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건빵이랑 놀자

어휘사전 - 91. 두 본문

어휘놀이터/어휘사전

어휘사전 - 91. 두

건방진방랑자 2020. 4. 17. 17:07
728x90
반응형

91.

 

 

()

북방 현무(北方玄武) 7성의 하나. 협기변방서의례오(協紀辨方書義例五)

 

두가구원(竇家仇怨)

후한(後漢)의 두무(竇武)가 태후(太后)의 명으로 영제(靈帝)를 받아들여 제위(帝位)에 앉힌 공로로 대장군(大將軍)이 되고 문희후(聞喜侯)에 봉해졌으며, 아들과 조카들까지도 모두 후에 봉해져 그 위세가 천하를 흔들었다. 그러나 두무는 조금도 자만하지 않고 태부(太傅) 진번(陳蕃) 등과 함께 국사에 진력하면서 당시 정권을 농락하는 고질적인 존재인 환관(宦官)들을 숙청하려다가 뜻을 못 이루고 도리어 환관 조절(曹節)ㆍ왕보(王甫) 무리들에 의해 멸족지화를 당했다. 그런데 두무가 처음 태어날 때 그의 어머니가 두무와 함께 한 마리의 뱀을 더 낳아 그를 숲 속으로 보냈는데, 당시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는 장차 두씨 집안에 무슨 일이 있을 것임을 미리 알았다고 한다. 후한서(後漢書)卷六十九

 

두각(頭角)

머리끝이라는 뜻으로, 여러 사람들 중에서 학식이나 재능이 특히 뛰어난다는 말이다.

 

두각열(頭角熱)

머리를 자구 조아렸다는 말이다.

 

두각참연(頭角嶄然)

한유(韓愈)유자후 묘지명(柳子厚墓誌銘), “雖少年 已自成人 能取進士第嶄然見頭角이라 했다.

 

두각초상소(頭角稍相踈)

이 시구는 부독서성남(符讀書城南), “年至十二三 頭角稍相疎이라고 보이는데, 글을 읽은 자는 학식과 재능이 두각을 나타내서, 점점 글을 읽지 않은 자와 차이가 생긴다는 뜻이다.

 

두간용광(斗間龍光)

() 나라 무제(武帝) , 하늘의 두우(斗牛) 사이에 자기(紫氣)가 뻗치는 것을 보고, 뇌환(雷煥)이 용천(龍泉)과 태아(太阿)의 두 명검(名劍)을 얻었던 고사가 있다. 진서(晉書)36

 

두강(杜康)

() 나라 사람으로 술을 맨 처음 만들었다 하는데 이때문에 술 이름으로도 전용 되었다 한다. 상우록(尙友錄)

 

두강(頭綱)

차의 이른다. 북원다록(北苑茶錄)백차(白茶)와 승설(勝雪)은 경칩(驚蟄) 전에 따서 경사(京師)에 올라오므로 두강옥아(頭綱玉芽)라 일렀다.” 하였다.

 

두강생(杜康生)

두강은 황제(黃帝) 때의 재인(宰人)으로 맨 처음 술을 만들었던 사람이다.

 

두강주(杜康酒)

술 이름인데 옛날 술을 잘 만들었던 두강의 이름을 따서 명명한 것이다.

 

두 개회(豆稭灰)

콩깍지를 태운 재. ()을 비유하기도 한다.

 

두견상재배(杜鵑尙再拜)

() 나라의 망제(望帝)란 임금이 타인에게 위()를 전하고 서산(西山)에 들어가 숨었다가 뒤에 두견(杜鵑)이 되었는데, 후인들이 망제의 덕을 사모하여 두견새의 울음을 듣고 절을 하였다는 전설을 말한다. 화양국지(華陽國志)』 「촉지(蜀誌)

 

두계련무죄(杜雞憐無罪)

두계는 당 나라 시인 두보(杜甫)가 읊은 박계행(縛鷄行)를 말하는데, 이는 어떤 종이 벌레를 잡아먹는 닭을 미워하여 꽁꽁 묶어가지고 시장으로 팔러 가는 것을 보고 읊은 것으로, 닭도 팔려가면 죽게 될 것이니 벌레나 닭이나 죽는 건 마찬가지인데, 왜 닭만을 묶는단 말인가? 닭을 풀어줘라 한 내용에서 온 것이다.

 

두곡(杜谷)

서천(舒川)의 속역(屬驛)이었던 마을 이름이다.

 

두곡(杜曲)

중국 섬서성(陝西省) 장안현(長安縣) 남쪽에 위치한 지명. ()나라 때 대성(大姓)인 두씨(杜氏)들이 대를 이어 그곳에서 살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두곡종남(杜曲終南)

두곡은 당() 나라 대성(大姓)인 두씨(杜氏)가 대대로 살아 온 섬서성(陝西省) 서안(西安)의 동남쪽 지역을 가리키고, 종남은 그곳의 산 이름이다.

 

두공부(杜工部)

당 나라 시인(詩人) 두보(杜甫)의 벼슬이 공부원외랑(工部員外郞)이었으므로, 세칭 두공부라 하였다.

 

두공부집(杜工部集)

() 나라 두보(杜甫)의 시문집(詩文集). 공부(工部)는 관명인데. 두보가 검교공부원외랑(檢校工部員外郞)을 지냈으므로 두공부라 부른다.

 

두구(荳蔲)

풀 이름이다. 이 꽃이 활짝 피기 이전의 꽃망울을 마치 소녀(少女)가 임신한 것과 같다는 데서 함태화(含胎花)라 부르기도 하므로, 전하여 소녀가 임신한 것을 가리키는데, 두목(杜牧)의 시에 예쁘고 간드러진 십삼 세 남짓의 소녀여 두구 가지의 꽃망울이 이월 초승이로다[娉娉嫋嫋十三餘 荳蔲梢頭二月初]”하였다.

 

두구초두(荳蔲梢頭)

두구는 육두구(肉荳蔲)의 준말로, 이 꽃이 활짝 피기 전의 불룩한 상태를 함태화(含胎花)라고 하기 때문에 나이 어린 아가씨가 임신(妊娠)한 데에 비유한 것이다. () 나라 두목(杜牧)의 시에 아리따운 아가씨 십삼여 세에, 두구의 초두가 두 달째라네[娉娉嫋嫋十三餘 荳蔲梢頭二月初]” 하였다.

 

두기(斗箕)

두 별의 이름이다. 이 두 별의 사이는 은하(銀河)가 가로놓였으므로, 간격이 있어 원활하지 못한 것의 비유.

 

두기(杜夔)

중국 삼국 시대 위() 나라의 음악가로 음률에 정통했다. 위 문제(魏文帝)가 빈객 가운데서 생()과 금()을 연주하게 하였는데 기는 난색을 지었다. 문제는 이를 좋아하지 않아 두기를 내쫓아 버렸다.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두기(豆萁)

형제끼리 화목하지 못하고 상대를 해치려 하는 것을 가슴 아파하는 노래라는 뜻이다. 조식이 문제의 위협에 쫓겨 지은 칠보시(七步詩)’ 가운데 콩깍지를 태워 콩을 삶으니, 콩이 솥 속에서 눈물 흘리네[煮豆燃豆萁 豆在釜中泣].”라는 구절이 있다. 삼국지(三國志)19

 

두남(斗南)

相一星在北斗南이라는 진서(晉書)천문지 상(天文志上)의 기록에서 비롯되어 재상(宰相)의 지위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두남(斗南)

북두성(北斗星)은 하늘의 북쪽에 있으므로 북두의 남쪽이란 천하를 말하는 것이다.

 

두남명(斗南名)

두남은 북두성(北斗星) 남쪽이란 뜻이니, 두남의 명성이란 곧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임을 의미한다.

 

두남일인(斗南一人)

두남은 북두칠성의 남쪽. , 온 천하에서 제일 가는 현재(賢才)를 의미한다.

 

두노(杜老)

() 나라 시인 두보(杜甫)를 가리킨다.

 

두당양(杜當陽)

당양현후(當陽縣侯)에 봉해진 진() 나라 두예(杜預)를 가리킨다. 그 역시 문제(文帝)의 누이동생인 고륙공주(高陸公主)와 결혼했는데, 청빈한 자세를 유지하면서 자신의 장례를 검소하게 치르도록 유명(遺命)을 남긴 내용이 진서(晉書)34에 나온다.

 

두대주(斗大州)

말만 한 고을이라는 뜻으로, 보통은 작은 읍성을 가리킨다.

 

두덕기(杜德機)

생동(生動)하는 기틀을 막는다는 뜻으로, 죽음을 말한다. 신무(神巫) 계함(季咸)열자(列子)와 함께 호자(壺子)를 보고 나와서 열자에게 말하기를 자네 선생은 죽을 것이다.” 하자, 열자가 다시 들어가 호자에게 그 사실을 고하니, 호자가 이르기를, “아까 내가 그에게 대지(大地)의 조용한 형상을 보여 주었더니, 그가 나의 두덕기를 약간 본 모양이다[鄕吾示之以地文, 萌乎不震不正, 是殆見吾杜德機也].”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장자(莊子)』 「응제왕(應帝王)

 

두랑(荳娘)

묘령(妙齡)의 소녀를 가리킨다.

 

두랑납량(杜郞納涼)

두랑(杜郞)은 두생(杜生)이니, () 나라 때의 은사(隱士), 송사(宋史) 두생전(杜生傳)두생이 문 밖을 나오지 않은 지가 15년이었다. 여양위(黎陽尉) 손진(孫軫)이 이유를 묻자 웃으며 전하는 사람들이 너무 지나친 것이오.’ 하고는 문 밖에 있는 뽕나무 한 그루를 가리키며 ‘15년 전에 일찍이 저 뽕나무 아래에서 바람 쐰 기억이 나는데, 어찌 문 밖을 나가지 않았다 할 수 있겠소.’하였다.” 한다.

 

두로(杜老)

두보(杜甫)를 높여 이른 말인데, 그의 곤오어숙자위이시(昆吾御宿自逶迤詩)에서 세상이 태평하지 못함을 걱정하는 뜻을 은밀히 부치어 벽오동은 봉황이 깃들던 가지만 늙은 채로 남았구나[碧梧棲老鳳凰枝]”고 하였다. 두소릉집(杜少陵集)卷十七

 

두로(頭顱)

백발의 쇠한 머리를 가리킨다. 남제(南齊) 때의 은사 도홍경(陶弘景)이 자기 종형에게 보낸 편지에, “내가 나이 40세 전후에 상서랑(尙書郞)이 되기를 기약했는데, 지금 나이 36세에 바야흐로 봉청(奉請)이 되었고 보면, 40세의 머리를 알 만하니, 일찍 떠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했던 데서 온 말로, 전하여 나이 40여 세에 이미 쇠()한 것을 의미한다. 전국책(戰國策)진책(秦策), “暴骨草澤 頭顱僵仆 相望於境이라고 보인다.

 

두로강촌흥(杜老羌村興)

두로(杜老)두보(杜甫)를 말한다. 두소릉시집(杜少陵詩集) 5에 오언 고시(五言古詩)로 강촌(羌村) 3수가 실려 있다.

 

두로견응착(杜老見應錯)

두로는 두보(杜甫)를 가리킨다. 두보의 시 장부성도초당도중유작(將赴成都草堂途中有作), “새 솔은 천 척 높이 안 자라서 한스럽고, 나쁜 대는 만 줄기를 낫으로 쳐낼 거네.[新松恨不高千尺 惡竹應須斬萬竿]”하였다.

 

두로고응비호락(杜老故應悲濩落)

두로(杜老)두보(杜甫)를 말한다. 참고로 그의 시에 居然成濩落 百首甘契濶이라는 구절이 있다. 두소릉시집(杜少陵詩集)4 自京赴奉先縣詠懷

 

두로미(杜老眉)

두보(杜甫)는 당 나라 때 시인으로 그는 현종(玄宗) 천보(天寶) 14년 안녹산(安祿山)의 난을 만나 국가가 어지러워지자, 관산융마(關山戎馬) 등 나라를 걱정하는 시를 많이 읊었다.

 

두로음시수(杜老吟詩瘦)

이백(李白)두보(杜甫)를 두고 한 말이다. 이백이 장난으로 지어 두보에게 준 (戱贈杜甫) 시에 묻노니 그대는 작별한 뒤로 왜 그리 수척한가. 이는 모두 그 동안 시를 읊느라 그런 것이네[借問別來太瘦生 總爲從前作詩苦]” 하였다. 이태백집(李太白集)卷三十 詩文拾遺

 

두로추잠태임빈(杜老抽簪太恁頻)

벼슬을 그만두는 일을 자꾸만 반복하고 있다는 말이다. 두보(杜甫)누상(樓上)’이라는 오언 율시(五言律詩) 첫머리에 천지간에 부질없이 머리만 긁적이며, 백옥의 비녀를 자꾸만 뽑는구려[天地空搔首 頻抽白玉簪].”라는 표현이 있다. 두소릉시집(杜少陵詩集)22

 

두류산(頭流山)

지리산(智異山)의 별칭이다.

 

두륜산(頭輪山)

해남(海南)에 있다.

 

두릉(杜陵)

두릉(杜陵)에 거하며 두릉포의(杜陵布衣)라고 자호(自號)했던 당() 나라 시인 두보(杜甫)를 가리킨다.

오늘날 섬서(陝西) 서안시(西安市) 동남에 있던 지명.

 

두릉계졸(杜陵計拙)

당 나라 시인 두보(杜甫)는 생계가 곤궁하여 늘 타향을 떠돌아다녔다.

 

두릉노(杜陵老)

두릉(杜陵)에 살았던 당() 나라 시인 두보(杜甫)를 말한다. 이백(李白)과 함께 당대(唐代) 시인의 쌍벽(雙璧)으로 일컬어지는 불후의 시성(詩聖)으로서, 두릉야로(杜陵野老)라고 자호(自號)하기도 하였다.

 

두릉대아질소사(杜陵大雅軼騷些)

두릉은 당() 나라 시인 두보(杜甫)를 가리킨 말이고 대아는 곧 큰 문장이라는 뜻이다. 초소(楚騷)춘추시대(春秋時代) () 나라 굴원(屈原)이소경(離騷經)를 말한 것으로, 즉 두보의 문장이 굴원보다 훌륭하다는 뜻이다.

 

두릉야로(杜陵野老)

() 나라 시인 두보(杜甫)를 말한다.

 

두릉옹(杜陵翁)

() 나라 때의 시인으로 호가 소릉(少陵)두보(杜甫)를 높여 이른 말이다.

 

두릉인(杜陵人)

난리로 인해 떠돌이 생활을 하며 우국(憂國)의 심정을 읊었던 두보(杜甫)를 말한다.

 

두릉증식노장군(杜陵曾識老將軍)

두릉(杜陵)두보(杜甫)를 지칭하고 노장군(老將軍)은 엄무(嚴武)를 지칭한다. 두보가 성도(成都)를 다스리던 엄무(嚴武)의 깊은 지우(知遇)를 입어 보살핌을 받다가, 그가 죽은 후 의지할 데 없이 유랑하였다. 구당서(舊唐書)列傳 卷一百九十

 

두릉추흥팔수(杜陵秋興八首)

두릉(杜陵)은 두릉야로(杜陵野老)의 준말로, () 나라 시인 두보(杜甫)의 호이다. ‘추흥팔수는 대력(大曆; 唐代宗의 연호) 원년에 기주(玘州 사천성 동북방의 진절현(秦節縣)) 서각(西閣)에 있을 때 지은 연작시(連作詩)이다. 두소릉시집(杜少陵詩集)17

 

두릉팔애(杜陵八哀)

두보(杜甫)의 팔애시. () 나라 때의 현신(賢臣)인 왕사례(王思禮)ㆍ이광필(李光弼)ㆍ엄무(嚴武)ㆍ왕진(王璡)ㆍ이옹(李邕)ㆍ소원명(蘇元明)ㆍ정건(鄭虔)ㆍ장구령(張九齡) 등 여덟 사람의 죽음을 슬퍼하여 노래한 것이다. 두소릉집(杜少陵集)卷十六

 

두림칠서(杜林)

두림은 후한 때의 경학자이고, 두림이 일찍이 칠서(漆書)로 된 고문상서(古文尙書)를 얻어 매우 소중히 간직해 오다가, 마침내 위굉ㆍ서순을 만나 그들에게 전수함으로써 고문상서(古文尙書)가 세상에 전해지게 되었다고 한다. 후한서(後漢書)卷二十七

 

두모(杜母)

후한 때 남양태수(南陽太守)로서 남양을 대단히 잘 다스려, 백성들이 그를 어머니와 같다 하여 두모라 호칭했던 두시(杜詩)를 가리킨다. 후한서(後漢書)卷三十一

 

두목(杜牧)

만당(晩唐) 시인, ()는 목지(牧之) ()는 번천(樊川), () 나라 때 명신(名臣)이다. 시부(詩賦)에 능()하고 풍류(風流)와 아량(雅量)이 있었으며 강개롭게 병사(兵事)를 논하기를 즐겼다. 당서(唐書)卷一百六十六 두목전(杜牧傳)

 

두목중서루배낭(杜牧中書屢拜囊)

조낭은 검은 베로 만든 전대인데 여기에 글을 싸서 임금에게 올렸다. () 나라 때 중서사인(中書舍人)을 지낸 두목은 성품이 매우 강직하고 뛰어난 절개가 있어 매양 조정의 대사(大事)와 시폐(時弊)를 잘 논술하여 당시 직소(直疏)로 유명하였기 때문에 이른 말이다. 신당서(新唐書)卷六十六 두목전(杜牧傳)

 

두목지(杜牧之)

두목(杜牧)의 자(), ()는 번천(樊川), () 나라 때 명신(名臣)이다. 시부(詩賦)에 능()하고 풍류(風流)와 아량(雅量)이 있었다. 당서(唐書)卷一百六十六 두목전(杜牧傳)

 

두목참(杜牧慙)

() 나라 문장가로 자()는 목지(牧之)이며, 진사로 뽑힌 뒤 호주 자사(湖州刺史) 등을 지냈다. 그가 포의(布衣)로 있을 당시 친구가 자사(刺史)로 있는 호주(湖州)에 놀러갔다가 10여 세에 지나지 않는 절색의 기생을 만났는데 그때 그는 10년 후 자기가 자사로 올 때까지 기다려 달라 하고 돌아왔다. 14년 만에 자사로 부임하자 이미 그녀는 결혼하여 자식을 둘이나 거느린 부인으로 변해 있었다.

 

두목호주거교지(杜牧湖州去較遲)

() 나라 두목이 호주(湖州)에 노닐 때 그곳 자사(刺史)와는 절친한 사이였으므로 그는 자사의 주선으로 여러 미녀를 두루 보았으나 모두가 마음에 들지 않다가 10여 세 된 소녀가 하나 왔는데 자세히 보니 참으로 절색이었다. 그러자 두목은 10년 뒤에 맞이하겠다면서 만약 10년 뒤에 맞이하지 못할 경우에는 다른 데로 출가해도 좋다는 약속을 남기고 돌아왔는데 14년이 지난 뒤에야 가 보니, 그녀는 이미 3년 전에 출가하여 아이를 둘씩이나 낳았으므로 두목은 봄을 찾는 약속이 늦었으니 꽃다운 시절 한할 필요 없으리. 광풍이 붉은 꽃 다 떨어뜨려 푸른 잎 짙게 피고 열매가 주렁주렁하구나.”라는 시를 남기고 섭섭해하였다. 張君房, 麗情集(여정집)

 

두무악(頭無岳)

남방 해변에서 해채(海採)를 생업으로 하는 제주인(濟州人)으로 이들은 조주(操舟)ㆍ잠수(潛水)에 능하였다. 두무악은 본디 한라산(漢拏山)의 이명(異名)이다.

 

두문불출(杜門不出)

문을 닫아걸고 나가지 않음. , 집안에만 틀어박혀 밖에 나가지 않음. 세상과 인연을 끊고 세상에 나가지 않음. / 인용: 李生窺牆傳 / 商君列傳 / 廉頗藺相如列傳 / 사마상여열전(司馬相如列傳)

 

두미(斗尾)

전북 진안(鎭安)의 산골 이름이다.

 

두미삼전(斗米三錢)

옛날에는 쌀값이 쌀수록 백성이 살기가 좋다는 것이다.

 

두방(杜房)

당 태종(唐太宗) 때의 명재상 두여회(杜如晦)와 방현령(房玄齡)을 말한다.

 

두번천(杜樊川)

번천은 당() 나라 두목(杜牧)의 호이다.

 

두병(斗柄)

북두칠성의 손잡이를 뜻한 것인데 북두성이 바가지() 형태로 생겼다 하여 다섯째에서 일곱째 별까지의 셋을 가리켜 손잡이라 한다.

 

두보(杜甫)

중국 당()나라 시인. 자는 자미(子美), 호는 소릉(少陵). 소릉이라고 불리는 것은, 장안(長安) 남쪽 근교의 소릉(小陵)이 선조의 출신지인 데서 유래한다. 하남성(河南省) 공현(鞏縣)을 본거지로 하는 소호족(小豪族) 출신. 중국 최고의 시인이라는 뜻에서 시성(詩聖), 이백(李白)과 아울러 일컬을 때는 이두(李杜), 당나라 말기의 두목(杜牧)에 견줄 때는 노두(老杜)ㆍ대두(大杜)라 불린다. 먼 조상에 진()나라 초기의 위인 두예(杜預)가 있고 당()의 초기 시인 두심언(杜審言)은 조부이다.

 

두보(杜保)

후한(後漢) 때 사람으로 자는 계량(季良)인데, 자로(子路)써 행세(行世)하였다. 그는 특히 의협심이 강하기로 유명하였다. 후한서(後漢書)卷二十四\

 

두보배두견(杜甫拜杜鵑)

() 나라의 두보(杜甫), 금수들조차도 촉제(蜀帝)의 혼()이 화하여 된 새인 두견새에 대해서는 존경을 표하는데 사람으로서 천자를 존경하지 않으니 새만도 못하다는 내용으로 두견행(杜鵑行)을 지어서 세상의 인심이 나쁨을 한탄하였다.

 

두사(蠹死)

포박자(抱朴子)뽕나무가 잘리워지면 나무굼벵이가 죽는다[桑木見斷而蠹殄].”하였다.

 

두사훈(杜司勳)

당 나라 시인 두목(杜牧)을 가리킨다. 두목이 일찍이 사훈원외랑(司勳員外郞)을 지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두상옹초선(頭上擁貂蟬)

초선(貂蟬)은 담비 꼬리로, 높은 고관이 되었다는 뜻이다. 옛날에 고관들의 관에는 담비 꼬리로 장식하였다.

 

두소(斗筲)

()는 열 되, ()는 대그릇 두 되들이. 모두 작은 그릇인데, 짧은 재주와 얕은 도량(度量)을 지닌 소인을 두초의 사람이라 한다. 논어(論語)』 「자로(子路)/ 유의어: 두소지인(斗筲之人) / 인용: 大賈(이조원)

 

두소릉(杜少陵)

소릉은 두보(杜甫)의 호이다.

 

두솔궁(兜率宮)

수미산(須彌山) 꼭대기에 있는 칠보(七寶)로 된 궁전. 석가여래가 전생에 도솔궁에서 머물렀는데, 중생 제도의 인연을 품부받고 이 세계에 내려왔다 한다.

 

두수삼년적(杜叟三年笛)

두보(杜甫)의 청적(聽笛) 시에, “3년 피리 속에 관산의 달이요, 만국 병장기 앞에 초목 바람[三年留裏關山月 萬國兵前章木風].”라고 하였다.

 

두수여점부(斗水如霑鮒)

미천하고 곤궁한 사람을 구원해 주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장자(莊子)』 「외물(外物)()가 어제 오는데 도중에서 누가 부르는 자가 있기에 뒤를 돌아보니, 수레바퀴 자국의 괸 물속에 붕어가 있었다. ……그 붕어가 말하기를 나는 동해(東海)의 파신(波臣)인데, 당신이 두승(斗升)의 물로써 나를 좀 살려주지 않겠느냐?[, 東海之波臣也. 君豈有斗升之水而]’ 했다.” 하였다.

 

두순압(杜荀鴨)

당나라 두순압(杜荀鴨)은 시인(詩人) 두순학(杜荀鶴)을 사모하여 순압(荀鴨)이라고 이름을 고쳤다.

 

두시정오(杜詩正誤)

채흥종(蔡興宗)이 두시정오(杜詩正誤)를 지었는데 주자(朱子)가 칭찬했다.

 

두심언(杜審言)

()의 문인. 두보(杜甫)의 종조부(從祖父).

 

두십이(杜十姨)

양용수(楊用修)가 말하기를 항주(杭州)에 두습유(杜拾遺)의 묘()가 있는데 촌학구가 두십이(杜十姨)라 쓰고 드디어 여상(女像)으로 만들어 유령(劉伶)과 짝을 지었다.” 하였다.

 

두압(杜鴨)

당나라 두순압(杜荀鴨)은 시인(詩人) 두순학(杜荀鶴)을 사모하여 순압(荀鴨)이라고 이름을 고쳤다.

 

두약(杜若)

향초(香草)의 이름이다. 초사(楚辭)』 「구가(九歌)상군(湘君)저 방주(芳洲)에서 두약을 캐노라.” 하였다.

 

두약주(杜若洲)

두약은 향초(香草)인데 물가에 나며, 잎은 능하(菱荷)와 같고 줄기 끝에 꽃이 핀다. 초사(楚辭)구가상군(九歌湘君), “방주에서 두약을 뜯는도다[採芳洲兮杜若].”하였다.

 

두양(竇梁)

동한(東漢) 때의 권신(權臣)인 두헌(竇憲)과 양기(梁冀)를 가리킨다.

 

두어오(蠹魚惡)

비파기(琵琶記) 효부제진(孝婦題眞)향초 잎 향기 진동하자 책 벌레 모두 달아나네[芸葉分香走魚蠹].”라는 시구가 있다.

 

두엄(竇儼)

()의 어양(漁陽) 사람. 재주가 높고 글을 잘했으며 박학다식하여 당시의 사사(祀事)ㆍ악장(樂章)ㆍ종묘(宗廟)ㆍ시호(諡號)등 제도에 관하여도 많은 것을 찬정(撰定)하여 주위로부터 해박하다는 찬사를 받았다. 송사(宋史)卷二百六十三

 

두여방(杜與房)

당 태종(唐太宗)을 도와 정관(貞觀)의 치적을 구현하는 데 결정적 공헌을 한 두여회(杜如晦)와 방현령(房玄齡). 방모두단(房謀杜斷)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태종조의 쌍벽이었음. 당서(唐書)卷九十六

 

두예(杜預)

()나라 경조(京兆) 두릉(杜陵) 사람으로 자는 원개(元凱)이다. 하남 윤(河南尹)과 탁지상서(度支尙書)를 지내다가 도독형주제군사(都督荊州諸軍事)와 진남대장군(鎭南大將軍)이 되어 수리사업(水利事業)을 추진, 1만여 두락의 논을 옥토로 만들었고 태강(太康) 원년(元年)에는 군사를 거느리고 오()나라를 쳐서 멸망시킨 전략가인데, 유가의 경전에도 조예가 깊어 춘추좌씨전집해(春秋左氏傳集解)를 저술하였다. 진서(晉書)卷三十四 두예열전(杜預列傳)

 

두예(杜預)

()나라 초엽의 명장정치가학자. 자는 원개(元凱). 진나라의 초대 황제인 무제(武帝) 때 대장군(大將軍)이 되어 오()를 정벌하고 삼국 시대에 종지부를 찍는 무공을 세움. 춘추(春秋), 고문상서(古文尙書)에 통달한 학자로도 유명한다. 저서로는 좌전집해(左專集解), 춘추석례(春秋釋例)등이 있다.

 

두예침비(杜預沈碑)

() 나라 때 오() 지역을 평정하는 큰 공을 세운 두예(杜預)는 평소에 후세에 이름 남기기를 좋아하였다. 이에 일찍이 높은 언덕이 골짜기가 되고 깊은 골짜기가 구릉으로 된다.” 하면서, 자신의 공을 새긴 비석 두 개를 만들어 하나는 만산(萬山)의 아래에 묻고, 하나는 현산(峴山)의 위에 세워놓았다. 진서(晉書)34 두예열전(杜預列傳)/ ()나라 두예(杜預)가 형주(荊州)를 지키는 대장으로 있으면서, 부하들과 함께 현산(峴山)에 올라가 탄식하기를, “이 산은 항상 있건마는 이 산에 놀던 사람은 천추 뒤에 누가 알겠는가.” 하고, 비석(碑石) 돌을 만들어 자기의 사적을 새겨서, 하나는 산 위에 세워 두고, 하나는 후일에 산천이 변하여 산이 못이 되고, 못이 육지가 될 때를 예상하여 연못 속에 던져두었다.

 

두오랑(杜五郞)

두오랑은 송() 나라 때의 은사로서 이름을 알 수 없어 당시에 두오랑으로 일컬어졌고, 초막집에 살면서 30년 동안이나 문 밖을 나가지 않았으며, 고을 사람들에게 택일(擇日)이나 해 주고 의약(醫藥)을 팔아서 생활을 근근히 영위하였다 한다. 송사(宋史)卷四百五十八

 

두우(杜佑)

당 헌종(唐憲宗) 때 사람. 그는 유질(劉秩)이 만든 정전(政典)에다 신례(新禮)를 더 첨가, 통전(通典)2백 편을 엮었음.

 

두우(斗牛)

두성(斗星)ㆍ우성(牛星). ()ㆍ월() 지방의 분야(分野)에 해당한다. 유신(庾信)애강남부(哀江南賦)상수ㆍ한수에서 길이 나누어지니 두성ㆍ우성을 바라본다[路已分於湘漢 星猶望於斗牛].” 하였다.

 

두우륙(杜郵戮)

충신이 죄 없이 죽음을 당하다란 뜻의 고사성어다. / 유사어: 두우지륙(杜郵之戮)

 

두우정기(斗牛精氣)

옛날 용천(龍泉)과 태아(太阿)의 명검이 땅속에 묻혀서 하늘의 두우(斗牛) 사이에 자기(紫氣)를 발산하였다는 고사가 전한다. 진서(晉書)36 장화전(張華傳)

 

두우혼(杜宇魂)

두우의 넋이란 뜻으로, 옛날 촉제(蜀帝) 두우(杜宇)가 타향에 나갔다가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고 죽어 그의 넋이 새로 화했다고 하는데, 이 새가 피를 토하며 비통하게 울어대므로 이 새를 촉제의 이름을 따서 두우(杜宇; 두견새)라고 했다 한다.

 

 

 

두운(杜韻)

두보(杜甫)가 지은 시의 운()을 그대로 쓴 것이다.

 

두원(頭黿)

() 나라 때 화성(畫聖)으로까지 일컬어졌던 오도자(吳道子)는 특히 공자(孔子)의 초상(肖像)을 비롯해서 불화(佛畫)들을 많이 그렸는데, 소식(蘇軾)이 오도자의 불화를 예찬한 시에 오랑캐 임금 귀신 우두머리 천명 만명이 서로 밀치고 다퉈 들어와 머리가 자라 같구나[蠻君鬼伯千萬萬 相排競進頭如黿]” 한 데서 온 말이다. 소동파집(蘇東坡集)卷四

 

두원(杜園)

두보(杜甫)의 동산.

 

두위랑(杜韋娘)

() 나라 기생.

 

두율천궁(兜率天宮)

욕계(欲界) 육천(六天)의 넷째이며 욕계의 정토(淨土)에 있는 천궁으로 지상에서 32만 유순(由旬)의 거리에 있다. 미륵보살(彌勒菩薩)이 이곳에 살면서 석가의 교화를 받지 못한 중생을 위하여 설법한다고 한다.

 

두융(竇融)

B.C. 16~62, 후한(後漢) 초기의 무장(武將)으로 자()가 주공(周公)이며 평릉(平陵) 사람이다. 집안 대대로 하서(河西) 지방에서 벼슬하였는데, 왕망(王莽) 때에 하서(河西)를 점거하고 오군대장군(五郡大將軍)이라고 칭하면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였다.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가 천수(天水)를 점거하고 있던 외효(隗囂)와 익주(益州)를 차지하고 있던 공손술(公孫述)과 대치하고 있었는데, 두융(竇融)이 하서(河西)를 가지고 광무제(光武帝)에게 귀순함으로써 결정적으로 세력의 균형이 깨져 광무제(光武帝)가 천하를 통일할 수 있었다. 두융(竇融)은 이에 양주목(涼州牧)에 제수되었으며 계속하여 광무제(光武帝)의 돈독한 신임을 받아 후한(後漢)의 명문(名門)이 되어, 후손들이 여러 명 열후(列侯)에 봉해졌다. / 인용: 表忠觀碑(소식)

 

두인(豆人)

그림 속의 콩알 만한 사람이란 뜻으로, 멀리서 바라보는 사람의 형상을 일컫는 말이다.

 

두인(斗印)

무장(武將)의 관인(官印)이다.

 

두입(斗入)

북두성 모양으로 휘어져 들어간 것을 말한다.

 

두자미(杜紫薇)

당 나라 시인 두목지(杜牧之)인데, 이 시의 첫 귀가 두자미의 시이다.

 

두자미(杜子美)

중국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의 자, 호는 소릉(少陵).

 

두자진회야(杜子秦淮夜)

두목(杜牧)야박진회(夜泊秦淮)시에, “연기는 찬물에 자욱, 달은 모래에 휘영청. 밤에 진회에 대니 술집이 바로 옆에 있네[煙寒實水月籠沙 夜泊秦淮近酒家].”라는 구절이 있다.

 

두장(斗帳)

작은 휘장. ()을 덮을 정도로 작다 하여 이렇게 말한다.

 

두전표(斗轉杓)

해와 달이 바뀜을 말한다. 두표는 북두성(北斗星)의 꼬리 부분인 자루 모양으로 된 별을 말하는데, 이 별이 일년(一年) 십이개월(十二個月)에 걸쳐 십이진(十二辰)을 가리킨다. 예를 들면, 정월에는 인()을 가리키고, 2월에는 묘()를 가리키고, 3월에는 진()을 가리키는 등이다.

 

두점방맹(杜漸防萌)

애시당초 싹이 나오지 못하도록 막는다. ()은 사물의 처음. ()은 싹. 곧 좋지 못한 일의 조짐이 보였을 때 즉시 그 해로운 것을 제거해야 더 큰 해()가 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두정(餖飣)

두정(飣餖)이라고도 한다. 옥매(玉梅)() 소부감(少府監)에서 어찬(御饌)에는 구반장루(九盤裝纍)를 쓰는데 이름을 구정식(九飣食)이라 하였다. 그래서 지금 시속의 연회에는 점과(黏果)를 자리에 진열해놓고 이를 간석정좌(看席飣坐)라 한다. 옛날에는 정좌(飣坐)라는 칭호가 있는데 앉아서 보기만 하고 먹지는 않음을 이름이다.” 하였다. 한유(韓愈)의 남산시(南山詩)或如臨食案 看核紛飣餖라 하였으므로 세상에서는 문사(文詞)의 퇴체(堆砌)를 일러 정두라 한다. / 인용: 竹塢記(박지원)

 

두종(杜悰)

()의 두종(杜悰)은 문음(門蔭)으로 부마도위(駙馬都尉)가 되고 뒤에 장상(將相)을 역임했으나 자신의 자봉(自奉)에만 힘쓰고 인재를 천거 기용한 일이 없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를 일러 독각서(禿角犀)라고 하였다. 당서(唐書)卷一百六十六

 

두주(杜酒)

집에서 빚은 박주(薄酒)’를 말한다.

 

두주(頭籌)

제일 첫머리의 산가지란 말로, ‘어떤 기예(技藝)를 겨루어서 먼저 승리를 거둔 것을 말한다.

 

두주백편(斗酒百篇)

이태백(李太白)처럼 한자리에서 술 한 말을 해치우고 백 편의 시를 지을 만큼 문재(文才)가 뛰어나고 기개가 호방한 것을 말한다. 두보(杜甫)음중팔선가(飮中八仙歌)한 말 술에 시 백 편 짓는 우리 이태백, 장안 저자 주막에서 잠을 자누나[李白一斗詩百篇 長安市上酒家眠].”라는 구절이 있다.

 

두주불사(斗酒不辭)

한 말 술도 사양하지 않는다는 말로, ‘주량(酒量)이 세다는 뜻이다.

 

두주쌍감(斗酒雙柑)

남조 송(南朝宋) 때 대옹(戴顒)이 봄날에 술 한 말과 밀감 두 개를 가지고 나가므로, 누가 어디를 가느냐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꾀꼬리 소리를 들으러 간다.”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두준(杜濬)

명말(明末)의 학자로서 명이 망하자 금릉산(金陵山)에 은거하였다. 시문(詩文)에 능하였고 저서로는 변아당집(變雅堂集)이 있다.

 

두찬(杜撰)

근거 없이 저술하는 일. 두찬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그 하나를 들면, 야객총담(野客叢談), “두묵(杜黙)이 시()를 짓되 율()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 많았다. 그러므로 일이 격에 맞지 않은 것을 들어 두찬이라 한다.” 하였다.

 

두천(斗千)

두십천(斗十千)의 준말인데, 십 천은 곧 일만 전(一萬錢)으로, 미주(美酒) 일두(一斗)에 돈이 일만 전이나 됨을 이른 말이다.

 

두초(斗筲)

()는 열 되, ()는 대그릇 두 되들이. 모두 작은 그릇인데, 짧은 재주와 얕은 도량(度量)을 지닌 소인을 두초의 사람이라 한다. 논어(論語)자로(子路)

 

두타(頭陀)

불가(佛家)의 말로 고행(苦行)을 하여 온갖 번뇌(煩惱)를 제거하는 것을 말한다.

 

두탕호청사(杜蕩護淸司)

연산군 때에 늙은 흥청(興淸)들이 말썽을 일으킬까봐 집을 마련하여 살게 하고 관리하던 곳.

 

두통첩(肚痛帖)

장욱의 초서 서간(書簡)으로 두통첩이 있다.

 

두평(斗萍)

크기가 말만한 평실(萍實), 큰 공훈이나 맛있는 음식을 말한다. () 나라 소왕(昭王)이 강을 건널 적에 크기가 말만한 어떤 물체가 배에 다가오자, 소공이 괴이하게 여겨 건져 올리게 한 다음 사람들에게 물어보았으나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이에 공자(孔子)에게 사신을 보내어 물어보니, 공자가 이것의 이름은 평실(萍實)이라고 하는데, 쪼개면 먹을 수가 있다. 다만 패왕(霸王)이 될 만한 사람이라야만 그것을 얻을 수 있는바, 상서로운 징조이다[此所謂萍實者也, 萍水草也可剖而食也, 吉祥也, 唯霸者爲能獲焉].” 하였다. 공자가어(孔子家語)』 「치사(致思)

 

두풍(頭風)

병명(病名). 머리가 항상 아프거나, 또는 계속하여 부스럼이 나는 병.

 

두풍유(頭風愈)

시문이 뛰어남을 이른 말이다. 삼국 시대에 원소(袁紹)가 진림(陳琳)을 시켜 조조(曹操)를 성토하는 격문(檄文)을 초하게 하여 조조에게 보냈더니, 조조는 때마침 두풍(頭風)을 앓고 있다가 그 격문을 보고는 모골이 송연하여 부지중에 두풍이 나았다 한다.

 

두함(頭銜)

관리(官史)의 위계(位階)를 적은 관함(官銜)을 이른다.

 

두헌(竇憲)

동한(東漢) 때의 권신(權臣). 두헌은 화제(和帝) 때 황제가 어린 틈을 타 두 태후(竇太后)의 오빠로서 권력을 차지하여 마음껏 권력을 부리다가 화제가 장성한 뒤에 자살을 명 받고 자살하였다. 후한서(後漢書)23 두융열전(竇融列傳)竇憲

 

두후침비(杜侯沉碑)

두후는 두예(杜預)를 가리킨다. 진서(晋書)』 「두예열전(杜預列傳)두예는 후세에 이름 남기기를 좋아하여 자기의 훈적(勳績)을 기록한 비석 두 개를 만들어, 하나는 만산(萬山) 아래 있는 못에다 잠겨 놓고 하나는 현산(峴山) 위에 세워 놓고는 후세에 골짜기가 언덕이 되고 언덕이 골짜기가 되지 않을 줄 어찌 알겠는가.’ 했다.” 하였다.

 

두흑(頭黑)

머리가 아직 검은 젊은 시절.

 

두힐(肹肹)

전라도 나주목(羅州牧) 회진폐현(會津廢縣)의 백제(百濟) 시대 이른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인용

목차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어휘놀이터 > 어휘사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휘사전 - 93. 득  (0) 2020.04.17
어휘사전 - 92. 둔  (0) 2020.04.17
어휘사전 - 90. 동  (0) 2020.04.17
어휘사전 - 89. 돌  (0) 2020.04.17
어휘사전 - 88. 돈  (0) 2020.04.17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