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도덕경(老子道德經)』이라고 하는 책
1. 『노자(老子)』라는 책은 역사적으로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노자도덕경(老子道德經)』이라는 것이 이 책의 원래의 이름은 아니다. 노자(老子)라는 사람이 지었다고 해서 옛날에는 그냥 『노자(老子)』라고 불렀다. 그러니 『노자(老子)라는 이름이 아마도 가장 오래된 이름일 것이다.
그런데 이 『노자(老子)』는 두 편(篇)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한 편은 도(道)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해서 쓰여졌고, 한 편은 덕(德)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해서 쓰여졌다. 그러니 「도편(道篇)」, 「덕편(德篇)」의 이름이 가능하다. 전하는 판본[傳本]에 따라 도편(道篇)이 앞에 오기도 하고, 덕편(德篇)이 앞에 오기도 한다. 그러니 『노자(老子)』라는 책의 별명으로 『도덕(道德)』도 가능하고, 『덕도(德道)』도 가능하다. 그런데 후대에 내려오면서 이 『도덕(道德)」에 ‘경(經)’의 권위를 부여하게 되었다. 그래서 『도덕경(道德經)』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중국의 나라는 이 노자(老子)의 본명이 이씨(李氏)라고 생각했고, 당(唐)나라의 황실(皇室, 당태종의 이름이 李世民이기에)과 종친(宗親)관계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노자(老子)를 매우 존숭했다. 그래서 우리나라도 삼국시대(三國時代)때 이미 나라 황실로부터 『노자도덕경(老子道德經)』을 전해 받았던 것이다.
『노자(老子)』라는 책의 저자인 노자(老子)는 누구인가? 노자(老子)는 ‘늙은 선생(Old Master)’이라는 뜻이며 그것이 곧 그 저자의 정확한 이름은 아닐 것이다. 이 노자(老子)라는 인물에 관하여, 사마천(司馬遷)이라는 유명한 역사학자는 자신이 지은 『사기(史記)』라는 역사책 속에 역사적 인물의 전기를 모은 「열전(列傳)」이라는 부분에서 ‘노자열전(老子列傳, Biographies of Lao Tzu)’을 지어 남기었는데, 그 열전(列傳)에서조차 노자(老子)가 누구인지를 확실히 말하지는 못했다. 노자(老子)라는 인물에 관하여 내려오는 여러 이야기들[傳承]을 있는 그대로 다 실어 놓았을 뿐이다. 그러니까 사마천(司馬遷)의 시대에(漢나라 武帝 때 사람, BC 2세기) 이미 노자(老子)라는 인물은 오리무중(五里霧中)의 인간이었다는 것이다. 『노자(老子)』라는 책이 존재한다면, 분명『노자(老子)』라는 책의 저자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와 같이 간단치 않다. 우선 『노자(老子)』라는 책 자체의 존재가 역사적으로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고전(古典)을 대할 때, 불경(佛經)이든, 기독교 성경이든, 유가경전이든, 춘추제가(春秋諸家) 경전이든, 우리가 현재 시중에서 사볼 수 있는 책의 모습이 곧 그 옛날의 책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유치한 생각이다. 기독교 성경만 해도 지금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신약성경과 로마시대의 사람이 보았던 신약성경은 그 문자 내용이 매우 다르다. 모든 고전이 옛날 어느 정확한 시점에 정확히 한 사람에 의하여 쓰여져서 그 모습대로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온 예는 거의 없다. 우선 옛날에는 요새와 같이 ‘인쇄’라고 하는 책의 유포방식이 없었다. 모두 가죽이나 비단이나 대나무나 파피루스 같은 데에, 펜이나 붓으로 쓰거나, 칼이나 인두로 판 것이다. 그러니까 쓰는 사람마다 몇 글자씩 달라지는 것은 물론, 착간(錯簡)ㆍ누락(漏落)ㆍ첨가(添加)ㆍ삭제(削除)ㆍ유실(遺失) 등등의 변화가 반드시 일어나게 마련이다.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고전은, 모두가 근세에 와서(宋代 이후) 인쇄술이 발달한 이후에 하나의 판본을 정해 정본으로 약속한 것이다. 그래서 고전이라고 부르는 많은 것들이 후대에 날조된 것도 많다. 조선 말기에 성립한 책들을 가지고, 단군시대의 책이라고 주장하는 어리석은 이야기들이 이러한 날조의 대표적 사례이지만, 이러한 날조는 이미 한대(漢代)를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다.
2. 마왕퇴에서 발견된 B.C. 168년의 백서 노자
『노자(老子)』는 단행본으로 존재(存在)한 것이 매우 오래된, 그 정확한 추정이 가능한 희귀한 책 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아주 확실하게 말하면 오늘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노자(老子)』와 거의 유사한 책이 신약성서가 쓰여진 시대보다, 최소한 300년을 앞서 실재(實在)했다는 것이 고고학적으로 입증되고 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1973년 11월부터 1974년 초에 이르기까지 중국(中國)의 호남성마왕퇴(湖南省馬王堆, 마왕뛔이)라는 곳에서 한묘(漢墓)를 발굴했는데 그 3호 분묘에서 대량의 가 나왔다. 백서(帛書)라는 것은 비단에 먹과 붓으로 쓴 책을 말한다. 이 백서 중에 바로 오늘날의 『노자(老子)』 책과 그 내용이 거의 비슷한 『노자(老子)』 백서(帛書)가 2종이 나왔는데, 소전(小篆)체로 쓰인 한 종을 갑본(甲本)이라 하고, 예서(隸書)체로 쓰인 한 종을 을본(乙本)이라 한다. 갑(甲)ㆍ을(乙)이 모두 오늘날의 ‘도덕경(道德經)’이 아닌 ‘덕도경(德道經)’의 체제로 되어 있으나 그 내용은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도덕경(道德經)』과 큰 차이가 없다. 한 80% 이상이 대강 일치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삼호(三號) 분묘에 묻힌 연대를 우리는 확실히 알 수 있다. B.C. 168년이다. 이 『노자(老子)』 비단책은 여기 묻힌 대후이창(軑侯利蒼)의 아들이 생전에 보았던 초본(抄本)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백서의 출현으로도 노자(老子)라는 사람을 아는 데는 큰 도움이 되질 않는다. 그리고 이 백서의 출현이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노자(老子)』 책의 권위를 추락시키지는 않았다. 오히려 중국의 고전(古典)이 얼마나 그 전사(傳寫)의 역사가 정확한 전승을 지키고 있는가 하는 것을 입증하여 주었다.
그런데 최근에 더욱 놀랄 일이 하나 생겼다.
3. 곽점의 죽간본이 불러일으킨 소용돌이
1993년 10월, 호남성(湖北省) 형문시(荊門市) 사양구(沙洋區) 사방향(四方鄕) 곽점촌(郭店村)에 자리 잡고 있는 전국(戰國)시대의 분묘 하나를 발굴했는데, 그곳에서 804개나 되는 죽간(竹簡, 문자가 새겨진 대나무 쪽)에 쓰여진 一萬三天여 글자의 문헌이 발견된 것이다. 그런데 이 모두가 매우 심각한 개념성의 학술저작인 것으로 보아, 아마도 이 분묘주인 자신의 라이브러리(library)가 같이 묻힌 듯한데, 그렇다면 이 분묘의 주인은 대단한 사상가였을 것이다.
부장품중에 ‘동궁지사(東宮之師)’라는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는 컵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분묘의 주인은 나라의 태자(太子)의 선생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맹자(孟子)와 동시대며 맹자(孟子)보다 약간 나이가 많은 초(楚)나라의 사상가 진량(陳良)의 묘로 비정(比定)하는 까지도 제기되었다.
대부분의 문헌이 유가저작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죽간 중에 도가저작으로서 『노자(老子)』 삼편(三篇)과 『태일생수(太一生水)」 일편(一篇)의 2종이 포함되어 있다는 획기적인 사실이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이다. 이 분묘는 하장(下葬)시기의 하한선이 B.C. 300년 경이므로, 이 분묘속의 죽간(竹簡)은 모두 B.C. 300년 이전의 통용연대를 확보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마왕퇴(馬王堆)의 백서(帛書)보다 연대가 근 두세기까지를 소급할 수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곽점초묘죽간(郭店楚墓竹簡)’이라고 부르는 이 문헌들은 중국의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사상사를 재구성하는데 매우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아주 생생한 근거를 제시한다고 본다. 전국시대(戰國時代) 중엽의 제1차 자료를 지금 우리가 우리의 육안(肉眼)으로 볼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전문가가 아닌 사람들에게 그 감흥이 전달될 수 없겠지만 참으로 놀라운 것이다. 이 문헌에 비정하여 많은 다른 문헌의 문제점을 비교검토함으로써 중국 고대사상에 관하여 보다 정확한 추측이 가능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사실 곽점(郭店)의 출토로 요즈음 중국철학계는 구설에 안주할 수 없도록 새로운 아이디어들이 바쁘게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노자(老子)』의 문제만 하더라도 이 곽점(郭店, 꾸어띠엔)의 죽간본(竹簡本)이 마왕퇴(馬王堆, 마왕뛔이)의 백서본(帛書本)보다 문헌학적으로 훨씬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마왕퇴(馬王堆)의 백서본(帛書本)은 기본적으로 현존하는 금본(今本)의 정당성을 강화시켜 주며, 판본의 많은 문제점을 해결하여 주는 서지학적 보조자료의 역할이 그 주효용(主效用)이었다. 그러나 곽점(郭店)의 죽간본(竹簡本)은 금본(今本)의 정당성 자체를 회의케 하며,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도덕경』이라는 문헌의 성립과정에 대해 매우 결정적인 새로운 가설을 가능케 한다.
4. 곽점죽간본 출토로 노자 연구는 한층 복잡해졌다
곽점죽간본(郭店竹簡本, 약칭하여 ‘簡本’이라 한다)은 갑(甲)ㆍ을(乙)ㆍ병(丙) 삼조(三組)로 나누어져 있다. 갑조(甲組)의 것은 길이 32.3㎝짜리 39매(枚)로 되어 있고, 을조(乙組)의 것은 30.6㎝짜리 18매(枚), 병조(丙組)의 것은 26.5㎝짜리 14매(枚)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은, 백서(帛書)가 오늘날 우리의 한문지식으로도 쉽게 식별할 수 있는 소전체와 예서체로 되어 있는데 반하여, 우리의 눈으로 보아 쉽게 식별하기 어려운 초(楚)나라의 독특한 자체(字體)로 되어있다(戰國中期의 古體의 특징을 보여준다). 그리고 백서(帛書)의 경우 갑(甲)ㆍ을(乙)이 동일한 내용의 중복되는 두 세트의 문헌임에 반하여, 이 간서(簡書)의 경우는 갑(甲)ㆍ을(乙)ㆍ병(丙)의 내용이 거의 중복되지 않으며 그것을 다 합치면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도덕경』 문헌의 5분의 2 정도의 분량을 형성한다. 그리고 간본(簡本)의 내용이 대부분 오늘날 금본(今本)에 있는 내용이지만, 그 장절(章節)의 체계가 금본(今本)과 크게 다르다는 사실이다.
혹자는 이 묘소가 이미 도굴된 사실이 있으며, 『노자(老子)』 간본(簡本)이 완정(完整)하지 못한 것은 일부가 도둑맞았기 때문이라고도 주장하지만 대부분의 고증가들이 그러한 결론에 도달하지는 않는다. 바로 금본(今本)의 5분의 2를 형성하는 간본(簡本)의 내용이야말로, 성서문헌학에서 말하는 복음서의 ‘Q자료’처럼, 『도덕경』의 가장 오리지날한 고층대를 형성하는 문헌일 것이라고 우리는 비정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간본(簡本)의 문제는 간단치가 않다. 갑본(甲本)과 병본(丙本)간에 금본(今本)의 64장 하반부분(下半部分)이 중복되어 나오고 있으며 그 문자의 표현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역시 갑(甲)ㆍ을(乙)ㆍ병(丙)이 합쳐져서 하나의 완정(完整)한 텍스트를 이룬다기 보다는 제각기 다른 전승의 사본(寫本)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만든다. 다시 말해서 갑(甲)ㆍ을(乙)ㆍ병(丙)의 어떤 프로토 텍스트(proto text)가 있다는 가정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갑본(甲本)과 저 두 텍스트 간의 문자를 비교해보면 갑본(甲本)이 병본(丙本)보다 오래된 초본(抄本)임을 알 수 있다. 양본(兩本)은 그 전승(傳承)이 다른 것이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갑(甲)ㆍ을(乙)ㆍ병(丙)을 합친 내용이 『노자(老子)』라는 프로토 텍스트(proto text)의 모습에 가까운 것일 것이라는 가설은 유용하다. 그러나 갑(甲)ㆍ을(乙)ㆍ병본(丙本)이 모두 다른 전승의 소산이라고 한다면 『노자(老子)』 연구는 매우 복잡한 양상을 띠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5. 노자가 원본은 질박한 사상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본 강의는 대중강연이다. 『노자(老子)』라는 문헌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을 이미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진행되는 학술세미나가 아니다. 그리고 본 강의의 취지 자체가 『노자(老子)』의 생각을 전달하려는 것이지, 『노자(老子)』라는 문헌의 전문적 분석결과를 전달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서지학(書紙學)적 논쟁이 매우 중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너무도 전문적인 지식을 요구하는 것이며 여기 소개되어야 할 하등의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곽점초간본(郭店楚簡本) 『노자(老子)』를 살펴 본 나의 소감 중에 가장 의미 있는 사실은, 그것이 『노자(老子)』라는 책의 형성과정에 대해 매우 설득력 있는 새로운 가설을 가능케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내가 대만대학(臺灣大學)에서 석사 논문을 쓸 때부터 주장해왔던 학설들과 대강 일치하는 것이다.
공자(孔子)와 동시대 쯤에, 노자(老子)라고 하는 어떤 X의 역사적 인물이 있었고, 그 인물이 단일 저작물로서 『노자(老子)」라는 책을 썼다고 한다면, 그것은 오늘날의 『노자(老子)』와는 다른 모습이면서도, 그 배태를 형성하는 매우 질박한 사상형태였을 것이다. 그것은 오늘날과 같은 현묘한 형이상학(形而上學)적 인식론의 체계나, 지나친 정치철학적 주장이나, 유가철학이나 타제가(他諸家)에 대한 명백한 비판의식을 수반하는 것이 아닌 질박한 내용의 것이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한 이ㆍ삼백년 동안의 첨삭을 거치면서 발전하여 전국말기쯤에는, 오늘 우리가 보는 금본(今本)과 상응되는 새로운 프로토타입으로 되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전국말기의 사상가며 『노자(老子)』의 최초의 주석가인 한비자(韓非子)가 보았다고 하는 『노자(老子)』는 바로 백서(帛書)의 모습에 가까운 것이며, 내가 말하는 프로토타입의 문헌에 상당하는 것이다. 그것은 『도덕경(道德經)』이 아닌 『덕도경(德道經)』이었다.
6. 16살에 노자를 주해한 왕필
그럼 오늘 우리가 보는 『노자(老子)』 금본(今本)은 무엇을 기준으로 하는가? 그것이 바로 왕필(王弼, 왕 삐)이라고 하는 천재적 사상가가 주석을 단 판본을 말하며 보통 ‘왕본(王本)’이라고 지칭한다. 왕필(王弼, 왕 삐)이라는 사람은 A.D. 226년에 낳아서 A.D. 249년에 죽은 위(魏)나라의 천재적 사상가였다.
그런데 여기 연대를 한번 잘 계산해 보라! 몇 살에 죽었는가? 만 23살에 죽었다. 23살? 모차르트는 몇 살에 죽었는가? 그래도 모차르트는 결혼도 했고 35살까지 살다 죽었다. 그럼 23살에 죽은 청년이 언제 무슨 사상을 구축할 수 있었던 말인가? 왕필이 『노자(老子)」를 주석한 것은 16살의 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니까 요즈음 나이로 중학교 3학년 정도의 소년이다. 그러나 이 소년 왕필의 『노자(老子)』 주석은 거의 중국 전 역사를 통털어 가장 탁월하고 가장 심오하고 가장 널리 읽히는 주석으로 꼽히고 있다.
왕필이 활약한 시대는 『삼국지(三國誌)』의 조조(曹操), 유현덕(劉玄德) 같은 사람들이 활약하던 시대와 비슷하다. 왕필이 태어난 다음 해 3월에 제갈량(諸葛亮)이 그 유명한 출사표(出師表)를 올리고 魏를 쳤으니까. 우리나라로 치면 신라ㆍ고구려ㆍ백제가 흥기하면서 서로 충돌을 일으키던 삼국초기(三國初期)에 해당되는 시기다.
모차르트와 같이 10대에 이미 탁월한 음악가가 된다는 것은 요즈음 우리나라의 음악천재들을 보아도 이해가 갈 수 있다. 그리고 10대에 세계적인 수학자들이 배출된다는 것도 쉽게 이해가 간다. 그러나 10대에 인생에 대해 쓴맛 단맛을 다 겪고 인간과 우주에 대한 모든 통찰을 거쳐야 나올 수 있는 심오한 철리(哲理)의 대가(大家)가 된다는 것, 그것도 당대(當代)의 인간들에게도 쉽게 접근이 될 수 없었던 난해(難解)한 문헌이었던 고경(古經)의 대가가 된다는 것, 그것도 보통 대가(大家)의 수준이 아니라 그 수천억의 인구가 살고 죽고 했던 중국땅덩어리의 역사 전체를 통하여 가장 위대한 사상가가 된다는 것, 그것도 10대에, 그것은 아무래도 우리의 상식으로 쉽게 풀리지 않는다.
신비를 좋아하는 사람들, UFO를 좋아하는 사람들, 에집트의 피라밋을 놓고, 나즈카의 지오글립스를 놓고 스페이스 커넥션을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뭔가 고대적(古代史)의 신비가 인간적 상식에 의해 풀리는 것을 공포스러워한다. 그리고 자기들의 희한한 가설에 인류가 호기심을 기울여 주는 것을 자기들의 종교로 삼는다. 그러나 왕필은 조금도 그러한 신비의 인물이 아니다.
왕필을 보면 인간의 가능성의 위대함에 고개가 숙여진다. 왕필의 성장과정은 정확하게 추정 가능하며, 그는 당대의 최고의 라이브러리(library)였던 ‘채옹(蔡邕)의 만권지서(萬卷之書)’를 물려받은 서향지가(書香之家)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당대의 석학들과 고담청론(高談淸論)을 일삼았다. 무엇보다도 왕필이라는 존재를 가능케 했던 것은 삼국시대(三國時代)라고 하는 변혁기ㆍ혼돈기의 창조적 자유의 분위기였다. 나이를 불문하고 실력자를 실력자로서 대접하는 비권위주의적 분방함이 확보되지 않은 시대였더라면 왕필은 태어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지금 그 어느 권문세가 이 사회의 리더들이 열살짜리 석학을 모셔다 그의 강론을 듣고 심복(心服)을 할 것인가? 그의 시대는 곧 완적(阮籍)ㆍ혜강(嵇康)과 같은 죽림칠현(竹林七賢)의 기괴 발랄하고 자유분방한 행동들이 상식으로 받아들여지는 새로운 로맨스의 시대였고, 그러한 로맨스는 지교(智巧)에 찬 속진(俗鹿)을 부정하고 자연(自然)의 순박(純朴)을 영탄하는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와 같은 시경(詩境)으로 이어지고 있는 그러한 시대였다.
7. 왕필주가 달린 노자도덕경을 저본으로 삼다
왕필이 『노자(老子)』를 주석했다 하는 것은, 요새 우리가 고전을 주해하는 책을 쓰는 것과는 좀 개념이 다르다. 우리는 기존의 텍스트가 대부분 이미 정본화(正本化)되어 있기 때문에 그 텍스트를 전제로 해서 주해를 단다. 그러나 왕필이 『노자(老子)』나 『주역(周易)』을 주해했다 하는 것은, 그때까지 내려오던 다양한 전승의 텍스트 그 자체를, 자기의 주석적 견해의 일관성의 틀 속에서 정비하고 재구성하는 작업을 포함한다.
왕필은 물론 이러한 작업을 텍스트의 ‘왜곡’이라고 생각치 않았다. 왕필의 손에서 일어난 텍스트의 변형 내지 왜곡에 관하여 나는 매우 새로운 견해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견해들을 여기 피력할 생각은 없다. 그 또한 너무도 충격적이고 너무도 전문적인 논의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단지 우리가 현재 『노자도덕경』이라고 부르는 것은 일단 왕필이라는 어린, 그렇지만 만고의 걸출한 사상가의 손에서 변형된 텍스트이며, 대강 우리의 『노자도덕경』의 이해의 틀도 왕필의 현학적(玄學的)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을 수 없다는 대전제를 확실히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여기 피력하는 것으로 우리의 논의는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왕본(王本)의 가치는 근 두 밀레니엄 동안 인류의 『노자』 이해의 다양한 틀을 형성해온 것이며, 어떠한 타 판본의 재해석에도 불구하고 독립적인 가치가 인정된다는 것을 밝혀둔다. 그리고 왕본(王本)의 텍스트는 백서(帛書)나 간본(簡本)과는 다른 또 하나의 전승(傳承)의 소산일 가능성이 높다. 왕본(王本) 텍스트의 독립적 가치는 마치 산스크리트 원본의 『바즈라 째디까 수뜨라((Vajra-Prajna-Paramita-Sutra)』가 엄존하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금강경(金剛經)』하면, 구마라십(꾸마라지바, 鳩摩羅什)의 한역본(漢譯本) 텍스트가 더 총체적인 금강의 지혜의 이해의 틀을 형성해온 것과도 같다.
우리의 『노자(老子)』 강해는 바로 이 왕본(王本)의 해석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전문적인 학도들은 백서(帛書)나 간본(簡本)에서 제기된 많은 문제들을 비교적으로 검토ㆍ파악하는 자세를 잃어서는 아니될 것이다. 나 역시 왕본(王本)을 해석해가는 과정에서 백서(帛書)와 간본(簡本)의 연구성과를 도입할 필요가 있을 때는 그를 충분히 반영하도록 할 것이다. 왕본(王本)에 문제점이 발생할 때, 백서(帛書)나 간본(簡本)의 기준이 더 진실하다고 판명되면 물론 새 자료에 의하여 왕본(王本) 텍스트의 의미를 정확히 형량해야 할 것이며, 왕본(王本) 텍스트의 정정이 요구될 때는 그를 정정하는 것이 당연한 학문적 자세일 것이다.
나의 요번 『노자(老子)』 강해는 1999년까지의 세계적으로 노출된 모든 정보를 종합하는 가장 새로운 『노자(老子)』 강해가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나는 사부집요(四部集要) 자부(子部)에 수록된 가장 흔한 청대(淸代)의 화정장씨본(華亭張氏本) 왕필주(王弼注) 『노자도덕경(老子道德經)』을 나의 강해의 저본(底本)으로 삼았다.
8. 노자가 말하는 걸 빈 마음으로 따라가보자
『노자』는 한마디로 지혜의 서이다. 그것은 어떤 종교의 교리를 말하거나, 어떤 물리적 사태의 규명을 목적으로 하거나, 우리에게 특정한 교훈이나 가치규범을 강요하거나 하기 위한 책이 아니다. 서양의 전통에 있어서 ‘지혜’란, 신과 인간을 매개하는 무엇이다. 그러나 그러한 지혜란 근원적으로 ‘무당의 지껄임’이다. 동양에서 말하는 지혜란 그런 것이 아니다. 신이란 전제도, 인간이란 전제도, 지혜 앞에선 성립하지 않는다.
지혜란 우리 삶의 과정적 행위의 지혜이다. 그런데 지혜의 특징은 일체의 권위적 실체를 전제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혜는 어떠한 경우에도 ‘무전제’인 것이다. 지혜는 개념적 분석의 소산이 아니다. 그것은 분별적 지식을 뛰어넘어 우리의 몸으로 궁극적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느끼는 것이다. 따라서 『노자(老子)』는 미리 공부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공연히 선입견만 불어넣을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노자』는 공부하는 책이 아니라, 그냥 부담 없이 정직하게 느끼는 책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노자』에게서 무엇을 구하려 하지 말 것이며, 『노자』에게서 무엇을 배우려 하지 말 것이다. 그냥 그가 말하는 것을 빈 마음으로 따라가다 보면, 그것이 곧바로 나의 삶의 바른 가치의 한 측면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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