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검녀」의 여성 캐릭터 분석
1) 「검녀」 작품 소개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여종이다. 그녀는 주인댁 소저와 함께 검술을 익혀 주인댁의 원수를 갚은 다음, 선비로 이름이 높았던 한 양반의 소실이 되기를 자청했으나 그가 큰 인물이 아님을 깨닫고는 따끔하게 충고를 남기고 도로 남장을 하고는 떠나버린다는 내용이다.
주인집 소저와 동갑인 그녀는 소저의 소꿉놀이 시중을 들며 같이 자란 사이인데, 소저가 아홉 살 때 주인집이 권세가에 의해 멸문지화를 당하고 오로지 소저와 유모 그리고 그녀만이 목숨을 건져 도망을 할 수 있었다.
10살이 되자 소저는 그녀와 상의해서 남장을 하고 검객을 찾아 길을 떠났고 2년 후 비로소 검객을 만나 검술을 전수받았으며 5년이 되자 마침내 하늘을 날아다닐 수 있게 되었다. 마치 무협영화에서나 가능할 정도의 무술을 수련한 후 그들은 유명한 도회지를 다니며 자신들의 검술을 보여주고 몇 천 냥에 이르는 돈을 벌어 마침내 보검 넉 자루를 손에 넣게 된다. 그리고는 묘기를 자랑하러 온 사람들인 척하며 원수의 집을 찾아가는데 ‘달빛을 타고 칼을 휘둘러 칼날이 이르는 곳에 떨어진 머리가 금방 수십이 되었고[乘月舞之, 飛劍所割, 頃刻數十頭]’ ‘원수의 집 안팎의 식구 모두 붉은 피를 쏟으며 쓰러[讐家內外皆已赫然血斃矣]’졌으며 그리고서 자신들은 ‘날고 춤추며 돌아왔다[飛舞回來]’고 한다.
그 후 소저는 목욕하고 여복(女服)으로 갈아입은 후 술과 안주를 마련하여 복수한 내용을 선산(先山)에 고하고 자결하기로 결심한다. 그래서 여종에게 당부하여 ‘나는 남자가 아니니 살아남더라도 가문을 이을 수 없고, 남장으로 8년간 천 리를 횡행했으니 비록 남에게 몸을 더럽힌 바 없지만 어찌 처녀의 도리이겠느냐[吾非吾親之男子, 雖生存於世, 終非嗣續之重. 而男裝八歲, 方行千里, 縱不汚身於人, 寧爲處子之道乎]?’라고 하고서, 다시 중매해 줄 이가 없어 혼인도 불가하니 자신은 여기서 자결할 터인데 자신이 죽은 후 보검 두 자루를 팔아 장례를 지내주면 여한이 없겠다고 한다.
그리고는 ‘너는 내 처지와는 다르니 천하의 기사(奇士)를 택해 그의 처나 첩이 되라[審擇奇士, 爲之妻妾也]’고 하면서 ‘너 역시 기이한 포부와 걸출한 기상이 있는데 어찌 평범한 남자에게 머리를 숙이고 고분고분 살겠느냐[汝亦有奇志傑氣, 豈其甘心低眉於凡子者乎]?’는 말을 남기고는 그 자리에서 칼날에 엎드려 죽었다.
여종은 소저의 말대로 장례를 지내 준 후 남장으로 3년을 더 떠돌다가 고명한 선비로 삼남에 이름이 높았던 소응천(蘇凝天)을 택해 소실로서 몇 년 동안이나 동거를 했다. 위 내용은 어느 날 그녀가 독한 술과 좋은 안주를 갖추어서는 밝은 달밤에 소응천에게 고백한 자신의 과거사였다. 그녀가 그런 고백을 하게 된 동기는 살아보니 그가 천하의 기사(奇士)가 아닌 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런 줄 알면서도 억지로 모신다면, 이는 나 자신의 소망을 저버리는 것이요, 아울러 소저의 당부를 어기는 것[賤身旣知座下之非奇士, 而要終身仰望, 則是負宿心, 而兼負娘子之命也]’이라고 하고서, 내일 새벽에 떠나 먼 바다, 조용한 산에서 노닐겠다. 남장으로 가뿐히 갈아입고 떠날 것이니 ‘어찌 다시 여자로서 음식을 장만하고 바느질하는 일에 얽매어 지내겠는가[寧復爲女子, 低眉斂手於飮食縫紉之事乎]?’라고 한다. 그리고 작별의 예로 비장(秘藏)했던 검술을 선보이기 위해 그에게 독한 술 10여 잔을 권하는데 소응천의 정신이 굳세지 못하므로 술기운에 의지하지 않으면 자신의 매서운 칼바람을 버텨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덧붙인다. 그리고는 남장을 한 후 연화검 한 쌍을 꺼내 자신의 화려한 칼솜씨를 한바탕 과시했다.
소응천은 ‘처음에는 긴장하고 앉았다가 중간에는 벌벌 떨더니 마침내 쓰러져서 거의 인사불성이 되었다[凝天大驚, 而赧然嘿然, 不能開一語, 只受所擎之杯, 旣滿平時之量, 止之].’ 그녀는 칼을 도로 집어넣고 옷매무새를 만지더니 술을 데워 한 잔 마시고 기뻐하였다. 다음날 새벽에 남장을 한 채 떠나갔으며 그 후로는 그 행방을 알 수 없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안석경(安錫儆 1718~1774)이 쓴 「삽교만록(霅橋漫錄)」에 제목도 없이 수록되어 있다. 그가 삽교로 들어간 것이 최소한 50세(1768) 이전의 일일 것으로 추정되니, 「삽교만록」의 저술은 아마 1770년부터 1773년 사이의 일이었을 것 같다. 그런데 이 작품에는 실제 인물 두 사람이 등장한다. 그 한 명은 안석경에게 이 이야기를 전해 준 ‘단옹(丹翁)’이라는 인물이고, 다른 한 인물은 작품 속에서 검녀를 첩으로 삼았던 ‘소응천(蘇凝天)’이라는 인물이다.
단옹은 안석경의 친구였던 민백순(閔百順 1711~1772)을 가리키는데, 민백순은 자가 순지(順之), 호가 경암(警菴)ㆍ단실자(丹室子) 등이다. 그는 노론의 영수 민진원(閔鎭遠)의 손자로서, 후에 벼슬이 승정원 좌승지까지 오른 인물이었는데 안석경과는 선대부터 교유가 있어 유달리 친분이 두터웠다고 한다.
이 작품이 ‘단옹이 호남 사람에게서 들은 이야기다.’로 시작하는 것을 볼 때, 이는 민백순이 아버지의 귀양지였던 나주에 따라갔을 때 들었을 이야기일 가능성이 있다. 소응천(蘇凝天: 1704~1760)의 자는 일혼(一渾), 호는 춘암(春庵)으로 그는 파당(派黨)으로 인한 혼란한 현실을 떠나 두류산으로 은거를 한 후, 평생 산림 속에서 은거하며 이곳저곳을 유람하다가 말년에 전주로 나와 일생을 마친 인물이다.
당시 호남에서는 그가 남명 조식 이후의 고결한 처사로 명성을 떨치고 있었고, 따라서 그를 추종하는 무리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문집인 『춘암유고(春庵遺稿)』 권7 「처사소공행장(處士蘇公行狀)」에 의하면, 한 번은 ‘피세입산(避世入山)’이 죄목이 되어, 또 한 번은 무고(誣告)를 받아 그를 따르던 몇몇 사람과 함께 끌려갔던 일이 있다.
그런데 「검녀」를 보면 ‘지금부터라도 산림에 은거하지 마시고 그저 적당하고 평범하게 전주와 같은 큰 도회지에 살면서 아전들의 자제나 가르치며 살면 세상의 화는 면할 수 있을 것이다[願自今無居深山, 而隤然闒然, 處全州大都會, 敎授吏胥子弟, 以足衣食而已, 無他希覬, 則可免世禍矣].’는 대목이 있어 소응천의 실제 삶과 부합하는 측면이 있다.
안석경과 민백순의 친밀함, 소응천이라는 인물의 실재 삶과 서사의 일치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이 작품은 당대 현실 속에서 충분히 개연성 있는 서사였을 것으로 보인다.
2) 「검녀」의 서사 분석과 캐릭터의 특징
고전문학이 새로운 문화콘텐츠로 제작되려면 고전의 서사(敍事) 또한 오늘날 서사방식으로 바꾸어 서술할 필요가 있다.
고전은 고전의 문법, 즉 당대 장르의 문법으로 서술되는데 이 문법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이 해당 작품의 서사의 성격을 파악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사에 대한 이해는 서사의 주인공을 더욱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이 작품은 두 여성 검객의 복수의 서사라고 할 수 있다. 주인집을 멸망시킨 원수를 갚기 위해 소저와 뜻을 같이 하고 오랜 세월을 기다려 그야말로 깔끔하게【‘달빛을 타고 칼을 휘둘러 칼날이 이르는 곳에 떨어진 머리가 금방 수십이 되었습니다. 원수의 집 안팎의 식구가 모두 붉은 피를 쏟으며 쓰러진 것입니다. 그러고서 우리는 날고 춤추며 돌아왔지요.’ 이 대목은 빠른 칼놀림과 경공에 능한 그녀들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복수를 마무리하는 이야기가 바로 「검녀」인 것이다. 그러나 본문의 그 장면을 시각화해 보면 그녀들의 검술은 스펙터클하면서도 화려한【「검녀」 외에도 조선시대의 여성 인물들의 이야기 중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혹은 자신의 정절을 모해한 이에게 복수하기 위해 살인을 시도하는 이야기들이 있다. 그러나 이런 작품들의 복수 장면은 매우 단순하게 처리되어 싱겁거나 혹은 잔혹하게 그려져서 결코 「검녀」의 복수 장면처럼 화려하고도 낭만적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검녀」의 복수 장면이 이렇게 그려지는 것은 비기(秘技)에 가까운 그녀들의 검술에서 기인한다.】 영상으로 펼치기에 충분한 장면이기도 하다. 편역자들이 제목을 ‘칼 쓰는 여자[劍女]’라고 붙였듯이 이야기는 그야말로 강호의 검객과 복수라는 무협의 코드가 들어있는 작품이다.
그런데 두 여성이 이렇게 복수를 하게 되기까지는 많은 세월이 필요했을 것이다. 즉 검객을 찾아 나서고 그 밑에서 제자가 되어 검술을 전수받는 수련의 기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물론 이 작품에서는 이 수련의 과정이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지는 않다.
그러나 ‘2년이 지나 비로소 검객을 만나 칼 쓰는 방법을 익혔고, 5년 만에 마침내 공중을 날아 왕래할 수 있었다[經二年始得之, 學舞劍, 五年始能飛空往來].’고 하는 대목은, 그녀들이 스승을 만나 수련을 하는 사건들로 채워질 수 있다. 즉 이 작품은 수련의 서사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검사(劍師)를 만나 검술을 익히는 이야기는 신광수의 「검승전(劍僧傳)」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며, 앞에서 언급한 백동수의 경우도, 검선(劍仙)이라 불렸던 김광택을 찾아가 김광택 및 김체건의 검법을 전수받으려 했다.
또 이 작품은 탐색의 서사를 지니고 있다. 이 작품에서의 탐색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두 여성이 검술의 스승을 찾는 과정, 원수를 찾는 과정 및 검녀가 모실 만한 남성을 찾는 과정이 포함되어 있다.
여기서 시각적으로 가장 효과적인 탐색은 두 여성 인물이 검무를 추며 여러 집을 방문하면서 원수의 집을 찾는 과정일 것이다. 조선후기에 검무(劍舞)를 췄던 여성은 기예를 갖춘 관기(官妓)【『의유당관북유람일기』중 「북산루」를 보면 관군 복장을 한 관기들이 검무를 춰서 의유당의 흥취를 돋웠다는 대목이 나온다.】만이 아니었던 듯하다. 『계서야담(溪西野談)』 「유생자낙하인(柳生者洛下人)」과 같은 작품을 보면 어렸을 때 한 남자와 결혼해서 같이 살자고 약속했던 한 여성이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남장을 하고 칼춤을 추면서 이 집 저 집 다니면서 친구를 찾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는 「검녀」의 두 여성이 사용한 탐색 방법과 같다.
두 여성이 비록 주인댁 아가씨와 그 몸종이라는 신분의 차이가 있어도 20대 여성이고, 쌍검을 쓰며, 남장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각적인 공통점이 있다. 이때 쌍검은 ‘연화검’이라는 구체적인 이름을 지니고 있으므로 연꽃무늬가 아로새겨져 있을 수도 있다【쌍검을 쓰는 여성 인물 중 대표적인 이로는「옥루몽」의 강남홍을 참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의 검술 장면 역시 매우 화려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녀들의 칼춤 장면은 신윤복의 「쌍검대무」를 참고해서 구성할 수도 있다. 또 작품에 묘사되어 있는 화려한 무공 장면 역시 시각적 효과가 클 것으로 보인다. 특히 소응천 앞에서 선보인 마지막 검술 시범 장면에서 검녀는 말술을 들이켜 홍조 띤 붉은 뺨에 푸른 털로 만든 건을 두르고 붉은 비단 상의 위에 수놓은 황색 띠를 둘렀으며 밑에는 흰 비단바지에 무늬 있는 무소가죽으로 만든 신을 신고 마치 특수효과를 연상시키는 신기(神技)에 가까운 솜씨로 한 쌍의 연화검을 휘두르는 것이다.
저고리와 치마를 다 벗고, 홑겹으로 갈아입고서는, 두 번 절을 하고 일어나는데 사뿐히 나는 것이 물 찬 제비 같더니, 별안간 공중으로 칼이 날자 몸을 솟구쳐 그것을 옆구리에 끼었다. 처음에는 사방으로 흩어져 꽃잎이 떨어지고, 얼음이 부서지고, 중간에는 둥글게 모여서 눈이 녹고, 번개가 번쩍이더니, 끝에는 훨훨 날아올라서 고니와 학처럼 나는데, 이미 사람을 볼 수 없으니 또한 칼을 볼 수 있으랴! 다만 한 가닥 하얀빛이 동쪽을 치고, 서쪽에 부딪치며, 남쪽에서 번뜩이고, 북쪽에서 번뜩하여, 휙휙 바람이 나고, 싸늘한 빛이 하늘에 얼어붙는 것이 보였다. 잠시 후, 외마디 소리를 부르짖으니 휙 하고 뜰에 있던 나무가 베이고는, 칼을 던지고 사람이 우뚝 섰다. 나머지 빛과 못 다한 기운이 싸늘하게 사람을 감고 돌았다.
3) 「검녀」의 주체성
검녀가 ‘삼남의 고명한 선비’의 소실로 얌전하게 살았으면 그녀 역시 조선의 질서 안에서 조용히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과감하게 그 남자를 떠나 남장을 하고 다시 ‘절해공산(絶海空山)’ 즉 강호(江湖)로 돌아가 버렸다. 무공을 즐겨했든 아니든 그녀가 절해공산을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에게 높은 수준의 검술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결국 그녀는 조선 아녀자의 삶 대신 검녀, 여협의 삶을 선택한 것이다.
여종이 조선의 지배 이데올로기가 젖어 들어갈 수 없는 공간으로 떠난 것과는 달리 양반 여성은 복수 후 자결을 선택함으로써 다시 조선의 질서 안으로 들어갔다. 남장을 하고 검객이 되었다는 점에서는 일탈적이지만 그녀가 억울하게 죽은 부모의 원수를 갚았다는 점에 주목한다면, 거기까지는 조선이라는 체제에서도 기려 주었던 이야기일 수 있다.
조선 시대에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살인을 한 경우는 죄가 아니었다. 오히려 효를 실천한 것이라고 해서 기림의 대상이 되었다. 아버지가 아니라 남편의 원수를 갚은 경우도 비슷한 평가를 받았다. 보기를 들면, 임윤지당의 「최홍이녀전(崔洪二女傳)」 역시 억울하게 죽은 남편과 아버지의 원수를 갚은 부인과 딸을 절(節)이라는 덕목으로 기리고 있다.
그러므로 멸문지화를 당한 후 부모의 원수를 갚은 그녀의 행동은 미덕으로 간주될 수 있으며, 복수 후 양반의 신분에 맞게 자결을 선택한 것 역시 신분 질서를 공고히 지켰다는 점에서 조선의 지배 체제에 부합되는 것이었다.
문제는 여종의 일화이다. 야담 중에는 여성 인물이 자신의 급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우연치 않게 마주친 남성과 동침하는 이야기들이 들어 있다. 이런 경우는 다른 목적을 달성하는데 필요하기 때문에 그 남성을 취하는 것이다. 그런데 검녀는, 어떤 다른 목적을 이루기 위한 방편으로서가 아니라 오로지 자신이 ‘우러러 볼 만한’ 남성을 택해, 누군가를 찾아가 스스로를 천거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이 같은 표현은 검녀만이 아니라 양반 여성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여주인이든 여종이든 ‘앙망(仰望)’이나 ‘택(擇)’과 같은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는 ‘우러러 볼만할 만한 인물이 아닌 경우에는 선택하지 않겠다.’는 그녀들의 의지를 암시한다. 그러므로 이런 단어의 사용을 통해 여성인물의 의지가 강조되는 효과를 얻는다. 그런데 이 작품 역시 조선 시대의 텍스트이므로 검녀 역시 ‘시건즐(侍巾櫛)’과 같은 표현을 쓰기도 한다. 그러나 본문 전체를 통틀어 이 표현은 소응천을 처음 만났을 때 그를 향해 예의를 갖추며 인사를 했던 한 장면에서만 사용되었다.】.
조선시대 남녀의 만남에서 여성 인물이 사용할 단어로 적당한 것은 ‘택(擇)’보다는 ‘종(從)’이 보편적이었다. 그런데 이 여성은 ‘남편이기 때문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앙망할 만한, 즉 따를 만한 대상’을 선택해 남편으로 삼고자 한 것이다. 더구나 이를 위해 자신을 천거하는데, 조선 시대의 규범과 관습을 생각해 볼 때, 여성이 남성에게 스스로를 천거하는 것은 과감하고도 파격적인 행동이 아닐 수 없다【한문 단편집 중에는 간혹 여성이 남성을 선택하는 이야기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여성들은 대개 남녀 관계 자체가 아니라 자신의 어떤 다른 필요에 의해 남성과 성적 관계를 맺으며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관계 맺기의 양상이 다른 예, 즉 그 남성과의 관계를 통해 다른 보상을 기대하지 않고 그 남성과의 일대일 관계 자체가 관계 맺기의 목적인 경우로 그려지는 경우로는 아마 황진이 정도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기사(奇士)’일 것을 기대해 자천했던 그 남성은 막상 살아보니 ‘마음을 닦고 몸을 지키는 방법이나 세상을 다스려 후세에 모범을 보이는 높은 도’에는 전혀 미치지 못하는 인물이었다.
이에 그녀는 “알맹이가 없는 이름은 태평 시에도 화를 면하기 어려운데, 난세를 맞는다면 어떻겠는가? 선생이 이제 근신한들 안전하게 일생을 마치기도 쉽지 않으리다. 지금부터라도 산에 은거하지 마시고 그저 적당하고 평범하게, 전주와 같은 큰 도회지에 살면서 이속들의 자제나 가르치며 의식의 충족이나 도모하고 달리 희망을 안 가지면 세상의 화를 면할 수 있을 것[夫得過實之名者, 雖在平世, 亦難自免, 況於亂世哉! 座下愼之, 其得全終, 必不易矣. 願自今無居深山, 而隤然闒然, 處全州大都會, 敎授吏胥子弟, 以足衣食而已, 無他希覬, 則可免世禍矣]”이라고 충고한 후 자신은 떠나겠다고 선언한다.
소응천에게는 이 말만으로도 놀라울 뿐인데, 그녀는 화려하게 남장을 하더니 연화검 두 자루를 가지고 검술을 선보인 것이다.
고수의 반열에 오른 무협(武俠)으로서의 기상, 이는 조선 시대의 평범한 여성이 지닐 기상은 아닐 것이다. 바로 이 기상이 모르는 남성에게 스스로를 천거할 수 있었던 힘이었을 것이며, 동시에 결연히 그에게서 떠날 수 있는 힘이기도 했을 것이다. 마치 유협(遊俠)이 다시 강호로 나가듯 그녀는 ‘절해공산’을 향해 길을 떠났다. 절해공산, 그곳은 조선이 그 통치 이데올로기로 규율할 수 없는 공간으로, 조선이라는 체제 밖에 놓인 세상이다. 그녀는 결국 조선의 체제 바깥으로 유유하게 넘어가 버린 것이다.
바로 여기에 그녀의 주체성이 돋보인다. 그녀는 주체적으로 ‘남성’을 그리고 ‘강호’를 선택했다. 처음에는 여주인에 대한 신의로 인해 복수에 동참하였으나 복수를 이룬 후 그녀는 스스로 자신의 기준을 놓고 ‘선택’하고 ‘행동’한다. 기존 논의에서는 이 작품을 ‘인권’ 획득의 문제, 혹은 ‘민중의 움직임’으로 읽었으나 검녀는 인간 혹은 민중으로 치환되기 어렵다. 그것은, 검녀의 행동은 남성을 삶의 방식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조선시대의 여성 현실과 무관하게 해석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작품을 보면 검녀의 행동이 결코 계층이나 계급에 대한 의식화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작품을 보면 검녀는 주인과 여종이라는 신분 차이에 대해 한 번도 의문을 제기하거나 문제 제기한 적이 없다.】. 오늘날처럼 다변화되고 다층(多層)화된 사회에서 검녀 캐릭터를 민중 코드로 이해하는 것은 오히려 그녀의 미묘한 현실과 문제의 지점들을 둔탁하게 뭉뚱그려 놓을 것이다【하층민 해석에 대한 새로운 시도를 보여주는 영화가 「왕의 남자」이다. 「왕의 남자」 시나리오의 신선함은 남사당패 광대를 더 이상 민중의 대변자로만 해석하지 않는 그 작품의 시선에서 비롯된다. 이 작품은 그동안 민중의 대변자로 광대를 읽어내던 관점에서 벗어나 광대를 사적인 문제에 얽힌 개인으로 그려내고 있다.】. 검녀의 주체성은 조선시대 하층 여성이 자기 성의 주체로 행동했다는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여성과 섹슈얼리티의 문제로 접근해 본다면, 당대에는 인정되지 않았던 자신의 신체에 대한 결정권, 성적(性的) 결정권을 스스로 행사했던 조선의 하층 여성 검녀의 주체성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하게 다루어질 만한 것이다.
인용
1. 들어가며
5. 끝맺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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