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국초(國初) 소단(騷壇)의 양상
조선왕조는 국초(國初)부터 문치(文治)를 표방하였지만, 개국초원(開國初元)에는 걸출(傑出)한 시인(詩人)이 배출되지 않았다.
문(文)은 고명(誥命)ㆍ장주(章奏)와 같은 관각문자(館閣文字)를 필요로 했으며 시(詩)에 있어서도 새 왕조의 위업과 서울의 새 풍물을 읊조린 가영(歌詠)ㆍ송도(頌禱)의 사(辭)가 많은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는지 모른다. 정도전(鄭道傳)ㆍ권근(權近)ㆍ정이오(鄭以吾)ㆍ이첨(李詹)ㆍ조운흘(趙云仡)ㆍ유방선(柳方善) 등의 시편(詩篇)이 각종 선발책자(選拔冊子)에 자주 뽑히고 있지만, 이 가운데서 유방선(柳方善)을 제외하고는 모두 전조(前朝)에서 과거로 입신(立身)하여 양조(兩朝)에 사환(仕宦)한 관료의 전형이다. 다만 정도전(鄭道傳)과 권근(權近)은 모두 경세(經世)의 포부(抱負)로 또는 경국(經國)의 문장(文章)으로 일세(一世)를 울리었지만 그들의 시세계는 개성의 빛깔을 뛰어넘는 시정신(詩精神)의 근원에서부터 다른 세계를 보이고 있어 주목되기도 한다.
정도전(鄭道傳)과 권근(權近)의 시작(詩作)을 이러한 관점(觀點)에서 대비해보기로 한다. 정도전(鄭道傳)의 「산중(山中)」과 권근(權近)의 「탐라(耽羅)」를 차례대로 보기로 하자.
「산중(山中)」은 다음과 같다.
弊業三峰下 歸來松桂秋 | 삼봉(三峯) 아래서 공부도 그만두고 소나무 길 가을철에 돌아오는도다. |
家貧妨養疾 心靜定忘憂 | 집이 가난하여 병 고치기 어렵고 마음이 고요하여 근심 잊기 알맞도다. |
護竹開迂徑 憐山起小樓 | 대나무 보호하느라 길을 멀리 내었고 산을 아끼느라 작은 누각을 세웠네. |
隣僧來問字 盡日爲相留 | 이웃 중이 글을 물으러 와 하루 종일 같이 지냈네. |
「탐라(耽羅)」는 다음과 같다.
蒼蒼一點漢羅山 | 푸르디 푸른 한 점의 한라산이, |
遠在洪濤浩渺間 | 멀리 푸른 파도 사이에 있네. |
人動星芒來海國 | 사람 따라 별빛이 바다에서 오고 |
馬生龍種入天閑 | 말은 준마를 낳아 천자의 마굿간에 드네. |
地偏民業猶生遂 | 땅은 외져도 백성의 생업은 그런대로 이루어지고 |
風便商帆僅往還 | 바람 편에 상선(商船)은 겨우 왔다 갔다 하네. |
聖代職方修版籍 | 성대의 직방씨(職方氏) 지도를 손질할 때 |
此方雖陋不須刪 | 이 나라 비록 누추해도 깍아버리지 않았네. |
양편(兩篇) 모두 그들의 대표작에 드는 것들로 보이지 않는 관풍(觀風)의 의지가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산중(山中)」의 ‘호죽개우경 련산기소루(護竹開迂徑 憐山起小樓)’는 분명히 풍교(風敎)에의 용의(用意)보다는 멋과 호기(豪氣)가 앞서고 있음을 읽어낼 수 있다.
그러나 「탐라(耽羅)」에는 풍교(風敎)의 의지가 깊숙히 내장(內藏)되고 있다. 이 작품은 작자 권근(權近)이 명(明) 태조(太祖) 주원장에게 지어 바친 응제시(應製詩)이기 때문에 무게가 더 실리고 있다. 우리나라와 탐라의 역사적 관계를 해명하는 것이 이 시의 주지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작자가 노리고 있는 것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있다.
목판(木板)으로 된 지도 위에 새겨진 탐라(제주도)는 조그마한 점 하나에 지나지 않는 것이므로 지도를 개수(改修)할 때 끌[削刀[ 끝이 닿기만 해도 없어지고 말겠지만, 왕화(王化)는 이를 가벼이 여기지 않았다는 것이 작자의 속뜻이다. 이때 우리나라와 탐라와의 관계는 곧 명(明)과 우리나라와의 관계로 치환(置換)될 수 있음을 암유(暗喩)하고 있는 것은 물론이다.
그리고 다음 시편(詩篇)은 모두 귀양에서 풀려난 양인(兩人)의 처지를 제각기 읊조린 것이지만, 여기서도 우리는 두 시세계의 먼 거리를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정도전(鄭道傳)의 「공주금강루(公州錦江樓)」는 다음과 같다.
君不見 | 그대는 보지 못하였는가? |
賈傅投書湘水流 | 가태부(賈太傅)가 호수(湖水)에 글을 던지고 |
翰林醉賦黃鶴樓 | 이태백(李太白)이 황학루(黃鶴樓)에서 시(詩)를 읊던 것을.. |
生前轗軻無足憂 | 생전(生前)의 불우(不遇)를 근심하지 마오, |
逸意凜凜橫千秋 | 호일(豪逸)한 기개(氣槪)가 천추(千秋)에 늠름하네. |
又不見 | 또 보지 못하였는가? |
病夫三年滯炎州 | 병든 몸 3년 동안 염주(炎州)에 묶였다가 |
歸來又到錦江頭 | 돌아올 때 또 다시 금강루(錦江樓)에 오른 것을. |
但見江水去悠悠 | 강물이 유유히 흐르는 것만 보았을 뿐, |
那知歲月亦不留 | 어찌 알았으리요 세월 또한 머물지 않는 것을. |
此身已與秋雲浮 | 이내 몸 두둥실 가을 구름이라 |
功名富貴復何求 | 부귀공명 또 다시 구해 무엇하리요? |
感今思古一長吁 | 고금의 감회 긴 탄식일 뿐. |
歌聲激冽風颼颼 | 노래 소리 격렬하고 바람도 우수수 부는데 |
忽有飛來雙白鷗 | 갑자기 백구 한 쌍 날아오누나. |
권근(權近)의 「차용궁객사판상시(次龍宮客舍板上詩)」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一郡風煙十里間 | 온 고을 연기는 십 리 사이에 일고 |
政淸刑簡吏民閑 | 정사 형벌 깨끗하여 관리 백성 한가롭네. |
門前直道澹臺路 | 문전의 곧은 길은 담대멸명(澹臺滅明)의 길이요, |
窓外群峯謝眺山 | 창 밖의 여러 봉우리 사조(謝眺)의 산(山)이네. |
幸與故人相會合 | 다행히 벗들과 서로 만나니 |
可憐逐客得生還 | 가련할손 내쫓긴 몸 살아서 돌아오네. |
從今欲遂爲農志 | 이제부터 농사짓는 뜻 이뤄볼꺼나, |
䆠海由來最險艱 | 관직의 세계는 본래부터 험난한 것. |
전자(前者)는 타고난 호탕(豪宕)을 한 눈으로 읽게 하는 작품이다. 귀양살이 때의 앙금을 일시에 떠올리며 바뀌어진 지금의 처지에 한껏 부풀어 있는 양상이다. 시작(詩作)의 높낮이를 따지는 것은 딴 문제에 속한다.
그러나 후자(後者)에 있어서는 처음부터 감정의 유로를 최대한으로 억제하여 비분(悲憤)해도 강개(慷慨)에 흐르지 않는 긴장을 끝내 잃지 않고 있다.
이는 물론 정도전(鄭道傳)의 ‘호매(豪邁)’와 권근(權近)의 ‘전아(典雅)’를 대조적으로 보여준 것이기도 하거니와 이는 개성 이상의 시정신(詩精神)과도 유관한 것임에 틀림없다.
정도전(鄭道傳)은 앞장 서서 스스로 재도론(載道論)을 천명했지만, 시(詩)에 대한 그의 관심과 집착 때문에 유명한 「오호도(嗚呼島)」 시화(詩禍)를 일으켜 이숭인(李崇仁)을 죽게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러나 권근(權近)의 시작(詩作)은 대부분 차운(次韻)ㆍ기증(寄贈)ㆍ송별(送別)ㆍ만사(挽詞) 등으로 채워져 있어, 없을 수 없는 삶의 부분들을 시(詩)로서 실천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나라 한시가 대체로 한취(閑趣)를 노래한 전원문학이 주종을 이루고 있지만 한가로운 서정을 읊은 한정(閑情)ㆍ만성(謾成)ㆍ우음(偶吟)ㆍ감흥(感興) 따위도 그의 시작(詩作)에서는 감쇄(減殺)되고 있다.
정도전(鄭道傳, 1337 충숙왕 복위6~1398 태조7, 자 宗之, 호 三峯)의 대표작으로는 「정조봉천문외구호(正朝奉天門外口號)」(七絶), 「방김거사야거(訪金居士野居)」(七絶), 「산중(山中)」(五律), 「오호도조전횡(嗚呼島弔田橫)」(五古), 「공주금강루(公州錦江樓)」(七古) 등이 꼽히거니와 각체(各體)에서 두루 명편(名篇)을 뽑아낸 그의 시재(詩才)는 가리워질 수 없는 것이다. 특히 「방김거사야거(訪金居士野居)」는 마치 한 폭의 그림을 마주하는 것 같아 당인(唐人)의 솜씨에 모자람이 없다.
권근(權近, 1352 공민왕1~1409 태종9, 자 可遠ㆍ思叔, 호 陽村)의 시작(詩作) 중에는 「탐라(耽羅)」(七律), 「금강산(金剛山)」(七律), 「항래주해(航萊州海)」(七律), 「차조정승준(次趙政丞浚)」(七律) 등이 각종 선발책자에 뽑히고 있으며 이것들은 모두 칠율(七律)이다.
특히 이 가운데서도 「차조정승준(次趙政丞浚)」을 제외한 나머지 3편은 모두 24수의 응제시(應製詩) 속에 들어 있는 것이다. 이 응제시(應製詩)는 표전(表箋) 문제로 명(明) 태조(太祖)가 그 찬자(撰者)를 불러들일 때 권근(權近)이 정도전(鄭道傳)을 대신하여 그 앞에 나아가 명제(命題)에 따라 시(詩)를 지어 바친 것으로, ‘온순전아(溫醇典雅)’, ‘평담온후(平淡溫厚)’한 시세계를 바로 입증해준 것이기도 하다. 이는 그의 박학능문(博學能文)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의 위인(爲人)과 개성(個性)이 그렇게 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하륜(河崙)이 이숭인(李崇仁)과 권근(權近)의 시(詩)를 논하는 자리에서 특히 이 응제시(應製詩)를 가리켜 “양촌(陽村)은 이를 해내었지만 도은(陶隱)은 결코 할 수 없을 것”이라 한 것도 시(詩)의 고하(高下)를 가린 것이기보다는 그의 정신을 두고 한 말이었을 것이다.
그의 시작(詩作)은 1,000여수에 이르고 있지만 역대 중요 시선집에서 선발되고 있는 것은 겨우 23수에 지나지 않으며 그것도 대부분 『동문선(東文選)』에서 뽑아준 것이다. 『동문선(東文選)』에서 그의 문(文)을 170여편 뽑으면서 시편(詩篇)은 겨우 20수를 뽑고 있는 것은 그 장처(長處)가 시(詩)보다는 곳에 있음을 쉽게 알게 해준다. 물론 그것들의 대부분이 교서(敎書)ㆍ책(冊)ㆍ표전(表箋)ㆍ찬(贊)ㆍ차자(箚子) 등 문학성이 거세된 의론체(議論體)의 관각문자(館閣文字)이기는 하지만 그가 재능을 발휘한 것이 산문(散文)이었음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조선조 최초의 문형(文衡)다운 면모를 여기서 볼 수 있다.
그러나 국초(國初)에 시업(詩業)으로 이름을 남긴 소인(騷人)은 이첨(李詹)ㆍ정이오(鄭以吾)ㆍ유방선(柳方善) 등이 대표할 만하다. 이때까지도 소단(騷壇)의 풍상(風尙)이 송시학(宋詩學)의 영향권에 있었지만 특히 이첨(李詹)과 정이오(鄭以吾)는 당인에 모자람이 없는 솜씨로 아려(雅麗)ㆍ초초(楚楚)한 시작(詩作)을 남기고 있다. 권근의 뒤를 이어 변계량(卞季良)이 문형(文衡의 제도가 변계량에서 시작되었음)의 영예를 누리었지만, 이첨(李詹)과 정이오(鄭以吾)도 권근(權近)과 변계량(卞季良)의 중간에 위치하면서 국초(國初)에 문한(文翰)의 임무를 해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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