐주면 순간적으로 머리가 환해져 모든 게 이해되는 때도 올 것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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