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근대적 서사시의 특징을 담은 작품
이 시는 720행에 이르는 장시다. 그런데도 ‘아래는 떨어져나감(하결下缺)’으로 표시되어 있다.
주인공 방주는 장계(長谿, 지금 전라북도 장수군에 속한 지명) 땅의 백정집에서 태어난 여성이다. 무관 장파총이 지나다가 방주를 보고 일부러 방주의 집을 방문해서 그녀의 아버지에게 자기 아들과의 혼인을 청한다. 작중 현재에 진행된 사건은 여기서 일단 정지되며 시는 장파총의 과거로 소급해 들어간다. 그리하여 장파총의 파란의 인생역정을 장황하게 서술해가는데 그러다가 중간에서 끊어진 것이다.
그런데 원제에서 ‘장원경(張遠卿)의 처 심씨를 위해 짓는다[爲張遠卿妻沈氏作]’라고 하였다. 심씨란 방주를 가리키며, 장원경은 필시 장파총의 아들이다. 그리고 서시 부분에서 전통적인 흥(興)의 수법을 쓴 새의 의미 내용으로 미루어 그들 양인의 결혼은 아마도 행복한 삶으로 이어지지 못한 모양이다. 시인은 작품을 양반의 자제와 백정의 딸이 장파총의 진보적 인간관의 선도로 결합을 하였으나 마침내 신분 갈등 및 성차별로 인해 파탄에 이르는 이야기로 구상했을 것이다.
그러나 「방주가」는 유감스럽게도 중도반단(中道半斷)으로 끝나고 말았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물론 어쩌다 뒷부분만 떨어져나갔을 수도 있겠지만 본래 완결을 시키지 못했던 것이 아닌가 짐작되기도 한다.
문제점은 장파총의 소경력을 진술한 제6부에서 제8부에 있다. 어엿한 양반으로서 백정의 집에 청혼하는 일은, 백정 자신이 “예로부터 하천배론 / 백정을 첫 번째로 꼽지요. / 남의 집 종보다 못한 신세/광대도 우리보단 영예롭다오. / (…) / 그런 말씀 감히 꿈이나 꾸겠습니까! / 쉰네에게 허물이 있다면 / 차라리 매질이나 해주옵소서[由來下賤者 先頭數白丁 人奴尙不如 倡優反爲榮 (…) 小屠若有過 棍箠任所爲]”라고 경악하듯, 당시의 제도나 상식에 비추어 도저히 상상조차 못할 일이었다. 이에 파총은 인간의 가치는 신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님을 역설하면서 “빈부는 본래 물을 것도 없거늘 / 지체야 다시 논할 것 있겠는가[貧富本不問 地閥誰敢論]”라고 설득하였던 것이다. 파총은 과연 어떤 인간이었기에 당시로선 놀라운, 실로 파격적인 사상을 선취해서 갖게 되었던가? 바로 이 점을 해명하는 것이 작자로선 응당 필요하게 되었다.
그래서 “장파총 웬 사람인가[借問把摠誰]?”하고 서사의 시점이 제6부에서부터 과거로 들어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를 초래하였다. 물론 간과해서는 안 되는, 당연히 설정되어야 할 내용이다. 또한 이 부분은 독립적으로 보면 현실주의 문학의 한 중요한 성과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작품 전체로 볼 때 이 부분은 너무 비대하여 구성축에서 과다히 빗나갔다. 뿐만 아니라 빗나간 그 상태로부터 원점으로 돌아오지도 못한 것이다. 작자 자신 이 대목을 써나가는 데 스스로 흥취를 느낀 나머지 기량을 마음껏 발휘하다가 급기야 수습하기가 어려워진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든다.
작품은 내용 형식이 단일하지 않고 복잡하며 예술적 성취도 다채로운 편인데 몇가지 주목할 점을 들어본다.
첫째, 주제 사상의 진보성과 인물 형상화의 특징
신분 차별이 빚어낸 애정 갈등은 중세 말 근대 초 문학예술에서 특징적 제재로 많이 다루어졌거니와, 이 시는 가장 무거운 신분 질곡을 받았던 백정의 딸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주제를 선명하게 한데다 평등의식이 다른 어떤 작품보다 앞서나가 있다. “천지가 만물을 생성하는 이치 / 고르고 가지런하여 본디 치우침이 없거늘[絪縕化醇理 均齊元不黷]”이라는 균평의 원리에 입각하여 인간의 본원적 평등을 확고히 인식하고, 그리하여 가장 하천한 신분의 백정 가운데에서 아름다운 여성을 발견하며, 또 나아가 그 신분을 타고난 여성과 대등한 결합을 실현시키려는 것이 작품의 핵심이다(「춘향전」의 경우도 대등한 결합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특히 방주라는 구체적 인물의 자태와 행동을 묘사하여 인간은 평등하다는 진리를 보여주며, 주제사상은 장파총과 방주 아버지 사이의 대화 속에 용해되어 있다.
둘째, 생활 현실의 사실적 표현
제4부에서 백정의 생활 실태, 제6부부터 제8부까지에 있는 서울의 남산에서 나무를 해다 구리개서 파는 이야기, 바다에서 고기잡이하는 노동현장과 양양(襄陽, 지금 속초항 일대)의 전복 채취하는 어민들이 관의 탐학에 고통당하는 실상 등 사실적 서술이 풍부하고도 빼어나다. 그중에도 고기 잡는 바다의 현장 묘사는 알려지지 않은 특수한 생활지식에 바탕을 두고 있어 소중하게 여겨진다.
셋째, 판소리처럼 민중적 어법을 도입한 점
이 시는 쇠코잠방이[犢鼻襠]ㆍ마상이[亇尙]ㆍ당도리[唐兜] 등등의 생활어휘나 민간 지식을 어구상에 대폭 수용했거니와 때로 사설이 사뭇 장황하게 엮이기도 하며, 이미 언급한 것처럼 부분이 과다히 확대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런 필치는 판소리소설의 언어 표현적 특징으로부터 영향받은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형식미학의 관점에서는 결함이 되겠지만 오히려 새로운 미학적 모색으로 볼 수 있다.
「방주가」는 미완성의 서사시다. 주제와 사건을 통일적으로 결합시켜 서사의 완결을 이루지는 못한 결함이 있으나 서사시의 귀중한 성과로 해석하고 평가해야 할 것이다. 북쪽의 우리 문학사에서는 이 시를 ‘근대적 서사시의 출현’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보아 비중을 두어 다루고 있다.
-임형택, 『이조시대 서사시』 2권, 창비, 2020년, 360~362쪽
1 | 기이한 새와 원통한 여자 |
2 | 아빠와 오빠의 특징 |
3 | 점점 자라며 빛을 낸 방주 |
4 | 무더운 여름에 물 한 모금 달라던 훤칠한 사내 |
5 | 물 떠준 아가씨를 시로 그리다 |
6 | 낭자 사는 집에 들어와 저녁밥을 청하다 |
7 | 방주와 아비가 차린 저녁상을 받다 |
8 | 자식 결혼을 요구하다 |
9 | 계급 차이로 요청을 받지 못하다 |
10 | 파총의 젊을 때 이야기 |
11 | 전복 캐는 이야기 |
12 | 전복으로 인한 어부의 고초를 듣다 |
13 | 어촌에서 지나다가 다시 길을 나서다 |
14 | 물고기 잡는 풍경과 마구잡이로 잡아들이는 풍조 |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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