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그때의 지금인 옛날, 통변론(通變論)
한시(漢詩) 전통의 미학의의
1. 지팡이 자국마다 고이는 봄비
자료를 찾으러 대학 도서관에 들렀다. 고서 영인본 서가를 둘러보는데 「송산하(頌山河)」란 시집이 한 권 꽂혀 있다. 옛 책 매듯 제본하였기에 잘못 고서로 분류한 것이다.
산기슭/ 물굽이/ 도는 나그네/ 지팡이/ 자국마다/ 고이는 봄비 (春 2)
소나무/ 가지 끝에/ 달랑/ 앉아/ 봄맞이 노래로/ 해 지는 멧새 (春 25)
갈매기/ 흰 나래/ 타는 저녁놀/ 기다림에/ 지쳐서/ 조는 나룻배 (夏 37)
청개구리/ 버들 타고/ 울면/ 파초 잎에/ 후두둑/ 소나기 (夏 64)
못 잊어/ 찾는 이 길/ 하도 덧없어/ 허랑해/ 잊잔 길이/ 이리 삼삼해 (秋 97)
긁어 모은/ 낙엽에/ 불을 붙이면/ 외줄기로/ 타오르는/ 하얀 가을 (冬 104)
예불(禮佛)/ 하다/ 잠든 동승(童僧)/ 불상(佛像)은/ 자비로운/ 웃음 (冬 118)
김일로(金一路), 본명 김종기(金鍾起)란 분의 시집이다. 82년 시집 발간 당시 73세로 적혀 있다. 손길 따라 몇 편 추려본 것이다. 각 편 끝에는 제목 대신 한시 한 구절씩을 적어 놓았다. 「춘(春) 2」에는 ‘망향여인봉춘우(望鄕旅人逢春雨)’를, 「춘(春) 25」에는 ‘행목낙화승계수(杏木落花乘溪水)’가 적혀 있다. 일본의 하이꾸를 연상시키는 정제되고 깔끔한 시상이다.
가끔 현대시를 읽다가 이렇듯 한시의 정서와 만날 때가 많다. 신석정의 “갓 핀/ 청매(靑梅)/ 성근 가지/ 일렁이는/ 향기에도/ 자칫/ 혈압(血壓)이/ 오른다.”(「호조일성(好鳥一聲)」 일절)는 얼마나 섬세한가. 서정주의 “섭섭하게, / 그러나/ 아조 섭섭치는 말고/ 좀 섭섭한 듯만 하게,// 연(蓮)꽃/ 만나러 가는/ 바람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 같이...”(「연(蓮)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부분)는 이다지도 은근한가. 박목월의 “모란꽃 이우는 하얀 해으름/ 강을 건너는 청모시 옷고름.”(「모란 여정(餘情)」 일절)이거나, “오리목/ 속잎 피는 열두 구비를// 청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청노루」 부분)에는 그이의 그 어진 눈빛이 어려 있는 것만 같다. 이럴 때 필자는 한시와 현대시가 무던히도 잘 닮았다는 생각을 한다. 별개의 미학으로 대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지금과 옛날의 사이에는 무엇이 있는가? 시간의 강물도 여기서는 의미가 없다. 깊은 밤 연구실에 앉아 백광훈(白光勳)의 시를 번역하다가, 권필(權韠)의 시를 소리 내어 읽다가 몇 백 년 전 그들과 어제처럼 앉아서 얘기를 나눈다. 그가 울면 나도 울고, 그가 웃으니 나도 좋다. 회심(會心)의 글귀와 쾌재(快哉)의 문장을 만나면 공연히 설레어 두근거린다. 옛 것이 어째서 오늘에도 감동을 주는가? 그들은 내가 아닌데 왜 나와 같을까? 그와 나를, 그들과 미당을, 그들과 목월을 연결 지어주는 원형질은 무엇일까? 저 20년대의 시조부흥 운동도 좋고, 이즈음의 생활시조 운동도 소중하지만, 형식의 복고에 앞서 이 원형질을 찾아 나서는 일이 우선해야 할 것 같다. 형식은 변한다. 생각도 변한다. 그러나 변치 않는 것이 있다. 이 강산, 이 흙 밟고 살아온 사람들의 가슴 속에 스민 정서는 세월로도 씻을 수 없는 원형질로 남는다.
인용
2. 거미가 줄을 치듯
3. 그때의 지금인 옛날
4. 사기의 불사기사
5. 도로 눈을 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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