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天下皆知美之爲美, 천하개지미지위미, |
하늘아래 사람들이 모두 아름다운 것이 아름답다고 알고 있다. |
斯惡已; 사오이; |
그런데 그것은 추한 것이다. |
皆知善之爲善, 개지선지위선, |
하늘아래 사람들이 모두 선한 것이 선하다고 만 알고 있다. |
斯不善已。 사불선이. |
그런데 그것은 선하지 않은 것이다. |
故有無相生, 고유무상생, |
그러므로 있음과 없음은 서로 생하고 |
難易相成, 난이상성, |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 이루며 |
長短相較, 장단상교, |
김과 짧음은 서로 겨루며 |
高下相傾, 고하상경, |
높음과 낮음은 서로 기울며 |
音聲相和, 음성상화, |
노래와 소리는 서로 어울리며 |
前後相隨。 전후상수. |
앞과 뒤는 서로 따른다. |
是以聖人處無爲之事, 시이성인처무위지사, |
그러하므로 성인은 함이 없음의 일에 처하고 |
行不言之敎, 행불언지교, |
말이 없음의 가르침을 행한다. |
萬物作焉而不辭, 만물작언이불사, |
만물은 스스로 자라나는데 성인은 내가 그를 자라게 한다고 간섭함이 없고, |
生而不有, 생이불유, |
잘 생성시키면서도 그 생성의 열매를 소유함이 없고, |
爲而不恃。 위이불시。 |
잘 되어가도록 하면서도 그것에 기대지 않는다. |
功成而弗居, 공성이불거, |
공이 이루어져도 그 공속에 살지 않는다. |
夫唯弗居, 是以不去。 부유불거, 시이불거. |
대저 오로지 그 속에 살지 아니하니 영원히 살리로다! |
1. 대만 고궁박물관으로 옮겨온 중국의 보물들(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已)
내가 타이베이에 유학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타이뻬이는 본시 포르모사, 고산족의 고향이다. 중국적인 냄새라는 것은 대개가 모두 모택동(毛澤東)에게 쫓겨온 국민당(國民黨)정권이 이주한 후에 새롭게 지어낸 것이래서 진정한 의미에서 그 땅의 전통이라 할 것은 별 것이 없었다. 다시 말해서 우리나라 경주(慶州)와 같은 고도를 찾는 흥취는 대만 땅 어느 구석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하나의 예외가 있었다. ‘꾸꽁’이라고 불리우는 고궁박물관(故宮博物館)이었다. 비록 한 건물 안에 들어있지만 이 고궁(故宮)에만 들어가면 중국문물(中國文物)의 향취를 흠뻑 들이킬 수 있다. 부패한 친미(親美)의 국민당(國民黨)정부가 모(毛)의 공산당(共産黨)에게 여지없이 깨져 거대한 대륙(大陸)을 포기하고 포르모사(포르투갈말로 ‘아름답다’ 라는 뜻이다. 1590년 명명)로 이주하면서도 포기 못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중국(中國)의 문화(文化)였다. 생각해보라! 호지명(胡志明, Ho Chi Minh)에게 쫓겨나는 아수라통의 월남정부가 월남의 고궁박물관을 먼저 옮긴다는 것을 생각할 수나 있는가? 중국 고대(古代)로부터 청대(淸代)까지에 이르는 6천 여년 동안의 60만점이 넘는 보물을 장개석(蔣介石) 정부는 남경(南京, 난징)으로부터 타이뻬이로 먼저 조심스럽게 옮기는 작업을 선행(先行)하고 나서야 비로소 군대를 퇴각시켰던 것이다. 문화에 대한 중국인들의 집념의 깊이를 헤아릴 수가 있다. 오늘날의 타이베이의 고궁(故宮)컬렉션은 그 대부분이 청(淸)나라의 대제(大帝) 건륭(乾降)황제가 수집해놓은 것이다.
나는 유학시절 주말에 심심하면 꾸꽁(故宮)을 가곤 했다. 그곳의 그윽하고 소조한 향기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고품(古品) 하나하나를 눈여겨 보고 있으면 온갖 상상의 실마리들이 피어오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컬렉션의 격조가 높았다. 그 속에 들어가기만 하면 나는 시간 흐르는 것을 몰랐다.
2. 대만박물관에서 만난 당현종 초상화, 그리고 양귀비
어느 날 나의 시선은 거대하고 웅장한 걸개그림에 멈추어 있었다. 당현종(唐玄宗)의 초상화였다. 매우 늠름하면서도 인자한, 그러면서도 섬세한 얼굴이었다. 아~ 이 자(者)가 바로 양가녀(楊家女)와의 로맨스를 흩날린 음악의 명인, 당명황(唐明皇)이란 말인가?
그런데 나의 시선에 들어온 그의 모습은 거구였다. 물론 황제의 초상화가 대강 거대하게 보이도록 그리는 것이 특징이긴 하지만, 하여튼 거구였다. 이 거구의 사나이와 그토록 애달픈 사연의 로맨스를 남긴 양귀비(楊貴妃, 양꿰이훼이)는 과연 어떤 미녀였을까?
요즈음 미녀(美女)라 하면, 호리호리하기 이를 데 없는 가냘픈 몸매에 깊은 눈매 오똑 선 콧등을 생각한다. 꽃으로 비하면 소심(素心)의 난향(蘭香)이라 할까? 그러나 나라는 모든 것이 성대(盛大)한 것이 기준이었다. 그 심볼이 소심(素心)이 아닌 모란이었다. 함박꽃과 같은 푸짐한 여인의 모습이야말로 나라 여인의 아름다움의 기준이었다.
양귀비는 요새 기준으로 말하면 ‘뚱보’였다. ‘뚱보’라는 너무 혹독한 표현을 쓰지 않아도 매우 통통한 볼륨이 있는 여인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그 거구의 현종(玄宗)과 로맨스를 즐길 정도라면 체력이 뒷받침되어야 할 것이다. 요새같이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깨질 듯 바스락거리는 몸매로는, 정감의 소통이 어려웠을 것이다.
3. 백거이가 노래한 현종과 양귀비
당나라의 감성적인 시인 백거이(白居易)는 양가녀가 처음 현종(玄宗)을
만나기 위해 발탁되는 순간을 「장한가(長恨歌)」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回眸一笑百媚生 | 새카만 눈동자 흘깃 그 뺨에 보조개 어른거리면 백 가지 교태가 생겨나고, |
六宮粉黛無顔色 | 후궁 뜰의 눈썹질은 아가씨들 얼굴 빛을 잃고 말았지. |
春寒賜浴華淸池 | 싸늘한 기운 가시지 않은 따사로운 봄별에 찬란한 여산의 온천 화청지에서 몸을 씻기웠네. |
溫泉水滑洗凝脂 | 따스한 온천물 그 기름진 하이얀 살갗을 스치며 미끄러지네. |
여기 ‘응지(凝脂)’라는 표현 속에서 우리는 포동통한 하이얀 뚱보의 몸매를 연상할 수 있다.
이렇게 시작한 그 아름다운 남녀 이야기도 전진(戰塵)에 휩싸인 피묻은 티끌로 끝나버리고 말았지…… 그 비극적 마외(역馬嵬驛)의 장면을 우리의 천재시인 천락(樂天, 러티엔)은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六軍不發無奈何 | 육군이 모두 말을 안 들으니 황제인들 어떨소냐? |
宛轉蛾眉馬前死 | 아~ 그 아릿다운 여인의 눈매 이리저리 비틀거리며 군마 발급 속으로 쓰러져 갔네 |
花鈿委地無人收 | 꽃다운 머리장식 흙바람 속에 흩날려도 아무도 주울 생각 하지 않고, |
翠翹金雀玉搔頭 | 취옥의 푸른 날개 금동이 참새, 옥비녀 즐비하게. |
君王掩面救不得 | 아아~ 군왕은 얼굴을 가리 우고 어쩔 줄을 몰라, |
回看血淚相和流 | 고개를 들려 그녀의 최후의 시선이 맞닿을 때 끝까지 남몰래 피눈물이 서로 흘러내렸지. |
4. 미인의 대표주자, 서시의 이야기
중국의 고전에서는 천하(天下)의 미녀로서 모장(毛嬙, 마오치앙)과 서시(西施, 시스)를 꼽는다. 그런데 이 서시라는 미녀는 바로 오월동주(吳越同舟)의 주인공, 월나라의 왕 구천(句踐)이 오나라의 왕 부차(夫差)에게 헌상한 여인이었다. 구천은 오왕 부차로 하여금 이 여자에 넋을 잃고 국정을 태만케 한 것이다. 결국 이 미인계로 오나라가 멸망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경국지색(傾國之色, 나라를 기울게 하리만큼의 아름다움)이라는 말도 생겨난 것이다.
혹설에 의하면 서시는 시골의 나뭇꾼의 딸이었는데, 그 천연의 아름다움을 간택하여, 꼭 『마이 페어 레이디(My Fair Lady)』에서 오드리 햅번을 훈련시키듯, 3년 동안, 피부를 가꾸게 하고, 고상한 말을 가르치고, 우아하게 걷는 것을 가르치어 그러한 천하(天下)의 미녀로 둔갑시켜 진상했다는 것이다. 부차는 진실로 서시를 사랑했을 것이다. 부차는 죽을 때 서시를 물에 빠트려 황천길에도 같이 데리고 갔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런데 이것은 장자(莊子, 주앙쯔)가 꾸며낸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天運」), 또 이러한 이야기가 전한다. 서시가 예뻤던 것은 바로 그녀가 폐병장이 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장자는 ‘병심(病心, 가슴을 앓았다)’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 아마도 이것은 요새 말로 튜버클로시스(tuberculosis), 즉 결핵증세에 가까운 것이었을 것이다. 사실 폐병을 앓는 여자는 예쁘기로 유명하다. 가냘프고 창백하며 항상 애수를 띠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시는 항상 가슴에 손을 대고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는 것이다[棒心而矉]. 그래서 ‘서시봉심(西施捧心)’이라는 고사가 생겨나게 된 것이다. 따라서 당대의 모든 미녀의 표준은 가슴에 손을 얹고 얼굴을 찡그리는 모습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추한 여자들까지 모두 서시흉내를 낸다고 그 못생긴 얼굴에다가 또 얼굴까지 찡그리게 되니까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그 추한 꼴을 보기가 괴로와 모두 달아났다는 코믹한 얘기들이 전한다. 농교반졸(弄巧反拙, 예쁜 흉내 내려다가 더 추하게 된다)!
이러한 얘기들은 모두 과연 우리가 생각하는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야기시킨다. 장자(莊子)는 「제물론(齊物論)」에서 이와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서시나 모장(毛嬙)ㆍ여희(麗姬)와 같은 미녀들, 아마도 요즈음 인기가 높다 하는 탤런트, 김희선과 같은 미녀들일까? 하여튼 이런 미녀들이 길거리를 걸어가면, 사람들이 졸졸졸졸 그 뒤꽁무니를 쫓아다닌다. 그런데 이 미녀들이 물가에 가면, 고기는 놀라 물속깊이 숨어버리고, 새는 팔짝 날개를 휘젓으며 창공으로 높이 나르고, 사슴은 보자마자 사생결단 죽으라고 도망간다[毛嬙麗姬, 人之所美也; 魚見之深入, 鳥見之高飛, 麋鹿見之決驟].
과연 무엇이 천하의 정색(正色, 미의 기준)이란 말인가?
5. 미의 기준과 서양미술사의 변화
고갱(Paul Gauguin, 1848~1903)이 그린 타히티의 여인들, 그 투박하고 무뚝뚝한 남태평양 섬의 여인들, 두터운 입술, 검은 얼굴에 무수통 같은 정강이에 퉁명스럽게 삐져나온 마당발…… 참으로 못생긴 모습이라 아니할 수 없겠지만 그의 붉은 색조와 함께 발하는 아름다움의 마력은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것이다. 맨하탄의 늘씬한 서구의 여인들이 그 고갱의 그림 앞에서 자신들의 아름다움의 초라함을 탄식하고 있다면 과연 무엇이 천하의 정색이란 말인가?
아름다움에 관한 인간들의 논의를 살펴보면, 아름다움을 인간 외적 사물의 모습의 문제로 보는 객관주의(objectivism)와, 아름다움을 인간 내적, 즉 인간이 사물을 인식하는 인식의 구조에 내장되어 있는 그 무엇으로 파악하는 주관주의(subjectivism)로 크게 대별할 수 있다.
그런데 서양은 희랍인들의 탁월한 미의 인식 이래 객관주의적 전통을 고수하였다. 그들은 아름다움이 어떤 이상적, 이데아적 형상에 있다고 보고 그 형상의 비율을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동양은 이미 노자(老子) 이래 고래(古來)로부터 객관주의적 미의 인식을 아예 포기하였던 것 같다. 그래서 고대(古代)의 벽화로부터 그러한 이상적 비율의 추구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서양에서도 그러한 객관주의적 전통은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1724~1804)의 미학에 오면서 비로소 주관주의적 전향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그리고 19세기를 거쳐 20세기에 이르면 미에 대한 다양한 생각들이 꽃을 피운다. 그것이 곧 서양미술사의 다양한 사조들로 나타나는 것이다.
6. 미(美)의 반댓말은 추(醜)가 아닌 오(惡)다
노자는 말한다. ‘천하의 사람들이 아름다움(美)의 아름다움됨(爲美)만을 안다(知). 그런데 그 아름다움이 추함(惡)일 수 있는 것이다.’
최소한 기원전 4ㆍ5세기 이전에 이러한 철학적 주제가 이미 충분히 논의되고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다. 이러한 논의는 실제로 서양에서는,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1724~1804) 미학의 전향을 거쳐 19ㆍ20세기에나 이루어지는 최근세의 논의들이기 때문이다.
노자의 언어는 경이롭다. 노자는 미(美)의 상대어로서 ‘醜(추)’를 사용하고 있지 않다. 미(美)의 상대어는 惡(오)인 것이다. 중국 고대어에서는 악(惡)을 모두 요새 우리가 생각하는 ‘악’으로 읽어서는 아니 된다. 악(惡)은 악이 아니라 오인 것이다. 오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싫음’이요, ‘추함’이다. 미(美)의 반대는 惡(오)요, 그것은 ‘싫음’이요, ‘추함’이다. 다시 말해서 ‘악’이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악은 악의 실체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것이 우리에게 ‘싫은’ 어떤 현상이요, 우리에게 ‘추하게 느껴지는’ 현상인 것이다.
왕필은 ‘미(美)라는 것은 사람의 마음이 나아가 즐기는 바의 것이요, 오(惡)라는 것은 사람의 마음이 싫어하고 미워하는 바의 것이다[美者, 人心之所進樂也, 惡者, 人心之所惡疾也].’라는 천하의 명주(名注)를 달아 놓았다. 이것은 서구라파의 윤리사상에서 20세기에나 다루게 되는 이모티비즘(emotivism)의 선구를 이루는 것이다. 실로 우리는 동양인들의 사유의 깊이에 대하여 경이로움을 금치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노자는 아름다움의 논의를 단지 미학적 가치로 분리시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가치론의 일반적 기저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미(美)의 문제는 선(善)의 문제와 분리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2장에서 ‘미지위미(美之爲美)’와 ‘선지위선(善之爲善)’이 동일한 문맥에서 병치되고 있는 이유인 것이다.
7. 선(善)의 반댓말은 악(惡)이 아닌 불선(不善)이다
선(善)이란 무엇인가? 과연 선(善)은 존재하는가? 선(善)이 존재한다면 선(善)의 상대(반대)인 악(惡)이 존재하는가? 이미 말하지 않았던가? 惡은 악이 아니라 오라고! 악(惡)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선(善)이 존재한단 말인가? 악(惡)이 ‘오’로서 미(美)의 상대어일 뿐이며, ‘악’은 근원적으로 존재할 자리가 없다면, 과연 선(善)의 상대 개념으로서의 우리가 쓰고 있는 ‘악’에 해당되는 것은 무엇인가? 이 재미난 질문에 노자는 매우 현명한 답안을 내리고 있다. 그것은 ‘불선(不善)’인 것이다.
선(善) | ⇎ | 악(惡) |
선(善) | ⇔ | 악(惡) |
선(善) | ⇔ | 불선(不善) |
그렇다면 ‘불선(不善)’이란 무엇인가? 불선(不善)이란 ‘선(善)이 아닌 것’이다. 선(善)이 아닌 것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선(善)이 아닌 그 무엇이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A에 대하여 B가 있다는 것과, A에 대하여 X라는 불규정자는 A가 아니라는 것과는 전혀 맥락이 다른 것이다. 철수에 대하여, 철수가 아닌 것이라는 것이, 곧 복동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선에 대하여 악이 있다는 것, 선과 악이 실체로서 동시적으로 한다는 것은, 현재 우리의 서양언어화된 개념적 틀 속에서는 사실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 누구든지 선의 반대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악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옛말에는 이러한 식의 대답이 나올 수가 없었다. 이것은 모두 20세기에 들어와서 생겨난 번역언어의 장난이다. 19세기 말까지만 해도,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선의 반대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악이라고 대답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냥 “선하지 못함[不善]”이라고 대답했던 것이다.
선인에 대하여 악인이 있고, 선행에 대하여 악행이 있고, 선신에 대하여 악신이 있고, 천사에 대하여 악마가 있고, 빛에 대하여 어둠이 있고, 창조에 대하여 종말이 있는 것은 모두 헤브라이즘의 전통 속에서 나온 특이한 발상이다. 이 특이한 발상이 과학주의와 더불어 20세기 인류의 보편적 사유방식으로 왜곡되어 정착된 것이, 바로 인류 20세기의 발전이요 불행인 것이다. 인류의 21세기는 바로 다시 10세기 이전의 노자(老子)로 되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8. 최세진과 왕필의 일치되는 사유방식
인간을 ‘악인’으로 바라보는 것과, ‘선하지 못한 인간’으로 바라보는 것은 너무도 큰 차이가 있다. 한 인간이 악인이 되면 그 인간은 악의 화신으로서 악의 실체가 되어 버리기 때문에 개전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선하지 못한 인간’은 항상 선하게 될 수 있는 것이다.
선에 대하여 악을 설정한다는 것과, 선에 대하여 불선을 설정한다는 것은 논점이 악과 불선의 차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상은 선 자체를 바라보는 생각이 전혀 다르다는 데 그 논의의 핵심이 있는 것이다. 악에 대한 선은 선 자체가 악처럼 실체화되어 있을 때만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불선에 대한 선은 선 자체가 불선처럼 실체화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선(善)이란 무엇인가? 노자는 선(善)을 먼저 말하지 않았다. 노자는 미(美)를 말했을 뿐이다. 다시 말해서 노자에게 있어서 선이란 미의 연장적 개념일 뿐이다. 즉 선은 미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선이 실체화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선은 곧 미라 말해도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럼 선(善)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천자문(千字文)』 식으로 선(善)에 훈을 달 때, ‘선 善,’ 이런 식으로 선(善)을 실체화시키지 않는다. 보통 ‘착할 善,’ 이렇게 말하지만 착하다는 것은 인간의 행위에 관련된 가치판단이며, 그것은 후대(後代)에 성립한 훈(訓)이다.
중종조에 나온 『훈몽자회(訓蒙字會)』(1527년)를 보면 선(善)은 ‘됴ᄒᆞᆯ션’이라 훈(訓)을 달았다. 즉 ‘좋을 선’인 것이다. 선은 ‘좋음’인 것이다. 좋음이라는 것은 인간의 감정의 일반상태와 관련된 것이다. 선(善)은 인간에게서 ‘좋음’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훈몽자회(訓蒙字會)』에 악(惡)은 뭐라 훈을 달았나 찾아볼까? ‘모딜 악’이라 했고 그 뜻을 ‘염(厭)’이라 하였다. 즉 싫음인 것이다. 악(惡)이란 ‘모진 것’이다. 모질다는 것은 좋지 않음인 것이다. 그 앞에 호(好)를 훈하여, ‘됴ᄒᆞᆯ 호’라 했다. 그리고 그 뜻을 ‘미야(美也)’라고 했다. 라는 것은 곧 좋아함인 것이다.
여기 16세기 초의 한국인 석학, 최세진(崔世珍, 1468~1542)과 중국 삼국시대의 천재 소년 왕필과의 놀라운 사유방식의 일치를 우리는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왕필은 뭐라 말했던가? 미(美)라는 것은 사람의 마음이 나아가 즐기는 바의 것이요[美者, 人心之所進樂也]. 미라는 것은 사람의 마음이 나아가 좋아하는 바의 것이다. 미(美)는 곧 호(好)요, 곧 선(善)이다. 악(惡)은 모짐이요 싫음이요, 곧 불선(不善)이다. 그것은 단지 ‘좋지 않음’인 것이다.
9. 언어의 비극과 방편적 존재(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較,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
현재 인간세에 궁극적으로 문제가 되는 악이라고 하는 것은, 모두 인간의 행위에 관련된 것이다. 들판에 핀 백합꽃과 독초를 놓고 선ㆍ악을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행위에 관한 모든 악은 사실 알고 보면 악이라는 실체가 아니라, 우리가 싫어하는, 즉 좋아하지 아니하는 행위들일 뿐인 것이다. 그것을 우리가 악(惡)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일 뿐이다.
선(善)은 미(美)로 환원될 수 있는 인간의 가치에 불과한 것이다. 여자가 예쁘다는 것은 선일 수 있다. 그러나 여자가 못생겼다고 악일 수는 없다. 악은 상식적으로 인간에게 부정적인 가치이지만, 못생김이나 추함은 그것 나름대로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가치일 수 있는 것이다. 고갱의 그림 속에서 추가 곧 아름다움일 수 있는 것처럼, 추는 항상 긍정적인 가치일 수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선(善)에 대하여 불선(不善)도 궁극적으로 긍정적인 가치일 수 있는 것이다.
윤리적 악은 없다. 윤리적인 불선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윤리적인 불선은 심미적인 불선처럼 긍정적인 가치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여기서 노자가 우리에게 말하려는 것은 인간의 가치언어가 도(道)의 실상을 나타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도를 도라고 말하면 그것은 이미 항상 그러한 도가 아닌 것이다. 즉 미(美)다. 오(惡)다, 선(善)이다 불선(不善)이다 하는 것이, 모두 이미 말해버린 도[可道之道]인 것이다. 그것은 존재의 실상이 아닌 것이다.
따라서 노자는 화해를 요청한다. 미(美)와 오(惡)가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실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선(善)이 불선(不善)과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에 있어서는 양자는 전혀 대립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서로 생하고, 어려움과 쉬움이 서로 이루며, 김과 짧음이 서로 겨루며, 높음과 낮음이 서로 기울며, 앞과 뒤가 서로 따르는 것[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較,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처럼, 단지 인간의 상대적인 즉 방편적인 개념구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장단상교(長短相較)’라는 말은 그 말을 뒤집어 번역하면, 장(長)과 단(短)이 실체적으로 먼저 존재하고 그 양자가 서로 비교된다는 뜻이 아니라, 장(長)과 단(短)이라는 개념 자체가 서로 비교될 때만이 상대적으로 파생되는 방편개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장(長)은 단(短)과 비교될 때만이 장(長)이며, 그것이 경장(更長)한 것(더 긴것)과 비교될 때는 오히려 단(短)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장(長)이 곧 단(短)이고, 단(短)이 곧 장(長)이므로 장과 단은 오직 상교(相較)의 관계에만 있는 방편적 설정이지, 절대적 설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유무(有無), 장단(長短), 고하(高下), 음성(音聲), 전후(前後), 바로 이러한 이가적(二價的) 상대성(相對性)이 곧 우리 언어의 본질이다. 언어는 이가적 분별(二價的 分別, bifurcation)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분별(分別) 이후의 사태는 실상(實相)의 여실(如實)한 표상이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분별적 언어만이 실상(實相)에 접근하는 인간의 유일한 통로라는데, 인간존재의 파라독스가 있는 것이다. 언어는 끊임없이 유동적인 존재를 고착시킨다. ‘말할 수 있는 도[可道之道]’는 항상 그러한 도[常道]가 아닌 것이다. 장(長)과 단(短)은 단지 상재(相載)되는 데서만 발생할 수 있는 상대적인 가변적인 방편임에도 불구하고, 장(長)은 장(長)으로서만 자기동일성을 주장하고, 단(短)은 단(短)으로서만 자기동일성을 주장한다. 이것이 곧 언어의 비극인 것이다.
인간과 신은 마찬가지로 서로 인식되는 관계에서만 생겨나는 상대적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인간으로서만 자기동일성을 주장하고 신은 신으로서만 자기동일성을 주장한다. 그리하여 신은 절대적인 권위자가 되어버리고 불완전한 인간은 그 권위에 복속하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도대체 인간 없는 신이 뭐 말라빠진 명태 대가리 만큼이라도 의미가 있는 것일까? 인간이 없는 저 황량한 죽음의 벌판에 서 있는 하나님이 뭔 말라빠진 허수아비란 말인가? 도대체 신없는 인간이, 과연 존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신과 인간은 이와 같이 언어적 관계로 표상되는 어떤 일체적(一體的)인 진여(眞如)의 양면(兩面)일 뿐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신을 신으로 고착시키려 하고, 인간을 인간으로 고착시키려 한다. 유(有)와 무(無)가 상생(相生)하고, 난(難)과 이(易)가 상성(相成)하는 것처럼, 인간과 신도 서로 생성(生成)하는 것이다. 신이 인간을 창조한다면 인간 또한 신을 끊임없이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
10. 성인은 귀가 밝은 사람(是以聖人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언어의 고착성과 분별성, 그리고 실체성을 전제로 할 때, 우리 인간은 언어야말로 도(道)를 표현하는 가장 불완전한 도구임을 자각해야 하는 것이다. 도를 도라고 말하면 도가 아니요,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이라 말하면 그것은 이미 아름다움이 아닌 것이다. 거대한 창공의 화폭을 수놓는 그 위대한 일몰의 황혼 앞에서 우리는 언어를 상실케 되는 것이다.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라 한다면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 함이 없어야 하고[無爲], 말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不言].
그렇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하고, 아무것도 말하지 말아야 하는가? 죽림칠현(竹林七賢)의 일인(一人)인 가야금의 명인이 가야금을 걸어놓기만 했다는데(가야금줄을 튕기는 것 자체가 하나의 언어며 분별이며 불완전이며 온전의 파괴며 국한이다), 우리 역시 그러한 선객(僊客)이 되어야만 이상적인 인간이 되는 것일까?
여기 ‘무위지사(無爲之事, 함이 없음의 일)’와 ‘불언지교(不言之敎, 말이 없음의 가르침)’의 주어는 ‘성인(聖人, 성스러운 사람)’이다. 백서(帛書) 갑본(甲本)에는 성인(聖人)이 ‘성인(聲人)’으로 되어 있고, 백서(帛書) 을본(乙本)에는 귀耳변에 입口만 있는 ‘𦔻’으로 되어 있다. 이 모두가 같은 음의 다른 가차자(假借字)인 것이다. 간본(簡本)에는 ‘성인(聖人)’으로 되어 있다. 이 모두에 공통된 것은 귀耳 글자인 것이다. ‘성인(聖人)’이란 한마디로 ‘귀가 밝은 사람’이다.
백서(帛書) | 간본(簡本) | |
甲本 | 乙本 | |
聲人 | 𦔻 | 聖人 |
성인이란 노자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현세의 지도자(Worldly Leader)이다. 그는 이상적 군주이며 동시에 노자가 말하는 도(道)를 실천하는 철인(哲人)이요, 인간으로 말하면 완벽한 도(道)의 구현자다. 그런데 이러한 군주는 성인이요, 성인이란 ‘귀가 밝은 자’다. 본시 ‘귀가 밝다’ 하는 것은 ‘신의 소리를 듣는다’는 의미다. 즉 옛날의 제정일치시대에는 신탁의 소리를 듣는 자들 즉 무당이 곧 성인이었던 것이다. 신의 소리를 인간에게 매개하는 자들이 모두 ‘성인(聲人=聖人)’이었던 것이다. 헤브라이즘의 전통에서는 바로 예언자들이 성인이었다. 예수도 물론 이러한 성인 중의 한사람이었다. 그러나 노자(老子)의 시대에 오면 그러한 종교적 함의는 탈락되고 철저히 비신화적 개념의 성인이 된다. 노자의 성인은 곧 백성의 소리, 도(道)의 지혜의 소리를 잘 듣고 구현하는 사람인 것이다.
따라서 『노자(老子)』 일서(一書)는 본시 성인(聖人)을 위하여 쓰여진 책이다. 범인의 개인적 수양을 위하여만 쓰여진 책이 아니다. 노자철학은 기본적으로 일종의 ‘임금의 학문[君主之學]’인 것이다. 그러나 군주(君主)의 의미를 ‘사회집단의 리더’로 볼 때, 사회는 무한한 층차를 지니므로, 수없는 계층의 수없는 리더들이 있을 수 있다. 『노자(老子)』 일서(一書)는 바로 그들에게, 모든 리더들에게, 리더십을 얻고자 하는 모든 인간들에게 설파된 지혜의 서인 것이다.
이 성인은 반드시 ‘함이 없음의 일[無爲之事]’에 처하고, ‘말이 없음의 가르침[不言之敎]’을 행하여야 하는 것이다.
11. 무위(無爲)와 불언지교(不言之敎)
무위(無爲)란 노자철학(老子哲學)의 핵심적 사상을 이루는 개념으로 통상 유위(有爲)와 대비되는 것이다. 무위(無爲)는 ‘함이 없음’이다. 그렇다고 무위(無爲)가 곧 아무것도 하지 않음(actionlessness)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무위(無爲)는 곧 ‘무위(無爲)’다. 무위의 ‘위’는 유위적이고 조작적인, 도(道)의 흐름에 배치되는 사특한 행위인 것이다. 그것은 위선적인 행위이며 거짓적인 행위이며 독선적인 행위이며 전체를 파악하지 못하는 부분적인 행위이다. 당연히 모든 사회의 리더는 그러한 조작적인 인간이 되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그리고 리더는 잔 일을 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작은 일에 집착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리더는 자기는 함이 없이 남으로 하여금 하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노자가 말하는 무위(無爲)인 것이다.
불언지교(不言之敎)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말을 내세우지 않는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진정한 리더는 자기를 말로 표현하지 않는다. 내가 IMF와 같은 국난을 극복했다고 외치지 않는다. 내가 위대한 리더라고 말로 외치지 않는다. 그는 소리 없는 실천의 가르침[不言之敎]을 실천(行)할 뿐인 것이다. 말로 자기를 나타낸다고 하는 것 자체가 이미 자기의 파산을 선고하는 것이다. 내면이 충만한 자들은 말을 앞세우지 않는다. 말 없이, 물 흐르듯, 그냥 흘러갈 뿐인 것이다.
12. 만물은 스스로 자라고 성인은 간섭치 않는다(萬物作焉而不辭)
‘만물작언이불사(萬物作焉而不辭)’는 백서(帛書) 을본(乙本)에 ‘만물석이불시(萬物昔而弗始)’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요번에 나온 곽점간본(郭店簡本) 갑본(甲本)에 ‘만물작이불시(萬物作而弗始)’로 되어 있다. 간본(簡本)이 백서(帛書)에 근접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두 판본의 일치에 근거하여 왕본(王本)을 수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王本 | 帛書 乙本 | 郭店簡本 甲本 |
萬物作焉而不辭 | 萬物昔而弗始 | 萬物作而弗始 |
그러나 그 뜻을 깊게 생각해보면 양자의 텍스트가 의미론적으로 상통(相通)한다고도 볼 수 있다. 작(作)과 석(昔)은 끝나는 운미(-k)가 공통되고, 사(辭)와 시(始)는 시작하는 음이 비슷하다. 모두 통가자(通假字)들인 것이다.
‘만물작이불시(萬物作而弗始)’는 ‘만물이 생성되어 자라나도, 성인은 그 만물을 시작케하지 않는다(The ten thousand things arise, but he doesn't begin them. Robert G. Henricks 역).’는 뜻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而)’다음 구문에서는 주어가 바뀐다는 것이다. ‘불시(弗始)’ 주어는 성인(聖人)이다. ‘불시(弗始)’의 시(始)는 ‘주도(主導)한다.’ ‘주재(主宰)한다.’ ‘제어(制御)한다’는 뜻을 갖는다. 즉 앞서서 이끈다는 뜻이다.
萬物作而弗始 | |
萬物作의 주어 | 弗始의 주어 |
萬物 | 聖人 |
전통적인 왕본(王本)의 ‘만물작언이불사(萬物作焉而不辭)’를 ‘만물이 스스로 지어지는데, 성인은 잔소리를 하지 않는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백본(帛本)ㆍ간본(簡本)의 ‘만물작이불시(萬物作而弗始)’를 ‘만물이 스스로 자라나는데, 성인이 주도하지 않는다’라고 번역하면 인위적으로 창도(倡導)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양자(兩者)는 상통할 수 있다. 그러나 왕본(王本)의 ‘불사(不辭)’보다는 백(帛)ㆍ간본(簡本)의 ‘불시(不始)’가 더 명료하다.
13. 세 개의 판본마다 조금씩 편차가 있다(生而不有, 爲而不恃, 功成而弗居. 夫唯弗居, 是以不去)
또 왕본(王本)의 ‘위이불시(爲而不恃)’가 백서(帛書) 갑본(甲本)에는 ‘위이불지야(爲而弗志也)’로 되어 있고, 백서(帛書) 을본(乙本)에는 ‘위이불시야(爲而弗侍也)’로 되어 있는데, 간본(簡本)에는 ‘위이불지야(爲而弗志也)’로 되어있다(甲木이 乙本보다 더 古本).
王本 | 帛書 甲本 |
爲而不恃 | 爲而弗志也 |
帛書 乙本 | 簡本 |
爲而弗侍也 | 爲而弗志也 |
왕본(王本)의 ‘위이불시(爲而不恃)’는 ‘성인은 만물이 잘 되어가도록 하면서도 그것에 기대지 않는다’는 뜻으로 보통 해석된다.
그러나 간본(簡本)과 백서(帛書) 갑본(甲本)의 ‘위이불지야(爲而弗志也)’는 매우 명료한 새로운 의미를 우리에게 전달해 준다. 이때의 ‘지(志)’는 구체적인 지향성(intentionality), 자기의 행위의 결과를 인위적으로 조작하는 어떤 방향성을 나타낸다. ‘위이불지(爲而弗志)’는 곧 성인의 무위(無爲)의 특질을 나타내는 말이다. 곧 성인은 행위를 하되, 자기의 행위가 어떤 인위적 지향성의 방향의 범위 내에 갇히도록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되, 함에 좁은 뜻을 두지 않는다” 정도로 번역하면 될 것이다.
재미있게도, 왕본(王本)에서 가장 중요한 테마로서 잘 인용되는 ‘생이불유(生而不有)’는 백본(帛本)에도 간본(簡本)에도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후대의 첨가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간본(簡本)은 왕본(王本)의 ‘공성이불거(功成而弗居)’에서 공(功)이 빠져 있다. 그리고 ‘작이불시(作而弗始)’, ‘위이불지(爲而弗志)’, ‘성이불거(成而弗居)’는 세 개의 파라렐리즘(parallelism)을 형성하는 구문이 되어 마지막의 ‘부유불거야 시이불거야(夫唯弗居也, 是以弗去也)’와 연결되고 있다. 아마도 이 간본(簡本)의 모습이 가장 오리지날한 『노자(老子)』 2장의 모습에 근접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백서(帛書) 갑(甲)ㆍ을본(乙本)에는 이 구문이 재미있게도 ‘성공이불거야(成功而弗居也)’로 되어 있다. 그 뜻은 대차가 없다.
14. 생이불유(生而不有)
금세기 영국의 철학자 버트란드 럿셀(Bertrand Russell, 1872~1970)경은 우리나라의 선남선녀들이 일본 제국주의의 질곡 속에서 처절하게 독립만세를 부르고 있을 때, 유관순 누나가 서대문 형무소에서 모진 고문을 받고 있을 즈음, 북경대학(北京大學) 철학과에서 명강의를 휘날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노자라는 사상가는 도의 작용을 ‘소유없는 생산(production without possession), ‘자기 주장없는 행동(action without self-assertion), ‘지배없는 발전(development without domination)이라는 세 마디로 압축해서 묘사하고 있다.
이 말 속에서 우리는 사려 깊은 중국인들이 자신의 삶의 목표를 바라보는 매우 기본적인 개념의 틀을 꺼집어 낼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이 참으로 우리 서양의 백색인종들이 자신의 삶을 인식하는 가치의 틀과는 너무도 다른 것이라는 것을 시인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소유, 자기주장, 지배, 이것은 서양인들이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열렬히 추구하는 가치의 전범이다. 이 가치의 전범들을 니이체는 하나의 철학으로 숭고한 듯이 건립하여 놓았다.
그런데 이 니이체의 제자들은 독일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The Problem of China, p.194
여기서 럿셀이 말하고 있는 ‘소유 없는 생산(production without possession)’은 ‘생이불유(生而不有)’의 번역이고, ‘자기 주장없는 행동(action without self-assertion)’은 ‘위이불시(爲而不恃)’의 번역이고, ‘지배없는 발전(development without domination)’은 ‘장이부재(長而不宰)’의 번역이다.
‘생이불유(生而不有)’가 비록 간본(簡本)에 나오지 않고 있지만 그것은 노자 사상을 대변하는 가장 중요한 개념이다.
인간존재의 최대비극은 바로 자기가 생(生)하는 모든 것을 자기가 소유하려는데 있다. 자식을 낳아도 자식을 ‘내 자식’이라 하여 내가 소유하려 하고, 내가 깨우쳐 얻은 지식은 ‘내 지식’이라 하여 나만 소유하려고 애쓴다. 내가 애써 만든 단체를 ‘내 덕분에 이루어진 단체’라 하여 내가 좌지우지하려 하고, 내가 이룩한 가정을 ‘내 집’이라 하여 그 속에서 왕노릇하려고 애쓴다. 인간의 모든 행태가 이러한 소유의 패턴 속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물을 보라! 풀 한 포기도 새로 솟아나게 한 새싹을 헌싹이 소유하려고 하지 않는다. 새싹은 헌싹에 의하여 소유되지 않기 때문에만 또 다시 새싹을 낳을 수 있는 것이다. 헌싹이 새싹을 소유하면 그 새싹은 끊임없이 생성할 수 있는 길을 차단당하게 되고 곧 시들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15. 생이불유(生而不有)와 공성이불거(功成而弗居)
‘생(生)하되 생(生)한 것을 소유하지 않는다[生而不有].’는 노자사상인 동시에 럿셀경이 말했듯이 우리 동방인(東方人)의 지혜의 가장 근원적인 패턴이며 삶의 태도다. 후대의 모든 ‘무소유’를 말하는 불교적 사유가 바로 이 ‘생이불유(生而不有)’적인 노자사상의 틀 속에서 전개된 것이다.
‘생(生)하되 생(生)한 결과를 내가 소유하지 않을 때, 당연히 지배나 권위나 모든 고착적 가치가 성립하지 않을 것이다. 즉 생(生)은 끊임없는 생성(生成)의 과정임으로 그 과정의 한 시점이 소유되는 순간에 생(生) 그 자체가 멈추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생(生)이 아니라 사(死)다. 생(生)은 한 시점의 창조가 아니다. 생(生)은 영속(永續)되는 시점의 창조인 것이다. 그러므로 생이불유(生而不有)의 생(生)은 영원한 과정일 수밖에 없다. Life is a Process! 생명은 하나의 과정인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은 자기의 공(功)이 이루어져도 그 공(功) 속에 거(居)할 수가 없다. 여기 ‘거(居)’라는 것은 불교용어로 말하면 ‘집착(執着)’이다. 공(功)에 집착함이 없다. 그러므로 불거(弗居, 집착하지 않는다)하기 때문에 오히려 불거(弗居, 영원하다)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불거(弗居)와 불거(弗去)는 발음상으로 펀(pun)을 이루고 있다. 즉 비슷한 발음으로 다른 의미를 중첩시키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영원하고 싶어서 집착한다. 자기의 공(功)을 세워 그 공(功)을 영원한 고착적인 실체로 남기고 싶어서, 건물을 남기고 비문을 남기고 동상을 남기고 책을 남기고 온갖 흔적을 남긴다. 그러나 자기의 공(功)에 집착하는 순간에, 그는 이미 거(去)하는 것이다. 가버리는 것이다. 사라지는 것이다. 우리가 영원할 수 있는 길은 자신의 공(功) 속에 거(居)하지 않는 길이다. 레닌의 동상이 쓰러지고 스탈린의 흉상이 깨질 날이 있으리라고 얼마 전까지 누가 감히 생각이나 했겠는가? 이렇게 어리석은 것이 인간의 업이려니, … 한국의 지도자들이여, 깊이 깨달을지니, 내가 지은 모든 훌륭한 업을 나의 공(功)이라 생각치 말 것이다. 그것이 나의 공(功)이라는 생각이 없을 때만 오직 그대는 영원하리니…
16. 총론적 성격을 지닌 1~3장과 문제점
전통적으로 우리가 『노자』를 이해할 때, 노자사상의 핵심을 담은 부분으로서 왕본(王本) 제1장, 제2장, 제3장을 중시한다. 중국고전은 대개 『논어(論語)』와 같은 어록체가 아니고, 일관된 사상논저 형식을 가지고 있을 때, 제일 앞 장이 전체의 내용을 포괄하는 개괄적 총론의 역할을 하는 것이 통례이다. 『중용(中庸)』의 제1장 속에 『중용(中庸)』 전체의 내용이 압축되어 있다고 말할 수도 있고, 『대학(大學)』 제1장 속에 『대학(大學)』 전체의 내용이 다 들어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장자(莊子)』의 경우도 「소요유(逍遙遊)」나 「제물론(齊物論)」이 그러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 할 것이다. 『노자』의 경우도 물론 전통적으로 제1장이야말로 『노자』 전서의 내용을 압축한 총론적 장으로 『노자』의 가장 대표적 문장으로 꼽혀왔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은 최근의 고고학적 발굴로 인하여 크게 수정되지 않으면 아니 되게 된 것이다. 우선 1973년 겨울에 출토(出土)된 백서본(帛書本)에는 갑(甲)・을본(乙本)이 모두 「도덕경(道德經)』이 아니라, 『덕도경(德道經)』으로 되어 있다. 그렇게 되면, 현재의 제1장은 「덕경(德經)」 끝머리에 붙게 됨으로 꼭 45장 정도의 느낌이 든다(古本은 오늘과 같은 장의 구분은 없다). 그러니 그 중요성이 오늘의 1장과 같은 느낌이 들지 않을 것은 뻔한 이치이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사실은 1993년에 출토된 곽점간본(郭店簡本)에는 아예 제1장도, 제3장도 존재(存在)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곽점간본(郭店簡本)은 그것이 단순한 결락(缺落)이라고 볼 수 없는, 그것 나름대로의 정연한 통일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문제는 심각해진다. 간본(簡本)에는 「덕경(德經)」의 제1장이라고 할 수 있는 금본(今本) 제38장 ‘상덕부덕(上德不德)’ 장(章)도 존재(存在)하지 않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노자사상의 가장 핵심적 중추로서 중시해왔던 1장과 38장이 모두 노자사상의 오리지날한 층대가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된 것이다. 제1장의 내용은 우주론과 인식론에 관계되고, 제2장의 내용은 가치론에, 제3장은 사회정치철학에 관계된다고 말할 수 있다.
제1장 | 우주론(cosmology), 인식론(epistemology) |
제2장 | 가치론(axiology), 인성론(theory of human nature) |
제3장 | 사회론(social theory), 정치철학(political philosophy) |
17. 노자철학의 핵심, 가치론
간본(簡本)에는 금본(今本)의 제2장이 고스란히 들어가 있다. 간본(簡本)의 발견으로 우리는 이런 가설을 내려볼 수가 있다. 노자철학의 핵심은 가치론에 있었다. 즉 노자철학의 가장 오리지날한 측면은 우주의 도(道)에 관한 현학적(玄學的) 사유, 즉 객관적 세계의 궁극적 진리에 관한 포괄적 이해를 지향한 것이 아니라, 인성에 기초한 가치의 문제, 즉 수도(修道), 수신(修身)을 추뉴(樞紐)로 하는 인간론의 소박한 성찰이었다.
그리고 지나친 사회정치철학적 관심도 그의 일차적 관심은 아니었다. 물론 제2장의 내용이 이미 치세(治世)의 원리, 지도자의 가치관을 언급하고 있음으로 노자의 고층대의 사상에 이미 사회적 관심이 짙게 깔려 있는 것은 부인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노자철학의 발전경로는 다음과 같이 도식화할 수 있을 것이다.
가치론 axiology |
⇒ | 사회론 sociology |
⇒ | 우주론 cosmology |
간본(簡本)에 1장ㆍ3장이 없다고 해서, 이미 150년 후의 백서(帛書)에 나타나는 1장ㆍ3장의 내용이 간본(簡本)의 시대에 완벽하게 존재하지 않았다는 가설도 무리가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초본(抄本)의 전승이 달랐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최소한 전국초기로부터 말기에 이르는 『노자(老子)』에 대한 사람들의 이해방식의 변화를 상기(上記)와 같이 도식화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왕필(王弼)의 『노자(老子)』 이해방식은 지나치게 우주론화(化) 되어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18. 아름다움과 이분법에 대해
이 장의 첫머리에서 운운한 아름다움에 대하여 몇 마디 내 생각을 말하자면, 우리가 흔히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시각’을 중심으로 한, 외재하는 사물의 형상에 관한 것이다. 한 여자를 보고 예쁘다고 하는 것은 대개는 내 시각에 나타나는 감각의 구조상 외재적 형상이 표상하는 그 무엇에 관한 것이다. 그런데 아름다움이란 궁극적으로 나의 ‘느낌’일 수밖에 없다. 나의 느낌을 떠난 아름다움은 존재할 수 없다. 그런데 나의 ‘느낌’은 우선 시각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나의 느낌(Feeling)은 안(眼)ㆍ이(耳)ㆍ비(鼻)ㆍ설(舌)ㆍ신(身)ㆍ의(意) .... 시각으로부터 시작해서, 청각, 후각, 미각, 촉각, 개념적 인지 무의식적 아라야식(藏識)까지를 포괄하는 것이다. 눈으로만 아름답다고 해서 그 아름다운 느낌이 유지될 수는 없다. 그 여자와 같이 밥 먹고, 같이 자고, 같이 일상 생활하면서 느끼는 느낌은 전혀 다른 것일 수도 있다. 아름다움은 우리의 느낌의 총체적인 건강 속에서 고려되어야 한다. 이것은 나의 소박한 생각이다. 참고하시도록!
그리고 이 제2장에서 제기되었던 윤리적 2원성(ethical dualism)의 거부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20세기가 윤리적 2원성의 세기였다면 나는 21세기는 윤리적 비2원성(ethical non-dualism)의 세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윤리적 선ㆍ악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 매우 필요한 상식적 가치기준이다. 그러나 이 상식적 가치기준이 고착화될 때는 인간의 살아있는 현실이 윤리적 선ㆍ악의 판단에 예속되고 심지어는 인간 생명 자체의 파멸을 초래한다. 윤리적 선악의 판단은 인간의 판단 중에서 가장 천박한 판단이다.
이러한 판단을 우리는 항상 재고해보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악이나 선을 생각해보는 넓은, 포용적인 마음을 잃지 말아야 한다. 한 사람의 행위를 선과 악으로 구분 지을 것이 아니라, 반드시 선과 불선으로 구분 지을 것이다. 그리고 그 선과 불선은 궁극적으로 아름다움과 추함에 불과하다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 이것이 노자의 지혜의 가르침이다. 모든 종교분쟁도 내가 믿는 신만이 선신(善神)이고 다른 신은 모두 악신(惡神)이라는 생각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내가 믿는 신이 선신(善神)이라고 한다면, 다른 신(神)에게도 선(善)의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기껏해야 불선(不善)의 신(神)밖에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불선(不善)의 신(神)이라 해서 곧 악신(惡神)은 아니다. 불선(不善)의 신(神)일 경우, 내가 안 믿으면 그뿐인 것이다. 그러면 종교분쟁은 일어나지 않는다. 스바하(svaha,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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