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등
등(滕)
등 나라는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있었던 작은 나라로 곁에 큰 나라인 제(齊)와 초(楚)가 있어 이러할 수도 저러할 수도 없었던 나라이다. 등문공(滕文公)은 맹자에게 “등 나라는 작은 나라입니다. 제(齊)ㆍ초(楚)의 사이에 끼어 있으니 제 나라를 섬겨야 하겠습니까, 초 나라를 섬겨야 하겠습니까?[滕, 小國也, 間於齊楚. 事齊乎? 事楚乎?]” 하였다. 『맹자(孟子)』 「양혜왕(「앙혜왕(梁惠王)」)」 下
등가(登歌)
나라의 제사를 거행하거나 대규모의 조회 때 악사가 마루에 올라가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그 악사가 연주하는 노래를 말한다.
등가(登伽)
마등가녀(摩登伽女)의 준말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음녀(淫女)의 이름인데, 그의 딸 발길제(鉢吉帝)를 시켜 환술(幻術)로 석가모니의 수제자인 아난(阿難)을 유혹하여 파계하게 하자, 석가모니는 이를 알고 신주(神呪)를 외어 아난을 구제하였다 한다.
등각장천(滕閣長天)
왕발(王勃)의 「등왕각서(滕王閣序)」에, “가을 물은 긴 하늘과 한 빛이로다[秋水共長天一色].”란 말이 있다.
등거(登車)
동한(東漢) 사람 범방(范滂)이 청조사(淸詔使)가 되어 기주(冀州)의 도적들을 평정하러 떠날 때 수레에 올라 개연히 천하를 깨끗하게 할 뜻을 가졌었다 한다. 『후한서(後漢書)』 卷六十七 「당고열전(黨錮列傳)」
등경산(鄧景山)
당 나라 사람. 문관(文官)으로서 태원윤(太原尹)에까지 이르렀으나, 너무 각박하게 부하들을 다루다가 그 부하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등계적(登桂籍)
문과(文科)에 등과하여 관원으로 되는 것을 계적에 올랐다 한다.
등고(謄告)
말을 달리며 부르다.
등고(登高)
음력 9월 9일인 중양절(重陽節)의 이칭. 후한(後漢) 때 환경(桓景)이 비장방(費長房)을 따라 선술(仙術)을 익히던 어느 날 밤 장방으로부터, 오는 9월 9일에 환경의 집에 재앙이 있을 터이니 급히 가서 가족들에게 붉은 주머니에 수유(茱萸)를 넣어 팔뚝에 걸고 높은 산에 올라 국화주(菊花酒)를 마시도록 해야 한다는 지시를 받고 그대로 시행했는데, 과연 9월 9일에 닭ㆍ개들은 모두 죽었으나 그의 가족은 무사했다고 한다.
등고구일(登高九日)
전거에는 구일등고(九日登高)로 되어 있다. 남조(南朝) 양(梁) 오균(吳均)이 지은 속제해기(續齊諧記) 구일등고에 “여남 환경(桓景)이 비장방(費長房)을 따라 여러 해 동안 유학하였다. 비장방이 오균에게 말하기를, ‘9월 9일에 너희 집에 재앙이 있을 것인데 빨리 집으로 가 식구들마다 붉은 주머니를 만들어 거기에다 수유를 담아 팔에 차고 높은 곳에 올라가 국화주(菊花酒)를 마시면 그 화를 면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환경이 그의 말처럼 온 가족이 산에 올라갔다가 저녁에 돌아와 보니 가축이 갑자기 죽어 있었다.”고 하였다.
등고난만취(登高爛慢醉)
세속에서, 9월 9일이 되면 높은 산에 올라 국화주를 마시는 속례를 말한다. 『속제해기(續齊諧記)』
등고자비(登高自卑)
높은 곳에 이르기 위해서는 낮은 곳부터 밟아야 한다. 일을 하는데는 반드시 차례를 밟아야 한다는 의미로 쓰이기도 하고, 지위가 높아질수록 스스로를 낮춘다는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등고작부(登高作賦)
높은 데 올라가서 부를 짓는다. 왕발(王勃)의 「등왕각서(滕王閣序)」에 보인다.
등공기구추(滕公起廐騶)
등공(滕公)은 한(漢)의 하후영(夏侯嬰)을 말한다. 하후영은 패(沛)땅 사람으로 처음에 패에서 말을 관리하는 천역(賤役)을 하던 자였는데, 유방(劉邦)과 사이가 좋았던 관계로 뒤에 유방이 한 나라를 세우고 천자(天子)가 되자 하후영은 태복(太僕)이 되었으며 한 나라를 위해 많은 공헌을 하였다. 『한서(漢書)』 卷四十一
등공신천(滕公新阡)
등공은 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과 같은 고향 사람으로, 유방을 도와 한 나라를 세운 하후영(夏侯嬰)의 별칭이다. 그가 죽어 장사를 지낼 때 공경들이 상여를 따라 도성의 동문 밖에 당도하자 말이 더 이상 가지 않고 땅바닥에 쓰러져 슬피 울었다. 그곳을 파보니 석곽(石槨)이 나왔는데 거기에 “암울했던 가성(佳城)이 삼천 년만에 태양을 보았도다. 아, 등공이여 이 집에서 살지어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어 마침내 거기에다 묻었다 한다. 『사기(史記)』 卷九十三 「하후영전(夏侯嬰傳)」 注
등공장(滕公葬)
등공은 한 고조(漢高祖)의 명신인 하후영(夏侯嬰)의 봉호이다. 등공이 일찍이 말을 타고 동도문(東都門)에 이르렀을 때 말이 가지 않고 발로 땅을 허비적거리므로, 그곳을 파 본 결과 석곽(石곽) 하나가 나오자, 이를 깨끗이 씻어서 보니, “답답하던 가성(佳城)이 삼천 년 만에 태양을 보았도다. 아, 등공이 이곳에 거처하리라[佳城鬱鬱 三千年見白日 吁嗟滕公居此室].”라는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하여 등공의 유명(遺命)에 의해서 등공이 죽은 뒤에 그곳에 장사지냈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등과기(登科記)
합격자 성명록.
등누점자기(登樓占紫氣)
노자(老子)가 서쪽으로 길을 떠나 함곡관(函谷關)에 거의 이르렀을 때, 관령(關令) 윤희(尹喜)가 누대에 올라 사방을 바라보다가, 보라색 기운(紫氣)이 관문 위로 떠오는 것을 살펴보고는, 분명히 진인(眞人)이 올 것이라고 예측을 하였는데, 얼마 뒤에 과연 노자가 푸른 소를 타고 왔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열산전(列仙傳)』 上ㆍ「관영내전(關令內傳)」
등단(登壇)
대장(大將)에 임명되었다는 말이다. 옛날 사령관의 권위를 높여주기 위해 단을 쌓고 예식을 행했던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사기(史記)』 「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
등단(登壇)
회맹(會盟), 제사, 사신 접대 등 국가의 중요한 의식을 말한다.
등단주소호(登壇周召虎)
주(周)나라도 한 때에는 국가가 쇠약하였던 것을 선왕(宣王)이라는 왕이 중흥시켰는데, 그때에 대장으로서 전쟁에 성공한 사람이 소호(召虎)였다. 예전부터 대장은 단(壇)을 모으고 거기에 올라가서 하늘과 전군에 맹서하였으므로 대장되는 것을 등단(登壇)한다고 말한다.
등당입실(登堂入室)
마루를 거쳐 방에 들어간다는 뜻으로, 순서를 밟아 학문을 닦으면 깊은 경지에 이르게 됨을 비유한 말이다. 『논어(論語)』 「선진(先進)」
등대자미(登臺子美)
자미(子美)는 두보(杜甫)의 자. 그의 9월 9일 등고(登高) 시 세째 연(聯)에, “만 리에 가을을 슬퍼하니 늘 나그네의 신세, 백 년에 병이 많아 홀로 대에 올랐네.”라 했다.
등래(登萊)
등주(登州)와 내주(萊州)의 합칭으로 중국 산동성(山東省) 일대를 말한다.
등롱(燈籠)
대나무 또는 나무나 쇠 같은 것의 살로 둥근 바구니 모양을 만들고, 거기에 비단 또는 종이를 씌워 그 속에 등잔을 넣는 것이다.
등루(登樓)
한(漢) 나라 말에 왕찬(王粲)이 난을 피하여 형주(荊州)의 유표(劉表)에게 가서 의지해 있으면서 뜻을 얻지 못함에 누각에 올라가서 등루부(登樓賦)를 읊어 시름을 달랜 고사를 말한다.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卷二十一 「왕찬전(王粲傳)」
등루거제(登樓去梯)
누상(樓上)에 오르게 하고, 오르고 나면 사다리를 치운다. 즉, 처음엔 남을 기쁘게 해놓고 뒤에 괴롭게 한다.
등루부(登樓賦)
삼국(三國) 시대 위(魏) 나라 왕찬(王粲)이 17세 때 황문시랑(黃門侍郞)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동탁(董卓)의 난을 피해 형주(荊州)의 유표(劉表)에게 의탁해 있으면서, 강릉(江陵)의 성루(城樓)에 올라가 고향에 돌아갈 것을 생각하며 지었다 한다. 『삼국지(三國志)』 卷二十一 「왕찬전(王粲傳)」ㆍ『문선(文選)』 卷十一 「유람(遊覽)」
등루장소(登樓長嘯)
진(晉) 나라 때 유곤(劉琨)이 진양 태수(晉陽太守)로 있을 적에, 호병(胡兵)에게 겹겹으로 포위를 당하자 유곤이 성루에 올라 긴 휘파람을 부니 호병이 이 소리를 듣고는 향수에 젖어있는 틈을 타서 포위망을 풀고 달아났다는 고사. 『진서(晉書)』 「유곤전(劉琨傳)」
등륙(滕六)
전설 속의 눈 귀신(雪神) 이름이다.
등륜(燈輪)
불사(佛事) 때 등을 달아 놓는 곳. 당 예종(唐睿宗) 선천(先天) 2년에 안복문(安福門) 밖에 20장(丈) 높이의 등륜을 설치하고 5만 개의 등을 달아 놓아, 마치 미묘한 꽃과 같았다 한다. 『조야첨재(朝野僉載)』
등림(鄧林)
① 등림은 좋은 나무만 있다는 숲으로, 신선이 구름을 타고 다니며 노는 곳이라 한다. 필원(畢沅)은 『산해경(山海經)』 「중산경(中山經)」의 “夸父之山, 北有桃林.”이라는 구절에 근거해 ‘도림(桃林)’이 ‘등림(鄧林)’이며, 그 땅은 초(楚)의 북쪽 경계에 있다고 주장했다.
② 『회남자(淮南子)』에, “과보가 막대를 버린 것이 등림이 되었다[夸父棄其策是爲鄧林].”라는 말이 있다. 과보는 신수(神獸)인데, 하수(河水)를 마시고도 부족하여 서해(西海)를 마시려고 가다가 중로에서 목이 말라죽었다. 그가 막대기를 심은 것이 살아나 큰 수풀이 되었는데, 전설에 나오는 아름답고 무성한 수풀이다. / 인용: 叢石亭觀日出(박지원), 소화시평 상88, 소화시평 하21
등문객(登門客)
등용문객(登龍門客). 인정과 추천을 받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후한서(後漢書)』 卷六十七 「이응전(李膺傳)」에 “이응의 명망이 높아 그의 인정을 받는 사람들을 세상에서는 용문에 올랐다고 하였다.”고 하였다.
등사(螣蛇)
용처럼 생긴 뱀. 운무(雲霧)를 제맘대로 일으켜 그 속에서 논다고 한다. 『이아(爾雅)』 「석어(釋魚)」
등산극(登山屐)
등산을 하지 않았음을 뜻한 말로, 남조(南朝) 송(宋) 때 사영운(謝靈運)이 등산할 때면 반드시 나막신을 신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등산사(登山謝)
사영운(謝靈運)은 남조(南朝) 시대 송(宋) 나라의 문장가. 산수를 좋아하여 회계(會稽)에 있을 때 언제나 나막신을 신고 산에 오르곤 하였다. 『송서(宋書)』 「사령운전(謝靈運傳)」
등산임수(登山臨水)
친지를 떠나보내는 서운한 마음을 표현할 때 보통 쓰는 표현으로, 『초사(楚辭)』 「구변(九辯)」의 “산에 올라 멀리 강물을 바라보며 돌아가는 길손을 전송한다[登山臨水兮 送將歸].”라는 유명한 구절에서 비롯된 것이다.
등상(騰傷)
등상은 호랑이가 날뛰어 이광에게 상처를 입혔다[虎騰傷廣]는 데서 온 말이다. 『사기(史記)』 「이장군열전(李將軍列傳)」
등생구절군(滕生求浙郡)
늙음을 이유로 외임(外任)을 자원한다. 송의 등원발(滕元發)이 강직한 성품 명쾌한 안목으로 신종(神宗)때 많은 치적(治績)을 내외에 남기고는 뒤에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에 반대하여 늙음을 이유로 회남(淮南)을 맡아 나갈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송사(宋史)』 卷三百三十二
등석(燈夕)
상원(上元). 즉 정월 대보름날 밤을 말한다. 예부터 이날은 밖에 등을 켜놓아 밤을 밝게 하였으므로 이름된 것이다. 속칭 원소절(元宵節)이라고 한다.
등석(燈夕)
음력 4월 8일 밤에 등대를 세우고 등을 달고서 석가모니의 탄일(誕日)을 기념하는 날.
등석연(燈夕宴)
음력 4월 초파일에 ‘등석(燈夕)’이라 하여 등을 달고 등대를 세우고, 밤에 불을 켜서 석가모니의 탄생일을 기념하는 잔치이다. 관등(觀燈) 놀이와 같다.
등설(滕薛)
춘추시대(春秋時代)에 독립된 두 소국(小國)의 이름인데, 전하여 지방관을 비유한 것이다.
등씨동산(鄧氏銅山)
등씨는 전한(前漢)의 등통(鄧通)을 말한다. 문제(文帝)가 등통을 매우 총애하여 그를 부자(富者)로 만들기 위해, 촉(蜀)의 엄도(嚴道)에 있는 동산(銅山)을 떼어 주어, 거기서 나는 동(銅)으로 돈을 주조해서 마음대로 사용하도록 했기 때문에, 등씨의 돈이 온 천하에 퍼졌었다. 『한서(漢書)』 「영행전(佞幸傳)」, 『사기(史記)』 「영행열전(佞幸列傳)」
등아(燈蛾)
등촉(燈燭)을 보면 서로 불을 뺏으려고 빙빙 돌다가 등유(燈油)에 빠지거나 불에 타서 죽는 불나방. 색욕과 탐욕에 어두워 신명(身命)을 망치는 우인(愚人)을 비유한다.
등영(登瀛)
선비가 총애와 영광을 입은 것을 신선의 세계에 오른 것에다 비유한 것인데, 영주는 전설에 신선이 사는 산이라고 하였다. 당(唐) 무덕(武德) 4년에 태종(太宗)이 태자가 되어 궁성의 서쪽에 문학관(文學館)을 열고 방현령(房玄齡), 두여회(杜如晦) 등 18명을 학사(學士)로 삼고 정사를 자문하였다. 그 선발에 든 사람을 사람들이 선망(羨望)하여 등영주(登瀛洲)라고 일컬었다. 『신당서(新唐書)』 卷一百二 「저량전(褚亮傳)」
등영주(登瀛洲)
영주는 당 태종(唐太宗)이 설치한 문학관(文學館) 이름으로, 여기에 임명된 두여회(杜如晦), 방현령(房玄齡) 등 이른바 ‘십팔학사(十八學士)’를 당시에 사람들이 부러워하며 ‘영주에 올랐다(登瀛洲)’고 일컬었던 고사가 전한다. 『신당서(新唐書)』 卷102 「저량전(褚亮傳)」
등오정(登鼇頂)
동해에 자라(鼇)가 산을 이고 있는데, 그 위에 신선이 산다 한다.
등왕각(縢王閣)
당나라 문인 왕발(王㪍)이 교지령(交趾令)으로 있는 아버지 복치(福畤)를 보러 가는 길에, 꿈에 강신(江神)이 와서 말하기를, “내일 9월 9일에 남창(南昌)의 등왕각(滕王閣)을 중수(重修)한 낙성식(落成式)이 있으니 참석하여 글을 지어 이름을 내라.” 하였다. 왕발이 대답하기를, “여기서 남창까지 7백 리인데 하룻밤 사이에 당도할 수가 있읍니까.” 하니, 강신(江神)은, “배에 오르기만 하면 내가 바람을 빌려 주리라.” 하므로, 왕발은 과연 하룻밤 사이에 남창에 도착하니 홍주 자사(洪州刺史)가 등왕각에 낙성식을 크게 열고 여러 손들에게 필묵(筆墨)과 종이를 돌려 글을 짓게 하였다. 사실은 자사(刺史)가 자기의 사위를 시켜 미리 글을 지어 두고 여러 손들이 사양하기를 기다려 사위의 글을 자랑하려 하였던 것이다. 다른 손은 모두 사양하는데 왕발이 사양하지 않고 붓을 드니 자사는 불쾌하여 사람을 시켜 왕발의 글을 쓰는 대로 엿보고 와서 보고하도록 하였다. 중간에 가서, “떨어진 놀은 외로운 따오기와 가지런히 날고, 가을 물은 긴 하늘과 한 빛이다[落霞與孤鶩齊飛 秋水共長天一色].” 하는 구절을 쓰니, 자사가 듣고, “참으로 기이한 재주로다.” 하였다. 왕발은 끝에 다시 시(詩)를 쓰기를, “그림 그린 기둥은 아침에 남포의 구름에 날고 주렴은 저녁에 서산 비에 걷는다[畵棟朝飛南浦雲 珠簾暮捲西山雨].” 하였다. 등왕각은 등왕(滕王)에 봉해진 당고조(唐高祖)의 아들 이원영(李元嬰)이 홍주(洪州)의 도독(都督)으로 있을 때에 세운 누각이다. 「등왕각서(滕王閣序)」
등용(登龍)
후한(後漢) 환제(桓帝) 때의 명망가인 이응(李膺)의 집을 찾아가 그의 대우를 받는 것을 당시에 영광으로 알아 “용문에 올랐다[登龍門].”고 했던 고사가 있다.
등용문(登龍門)
용문(龍門)은 황하 상류에 있는 급류로, 잉어가 여기를 통과하면 용이 된다는 말이 있다. 입신출세의 관문에 오름
등우(鄧禹)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 때의 장군으로, 일찍 대공(大功)을 세우고 24세의 나이로 대사도(大司徒)가 되었었다. 『후한화(後漢畫)』 卷十六
등원실목지도율(騰猿失木只掉慄)
혼란한 세상을 만나 고달픈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뛰어다니는 원숭이(騰猿)들이 큰 나무 위에서 걱정 없이 지내다가 가시나무 사이로 떨어지게 되어서는 오직 눈치를 살피고 벌벌 떨면서[危行側視 振動悼慄] 지내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장자(莊子)』 「산목(山木)」
등유(鄧攸)
아들이 죽어 후계자가 없게 된 것을 말한다. 진(晉) 나라 등유가 어린 아들과 조카를 데리고 피난 도중 모두 온전하게 살릴 수 없게 되자 아들을 버리고 조카를 구했는데, 그 뒤에 아들을 다시 얻지 못해 후사(後嗣)가 없게 되자 사람들이 “하늘도 무심하다[天道無知].”고 탄식했던 고사가 전한다. 『진서(晉書)』 「양리전(良吏傳)」 등유(鄧攸)
등이(等夷)
나이나 신분이 비슷하여 친하게 지내는 사람을 말한다. / 인용: 忠州石(권필)
등창(背瘡)
한의학에서, 등에 나는 큰 부스럼을 일컫는 말이다.
등춘대(登春臺)
“뭇사람들 즐거워 봄 대에 오른 듯[衆人熈熈 如登春臺].” 『장자(莊子)』 그 주석(注釋)에 이르기를, “봄엔 음양이 교통하고 만물이 감동하므로 대(臺)에 올라 바라보면 기분이 아주 흐뭇하다는 뜻이다.” 하였다. / 태평 성대의 백성들은 마치 풍성한 잔치상을 받은 듯, 또는 봄에 높은 대관에 올라가 사방을 전망하듯 즐거워한다는 노자(老子)의 말에서 온 것으로, 즉 태평 성대를 비유한 말이다. 『노자(老子)』 二十章
등파(藤婆)
죽부인(竹婦人)의 일종.
등하(登霞)
멀리가다. 제왕(帝王)의 죽음을 말한다. 하(霞)자는 하(遐)자의 뜻으로 하늘에 오른다는 뜻이다.
등하불명(燈下不明)
등잔 아래가 어둡다. 곧 가까운 곳을 도리어 잘 모른다.
등화(燈花)
등잔불 심지 끝이 타서 맺히는 꽃 모양의 불똥을 말한다. 불이 꺼지려 할 즈음에 이 등화 현상이 일어나면 조만간 기쁜 일이 있게 된다고 한다. 『본초(本草)』 燈花ㆍ『서경잡기(西京雜記)』 3
등화가친(燈火可親)
가을밤은 서늘하여 등불을 가까이 두고 글읽기에 좋다는 말
등후(鄧侯)
등우(鄧禹)를 말한다. 등우는 한 광무제(漢光武帝)를 섬겨 천하를 평정하고 중흥(中興)의 제일공신이 되었는데, 나이 24세에 대사도(大司徒)가 되고 찬후(酇侯)로 봉작되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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