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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현 - 소악부(小樂府) 본문

한시놀이터/삼국&고려

이제현 - 소악부(小樂府)

건방진방랑자 2021. 3. 21.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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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악부(小樂府)

 

이제현(李齊賢)

 

 

그물에 걸린 참새 새끼가 가엾어라

拘拘有雀爾奚爲 觸着網羅黃口兒

眼孔元來在何許 可憐觸網雀兒癡

 

님 오실 날이 되니 정신이 번쩍

鵲兒籬際噪花枝 喜子床頭引網絲

余美歸來應未遠 精神早已報人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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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버들 드리운 개울가에서

浣紗溪上傍垂楊 執手論心白馬郎

縱有連詹三月雨 指頭何忍洗餘香

 

애써 지은 수확을 먹어치우는 참새

黃雀何方來去飛 一年農事不曾知

翁獨自耕耘了 耗盡田中禾黍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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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마고우와 채마밭에 들어가서

脫却春衣掛一肩 呼朋去入菜花田

東馳西走追蝴蝶 昨日嬉遊尙宛然

 

옛 처용 노인네를 그리며

新羅昔日處容翁 見說來從碧海中

貝齒赬唇歌夜月 鳶肩紫袖舞春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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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한 닭에 어머니는 방긋

木頭雕作小唐鷄 筯子拈來壁上棲

此鳥膠膠報時節 慈顏始似日平西

 

우리의 이별에도 나는 일편단심

縱然巖石落珠璣 纓縷固應無斷時

與郞千載相離別 一點丹心何改移

 

그대 그리는 내 마음

憶君無日不霑衣 政似春山蜀子規

爲是爲非人莫問 只應殘月曉星知 益齋亂稿卷第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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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이 시는 이제현(李齊賢)이 말년에 조정(朝廷)에 있을 때 지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시의 형식은 악부(樂府), 주지하듯이 악부(樂府)는 한()대 음악을 관장하던 관청(官廳)의 명칭으로 출발하여 궁중연회나 종묘제사에 쓰는 음악, 또는 민간(民間)의 노래를 채집한 것으로 발생 시부터 하나의 문학양식으로 성립되기 어려운 형식상의 약점을 지녀 후대에 자유롭게 변형되었다. 그래서 당()대 이미 음악이 탈락되고 우리나라에 유입될 때도 가사만 전래되었던 것이다.

 

악부(樂府)의 형식은 자수(字數)가 일정치 않고(3, 5, 7이 가장 많음), 행수(行數)도 일정치 않으며(4~228), ()은 대체로 고체시(古體詩)를 따르고 있다. 고려 후기 출현하여 조선 초 김종직(金宗直)동도악부(東都樂府)를 이어 18.19세기가 악부(樂府)의 전성기이다.

 

그런데 소악부(小樂府)의 소()의 의미는 무엇인가? 대략 소악부(小樂府)의 소()는 대국(大國)에 대한 소국(小國)이란 사대(事大)와 자기폄하에서 나왔다고 보는 견해도 있고, 중국 재래의 악부나 고려 재래의 아악(雅樂)ㆍ당악(唐樂)ㆍ궁정악(宮廷樂) 등과 구별하기 위해 소()자를 붙였다는 설도 있으며, 절구시(絶句詩)를 말하는 소()라고 보는 학설도 있다.

 

이제현(李齊賢) 소악부의 의의는 구어(口語)와 문어(文語), 노래와 시는 두 갈래의 흐름이 있는 것이 문학의 일반적 특질인데, 이 소악부의 출현은 구어(口語)문언화(文言化), 노래 시()로 격상시켰으며, 당시 사대부들이 문학적 소재나 의경(意境)을 우리 것보다 중국적(中國的)인 것에서 취하는 경향이 많았는데, 이에 대해 우리의 노래에서 찾겠다는 생각을 가지면서 하층문학(下層文學)이라 할 수 있는 서민들의 애환(哀歡)을 직접 수용했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서거정(徐居正)동인시화(東人詩話)권상 41에서 악부(樂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악부는 자자구구마다 모두 음률에 맞아야 하니, 옛날 시를 잘 짓는 자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어려워했다. 후산 진사도(陳師道)와 성재 양만리(楊萬里)가 모두 소자첨의 악사는 공교롭긴 하나 악부 본령의 말은 아니라고 여겼으니, 하물며 소동파에 미치지 못하는 자에 있어서랴? 우리나라의 말소리는 중국과 달라 상국 이규보·대간 이인로·예산 최해·목은 이색 등이 모두 문장의 대가들이었지만 일찍이 악부에는 손을 대지 못했다. 오직 익재 이제현(李齊賢) 만이 여러 문체를 두루 갖추어 짓되 그 법도가 삼엄하였다. 선생은 북으로 중원에서 공부하여 사승 관계가 뚜렷하고 학문의 연원이 깊어 터득한 것이 많았다. 근래에 배우는 자들은 음률은 배우지 않고 먼저 악부를 지어 소동파도 할 수 없었던 것을 하려고 하니, 그것은 양성재와 진후산에게 죄인이 됨이 분명하다[樂府句句字字皆協音律. 古之能詩者尙難之. 陳后山楊誠齋皆以謂. 蘇子瞻樂詞雖工 要非本色語. 况不及東坡者乎. 吾東方語音. 與中國不同. 李相國李大諫猊山牧隱. 皆以雄文大手未嘗措手. 唯益齋備述衆體法度森嚴. 先生北學中原師友淵源. 必有所得者. 近世學者. 不學音律. 先作樂府. 欲爲東坡所不能. 其爲誠齋后山之罪人明矣].”

원주용, 고려시대 한시 읽기, 이담, 2009, 233~235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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