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인류는 앞으로 테레비 때문에 패망할 것이오
그러던 어느 날 따르르릉 무정재의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저희 방송사에서는 요번 밀레니엄 전환기를 맞이하여 좀 사려깊은 기획을 하나 했습니다……”
무슨 부탁이든지 무조건 거절하기로 악명이 드높은 나, 사실 거절의 미덕을 성공적으로 발휘 못하면 이 소란한 자본주의 세상에서는 도저히 ‘놀 수’ 있는 시간을 획득하기란 불가능한 것이다. 전화를 거시는 피디님의 목소리는 애초부터 절망에 가까운 떨림이었다. 나 도올의 악명을 이미 익히 탐지하신 훌륭한 분이셨던 것 같다. 그런데 궁합이란 참 묘한 것이다. 그렇게 까다롭게 선을 많이 보아도 어그러지기만 하는 혼사가 될려면 순식간에 짝, 우아한 웨딩마치가 울려퍼지는 것이다.
“알기쉬운 고전강의라구요?……”
나는 순식간에 까다로운 요청 몇 가지를 했다. 그런데 상대방측에서는 내가 응해주기만 한다면 그러한 조건을 다 수용하도록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겠다는 신실한 자세를 보여주었다. 기철학의 대작을 쓰는 대공사계획이 차질이 생기 우울하던 차에 이 방송사의 제안은 순간 나에게 새로운 삶의 젊은 의욕을 소생시키는 계기가 될 수도 있겠다는 희망찬 전율이 나의 맥박을 고동치는 것이었다.
이미 저승의 객이 되어버린 한창기(韓彰璂: 1936~1997, 샘이깊은물 발행인) 선생께서 나에게 성북동 한옥처마끝 툇마루에 앉아 문득 던진 한마디가 생각난다.
“오늘 왜 우리 조선의 역사가 요 모양 요 꼴이 된 줄 아시오? 일제식민지의 비극일 것 같소? 몰지각한 좌ㆍ우이념의 투쟁일 것 같소? 정신못차리는 정객들의 부패와 우롱때문일 것같소? 안일한 학자들의 ……”
한참 동안 열변을 토하시던 끝에 단도직입적으로 내뱉은 한마디! 내 평생 두고두고 생각해봐도 일리가 있는 명언이었다.
“테레비 때문이오! 테레비! 테레비만 안 생겨났더라도 우리 민족이 이토록 타락하지는 않았을 게요. 인류는 앞으로 이 테레비 때문에 패망할 것이오!”
당시 나는 이 퉁명스러운 이 한마디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살다보니까, 이세상 저세상 다 돌아다니면서 생각해 보니 한창기선생의 그 한마디는 두고두고 생각해 볼 만한 명언이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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