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순간의 감정에 휩쓸리는 사람에 대해
『소화시평』 권하 3번은 아주 의미심장한 말로 서두를 열고 있다.
시는 일의 실정을 전달할 수도 있어 풍자적인 비유와 통한다. 만약 말이 세속을 교화시키는 것과 뜻이 비흥에 있지 않다면 또한 헛수고일 뿐이다.
詩可以達事情, 通諷諭也. 若言不關於世敎, 義不存於比ㆍ興, 亦徒勞而已.
문학에 대한 관점 중 두 가지는 되풀이 되어 왔다. ‘순수 문학론’과 ‘참여 문학론’이 그것이다. 순수문학론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문학은 정치ㆍ이데올로기ㆍ현실에서 벗어나 문학이 지닌 순수성을 달성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참여문학론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애초에 문학작품이란 현실을 벗어나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현실의 아픔ㆍ상황 등을 적극적으로 반영하여 담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자와 같은 경우는 조선 초기에 일어나 ‘도가 근본이고 문장은 말단이다[道本文末]’와 같은 생각으로 현실성은 완전히 배제하고 철학적인 논쟁만을 담은 문장과 시를 지으려 했었다. 후자와 같은 경우는 조선 후기에 일어난 조선시에 대한 논쟁이나 연암 박지원의 ‘글이 아프게 하지도 않고 가렵게 하지도 않고 구절마다 허황되며 우유부단하다면, 그런 글을 어디에 쓸 수 있겠는가[不痛不癢, 句節汗漫, 優游不斷, 將焉用哉]? -『過庭錄』4’라는 말에서 알 수 있다시피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그걸 통해 개혁의 의지를 드러내는 문장과 시를 지으려 했었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홍만종의 시각은 후자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실정을 드러내야 하고 그 안에 현실을 풍자하는 의미까지 담고 있어야 한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에 아예 쐐기를 박듯이 그런 것들을 달성하지 못한 시들은 아무런 가치도 없는 헛짓을 한 것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번 편에서 보게 될 시들은 단순한 의미의 시들만은 아니다. 얼핏 보면 별 내용이 없는 것 같다가도 자세히 보면 숨겨진 의미에 소스라치게 놀라게 되는, 그렇기 때문에 깊은 맛이 담겨 있는 시들을 보게 된다. 과연 어떤 맛이 우러나는지 이제 한 편씩 보도록 하자.
塞翁雖失馬 莊叟詎知魚 | 변방 늙은이 비록 말을 잃었다 해도 장자인들 어찌 물고기를 알리오. |
倚伏人如問 當須質子虛 | 화복에 대해 사람이 묻는다면 마땅히 자허에게 질정하라고 하라. |
권하 3번에 첫째로 소개된 최해의 시는 전체가 모두 고사를 인용하고 있기 때문에 얼핏 읽으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나도 솔직히 얼버무리며 해석만 했고 무슨 내용인지 모른 채 스터디에 가서야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를 알게 됐을 정도다.
1구는 ‘새옹지마’의 고사를 인용하고 있다.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고사는 ‘변방 늙은이의 말’이란 뜻으로 변방 늙은이의 말과 빚어낸 이야기를 통해 행복하다고 여겼던 일이 불행의 단초로, 불행의 단초라고만 여겼던 일이 다시 행복의 단초로 끊임없이 뒤바뀌는 현실을 묘사하며 사건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 말처럼 변방 늙은이가 말을 잃은 것은 분명히 슬픈 일이긴 하지만, 그건 넓은 의미에서 보면 슬퍼할 만한 일은 절대로 아니라는 걸 담고 있다.
2구는 장자의 고사를 담고 있는데 이에 대한 내용은 시에 달아놓은 주석을 읽어보면 충분히 알 수 있으리라. 이 말을 통해 변방 늙은이의 슬픔이든 기쁨이든 그건 장자인들 절대로 알 수 없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어찌 보면 이게 맞는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우린 나 자신도 잘 모르면서 남은 정말 잘 아는 것처럼 말하고 함부로 재단하려 할 때가 엄청 많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사람에 대해 장자는 “넌 내가 아닌데 내 마음을 어떻게 아냐?”고 일갈했던 것이고, 아예 영화중엔 ‘잘 알지도 못하면서’라는 제목이 영화도 있을 정도다. 그렇다면 과연 이런 이야기를 통해 최해는 무얼 말하고 싶었을까?
그건 바로 3~4구에 명확하게 나온다. 3구엔 노자를 인용하여 새옹지마의 고사처럼 화와 복은 서로 연이어져 끊임없이 순환한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똑 하니 떨어진 복이란 것만 있을 수 없고, 마찬가지로 화라는 것만 있을 수도 없다. 복 속엔 이미 화가 내장되어 있으며, 화 속에도 복은 숨어 있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누군가 다가와 “도대체 화와 복이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고 해보자. 과연 그는 그 사람에게 무얼 말해줄까?
지금도 무수히 나오는 자기개발서에는 화와 복이 명료하게 갈라져 있고, 화를 피하고 복을 쟁취하려면 계획적이고 성실하며 허투루 살지 않는 자세를 견지하라고 외치고 있다. 이런 사람에게 위와 같은 질문을 던졌다면, 판에 박은 듯 “열심히 살아!”라는 말을 해줬을 것이다. 하지만 최해는 3구에서 인용한 노자의 사상에 깊이 경도되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니 그가 해주는 말은 “그런 질문은 나 말고 자허에게나 하라고”라고 말해준다. 실컷 물었더니 다른 사람을 소개시켜준 꼴이라 황당하기까지 하다. 그런데 자허란 누구인가? 자허는 한자로 ‘자허(子虛)’로 쓴다. 이쯤되면 명료해질 것이다. 그건 바로 ‘허무’라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허무’라는 사람에게 화와 복에 대해 물은 들 허무한 대답이 돌아올 건 명약관화한 일이다. 그러니 이 말은 ‘그런 허무한 질문일랑 넣어둬~ 넣어둬!’라는 얘기였던 것이다.
이에 대해 홍만종은 “얻고 잃음을 근심하는 무리들을 경계하였다[以警患得患失之輩].”라고 평가하고 있다. 아주 적절한 시평이라 할 수 있다.
하권 3번 | |
遆職後 | 示兒 |
일희일비하거나 욕망을 따르는 무리에게 | |
復寄仲始司藝 | 送僧之楓岳 |
사람의 인품과 물욕에 대해 | |
江上 | 南溪暮泛 |
벼슬길에 나가려는 사람에게 | |
詠雲 | 歧灘 |
改頭換面와 口蜜腹劒하는 사람에 대해 |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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