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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김인회, 조선시대 사대부의 한글 사용과 의미 - II. 사대부를 위한 번역, 1) 번역의 전통과 사대부 본문

한문놀이터/논문

김인회, 조선시대 사대부의 한글 사용과 의미 - II. 사대부를 위한 번역, 1) 번역의 전통과 사대부

건방진방랑자 2019. 11. 30.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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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I. 사대부를 위한 번역

 

 

1. 번역의 전통과 사대부

 

한글 창제 이전에도 번역은 있었다. 삼국사기에서는 설총(655?~?)방언으로 구경을 읽고 후생을 훈도했다[以方言讀九經, 訓導後生]”라고 했고 삼국유사에는 “(설총이) 우리말로 화이(華夷)의 풍속과 물명을 이해하고 육경과 문학을 훈해(訓解)하니, 지금도 우리나라의 경학을 공부하는 이들이 전수하여 끊이지 않는다[以方音通會華夷方俗物名, 訓解六經文學, 至今海東業明經者, 傳受不絶]”라고 했다. 이 기록을 통해 우리는 설총이 유가 경전을 구결이나 이두·향찰 등을 이용하여 우리말로 번역했음을 알 수 있다조선시대 구결을 붙여 경전을 해석하고 언해하는 전통은 설총이 창안한 구결을 이용한 번역에서 비롯된 것이다. 구결이란 용어는 세조실록에 처음 보이지만 세종실록1428년 윤418일의 기사 임금이 변계량에게 말하기를, ‘옛날 태종께서 권근에게 명하여 오경에 토()를 달라고 하니……’”의 주석에 무릇 독서할 때에 우리말의 절구로써 읽는 것을 시속에서 토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중국의 구두(句讀)가 문장의 휴지점(休止點)을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면 우리의 구결은 문장을 끊어줄 뿐만 아니라 문장성분까지도 밝혀줄 수 있다. 따라서 구결만으로도 충분히 번역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때 설총의 번역은 한문을 모르는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닌 식자층을 위한 풀이 및 해설의 성격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번역은 주어와 술어를 채워 단순히 문장을 구성하는 문법적용의 수준이 아니라 경전의 참뜻을 해석하게 도와주어 유학이라는 철학사조에 다가가게 하는 종류의 것이었다. 우리나라에서 번역이란 초기부터 한문을 모르는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한문 문장을 해독할 줄 아는 사람에게 그 문장의 참뜻에 대한 이해를 도와주기 위한 것이었다.

 

번역은 유가의 경전뿐만 아니라 법률서적이나 농서 등 다양한 분야의 서적들에서도 이루어졌다. 대명률과 같은 책은 고려 말에 전법사(典法司)의 상소에 의해 중국과 우리나라의 글과 말에 정통한 사람에게 명하여 참작하여 새로 정해야 한다고려사38 刑法1 職制.”라고 번역이 건의되었다. 대명률은 원나라의 지정조격을 대신한 법률서로 경국대전用大明律이라 하여 의용(依用)을 규정한 이래로 대한제국 말기까지 우리의 형법으로 통용된 법전이다. 조선 초 대명률을 우리나라에 적용하고자 했을 때 가장 큰 문제는 그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는 점이었다. 그 이유는 중국과 우리나라의 상황이 달랐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조문의 원문이 난해하여 그 뜻을 이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대명률을 우리말로 번역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1395(태조 4)대명률을 우리 이두로 풀어 번역한 대명률직해를 간행하기에 이르렀다.

 

 

[2󰠏1]

대명률은 법조문의 경중이 타당하므로 진실로 법을 집행하는 자들의 준칙이다. 성상께서 이를 중외에 널리 반포하여 관리들로 하여금 서로 전하여 외고 익혀 모두 법으로 취하게 하고자 하셨다. 그러나 그 문장의 용법이 보통과 달라서 사람마다 쉽게 깨우치기 어려웠다. 더욱이 우리나라에는 삼한 때의 설총이 만든 우리 문자가 있어 이두라고 하는데, 민간에서는 나면서부터 이를 알고 능숙하게 익히고 있어 갑자기 고치기 어려우니 어찌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대명률) 깨우쳐줄 수 있겠는가? 마땅히 이 책을 이두로 읽도록 하여 타고난 능력으로 이끌어내도록 해야 할 것이다.

此大明律書科條, 輕重各有攸當, 誠執法者之準繩. 聖上思欲頒布中外, 使仕進輩傳相誦習, 皆得以取法. 然其使字不常, 人人未易曉. 况我本朝三韓時嶭聦所製方言文字, 謂之吏道, 土俗生知習熟, 未能遽革, 焉得家到戶諭, 每人而敎之哉. 宜將是書, 讀之以吏道, 導之以良能. -金祗, [跋文], 大明律直解(서울대학교규장각, 2001), 634.

 

 

대명률직해의 간행 이후에도 1404(태종 8), 1441(태종 11),

1431(세종 13), 1432(세종 14) 네 차례에 걸쳐 대명률직해의 번역에 대한 조정의 논의가 발견된다. 이는 중국의 상황을 우리나라의 실정에 맞도록 조율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조금 더 정확한 번역을 위한 노력이기도 했다안병희, 대명률직해 이두의 연구, 규장각9(1985) 참조.. 대명률직해역시 그 독자는 일반 백성이 아닌 관료층이었다. 이렇듯 한글 창제 이전의 번역은 대개 식자층을 위한 것이었다. 식자층을 위한 번역은 한글이 창제되고 이두 대신 한글을 이용해 번역하는 언해(諺解)가 출현한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2󰠏2]

박진원이 아뢰기를, “세자께서 상서를 진강하는데 언해가 없습니다. 지금 상서예기를 현토(懸吐)하고 해석하여 시전언해를 개간하듯이 하면 경연에만 도움이 있을 뿐 아니라 여염의 훈몽에도 크게 유익함이 있을 것입니다.” -선조실록38(1605) 113.

 

 

예문 2󰠏2에서 거론되는 세자는 광해군으로 당시 31세였다. 우리가 쉽게 추측할 수 있는 바와 같이 31세의 세자는 이미 한문을 능숙하게 구사했을 것이다. 그러나 박진원은 세자를 위해 언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언해사업을 벌일 것을 제안하고 있다. 이 예문을 통해보면 여러 번역서에 관용어처럼 등장하는 여염(閭閻)’이란 한문을 모르는 일반 백성 전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문에 능숙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역시 번역의 이유로 자주 거론되는 훈몽(訓蒙)’ 역시 어리석은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주자학적 논리에 투철하지 않은 사람을 깨우치는 일을 뜻하는 것이다. 사실 “(경전의 언해는) 대중화와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사서삼경의 독자는 성리학을 탐색하는 사대부 계층이 절대적이므로 사서삼경언해 또한 기본적으로 사족 내에서의 대중화를 의미하지 일반 평민에게로의 확산을 지향하지는 않는다.”유영옥, 교정청본 사서언해의 경학적 연구, 부산대학교 박사학위논문(2010), 30.조선시대 경서의 번역은 사족 내부에 성리학을 확산시키는 가운데 그들에게 표준해석을 제공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사서언해등 경서의 번역서들은 해석의 기준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이점은 아래 예문을 통해 거듭 확인할 수 있다.

 

 

[2󰠏3]

상이 이르기를, “관유강의(寬裕剛毅) 등의 넷을 각각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사덕(四德)으로 나누어 설명했는데, 첫 단락의 총명예지(聰明睿智) 네 글자는 사덕의 조목에 끼이지 않았다. 언해(諺解)를 가지고 관찰하면 그것을 사덕 밖에다 별도로 세웠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총명예지는 어느 지위에 소속되어야 하는가?” -정조실록21(1797) 420.

 

 

예문 2󰠏3정조가 경연에서 중용의 해석을 토론하는 내용의 실록 기사이다. 정조는 관유강의(寬裕剛毅)중용31의 첫 구절中庸31爲能聰明睿知, 足以有臨也. 寬裕溫柔, 足以有容也. 發強剛毅, 足以有執也. 齊莊中正, 足以有敬也. 文理密察, 足以有別也.”(오직 천하의 지극한 성인이어야, 능히 총명하고 슬기롭고 지혜로워서 충분히 아랫사람에게 임할 수 있으니, 너그럽고 넉넉하고 온화하고 부드러움은 충분히 용납할 수 있으며, 굳셈을 발하고 강하고 강직함은 충분히 굳게 잡을 수 있으며, 재계하고 장엄하고 중도로 하고 바름은 충분히 경건할 수 있으며, 문장과 조리를 세밀하게 살핌은 충분히 사리를 변별할 수 있느니라.을 해설한 주자의 주中庸31聰明睿知, 生知之質. , 謂居上而臨下也. 其下四者, 乃仁義禮智之德.”(‘총명예지는 나면서부터 아는 자질이고 임한다는 것은 윗 자리에 있으면서 아랫 사람에게 임하는 것이니, 아래에 있는 네 가지는 바로 인의예지의 덕을 말한 것이다.)를 토론의 주제로 묻고 있다. 중용의 구절을 요약하자면 성인은 총명예지하여 아랫사람을 대할 수 있는 사람이다. 성인이 아랫사람을 대할 때는 너그럽고 넉넉하고 온화하고 부드러움……, 굳셈을 발하고 강하고 강직함……, 재계하고 장엄하고 중도로 하고 바름……, 문장과 조리를 세밀하게 살핌…… 등이 있다는 주장이다. 주자는 이 ① ② ③ ④를 각각 인의예지로 치환하여 설명하고 있다. 정조는 더 나아가 ① ② ③ ④를 실행하기 위한 전제로 거론되고 있는 총명예지(聰明睿智)’의 존재조건을 묻고 있다. 그것은 성인이 타고난 것인 동시에 군왕이 갖추어야 할 덕목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질문을 던지기 위해 경전의 원문과 함께 근거로 제시하는 것이 중용언해이다. 중용언해의 번역에 의거하여 자신의 번역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해 경전 해석의 정당성이 특정 번역서에 의해 확보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2󰠏4]

이날은 별일 없었다.【『논어에 의문 나는 대목을 어제 접대 때문에 미처 다 베껴 쓰지 못했는데 오늘 아침에서야 다 쓸 수 있었다. 맹자를 읽고자 했으나 사서대전맹자언해를 구할 수 없어서 민자필의 집에서 돌아왔기 때문에 한가했다.

是日無所事論語質疑處, 昨以接人未盡寫, 至今朝乃始畢書. 且欲讀孟子而未得大全及諺解, 故自子必家返, 則有等閑事.-趙克善, 忍齋日錄162039.

 

 

예문 2󰠏4는 조극선(1595󰠏1658)26세 되던 해 쓴 일기의 일부이다. 예문 2󰠏2, 2󰠏3을 참고하면 왜 조극선이 경전공부의 학습서로 사서대전맹자언해를 함께 거론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사서언해는 한문이 서툰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책이 아니라 사서대전과 같은 정도로 중요한 공부의 표준서였던 것이다.

 

그런데 사서언해의 그 쓰임새가 꼭 성리학 이해의 심화에만 있지 않았다. 사대부 또한 한문을 읽는 데 어려움을 느꼈고 번역서를 손쉬운 한문학습의 수단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2󰠏5]

임금이 전경문시강(專經文臣講)을 직접 시험하였다. 예전의 제도는 오경 가운데에서 돌아가며 뒤돌아 앉아서 암송하게 되어 있었으나, 명관들은 걸핏하면 스스로 불통이라 쓰고도 수치로 여기지 않았다. 임금이 그 폐단을 알고는 이에 자원하는 대로 임강(臨講)하라고 명하고, 또 언해가 없는 예기·춘추로 강에 응하였으므로 드디어 주역·서전·시전으로 차례차례 강을 시험함으로써 차례에 해당하는 글을 알아 미리 더 강습하도록 하고, 또 임강하여 불통한 자로 하여금 수치를 알게 하였는데, 이날은 바로 정식한 뒤 첫 번째 날이었다. 강원 중에 한 사람도 통()한 자가 없었으니 규례로 보아 파직시켜야 마땅했지만, 임금이 적중(適中)을 원하여 단지 금추만을 명하였다. -영조실록18(1742) 927.

 

 

위 예문은 영조대 젊은 문신을 대상으로 경전 시험하는 전경문신강에 관한 실록의 기사이다. 시험은 임강(臨講)이란 방식으로, 책을 앞에 펼쳐 놓고 읽은 후 구절의 뜻을 이야기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번역이 없는 예기·춘추등으로 시험에 응하여 떨어지는 핑계로 삼지 못하도록 아예 번역이 있는 주역·서전·시전등으로 시험을 보게 했다. 아울러 시험 볼 곳을 알려주어 미리 공부하도록 했는데 시험에 통과한 신하가 한 사람도 없었다는 내용이다. 문신들이 경전의 학습을 등한히 한 사실도 재미있지만 그들에게 번역서로 공부하도록 유도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이 예문에서 번역서는 경전의 표준번역이라기보다 공부하기 편리하도록 된 참고서로 해석된다. 어려운 원전을 가지고 씨름하지 말고 쉽게 번역된 책을 보라는 의도가 보인다.

 

삼국시대 설총의 구결부터 조선시대 언해에 이르기까지 번역은 식자를 위한 것이었다. 번역서는 때로는 뜻을 명확히 하는 표준서였고, 때로는 손쉬운 참고서였다. 한글의 창제는 조선의 식자층이었던 사대부들에게 이전보다 편리한 표준서와 참고서를 제공하는 역할을 했고 사대부들은 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활용했다.

 

 

 

 

인용

목차 / 지도

I. 머리말

II. 사대부를 위한 번역

1. 번역의 전통과 사대부

2. 표준번역으로서의 언해

III. 사대부들의 우리말 음가의 표현

1. 한자음의 혼란과 운서의 편찬

2. 시가의 가창과 한글

IV.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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