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한시의 용사(用事)
1. 이곤의 부벽루시와 용사
한시의 표현 방식 가운데 용사법(用事法)이 있다. 여기서는 이에 대해 살펴 표현방식의 한 양상을 검토하기로 한다. 한시에서 운자를 사용하여 여러 시인이 반복적으로 시를 짓다 보면 나중에는 표현 방식이 유형화 되게 마련이었다. 한시에서 앞선 시인이 사용한 것과 비슷한 표현이 유난히 많이 눈에 띄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래서 현재적 관점에서 보면 명백한 표절인 표현이 한시에 있어서는 별 문제되지 않고, 오히려 옛 사람의 표현을 얼마나 적절하게 자기화 하느냐에 시의 성패가 달려 있다고까지 생각되었다.
다음은 『동인시화(東人詩話)』에 실려 있는 이혼(李混)의 「부벽루(浮碧樓)」란 작품이다.
永明寺中僧不見 | 영명사 가운데 스님은 뵈지 않고 |
永明寺前江自流 | 영명사 앞에는 강만 홀로 흐르네. |
山空孤塔立庭際 | 산은 비고 외론 탑만 뜨락 가에 서있는데 |
人斷小舟橫渡頭 | 인적 끊겨 작은 배는 나루가에 걸려 있네. |
長天去鳥欲何向 | 저 하늘가는 새는 어디메로 가는 걸까 |
大野東風吹不休 | 넓은 들엔 봄바람만 쉴 새 없이 불어오네. |
往事微茫問無處 | 지난 일들 아득해라 물을 곳 바이 없고 |
淡烟斜日使人愁 | 저물녘 엷은 안개만 사람 근심 자아낸다. |
영명사는 대동강 모란봉 기슭에 자리 잡은 절이다. 한 때 번화했던 절엔 스님네의 자취도 끊어지고, 무심한 강물만 그 앞을 예전처럼 흘러가고 있다. 산이 비었다 했으니 아직 헐벗은 겨울산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겠고, 뜰 모퉁이의 쓸쓸한 탑의 모습은 시인의 외로움을 부추겼다. 대동강을 바라보아도 사람의 자취는 찾을 길 없고, 나룻배도 쓸모없어 휑하니 가로 걸려 있다. 고개를 돌려 하늘을 보면 봄을 맞아 다시 북으로 날아가는 철새들이 눈에 보이고, 바람은 자옥한 먼지를 일으키며 시야를 흐린다. 저물녘 부벽루에 올라 그 광경을 지켜보던 시인은 무상하고 덧없는 인간사가 하릴없어 강 위 안개처럼 자옥히 솟아오르는 근심을 누를 길이 없었다.
이 시의 용사처를 일일이 꼽아보면 1ㆍ2구는 이백(李白)의 「봉황대(鳳凰臺)」 시 가운데에서 따왔다.
鳳凰臺上鳳凰遊 | 봉황대 위에 봉황이 노닐더니, |
鳳去臺空江自流 | 봉황은 가고 대만 남아 강만 홀로 흐르네. |
4구는 위응물(韋應物)의 시에서 가져왔다.
野頭無人舟自橫 | 들머리엔 사람 없고 배만 가로 걸렸네. |
5ㆍ6구는 진사도(陳師道) 「등쾌재정(登快哉亭)」의 “날아가는 새는 어드메로 가는게오. 달려가는 구름 또한 홀로 한가롭도다[度鳥欲何向 奔雲亦自閑].”을 부연하였다.
度鳥浴何向 奔雲亦自閑 | 건너던 새는 씻으러 어디로 향하지만 달리던 구름은 또한 절로 한가로워 |
또 7ㆍ8구는 최호(崔灝)의 「황학루(黃鶴樓)」 시에서 따왔다.
日暮鄕關何處是 | 물 녘 고향땅은 그 어디메뇨, |
烟波江上使人愁 | 저 강 위 내 낀 물결만 근심 자아내누나. |
그러고 보면 이혼의 위 작품은 한 구절도 유래 없는 곳이 없다. 심하게 말하면 고금 명시의 좋은 구절들을 짜깁기하여 적절히 한 문맥 속에 재조립한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보았듯 시 자체만으로 보아서는 짜깁기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고, 그 자체가 완결된 하나의 새로운 시적 문맥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옛 사람이 흔히 말하는 환골탈태(換骨奪胎)니 점철성금(點鐵成金)이니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한시 표현 상 운용의 묘를 극대화시킴을 두고 이르는 말이다. 천의무봉(天衣無縫)이란 말이 있다. 선녀들의 옷에는 바느질한 자취가 없다고 했던가. 묘합무은(妙合無垠)이란 말이 있다. 서로 다른 것을 한 데 합쳤는데도 합쳐진 가장자리를 찾을 수가 없다. 이렇듯이 한편의 시는 절묘한 용사를 통해서 이룩되기도 한다. 이러한 용사는 학시(學詩) 과정에서의 수많은 시의 암송과 차운, 집구에 의한 습작 등의 과정에서 자연스레 체득된 것이다.
인용
1. 이곤의 부벽루시와 용사
2. 용사(用事)의 미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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