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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한시미학산책 - 26. 한시의 용사 본문

책/한시(漢詩)

한시미학산책 - 26. 한시의 용사

건방진방랑자 2021. 12. 8. 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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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한시의 용사(用事)

 

 

1. 이곤의 부벽루시와 용사

 

 

한시의 표현 방식 가운데 용사법(用事法)이 있다. 여기서는 이에 대해 살펴 표현방식의 한 양상을 검토하기로 한다. 한시에서 운자를 사용하여 여러 시인이 반복적으로 시를 짓다 보면 나중에는 표현 방식이 유형화 되게 마련이었다. 한시에서 앞선 시인이 사용한 것과 비슷한 표현이 유난히 많이 눈에 띄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래서 현재적 관점에서 보면 명백한 표절인 표현이 한시에 있어서는 별 문제되지 않고, 오히려 옛 사람의 표현을 얼마나 적절하게 자기화 하느냐에 시의 성패가 달려 있다고까지 생각되었다.

 

다음은 동인시화(東人詩話)에 실려 있는 이혼(李混)부벽루(浮碧樓)란 작품이다.

 

永明寺中僧不見 영명사 가운데 스님은 뵈지 않고
永明寺前江自流 영명사 앞에는 강만 홀로 흐르네.
山空孤塔立庭際 산은 비고 외론 탑만 뜨락 가에 서있는데
人斷小舟橫渡頭 인적 끊겨 작은 배는 나루가에 걸려 있네.
長天去鳥欲何向 저 하늘가는 새는 어디메로 가는 걸까
大野東風吹不休 넓은 들엔 봄바람만 쉴 새 없이 불어오네.
往事微茫問無處 지난 일들 아득해라 물을 곳 바이 없고
淡烟斜日使人愁 저물녘 엷은 안개만 사람 근심 자아낸다.

 

영명사는 대동강 모란봉 기슭에 자리 잡은 절이다. 한 때 번화했던 절엔 스님네의 자취도 끊어지고, 무심한 강물만 그 앞을 예전처럼 흘러가고 있다. 산이 비었다 했으니 아직 헐벗은 겨울산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겠고, 뜰 모퉁이의 쓸쓸한 탑의 모습은 시인의 외로움을 부추겼다. 대동강을 바라보아도 사람의 자취는 찾을 길 없고, 나룻배도 쓸모없어 휑하니 가로 걸려 있다. 고개를 돌려 하늘을 보면 봄을 맞아 다시 북으로 날아가는 철새들이 눈에 보이고, 바람은 자옥한 먼지를 일으키며 시야를 흐린다. 저물녘 부벽루에 올라 그 광경을 지켜보던 시인은 무상하고 덧없는 인간사가 하릴없어 강 위 안개처럼 자옥히 솟아오르는 근심을 누를 길이 없었다.

 

이 시의 용사처를 일일이 꼽아보면 12구는 이백(李白)봉황대(鳳凰臺)시 가운데에서 따왔다.

 

鳳凰臺上鳳凰遊 봉황대 위에 봉황이 노닐더니,
鳳去臺空江自流 봉황은 가고 대만 남아 강만 홀로 흐르네.

 

4구는 위응물(韋應物)의 시에서 가져왔다.

 

野頭無人舟自橫 들머리엔 사람 없고 배만 가로 걸렸네.

 

56구는 진사도(陳師道) 등쾌재정(登快哉亭)날아가는 새는 어드메로 가는게오. 달려가는 구름 또한 홀로 한가롭도다[度鳥欲何向 奔雲亦自閑].”을 부연하였다.

 

度鳥浴何向 奔雲亦自閑 건너던 새는 씻으러 어디로 향하지만 달리던 구름은 또한 절로 한가로워

 

78구는 최호(崔灝)황학루(黃鶴樓)시에서 따왔다.

 

日暮鄕關何處是 물 녘 고향땅은 그 어디메뇨,
烟波江上使人愁 저 강 위 내 낀 물결만 근심 자아내누나.

 

그러고 보면 이혼의 위 작품은 한 구절도 유래 없는 곳이 없다. 심하게 말하면 고금 명시의 좋은 구절들을 짜깁기하여 적절히 한 문맥 속에 재조립한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보았듯 시 자체만으로 보아서는 짜깁기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고, 그 자체가 완결된 하나의 새로운 시적 문맥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옛 사람이 흔히 말하는 환골탈태(換骨奪胎)점철성금(點鐵成金)이니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한시 표현 상 운용의 묘를 극대화시킴을 두고 이르는 말이다. 천의무봉(天衣無縫)이란 말이 있다. 선녀들의 옷에는 바느질한 자취가 없다고 했던가. 묘합무은(妙合無垠)이란 말이 있다. 서로 다른 것을 한 데 합쳤는데도 합쳐진 가장자리를 찾을 수가 없다. 이렇듯이 한편의 시는 절묘한 용사를 통해서 이룩되기도 한다. 이러한 용사는 학시(學詩) 과정에서의 수많은 시의 암송과 차운, 집구에 의한 습작 등의 과정에서 자연스레 체득된 것이다.

 

 

 

 

2. 용사(用事)의 미감

 

 

몇 글자만 바꿔 다른 미감을 만들다

 

보다 구체적으로 전인(前人)의 시구를 가지고 새로운 표현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살펴보기로 하자. 예를 들어 도연명의 시 중 사시(四時)라는 시가 있으니 다음과 같다.

 

春水滿四澤 夏雲多奇峰 봄물은 사방 못에 넘실거리고 여름 구름 기이한 봉우리 모양을 짓네.

 

이 가운데 실사(實辭)()’()’, ‘()’()’이고, 그 나머지 글자는 모두 허사(虛辭)이다. 만일 시인이 이 시구로 새로운 표현을 만들어내려 할 때, 허사를 그대로 두고 실사만을 바꾼다면 이런 시구를 만들어 낼 수 있다.

 

春陰滿四野 夏樹多奇花 봄 그늘 사방 들에 가득 차 있고 여름 나무엔 기이한 꽃 많이 피었네.

 

또 다음과 같이 실사는 그대로 두고 허사만을 바꿀 수도 있다.

 

流水歸成澤 晴雲逗作峰 흐르는 물 모여서 못을 이루고 개인 구름 머물며 봉우릴 짓네.

 

이렇게 보면 도연명의 시에서 새롭게 조합해 낸 두 시는 전혀 새로운 경계와 분위기를 가진 다른 작품이 된다. 이것은 분명히 표절과는 구분된다. 이익(李瀷)성호사설에서 말한 내용이다.

 

衆鳥高飛盡 孤雲獨去閑 뭇 새들 높이 날아 사라진 자리 외론 구름 호올로 한가로이 떠가네.

 

이백(李白)독좌경정산(獨坐敬亭山)1.2구이다. 이를 김부식(金富軾)은 그의 제송도감로사(題松都甘露寺)에서 다음과 같이 바꾸었다.

 

白鳥高飛盡 孤帆獨去輕 흰 새 높이 날아 사라져가고 외론 돛만 홀로 가벼히 떠나네.

 

첫 구가 허사(虛辭)만을 교체했다면, 둘째 구는 실사와 허사를 함께 바꿈으로써 분위기의 변화를 가져왔다. 대개 이러한 예는 이루 예거할 수 없을 만큼 많다.

 

 

 

원작의 분위기를 계승시키다

 

이색(李穡)부벽루(浮碧樓)시의 12구는 다음과 같다.

 

昨過永明寺 暫登浮碧樓 어제 영명사를 지나가다가, 잠시 부벽루에 올라 보았네.

 

시를 배운 사람은 이 구절을 읽는 즉시 이것이 두보(杜甫)등악양루(登岳陽樓)12구에서 가져온 것임을 금세 알아차릴 수 있다.

 

昔聞洞庭水 今登岳陽樓 예전부터 동정호의 물을 들어왔는데, 이제야 악양루에 올라 보았네.

 

이러한 인지는 한시의 독자에게는 친밀과 신뢰의 감정을 일으키는 동시에, 용사를 통해 원작의 분위기를 그대로 작품 속에 전이시키는 효과를 가져온다. 같은 시의 5린마거불반(麟馬去不返)’도 최호의 황학루(黃鶴樓)시의 3황학일거불부반(黃鶴一去不復返)’에서 허사(虛辭)()’()’를 뺌으로써 이루어졌다.

 

 

 

다른 표현 같은 분위기

 

그런가 하면 원작의 분위기를 살리면서 표현은 달리 하는 경우도 있다.

 

최유청(崔惟淸)잡흥(雜興)78구는 다음과 같다.

 

依檻欲歎息 靜然已忘機 난간에 기대어 탄식을 하려다가, 고요히 이미 기심을 잊었다오.

 

이는 도연명의 음주(飮酒)시 제 5수의 78구를 환골탈태한 것이다.

 

此中有眞意 欲辨已忘言 이 가운데 참된 뜻이 있어서, 분별을 하려하나 이미 말을 잊었네.

 

다음은 강희맹(姜希孟)임풍루(臨風樓)란 시의 일련이다.

 

紫燕交飛風拂柳 제비가 짝져 날아 버들가지 날리는데
靑蛙亂叫雨昏山 청개구리 개굴개굴 비 기운에 어둑한 산.

 

김유(金瑬)도중(客中)시에서 이를 변용시켜 다음의 일련을 얻었다.

 

遙山帶雨池蛙亂 먼 산 비 기운 띠자 연못 개구리 어지럽고
高柳含風海燕斜 버드나무 바람 머금어 제비는 비스듬 나네.

 

한시는 7언의 경우 넉 자 석 자, 5언의 경우 두 자 세 자로 끊어 읽는다. 또 각 구는 허사(虛辭)와 실사로 이루어진다. ‘자연(紫燕)’청와(靑蛙)’에서 ()’()’이 허사라면, ‘()’()’는 실사이다. ! 이제 두 구절을 비교해 보자. 앞 시의 실사는 (((((()’의 여섯 글자다. 이 여섯 글자를 표시해 두고, 뒤의 시에서 어떤 위치로 옮겨 가 있는지 살펴보자. 김류의 시는 강희맹의 시와 비교하여 볼 때 우선 아래 위가 바뀌었고, 앞뒤의 순서도 바뀌었으며, 다만 허사를 교체한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두 시의 의경을 비교해 보자. 둘 다 봄날 비 올 무렵의 경물을 묘사하고 있다. 강희맹의 시를 보면, 제비가 짝져 날아 그 활발한 날갯짓이 바람을 일으켜 버들가지를 하늘거리게 하고, 청개구리가 개굴개굴 울어대자 마치 응답이라도 하듯 먼 데 산이 빗기운에 어둑해지더라고 했다. 봄날의 약동하는 흥취가 제비의 경쾌한 날갯짓과 청개구리의 울음소리 속에 물씬하다. 뿐만 아니라 제비와 청개구리의 행동은 무정물인 버드나무 및 산과 상호 교감하고 있다. 그런데 김류의 시는 어떠한가. 그저 먼 산이 빗기운을 띠자 개구리도 그걸 보고 시끄럽게 울고, 버드나무 사이로 부는 세찬 바람에 제비의 날갯짓도 비스듬하다는 것이니, 단어와 단어 사이의 탄력은 없고 여운도 적다. 어음(語音) 면에서도 음악미가 부족하다. 강희맹이 봄날의 경치와 직접 마주하여 떠오른 흥취를 노래했다면, 김류의 시는 강희맹의 구절을 가공하여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것이다. 그래서 이미지의 사용이 거의 같음에도 불구하고 시의 격은 크게 달라지고 말았다. 말하자면 하나는 진짜고 하나는 가짜다. 그런데 그 차이는 종이 한 장 밖에는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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