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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어휘사전 - 299. 채 본문

어휘놀이터/어휘사전

어휘사전 - 299. 채

건방진방랑자 2020. 6. 3.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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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9.

 

 

채각관(豸角冠)

해채(獬豸)라는 동물이 부정(不正)한 사람을 보면 뿔로 떠받는다고 하므로 어사(御史)가 채각관(豸角冠)을 쓴다.

 

채갈(采葛)

시경(詩經)왕풍(王風 채갈(采葛), “칡을 캐노라, 하룻동안 보지 못하니 몇 달이나 된 것 같도다[彼采葛兮. 一日不見, 如三月兮].” 하였다.

 

채공화(蔡公禾)

() 나라 채무(蔡茂)가 꿈에 태극전(太極殿) 위에 세 이삭의 벼가 나 있는 것을 보고 뛰어 올라 벼를 잡았다. 그리고서 주부(主簿) 곽하(郭賀)에게 그 꿈의 길흉을 물으니, 곽하가 자리에서 일어나 축하하면서 대궐 대들보에 벼가 있는 것은 신하로서 상록(上祿)을 받을 징조입니다[極而有禾 人臣之上祿也]”하더니, 그 후 과연 순월(旬月) 만에 사도(司徒)가 되었다. 후한서(後漢書)』 「채무전(蔡茂傳)

 

채국음(採菊吟)

도연명(陶淵明)의 잡시(雜詩) 음주(飮酒), “동쪽 울타리 아래서 국화를 따다가 유연히 남산을 바라 본다.[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하였다.

 

채군모(蔡君謨)

() 나라 때의 문인으로 자가 군모인 채양(蔡襄)을 이르는데, 그는 특히 글씨에 뛰어나서 송대(宋代) 제일(第一)로 평가되었고, 시문에도 뛰어났다. 송사(宋史)卷三百二十

 

채궐(採蕨)

시경(詩經)주아(周雅) 채미(採薇)편은 미적(薇狄)을 정벌하는데 군사를 보내는 시()이다. 여기서는 음운(音韻) 때문에 궐()을 미()와 통용하였다.

 

채근백사(菜根百事)

() 나라 때 왕혁(汪革)이 일찍이 말하기를, “사람이 항상 나물 뿌리를 먹고살면 온갖 일을 이룰 수 있다.” 하였는데 주자(朱子)가 이에 대하여 논하기를, “내가 보건대 지금 사람들은 나물 뿌리를 먹고사는 것을 견디지 못함으로 인하여 자기 본심(本心)을 위배하는 지경에 이른 자가 많으니, 경계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한 데서 온 말이다. 소학(小學)』 「선행(善行)

 

채남(采藍)

시경(詩經)소아(小雅) 채록(采綠)에 의하면, 행역(行役) 나간 남편을 그리워하여 부른 노래로 아침 내내 쪽풀을 캤지만, 행주치마도 다 안 차네. 닷새만 되면 온다더니, 엿새가 되어도 오지를 않네[終朝采藍 不盈一襜 五日爲期 六日不詹].” 한 데서 온 말이다.

 

채녀가(蔡女笳)

채녀(蔡女)는 후한(後漢) 채옹(蔡邕)의 딸인 채염(蔡琰)을 가리킨다. 흉노(匈奴)의 포로가 되어 호중(胡中)에서 12년 동안 살다가 조조(曹操)의 구원을 받고 중국에 돌아온 뒤 비분강개의 심정을 읊으며 호가십팔박(胡笳十八拍)을 지었다 한다. 악부시집(樂府詩集)』 「금곡가사(琴曲歌辭)호가십팔박(胡笳十八拍)

 

채단(彩團)

재인(才人)의 집단을 가리키는 말이다.

 

채도주(蔡道州)

() 나라 때 위학(僞學)으로 몰리어 도주에 유배된 채원정(蔡元定)을 이르는데, 그가 도주에 가서 편지를 보내 제자(諸子)들에게 훈계하기를 혼자 다닐 때는 그림자에게 부끄럽지 않아야 하고, 홀로 잠잘 적에는 이불에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 내가 죄를 얻었다 하여 사도(斯道)에 게을리하지 말라.”고 하였다. 송사(宋史)卷四百三十四

 

채두(釵頭)

비녀처럼 생긴 불똥지우개.

 

채란(采蘭)

() 나라 속석(束晰)보망시(補亡詩) 남해(南陔)’에 나오는 언채기란(言采其蘭)’에서 나온 말로, 보배로운 향초를 캐어 어버이에게 드린다는 뜻에서 어버이 봉양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채란시(採蘭詩)

부모를 효도로 봉양하는 일을 읊은 시이다. 속석(束晳)의 남해(南陔)시에, “저 남쪽 언덕에 올라 그 난초를 뜯네[循彼南陔 言采其蘭].”하였다.

 

채련(彩輦)

영여(靈輿)를 말한다.

 

채련(採蓮)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 것을 말한다. 생원과(生員科)ㆍ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한 사람의 이름을 적은 명부(名簿)를 연방(蓮榜)이라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채련곡(採蓮曲)

악부 가사명으로 내용은 대부분 남녀가 서로 그리워하는 태도를 기술하였다.

 

채련사(採蓮詞)

연밥을 따는 모습을 읊은 노래로, 악부(樂府)의 청상곡(淸商曲) 가운데 하나인 채련곡(採蓮曲)을 말한다. / 인용: 허난설헌, 홍만종, 이백, 성간

 

채륜(蔡倫)

후한(後漢) 화제(和帝) 때 처음으로 종이를 만들었다고 한다. 후한서(後漢書)108 전지보(箋紙譜)

 

채모팽기(蔡謨蟛蜞)

() 나라 때 채모가 방게를 보고 대단히 좋아하여 이를 삶아 먹고 나서는 속이 좋지 않아 다 토해 내고 힘이 쭉 빠지므로, 이것이 먹는 게가 아닌 줄을 알았었다는 데서 온 말이다. 진서(晉書)』 「채모전(蔡謨傳)

 

채묘등몽(菜苗登夢)

송 진종(宋眞宗)이 일찍이 난간에 나와서 선비를 선발했는데, 꿈에 전각 아래에 채소 한 포기가 매우 무성한 것을 보았다. 그런데 채제(蔡齊)가 일등으로 뽑혔다.

 

채무(彩舞)

채색옷을 입고 추는 춤. 곧 늙은 부모를 위로하는 일을 미화하여 이르는 말이다. 고대(古代)노래자(老萊子)라는 효자가 나이 70에 색동옷을 입고 어린애 모양으로 노친 앞에서 재롱을 부려, 노친으로 하여금 나이 든 것을 잊게 하였다 한다. 몽구(蒙求)노래반의(老萊斑衣)/ 유의어: 반의지희(斑衣之戲).

 

채묵(蔡墨)

()는 거북을 말한 것으로, 채묵은 바로 거북점을 칠 적에 거북껍데기에 먹으로 획을 그은 다음 이를 태워서 길흉(吉凶)을 점치는 것을 말한다.

 

채문도사(蔡門倒屣)

손님을 반갑게 영접하는 것을 말한다. 위지(魏志)」 「왕찬전(王粲傳)채옹(蔡邕)이 문 밖에 왕찬(王粲)이 와 있다는 말을 듣고는 신을 거꾸로 끌고 나가 영접하였다.”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채미(蠆尾)

행서(行書)에 벌의 꼬리처럼 날카로운 필법(筆法)을 말한다.

 

채미가(採薇歌)

금곡(琴曲)의 가사(歌詞) 이른다. 주 무왕(周武王)이 은 나라를 멸망시키자, 백이(伯夷), 숙제(叔齊)가 주 나라 곡식을 먹을 수 없다 하여 수양산(首陽山)에 들어가서 고사리를 캐 먹다가 죽음에 임박하여 노래를 지어 부르기를, “저 서산에 올라가서 고사리를 캐도다. 폭력으로 폭력과 바꾸면서 자기의 그릇됨을 모르도다. 신농과 우순과 하우가 이제는 없으니 나는 어디로 돌아갈거나[登彼西山兮 採其薇矣 以暴易暴兮 不知其非矣 神農虞夏忽焉沒兮 我安適歸矣].” 한 것을 말한다. 사기(史記)』 「백이열전(伯夷列傳)주 무왕(周武王)이 상() 나라를 칠 때, 백이와 숙제(叔齊)가 간하니 병사들이 죽이려 했으나, 무왕은 의인(義人)이라 하여 놓아주었다. 그 뒤 두 사람은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다 죽었는데 그들이 남긴 채미가가 전해진다.” 하였다.

 

채미시(採薇詩)

채미조(採薇操)라고도 하는데, 악부(樂府) 금곡가사(琴曲歌辭) 이른다. 무왕(武王)이 은()을 정벌하자 백이(伯夷)ㆍ숙제(叔齊)가 수양산(首陽山)에 숨어 고사리를 캐먹으면서 불렀다는 노래. 사기(史記)』 「백이열전(伯夷列傳)

 

채미인(採薇人)

무왕(武王)이 주()를 치자, 백이(伯夷)는 주() 나라의 불의(不義)한 곡식을 먹지 아니하겠다 하고, 수양산(首陽山)에 들어가서 고사리를 캐어 먹다가 굶어서 죽었다.

 

채백창(蔡伯昌)

백창(伯昌)은 채유후(蔡裕後)의 자이다.

 

채번(綵幡)

()ㆍ은()ㆍ나()ㆍ채() 등으로 만든 꾸미개이다. 옛날 입춘일(立春日)이면 백관(百官)에게 이것을 나누어주어서 이를 머리에 달고 입조(入朝)하여 하례를 하게 하였는데, 하례를 마치고 나면 이를 머리에 단 채로 각각 귀가(歸家)했다고 한다.

 

채번(綵幡)

음력 정월 7일에 일곱 가지 채소로 국을 끓여먹고, 오색 종이로 깃발ㆍ제비ㆍ나비ㆍ금전 등의 형상을 만들어 머리 위에 꽂는 것을 채번 혹은 채승(綵勝)이라고 한다. 태평어람(太平御覽)976

 

채번은(綵幡恩)

채색의 표기인데, 옛날에 신년 원단(元旦)이 되면 조정에서 오색(五色)의 표기를 베풀고 군신()들을 조회시켜 잔치를 베풀었다는 데서 온 말이다.

 

채복(綵服)

색동옷이라는 말로, 어버이에게 재롱을 떨어 기쁘게 해 드리는 효자를 표현한 말이다. 춘추시대(春秋時代) () 나라의 효자(孝子)노래자(老萊子)70세의 나이에 채색옷을 입고 어버이 앞에서 어린애의 장난을 하여 어버이를 기쁘게 했던 데서 온 말이다. 두보(杜甫)입주행(入奏行)繡衣春當霄漢立 綵服日向庭闈趨라는 구절이 있다.

 

채복승환원(綵服承歡願)

어버이를 곁에서 모시며 기쁘게 해 드리려는 소망을 말한다. 춘추시대(春秋時代) () 나라 노래자(老萊子)70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어버이를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하여 색동옷을 입고 재롱을 떨었던 채의오친(綵衣娛親)’의 고사가 있다. 예문유취(藝文類聚)20

 

채복인(彩服人)

효행(孝行)을 일컫는 말이다. 전국시대(戰國時代) () 나라 현인(賢人) 노래자(老萊子)가 나이 70에 어린애처럼 색동옷을 입고 어린애같이 장난을 하여 부모를 즐겁게 한 데서 온 말이다. 몽구(蒙求)노래반의(老萊斑衣)

 

채봉인(蔡封人)

정 장공(鄭莊公)의 경()으로 이름은 족()이며 자()는 중(). 장공을 위하여 등() 나라에 장가들게 하여 소공 홀(昭公忽)을 낳자, 그를 세우려 하였으나, 여공 돌(厲公突)을 세우려는 송() 나라의 압력에 굴복하여 마침내 여공을 세웠으며, 뒤에 다시 자기를 죽이려는 여공을 몰아내고 소공을 세웠으나 고거미(高渠彌)에게 시해되자, 소공의 아우 자의(子儀)를 세우는 등, 반복 무상하였다. 좌전(左傳)桓公 五年十一年十五年十八年

 

채부다탈락(菜部多脫落)

()의 장개빈(張介賓)이 쓴 경악전서(景岳全書)내에 본초편(本草篇)이 있는데, 거기에다 채소 종류를 다 수록하지 않고서 빠뜨린 것이 있다는 말이다.

 

채붕(彩棚)

공중에 가설하여 아래를 가리는 것을 이른다.

 

채상단(采桑壇)

몸소 양잠을 하는 후비의 근면한 덕을 보여 주기 위하여 쌓은 단으로, 선잠단(先蠶壇)의 서북쪽에 있었다 한다. 후한서(後漢書)』 「예의지(禮儀志)

 

채색(菜色)

굶주린 사람의 얼굴에 누르스름한 빛깔을 띤 것을 말한다.

 

채석(采石)

이태백(李太白)이 채석기(采石磯)에서 술에 취해 뱃놀이하다가 물에 비친 달을 건지려다 물에 빠져 죽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채석서생(采石書生)

남송(南宋) 연간에 문신(文臣) 우윤문(虞允文)이 일찍이 예부 낭관(禮部郎官) 등을 역임하고, ()나라에 사신을 다녀와서 무비(武備)의 확충을 건의한 바 있었는데, 뒤에 과연 금주(金主)가 대군(大軍)을 거느리고 쳐들어와서 채석산(采石山) 아래 진을 치고 있을 때, 우윤문이 소수의 패잔병(敗殘兵)을 수습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독전(督戰)을 강행하여 마침내 채석의 대첩(大捷)을 거두었던 데서 온 말이다. 그로부터 그는 20여 년 동안 출장입상(出將入相)하면서 벼슬이 참지정사(參知政事), 좌승상 겸 추밀사(左丞相兼樞密使)에 이르렀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송사(宋史)383 오윤문열전(虞允文列傳)/ 인용: 李忠武公龜船歌(황현)

 

채석이백명(采石李白名)

이태백(李太白)이 채석기(采石磯)에서 배를 타고 놀다가 물에 비친 달을 건지려고 취중에 물로 뛰어들었다가 익사했는데, 그 뒤에 고래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다.

 

채석적선(采石謫仙)

이적선(李謫仙) 이태백(李太白)을 말한다. 채석기(采石磯)에서 술에 취해 뱃놀이하다가 물에 비친 달을 건지려다 물에 빠져 죽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채석전광(采石顚狂)

이백(李白)이 채석강(采石江)에서 농월(弄月)한 고사를 말한다.

 

채석주중금(采石舟中錦)

의상만은 현실을 초월한 낭만이 있다는 뜻이다. 이백(李白)이 채석기(采石磯)에서 밤에 비단 장포(長袍)를 입고 낚싯배에 앉아 뱃놀이를 즐기다가 물에 빠졌다고 한다. 매요신(梅堯臣)의 시에, “채석강 달빛 아래 적선을 찾았더니, 비단 장포 밤에 입고 낚싯배에 앉아 있네[采石月下訪謫仙 夜披錦袍坐釣船].”하였다.

 

채수(債帥)

뇌물을 바치고 장수가 된 사람을 기롱하여 이르는 말이다.

뇌물을 받고 벼슬을 알선해 주는 권요자(權要者)를 가리키는 말이다.

 

채수(綵樹)

채화수(綵花樹)와 같은 말로, 즉 조화(造花)를 이르는데, 당 중종(唐中宗) 입춘일(立春日)이면 시신(侍臣)들에게 봄맞이를 하게 하고, 대궐에서 채화수를 내다가 한 사람에 한 가지씩 하사했다고 한다.

 

채숙(蔡叔)

주 무왕(周武王)의 아우. 희도(姬度).

 

채승(彩勝)

부인(婦人)의 머리에 장식하는 조화(造花)인데, 옛날에 주로 입춘일(立春日)이면 이것을 머리에 꽂았다.

 

채승(綵勝)

입춘일(立春日)에 오색 종이로 깃발, 금전(金錢), 나비 등 여러 가지 모양을 만들어 매어 다는 장식물이다.

정월 초에 머리에 꽂는 일종의 조화(造花)로서 화승(花勝)과 같은 뜻이다.

머리에 꽂는 조화(造花)인데, 옛날 입춘일(立春日)이면 임금이 삼성(三省)의 관원들에게 이 채승을 차등 있게 하사했다 한다.

 

채시(蔡蓍)

거북 점과 시초(蓍草) 점이라는 뜻으로, 귀신과 같은 묘산(妙算)의 소유자라는 말이다.

 

채시관(采詩官)

풍속과 정치를 살펴보기 위해 각 지방의 시가(詩歌)를 채집했던 주() 나라의 관원 이름이다. 예기(禮記)王制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

 

채신지우(采薪之憂)

자기 병을 겸손하게 일컫는 말이다. 아파서 나무를 할 수 없다는 뜻이다. 맹자(孟子)』 「공손추(公孫丑)/ 유의어: 부신지우(負薪之憂)

 

채씨롱(蔡氏弄)

오롱곡(五弄曲)은 다섯 가지의 금곡(琴曲)으로 유춘(遊春)ㆍ녹수(淥水)ㆍ유거(幽居)ㆍ좌수(坐愁)ㆍ추사(秋思)인데, 후한(後漢) 때 채옹(蔡邕)이 지었다.

 

채약동남(採藥童男)

진시황(秦始皇)이 서복(徐福)을 시켜 동남동녀(童男童女) 수천 명을 배에 싣고 바다로 들어가서 삼신산(三神山)의 불사약(不死藥)을 캐 오게 하였는데, 불사약은 캐 오지 않고 일본으로 도망가서 살았다고 한다. 사기(史記)』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

 

채영(彩楹)

단정한 기둥

 

채옹(蔡邕)

후한(後漢) 때 사람. 자는 백개(伯喈). 시부(詩賦)를 잘하였으며, 저서에는 채중랑전집(蔡仲郞全集)이 있다. 채옹이 당시 좌중랑장(左中郞將)으로서 재주와 학식이 대단하여 조정의 귀중한 존재가 되고 있었으므로 그의 대문 앞에는 항상 수레와 말이 그득했었는데, 나이 어린 왕찬(王粲)을 한 번 보고서는, 자기는 따라갈 수 없는 재주라고 하면서 언제나 그만 찾아오면 미처 신발도 챙겨신지 못하고 뛰어나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채옹초미금(蔡邕焦尾琴)

채옹(蔡邕)이 일찍이 이웃 집에서 밥을 짓느라고 때는 오동나무가 타는 소리를 듣고는, 그 나무가 좋은 나무인 줄을 알고 그 타다 남은 오동나무를 얻어 거문고를 만들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채운저처권상렴(彩雲低處捲緗簾)

대궐에서도 이제 하루의 일과가 시작되리라는 말이다. 대궐 위에는 보통 상서로운 채색 구름이 감도는 것으로 묘사가 된다.

 

채원정(蔡元定)

채도주(蔡道州). () 나라 때 위학(僞學)으로 몰리어 도주에 유배되었다. 그가 도주에 가서 편지를 보내 제자(諸子)들에게 훈계하기를 혼자 다닐 때는 그림자에게 부끄럽지 않아야 하고, 홀로 잠잘 적에는 이불에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 내가 죄를 얻었다 하여 사도(斯道)에 게을리하지 말라.”고 하였다. 송사(宋史)卷四百三十四

 

채의(綵衣)

빛깔이 고운 옷, 즉 때때옷ㆍ색동옷. 노래자(老萊子)가 나이 칠십에 부모를 효성으로 봉양하면서 부모를 즐겁게 하기 위하여 어린애처럼 채색옷을 입고 재롱을 부렸다. 몽구(蒙求)노래반의(老萊斑衣)

 

채의(彩衣)

색옷인, 춘추시대(春秋時代) () 나라 사람인 노래자(老萊子)가 효성으로 어버이를 섬겼는데, 일흔 살의 나이에도 색동옷을 입고 어린아이처럼 유희를 하여 어버이를 기쁘게 하였다고 한다. 소학(小學)』 「계고(稽古), 몽구(蒙求)노래반의(老萊斑衣)

 

채의오친(綵衣娛親)

노래자(老萊子)가 채(綵衣)를 입고 어버이를 즐겁게 하다 소학(小學)』 「계고(稽古), 몽구(蒙求)노래반의(老萊斑衣)

 

채의환(彩衣歡)

옛날 초() 나라 노래자(老萊子)가 나이 일흔 살에 어버이를 기쁘게 해 드리려고 항상 색동옷을 입고 어린아이처럼 재롱떨었던 고사가 있다. 예문유취(藝文類聚)20 열녀전(列女傳), 소학(小學)』 「계고(稽古), 몽구(蒙求)노래반의(老萊斑衣)

 

채익(彩鷁)

뱃놀이에 사용하는 호화로운 배를 말한다. ()은 백로와 비슷한 큰 물새로 그 새가 풍파를 잘 견딘다 하여 그 모양을 뱃머리에 장식한다.

 

채익(綵鷁)

화려하게 꾸민 배를 가리킨다. ()은 바람을 잘 타는 새로, 뱃사람들이 뱃머리에다 채색 비단으로 익새의 모양을 만들어 달아서 배가 난파되지 않기를 기원한다.

 

채제(采齊)

예기(禮記)옥조(玉藻)옛날의 군자는 반드시 옥을 허리에 차고 …… 추창(趨蹌)할 때에는 채제의 박자에 맞추고 걸을 때에는 사하(肆夏)의 박자에 맞추었다.” 하였는데, 채제는 문외(門外)에서의 옛 음악이고 사하는 등당(登堂)할 때의 옛 음악이었다.

 

채주소역(蔡疇邵易)

() 나라 채침(蔡沈)홍범황극내외편(洪範皇極內外篇)와 소옹(邵雍)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를 가리킨다.

 

채중(蔡仲)

() 나라 채숙도(蔡叔度)의 아들. 아버지 숙도가 무경(武庚)의 반란에 가담했다가 귀양가 죽자, 채중은 덕을 닦고 착한 일을 하기에 노력하여 성왕(成王)으로부터 다시 채()에 봉해지는 신임을 받고 이어 자기 아버지 숙도의 제사를 받들었음. 서경(書經)』 「채중지명(蔡仲之命)

 

채중기(蔡仲耆)

채팽윤(蔡彭胤)의 자는 중기(仲耆), 호는 희암(希菴). 조선조 영조 때에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벼슬을 지냈고 시와 글씨에 뛰어났으며, 저서에는 희암집(希菴集)이 있다.

 

채중랑(蔡中郞)

후한 때 중랑장을 지낸 유명한 문사(文士) 채옹(蔡邕)을 이르는데, 거문고를 잘하였다. 그의 딸 염()은 어려서부터 음률(音律)에 통하여 9세 때에 자기 아버지가 거문고를 탈 적에 줄이 끊어지는 소리를 듣고는 어느 줄이 끊어졌음을 알아맞히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 거문고는 그 딸 채염(蔡琰)이 계승하였다

 

채진(采眞)

진실의 이치를 캔다는 뜻이다. 장자(莊子)』 「천운(天運)古者謂是采眞之遊라 하였다.

 

채진지유(采眞之遊)

장자(莊子)』 「천운(天運)소요(逍遙)의 뜨락에서 노닐고, 구간(苟簡)의 밭에서 먹고살며, 부대(不貸)의 구역에서 있나니, 소요면 무위(無爲)요 구간이면 이양(易養)이요 부대면 무출(無出)이라, 이를 일러 옛사람들이 채진지유(采眞之遊)라 하였다[以游逍遙之虛, 食於苟簡之田, 立於不貸之圃. 逍遙, 無爲也 ; 苟簡, 易養也 ; 不貸, 無出也. 古者謂是釆眞之游].” 하였다.

 

채취생(彩翠生)

전국시대(戰國時代) () 나라 시인 송옥(宋玉)고당부(高唐賦)’, 초왕(楚王)과 무산(巫山) 신녀(神女)의 연애 이야기가 실려 있는데, 서로 작별할 적에 무산 신녀가 아침에는 구름이 되고 저녁에는 비를 내리면서 언제까지나 양대 아래에 있겠다[旦爲朝雲 暮爲行雨 朝朝暮暮 陽臺之下].”고 말했다는 기록이 전한다.문선(文選)19

() 나라 왕유(王維)의 시에 비취빛이때때로 분명도 한데, 저녁 산기운은 처소를 알 수 없네[彩翠時分明 夕嵐無處所].”라는 표현이 있다. 왕우승집(王右丞集)13 목란시(木蘭柴)

 

채침(蔡沈)

채원정(蔡元定)의 아들이며, 주희(朱熹)의 제자였는데, 자기 아버지 원정이, 당시 학자들이 잘 모르는 홍범(洪範)의 수()에 관하여 자기 혼자 깨닫고는 있었으나 미처 논저(論著)를 못하고는 이르기를, “내 뒤를 이어 내 학설을 완성시킬 사람은 침()일 것이다.” 하였고, 주희는 늘그막에 서경의 전()을 쓰려다가 못하고 역시 채침에게 그 일을 부탁하였다. 송사(宋史)卷四百三十四

 

채택(蔡澤)

전국시대(戰國時代) () 나라 사람으로 말을 잘하여 조()ㆍ한()ㆍ위()에 유세하였으나 모두 쓰임을 받지 못하였다가 얼마 뒤에 진()에 들어가 응후(應侯)의 인도로 진 소왕(秦昭王)에게 객경(客卿), 승상까지 되었더니, 그 뒤 남들에게 미움을 사게 되자 병을 핑계, 승상의 인()을 돌려주었다.

 

채팽윤(蔡彭胤)

조선조 영조 때 사람. 자는 중기(仲耆), 이름은 팽윤(彭胤), 호는 희암(希菴). 형조 참판을 거쳐 부제학(副提學)을 지냈고, 시와 글씨에 뛰어났음. 저서에는 희암집(希菴集)이 있다.

 

채필(綵筆)

남조(南朝)의 강엄(江淹)이 꿈속에서 오색필(五色筆)을 곽박(郭璞)에게 돌려준 뒤로부터 미문(美文)이 나오지 않았다는 고사와, 이태백(李太白)이 붓 끝에 꽃이 피는 꿈을 꾸고 난 뒤로부터 더욱 시상(詩想)이 풍부해졌다는 채필생화(綵筆生花)’의 고사가 전한다. 남사(南史)59 강엄전(江淹傳)개원천보유사(開元天寶遺事)』 「몽필두생화(夢筆頭生花)

 

채필(彩筆)

뛰어난 문장 솜씨를 이른다. () 나라 때 문장가인 강엄(江淹)이 어릴 적에, 자칭 곽박(郭璞)이란 사람으로부터 채색 붓을 받는 꿈을 꾸고부터 시문(詩文)으로 명성을 크게 떨쳤는데, 한번은 꿈에 자칭 곽박(郭璞)이라는 사람이 나타나 내 붓이 그대에게 다년간 있었으니 이제는 돌려달라.” 하므로, 강엄이 품속에서 오색필(五色筆)을 꺼내 그에게 돌려주었는데, 그 꿈을 꾼 이후로는 강엄의 재주가 다해버렸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양서(梁書)卷十四

 

채필(綵筆)

뛰어난 문장 실력을 말한다. 이백(李白)이 붓 머리에 꽃이 피어나는 꿈을 꾸었다는 綵筆生花의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채필무공(彩筆無功)

재능이 떨어졌다고 스스로 비유한 말이다. ()나라 때 강엄(江淹)이 젊어서 문장으로 크게 이름을 떨쳤었는데, 한번 야정(冶亭)에서 잠을 자다가 꿈을 꾸었는바, 꿈에 한 장부가 나타나 곽박(郭璞)이라 자칭하면서 내 붓이 그대에게 가 있은 지 여러 해가 되었으니, 이제는 돌려줘야겠다.” 하므로, 강엄이 자기 품속에서 오색필(五色筆)을 꺼내 주었더니, 그 후로는 재주가 떨어져서 시를 지어도 미사여구가 전혀 없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양서(梁書)卷十四

 

채필토홍예(彩筆吐虹蜺)

훌륭한 문장을 짓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채색 붓이란, () 나라 때 강엄(江淹)이 일찍이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는데, 어느 날 꿈에 곽박(郭璞)이라 자칭하는 사람이 와서 자기 붓을 돌려 달라고 하자, 강엄이 품속에서 오색필(五色筆)을 꺼내어 그 사람에게 주었던바, 그 후로는 강엄에게 훌륭한 문사가 나오지 않았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고, 무지개를 토한다는 것 또한 시문의 재주가 풍부함을 형용한 말이다. 남사(南史)』 「강엄전(江淹傳)

 

채혈각이도강(蔡血脚而途僵)

송 나라 때 채원정(蔡元定)이 간신인 한탁주(韓侂冑) 등으로부터 위학(僞學)이란 배척을 받고 도주(道州)로 귀양가면서 짚신을 신은 채 3천여 리를 계속 가고 나니, 다리에서 피가 흘러 내렸다는 고사이다. 송사(宋史)卷四百三十三

 

채호재고진(彩毫才告盡)

() 나라 강엄(江淹)이 꿈속에서 곽박(郭璞)으로부터, 맡겨 놓았던 붓을 되돌려달라는 요구를 받고 품속을 더듬어 5색의 붓을 내준 뒤로는 뛰어난 글이 나오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이제는 그의 재주가 다했다.” 하였다.

 

채호제구벽롱사(彩毫題句碧籠紗)

당나라 왕파(王播)가 어릴 때 곤궁하여 양주(楊州) 혜소사(惠昭寺) 목란원(木蘭院)에서 거처할 때 그곳의 중들로부터 푸대접을 받았다가 나중에 존귀한 신분으로 다시 그곳을 찾아가서 보니 지난날 그가 절의 벽에 써붙였던 시구를 푸른 비단으로 감싸놓았다 한다. 곧 미천할 때 지었던 글이 신분이 존귀해짐과 동시에 좋은 대접을 받는 것을 말한다.

 

채홍준사(採紅駿使)

연산군 때 삼남의 미녀와 양마(良馬)를 뽑아 올리도록 보내던 사신을 말한다.

 

채화지(採華芝)

() 나라 이상은(李商殷)동환(東還)이란 시에 신선의 재능 있음을 스스로 알지 못해, 십 년 동안 길이 꿈속에서 영지를 캐었구나.” 하였는데, 이는 재능이 있으면서도 벼슬하지 않고 은거하였음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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