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   2024/1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건빵이랑 놀자

소화시평 감상 - 상권 94. 경험을 해야 더 맛깔나는 한시들 본문

연재/한문이랑 놀자

소화시평 감상 - 상권 94. 경험을 해야 더 맛깔나는 한시들

건방진방랑자 2021. 10. 27. 17:42
728x90
반응형

경험을 해야 더 맛깔나는 한시들

 

 

책 너머의 지식과 학교 너머의 공부라는 것이 무언지는 소화시평권상 94에 명확히 드러나 있다. 홍만종도 책을 통해서 시를 익혔던 사람이라 시에서 피상적으로 느껴지는 것들은 잘 이해는 되지 않지만 이런 경우도 있는 거겠지라고 갸우뚱하며 넘어갔나 보다. 굳이 홍만종이 아니더라도 현대인처럼 지식을 책을 통해서만 쌓는 사람이라면 이와 같은 경험은 수도 없이 했을 것이다. 학교에서 수없이 배웠던 여러 과목들은 분명히 경험이 무르익어 생성된 것임에도 우리의 경험은 완전히 배제된 앙꼬 없는 찐빵으로써의 지식만을 무작정 암기하고 익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배우면 배울수록 삶은 배움과 철저하게 괴리되어 갔던 것이다. 뭔가를 많이 아는 것 같은데 막상 현실에선 적용도 할 수 없고, 또 현실적인 감각은 뒤떨어지는 것 같은 아이러니 말이다.

 

홍만종도 이런 지식과 현실의 괴리를 받아들이며 살던 와중에 어느 순간 ~ 이 시가 바로 이런 환경 속에서 나온 것이구나.’라고 깨우쳐지던 순간이 있었던 것이다. 시에서 묘사한 상황과 얼핏 비슷한 상황을 경험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그 시의 의미는 단순히 이상적으로 쓰여진 게 아니라 현실의 경험을 기반하여 쓰여졌다는 사실을 간파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걸 간파하게 되면서 그 시는 자신의 경험과 완벽히 하나가 되어 재밌고 신선한다는 느낌이 느껴졌던 것이다.

 

 

江日晩未生 蒼茫十里霧 강의 해 늦도록 솟질 않고 아득히 십리까지 뻗힌 안개.
但聞柔櫓聲 不見舟行處 다만 노 젓는 소리 들리나, 배가는 곳 보이질 않네.

 

 

그래서 그는 강극성의 시를 처음 보았을 땐 도무지 맛을 느끼지 못하다가 결국 비슷한 경험을 하고 나서야 처음으로 이 시에서 경치를 설명한 것이 진실에 가깝다는 것을 깨달았다[始覺其說景逼眞].”라고 말할 수 있었다.

 

 

雁鳴江月細 曉行蘆葦間 기러기 울고 강가의 달 얇은데, 갈대 사이를 새벽에 출발하네.
悠揚據鞍夢 忽復到家山 흔들흔들 안장에 의지해 꿈꾸다가 문득 다시 고향에 도착했지.

 

이와 비슷한 사례인 권필의 시를 읽었을 때의 사례도 함께 제시하며 이 글의 주지를 더욱 강화시키고 있다.

그러면서 두 작가의 시적 가치가 경치를 대하고보니 더욱 높다[兩公詩價, 對景益高].’고 결론짓고 있다. 여기서 핵심어는 당연히 경치를 보다[對景]’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그 말은 곧 지식이란 경험을 통해 더욱 실질적으로 다가오며, 경험이 빠진 지식은 피상적으로 다가온다는 말이다.

 

 

다산이 딸에게 써서 하피첩에 써서 보내준 시.  이런 방식으로 그림과 글은 서로를 보충해준다.     

 

 

김형술 교수님은 이 글의 이해를 위해 다음과 같은 글을 제시해줬다.

 

 

심덕잠이 말했다. “당나라 무명씨가 지은 안개 낀 새벽에 사람 보이지 않지만 은근히 몇 번 들려오는 노 젓는 소리라는 구절은 새벽경치를 전하며 베낀 것이 모두 그림으론 도달할 수가 없는 것이다.

沈德潛曰: 唐無名氏有烟昏不見人, 隱隱數聲櫓, 傳寫曉景, 俱非畫筆能到-明詩別裁

 

 

그림은 한눈에 많은 정보들을 담아낼 수 있다. 그래서 그걸 보는 순간 사람들은 마치 그 상황을 모르더라도 그 상황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하지만 그림엔 한계가 있는데 거기엔 소리와 정황이 담길 수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최근엔 예술의 경계를 허물고자하는 많은 전위적인 실험들이 행해지고 있으며 우리나라엔 이 분야에 매우 걸출한 인물을 배출하기도 했다. 그가 바로 백남준씨다. 화폭에 갇힌 그림이 아니라, 그걸 넘어 아예 영상으로 분야를 확장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미디어가 발달하지 않았던 예전엔 가시적인 영역에선 그림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고 그림으로 표현한 것으로 부족하다 싶으면 그림에 지은 시[題畫詩]”를 남겨 미처 표현되지 못한 부분을 표현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할 수 있으리라. ‘그림으론 시를 드러내고, 시로는 그림을 보충한다고 말이다.

 

 

 

 

 

 

인용

목차

상권 목차

하권 목차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