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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와 21세기 - 21세기의 3대 과제 본문

고전/노자

노자와 21세기 - 21세기의 3대 과제

건방진방랑자 2021. 5. 7. 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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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세기의 3대 과제

 

 

1. , 건강, 디자인

 

 

지난 주 오스트랄리아 시드니에 다녀왔다. 세계 디자이너들의(ICSID, ICOGRADA, IFI 3단체) 총회가 열리는데, 나 보고 주제 강연을 하나 해 달라는 것이었다. 올 여름에 IFI(International Federation of Interior Architects/Designers) 워크숍이 서울에서 열렸다. 내가 디자인에 대해서 뭘 알까마는 우연한 기회에 주제강연을 간곡히 부탁하길래, ‘, 건강, 디자인(Soil, Health, Design)’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를 했다. 국제회의가 되어 놓고 보니, 영어를 제대로 할 줄 알면서도 좀 토속적인 냄새가 나는 사람을 고르다 보니까 나같은 사람이 적격이라는 생각이 드는지, 하여튼 요즈음은 그런 청탁이 적지 않다. 그런데 나 자신 또한 디자인에 대해 관심이 없는 것도 아니다. 눈뜨고 보는 것이 다 디자인이요, 내가 사는 집부터 입는 옷부터 이 글을 쓰고 있는 만년필까지 모두 다 디자인이니, 디자인에 대해 관심이 없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

 

그런데 많은 젊은이들이 디자인하면 무슨 밖에 있는 물건의 모양을 만드는 것으로 생각하고, 기껏해야 나 밖에 있는 공간(空間)을 칸막아 처리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 동양사상으로 말하자면 물건(things)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기()의 집적태며 불교식으로 말하자면 무아(無我), 즉 자기동일성을 지니는 실체성[]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무아(無我)들을 디자인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디자인이란 궁극적으로 나의 생각의 디자인이다. 나의 생각의 디자인이라는 것은 결국 내가 세계를 인식하는 인식의 디자인인 것이다. 자기 머리 속은 생각하지도 않으면서 컴퓨터 화면만을 들여다보고 앉아있는 디자이너들이 좀 한심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디자인의 철학적 기초라고 생각하는 시간ㆍ공간도 궁극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디자인이란 무엇인가?

 

하여튼 이런 복잡한 얘기들을 쉽게 풀어 주섬주섬 두어 시간 얘기를 했다. 그랬더니 그것을 들은 외국사람들이 내 강의가 너무 좋아 자기들만 듣기가 아깝다고 세계인들이 모인 총회자리에서 한번 다시 해달라는 것이다. 서양사람들은 좋은 것은 그냥 있는 그대로 좋다고 받아들이는 미덕은 확실히 우리보다 더 있는 것 같다. 요즈음 시간이 워낙 모자라 외유(外遊)를 한다는 것이 무리였지만, 세계의 미항(美港)으로 꼽히는 시드니(Sydney), 아니, 이색적인 또 하나의 남반구 대륙구경을 한 번도 한 적이 없기에, 초청을 수락했다. 그러나 사실 속마음으로는 좀 켕기는 구석도 있었다. 외국학회에 나가 일개의 학인으로서 내 논문발표하는 것은 해본 짓이지만, 세계인들이 이목을 집중하는 자리에서 대접받는 지도자의 모습으로 권위있는 연설을 한다는 것이, 한국말이라면 별 문제가 없겠지만, 아무래도 걱정이 되었다. 나는 당당히 2시간의 강연시간을 내놓으라고 호통을 쳤지만, 과연 영어로 세계각국의 청중들을 그 장시간동안 사로잡을 수 있을까? 하여튼 안해본 짓이래서 미지수의 부정적 결과를 고려 안할 수도 없었다. 말문이 확 막히면 어떻허나? 영어단어가 생각 안 나 떠듬거리면 어떻허나? 나라망신? 개망신? 평생을 외국어와 더불어 살아왔지만 아직도 외국어의 부담은 사라지지 않는다. 영어를 깊게 알수록 영어에 대한 절망감은 깊어져만 간다. 제기랄 내가 언제 이따위 고민하고 산 적 있나? 하여튼 단 위에 올라서서 생각하자!

 

 

우리나라 세종문화회관 규모보다도 훨씬 더 큰 시드니 컨벤션센터 전체를 빌려 행하여진 요번 총회의 회의실에서 나의 목소리는 울려 퍼졌다. 두시간 동안 미동도 없었다. 기침소리 하나 들을 수 없었다. 오직 낭낭한 나의 목소리만 울려 퍼졌을 뿐이다. 내가 생각해도 신기하게 영어가 잘 되었다. 아니 영어를 잘 했다기보다는, 단 위에 올라선 후 순식간에 나는 내가 외국어로 나 자신을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마지막, “인생이란 걸어가는 그림자, 인생이란 바보가 지껄이는 이야기.맥배드(Macbeth)의 독백을 끝으로 강의를 마쳤을 때, 모든 사람이 한둘씩 일어나기 시작했다. 곧 전 강의장이 기립박수의 열기 속에 휩싸이고 말았던 것이다.

 

말레이지아ㆍ싱가포르ㆍ인도 등지의 사람들도 나에게 달려와서 나의 강연이 동양인들의 프라이드를 높여주었다고 꼭 성자를 대하듯이 고꾸라지듯 절을 했다. 어느 임신한 오스트랄리아 여인은 뱃속의 아기가 감동을 받아 두시간 동안 계속 자기 배를 찼다구 죠크를 했다. 그리고 나와 사진을 찍으려고 사람들의 행렬이 길게 이어졌다. 하여튼 요번 여행은 강연의 성공으로 유쾌한 여행이 되었다.

 

내가 도착하자마자 그곳 오스트랄리아 시드니 동포들은 그들 나름대로 내 강연을 요청했다. 마침 그곳 현지의 교민언론연합체가 결성되어 있어서, 그 언론인협회 주최로 내 강연을 열겠다는 것이다(로바나, 개미스 후원).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내가 시드니에 도착한 것은 수요일 아침, 내가 떠나기로 되어있는 것은 일요일 밤이니까, 토요일 저녁밖에는 교민들이 모일 챈스(chance)가 없다. 그런데 그곳 우리 신문들이 대개 주말에 한번 나오는데, 토요일 아침에나 받아보게 되리라는 것이다. 미국과 달리 테레비ㆍ라디오 등의 채널도 확보되어 있지 않다. 더구나 요번 주말이 노동절 롱 위크앤드(Long Weekend)라는 것이다. 그리고 아직 시드니 교포사회가 역사가 짧고, 이런 사상강연같은 것은 전례가 없어, 몇 명이나 모일지 미지수라는 것이다. 부리나케 광고를 해도 삼사십 명 정도 올 것으로 예상을 해두는 것이 속 편할 것이라는 얘기였다. 그래도 최대규모로 잡아서 한 200명 예상하고 준비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한 명이 와 들어도 상관없다 했고, 수요일 저녁 그곳 현지 언론사 기자님들과 인터뷰를 했다.

 

 

102일 오후 7, 버우드여자고등학교(Burwood Girl's Highschool) 강당! 아내와 내가 탄 차가 어둑어둑한 수풀길을 지나가는데 꼭 개화기에 선교사집회에 몰래 몰래 사람들이 고깔을 뒤집어쓰고 몰려드는 듯, 한 두사람씩 강당 앞길로 물밀 듯이 모여들고 있었다. 매우 허름한 강당이었다. 강당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우리는 모두 얼얼한 충격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그 날 모여든 사람들이 500여명, 시드니 교민 사상(史上) 최대의 인파를 기록했다. 그리고 내 싸인을 받으려고 자기들이 집에 소장하고 있는 나의 책을 가지고 나와서 줄을 선 모습이 장사진을 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나의 저술가로서, 하나의 사상가로서, 생애에 이 이상의 기쁨이 어디 있으랴!

 

이날 나는 세시간 십분 동안 열변을 토했다. 이날 강연은 무아(無我)의 열정 그 자체였다. 강의가 끝났을 때 속옷부터 겉 두루마기까지 완전히 땀이 흠뻑 젖어 있었다. 기진맥진해서 곧바로 호텔로 돌아왔을 땐 오한이 났고 목구멍에서는 피가래가 끓었다. 그래도 유감이 없었고, 오랜만에 삶의 희열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늘씬하게 깊은 잠을 잤다. 내가 여기 21세기 인류의 3대 과제 운운하는 것은 바로 시드니에서 처음 설()한 것이다. 그날 시드니강연의 주제가 바로 이 3대 과제를 놓고 전개된 것이다. 나는 미래학 운운하는 학자도 아니요, 뭐 대단한 예언가도 아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우리일상의 지극히 상식적인 통념일 뿐이다.

 

나는 3대 과제로 다음의 세 가지 화해를 들었다. 그 첫째가 인간과 자연환경의 화해(the Harmony between Man and his Environment), 그 둘째가 종교와 종교간의 화해(the Harmony between Religions), 그 셋째가 지식과 삶의 화해(the Harmony between Knowledge and Life). 이것이야말로 곧 우리가 노자(老子)를 이해하는데 핵심적인 문제의식을 형성하는 것이다.

 

 

 

 

 2. 인간과 자연환경의 화해

 

 

수 년전의 일이다. 아프리카대륙과의 최초의 해후! 내가 탄 헬리콥타가 탕가니카 호수 북단의 호반의 푸른 초원에 내렸다. 내가 탄 헬리콥타가 검은 대륙에 착지하려고 접근을 시도할 때, 주변 동네의 어린아이들이 손을 흔들며 뛰어오는 모습이 어른거렸다. 바스라질 듯 해맑은 대기, 바다보다도 더 큰 호수, 호수를 병풍 친 밋밋하면서도 웅장한 산맥의 준령, 이 모든 것이 작열하는 태양빛 아래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에게 문화충격이랄까, 삶의 환희라고 해야 할까, 생명의 약동이랄까, 강렬하게 다가오는 것은 무엇보다도 내 주변에 바글거리는 까만 아동들의 얼굴이었다. 김서린 새벽 호면을 박차고 튀어 오르는 물고기들의 강렬한 몸짓보다도 더 투명한 빛을 발하는 그들 까아만 얼굴의 질점 하나 하나가 모두 인간의 태고적 발랄함과 원초적 순결성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것은 미대륙에서 경험하는 아메리칸 블랙들의 얼굴과는 전혀 다른, 도저히 언어로 형용할 수 없는 강렬한 생명의 발출이었다. 쵸코렡트를 던져주는 덩치 큰 깜둥이 지아이 아저씨들 트럭꽁무니를 열심히 뛰어다녔던 나의 추억이 바로 엊그제 같은데……, 카사바 베이 대통령 별장을 방문한 국빈이 되어 짙은 초록색 풀밭배경과 앙상블을 이루는 흑인 아동들의 얼굴에 열심히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사탕을 나눠주며 그들과 곧 친하게 되었다. 그리곤 그들의 손에 이끌리어 바로 옆에 있는 흑인마을을 방문할 기회를 얻었다. 마을이라고 해봤자 별로 크지도 않은 운동장 만한 황토벌 위에, 여인들이 물동이를 이고 모여드는 샘 펌프가 하나한 가운데 놓여 있고 그 주변으로 초가지붕의 아주 단순한 원통 모양의 막사들이 한 열 대여섯개 무질서하게 늘어져 있는 모습이었다.

 

 

그 황토 벽돌로 쌓아올린 원통모양의 담의 직경이래야 한 45메타될까? 그 지붕은 삿갓 모양으로 풀잎들이 이어져 있고, 그 위에는 호수에서 잡은 고기들을 건조하기 위해 척척 널려놓았다. 대문에 해당되는 네모난 구멍은 거적대기 같은 것이 드리워져 있었고 그 안으로 들어가 보니 가운데 직경의 3분의 2정도 만큼으로 하나의 사람키만한 칸막이 담이 처져 있었고 그 담 안쪽으로 나무 평상같은 것이 하나 놓여 있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부엌시설은 따로 없고, 큰 깡통 안쪽을 진흙으로 이겨 만든 화덕같은 것 하나, 그것이 취사시설의 전부였다. 빵은 배급받고, 그 깡통에 숯불 피워 지붕에 있는 건어물을 기름에 볶아 빵에 찍어 먹는 모양이었다. 잠은 그 평상 위에서 한 식구가 모두 같이 담요 한장 덮고 자는 모양이었다. 그것이 그나마 대통령관저 옆에서 보호를 받는, 그래도 제대로 된 한 모범적 마을의 모습이었다. 원시라든가, 빈곤이라든가, 미개라든가, 하는 말을 떠올리기 전에 나에게 충격을 준 사실은 인간의 삶의 양태의 단순성(Simplicity)이었다. 인간은 이렇게도 단순하게 살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러한 삶이 문명의 어느 구석에서도 체험할 수 없는, 발랄하게 약동치는 아동들의 모습을 연출해내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충격이었던 것이다.

 

나는 순간 나 자신의 리얼한 삶의 모습을 회상해보았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대부분 국민학교를 다녔지만, 저 동구밖 눈들에 있는 서당에 다니는 아이들도 있던 그런 시절이었다. 그 당시 대부분의 서민들이 살고 있던 초가집 단칸방의 모습은 내가 지금 목격하고 있는 아프리카초원의 가옥과 별 차이가 없었다. 우리는 겨울이라는 풍토때문에 벽이 두껍고 부뚜막 부엌이 따로 있었을 뿐이다. 그때만 해도 세멘트는 구경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아낙들의 최고의 꿈은 솥이 걸린 황토 부뚜막이 먼지가 안 나는 세멘으로 덮이는 것이었다. 그들은 기름 때를 묻혀 부뚜막의 흙을 굳혔지만, 그것도 몇년 지나면 다시 만들고 다시 만들고 해야만 했다. 수수깡 엮어 흙을 발라놓은 벽은 갈라져 구멍이 숭숭했고, 종이를 발랐어야 흙과 떠서 그 사이엔 검댕이가 끼어 있었다. 방바닥은 황토를 바른 위에 다시 바를 세멘트가 없으니까 장판을 해봤자 뜰 것이고, 아예 왕골자리나 삿자리를 깔았다. 겨울에 왕골자리 단칸방에 시커먼 광목 솜이불 하나 깔아놓으면, 요도 없이 그 밑으로 엄마ㆍ아버지ㆍ아기 ㆍ 메느리 할 것 없이 모두 부채살 모양으로 쑥쑥 들어가 잤다. 애기가 똥이라도 싸는 바엔 아무리 똥을 닦아내어 봤자 왕골 사이사이로 똥은 박히게 마련이다. 그것이 썩고 썩어 몇년을 지나게 되면 벽에 주렁주렁 매어놓은 메주냄새와 절묘한 하모니를 이루어 매쾌한 내음새를 스물네시간 발했다. 기절초풍 할 가관은 애기가 똥을 싸면 뒷마당으로 나있는 방문을 열어 강아지이름이라도 부르면 졸랑졸랑 방으로 들어온 강아지는 열심히 애기똥을 핥아먹고 나갔다. 그런데 이런 광경은 정말 우리시대에는 흔히 체험하는 상식적인 것이었다. 자연과 더불어 살았던 우리의 모습, 가끔 산토닌이라도 먹으면 똥구멍으로 삐질삐질 나오는 회충을 손으로 잡아 빼는 것은 물론, 가끔 아악 소리를 지르면 목구멍으로 지렁이같은 회가 한마리 요동을 치며 입안의 허공을 널름 거렸다. 저녁에 옷을 벗어 놓으면 엄마는 난닝구 이슴매 사이로 기어다니는 이를 잡느라 똑똑 거리고, 목양말은 매일 빵꾸가 나서 전기다마에 끼우고 기우느라 여인들은 손놀림을 쉴 수가 없었다. 아침이면 고운 참빗으로 머리에 낀 서캐를 긁어내느라 정신이 없고, 머리맡 윗목에 놓은 걸레는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우리 어릴 때만 해도 우리 삶 속에 전기라는 에너지가 거의 활용되지 않았다. 냉장고가 우리 삶에 진입한 것은 겨우 70년대였다. 서민들은 등잔불 속에서 살거나, 전기가 들어온다 해도, ‘보통이니 특선이니 해서 하룻밤에도 전기가 수십번 나갔다. 왜 특선인데 이렇게 전기가 나가냐고 전기회사에 전화걸어 항상 호통치시던 아버지의 모습과 음성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극장에 가도 영화를 한 번에 보는 예는 없었다. 꼭 전기가 나가기 때문에 영사기가 멈추었고 그럼 발전기를 돌려 다시 영사기를 돌려야 했다. 그러나 전기가 들어오면 발전기를 껐다가, 또 다시 전기가 나가게 되면 또 블랙아웃! 너무도 멀리 사라진 듯한 우리의 삶의 모습 이건만 이것은 불과 수십년전 우리 삶의 상식적 풍경들이었다.

 

내가 국민학교 56학년 때 비로소 형광등이라는 신기한 작대기 전구가 선을 보이기 시작했고, 그 때쯤 전 읍내에 한 가구 정도 테레비라는 꿈같은 현실이 부잣집 안방을 장식하기 시작했고 밤이면 온 동네사람들이 그곳으로 마실을 왔다.

 

간편한 볼펜도 중학교 때나 등장하기 시작했고, 학교에선 아동들 사이에는 누가 어떻게 연필을 더 예쁘게 깎느냐는 경기대회가 매일 열리는 판이었다. 말만 듣던 수세식 변소의 존재는 온양 온천관광호텔에서나 확인할 수 있었고, 슈악 맴도는 변기의 소용돌이가 도대체 어떻게 생길 수 있는지 너무도 희한한 광경을 바라본 듯 감격스럽게 불알을 털럭이며 미소지어야 했다. 집안에서 항상 더운물이 수도꼭지에서 나온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비현실이었다.

 

 

자아! 한번 생각해보자! 바로 몇년전의 우리의 삶의 모습으로 한번 되돌아가 보자! 정확하게 지금으로부터 한 사오십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 삶의 기본 양식이나 보편적 주거환경이, 고조선시대의 사람들의 주거 방식이나 삶의 양식과 거의 차이가 없다는 것을 발견한다. 단칸방짜리 온돌방식의 가옥구조가 우리인간의 문명의 세기 사천년 동안 거의 변화없는 연속성을 과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40년전까지만 해도 우리의 삶은 4,000년 전의 이 땅의 사람들의 삶과 별 차이가 없었다. 마르코 폴로(Marco Polo)가 목격한 중국문명의 찬란함은 당대의 서양의 문명에 비해 더 화려한 것이었다. 이미 청자개와를 해올린 신라의 고도 서라벌 경주(慶州), 불국사나 석굴암의 모습만 연상해도 그 웅장함과 단아한 문명의 아취는 쉽게 그려볼 수 있다. 그러나 그 문명들은 결코 우리가 이 땅에서 한 40년 동안 자연을 착취한 방식으로 에너지를 사용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즉 대중적인 인간 삶의 기본적인 연속성이 크게 흩트러진 적은 없다는 것이다. 그 연속성은 인간과 자연의 조화라는 화해의 연속성이었던 것이다.

 

20세기 인류사를 특징 지우는 희대의 사건은 20세기를 통하여 기술(테크놀로지)과 과학(사이언스)이 본격적인 랑데부(Rendezvous)를 시도했다는 사실이다. 많은 사람이 기술과 과학을 동일한 것으로 착각하고 기술과학이니, ‘과학기술이니 하고 무분별하게 말을 뭉뚱그려 사용하지만, 과학과 기술은 개념적으로 확연한 구분이 있는 것이다.

 

기술이란 본시 삶의 예술(the art of living)의 모든 것을 지칭한다. 즉 기술이란 살아가는 방편으로서 필요한 모든 예술 즉 기예(테크네, Techne)를 말하는 것이다. 까치가 휘엉청거리는 나뭇가지 끝에 태풍에도 견디는 견고한 집을 짓는 것은 분명 까치의 기술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까치의 과학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과학이란, 인간의 지식을 특징 지우는 어떠한 측면이다. 과학이란 본시 기술과는 무관한 인간의 사변이성(Speculative Reason)의 산물인 것이다. 과학의 특징은 인간이 살고 있는 세계를 법칙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이때 법칙적이라는 것은 대강 희랍인들에 의하여 연역인 것으로 이해되었는데, 연역적인 인간의 사유의 방법의 대표적인 것이 바로 수학이라는 것이다. 더 이상 깊게 이야기는 하지 않겠는데, 이 과학이라는 것은 기술의 전제 위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다. 과학은 인간의 사변이 고도화되면서 생겨난 하나의 철학체계요, 지식체계와도 같은 것이다. 다시 말해서 원시인들이 토기를 굽는 것은 기술이다. 그러나 그들이 토기를 구울 때 과학이라는 연역적 전제를 꼭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흙과 불에 대한 과학적 일반이론을 전혀 몰랐을지라도, 놀랍게 훌륭한 토기를 구워내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류의 역사에서 과학과 기술은 따로 따로 발전한 것이다. 기술의 역사, 그 정밀성과 고도성을 운운한다면, 아마도 중국문명이나 우리 한국문명이 훨씬 더 서양문명을 앞질렀을 것이다. 몇백년 전만 거슬러 올라가도 이 지구상에서 도자기를 굽는 기술은 우리 조선의 기술이 세계 최고의 수준을 과시하고 있었다. 고려청자나 조선백자의 수준은 기술적 측면에서 분명 송대나 명대의 자기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다. 그리고 당대 유럽은 1,300가까운 가마의 기술을 상상할 수도 없었다. 나의 최근의 희곡작품인 , (1999611~29, 동숭동 문예회관 대극장 초연)의 내용이 말해주듯이, 일본의 아리타 야키라(규슈 사가현 이마리에서 탄생한 자기)든가 사쯔마 야키(薩摩燒, 가고시마에서 탄생한 자기)가 모두 정확하게 당대 일본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우리나라의 고도의 불의 예술이 전수되어 발전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금속활자 활판인쇄술만 하더라도, 서양사람들이 아무리 구구한 이설을 내어도 소용없을 정도로, 명백하게 그 자체로서 당대의 최고ㆍ최초의 기술이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고려시대에 이미 성행했던 주자(鑄字) 인쇄는 차치하고서라도, 세종조의 갑인자(甲寅字) 같은 것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도무지 그 아름다움에 도취하여 눈을 뗄 수가 없을 정도로 정치하고 단초로운 품위가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우리나라 조선조의 목공예품을 보아도 그것은 디자인적으로나 크래프트맨십(craftsmanship)의 정밀성으로나 가히 세계 최고의 가품들이다.

 

그런데 이렇게 명백히 세계최고의 기술의 대국인 조선의 후손들의 나라인 대한민국은 왜 이다지도 기술의 시대에 뒤진 모습을 하고 있는가? 왜 테크놀로지에 있어서 조차 일본의 꽁무니도 따라가기 어려운 수준에 머물고 있는가? 바로 여기에 대답할 수 있는 결정적 열쇠가, ‘과학과 기술의 랑데부라는 이 한마디에 있는 것이다. 우리가 자부하던 과거의 찬란한 기술은 곧 과학의 전제 없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것은 삶의 방편으로 개발된 것이다. 그것은 삶의 예술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소위 개화를 통하여 경험해야만 했던 서양 콤플렉스는 바로, 과학과 기술이 본격적인 랑데뷰를 시작하여 구성한 새로운 문명에 대한 콤플렉스였던 것이다.

 

 

19세기초까지만 하더래도 동양과 서양은 소위 과학기술문명 전반에 있어서 그리 큰 차이를 보이는 문명의 양태들이 아니었다. 서양 역시 우리보다 앞선다 할 것이 별로 없는, 과학적으로, 의학적으로, 종교적으로 매우 미신적인 수준에 머물렀던 그런 문명이었다. 그런데 산업혁명이래 서양의 문명의 모습은 완전히 그 이전과는 다른 단절의 양상을 과시하기 시작했다. 기술속으로 과학이 진입하고, 또 과학속으로 기술이 진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어렸을 때 동네에 가끔 강냉이를 튀기는 아저씨가 오면 흥미진진하다. 쌀토락이나 강냉이나 누룽갱이 말린 것, 아무거나 갖다 주기만 하면 기다란 쇠통에 집어놓고 불위에 빙글빙글 돌리는 그 태연스러운 모습을 바라보는 것도 재미있지만, 한참을 지난 후 거대한 철망통을 씌우고, 으앗! 철통같이 닫힌 아구리를 지렛대로 후악 제치는 순간! 우리는 얼마나 간이 콩알 만해져 가지고 고사리손으로 귀를 막고 몸을 옹크려야 했던가? 갑자기 구수한 냄새가 천지에 진동을 하고 망탱이 주변에 떨어진 강냉이라도 주어먹을 국물이 있을까 하고 몰려드는 어린아이들! 뻥튀겨진 변모된 쌀보풀의 모습을 바라보는 우리 아기들의 눈은 경이와 호기심에 찬 그런 눈이었다.

 

과학과 기술의 랑데뷰! 이것은 순식간에 우리가 살고 있는 문명의 모습을 뻥 튀겨 놓았다. 이미 예전의 쌀토락이 아니고 예전의 누룽갱이가 아니다. 이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노름인 것이다. 과학의 성과는 놀라운 기술의 진보를 가져 왔다. 기술의 진보는 놀라웁게 우리의 과학적 사유의 영역을 넓혀갔다.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게 되고, 개발의 영역이 아니던 것이 마구 개발될 수 있게 되고, 인간사유의 대상조차 아니었던 것들이 마구 인간 사유의 영역 속으로 들어왔다. 공상이 마구 현실로 변모해갔던 것이다. 꿈이 현실로 된다는 것은 매우 즐거운 것이다. 매우 기쁜 것이다.

 

그러나 인류는 이 기쁨에 도취하여 매우 중요한 사실을 망각했다. 그들은 꿈 그 자체를 하나 둘 잃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꿈은 무한히 꿀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 그 자체가 하나의 망상이요, 인간의 능력에 대한 지나친 신뢰다. 꿈의 상실은 인간 그 자체의 도덕적 파멸인 것이다.

 

 

다시 한번 옛날로 돌아가 보자! 40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의 일상적인 현실적 삶이 4,000년 전의 삶의 양태와 연속성을 과시하고 있었다는 그 사실은 바로, 40년 동안의 변화가 4,000년 동안의 연속성을 근원적으로 단절시켜 놓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4,000년 동안 유지해왔던 옥수수 알갱이가 불과 40년 동안에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는 전혀 다른 성질의 강냉이로 뻥튀겨져 버린 것이다. 그 뻥 튀김의 실체가 바로 내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과학과 기술의 랑데뷰라는 사건이다. 과학은 물론 우리 조선민족의 창안이 아니다. 그것은 희랍인들의 놀라운 사변 이성이 이룩한 인류의 쾌거의 씨앗이 르네쌍스( Renaissance) 이래 발아한 것이다. 우리는 20세기를 통해 단지 그것을 정확하게 배울려고 힘썼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서구라파문명이 두세기 동안 달성한 것을 곧 사오십년 안에 달성하려고 몸부림쳤던 것이다. 그것이 과연 달성된 것인지 안된 것인지는 지금 내가 단안을 내릴 수는 없다. 그러나 외면적으로 우리의 삶의 변화는 최소한 그 과학문명을 이룩한 주축의 문명의 삶의 양태의 변화보다도 더 철저하고 근원적이고 더 그 변화의 폭이 큰 것이다.

 

4,000년 동안 인간이 건드릴 수 없었던 성역이 40년 동안에 무너졌다면 이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연의 에너지를 문명의 에너지로 전환하는 방식이 여태까지의 인류의 문명사의 어떠한 방식과도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졌으며, 그 에너지의 전환이 바로 모든 에너지의 근원을 고갈시키고 파괴시키고 있다는 가공스러운 결과인 것이다. 자연의 에너지란 천지의 에너지며, 이 천지의 에너지란 곧 생명의 에너지인 것이다. 자연의 에너지의 고갈이나 파괴는 곧 생명의 고갈과 파괴를 의미하는 것이다.

 

저 사막에 우뚝 서 있는 스핑크스나 피라밋은 한없이 신비롭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가 지구상의 문명의 소치라고 말한다면 지금도 풀 수 없을 정도의 어떤 문명에너지의 비약적 형태를 가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나일의 사막 위에 아무리 피라밋이 수백개 들어섰다 할지라도 지구 전체의 기상상태를 파괴시킬 만한 환경의 오염이나 생태의 변화를 초래한 바는 없다. 피라밋이나 만리장성은 인간의 인위적 장난의 극치라 말해도, 그것은 지금도 묵묵히 관광객의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는 고요한 자연의 돌더미일 뿐이다. 그러나 63빌딩 하나가 저지르고 있는 하천의 오염은 결코 묵묵한 한강의 석양의 아름다운 반사로 가리워질 수 있는 그러한 것은 아닌 것이다.

 

밥을 급작스레 먹으면 체하는 것은 정한 이치다. 그리고 조금씩 먹지 않고 과식을 해도 반드시 부작용은 뒤따른다. 소식(少食)을 하거나 적당히 먹어서 나쁠 것이 없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이지만 가련한 인간은 그것 하나를 지키지 못한다. 맛있으면 과식하게 마련이고, 과식하면 설사나 배탈의 부작용이나, 장기적으로는 비만ㆍ고혈압ㆍ당뇨 등의 지병이 생기게 마련이다.

 

4,000년 동안 건드리지 않았던 성역들을 40년에 다 건드려 버렸다면, 4억 만년 동안 순결한 처녀의 살결처럼 인간의 때가 묻지 않았던 도봉의 만장봉이 불과 몇십년 사이에 알피니스트(Alpinist)들의 핫켄이나 볼트, 온갖 인공확보물로 상처투성이가 되었다면, 해방 후 불과 450년 동안에 과학과 기술의 랑데뷰로 인한 산업사회의 진보가 우리 문명의 모습을 되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뻥튀겨놓았다고 한다면, 이러한 역사의 과식ㆍ과속ㆍ과욕이 여러 가지 병적 부작용을 초래할 것은 뻔한 이치인 것이다.

 

 

요즈음 사방에서 지진이 터지고 있다. 일본에서 L.A.에서, 중국에서 터키에서, 파키스탄에서, 그리스, 대만에서…… 어마어마한 인간세의 불행을 초래하는 규모로 여기저기서 지진이 폭발하고 있는 것이다. 지진의 발생은 역시 지각의 이동이라는 지질학적 법칙의 사실에서, 그 개연성을 지배하는 일반론에서 그 원인을 논구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가 천지(天地)를 하나의 신명체(神明體, 가이아, Gaia)로 본다면, 거대한 하나의 살아있는 생명체로 본다면, 우리는 우리의 신화적 상상력을 여기 도입해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이 지구(地球) 상에 건설한 문명이 오죽이나 형편없는 것이었으면 저렇게 지신(地神)의 진노를 불러일으켰을까? 얼마나 지신(地神)을 화나게 만들었길래 자신의 몸뚱이를 더럽힌 저 문명의 장난을 저렇게 털어버리실까? 물론 지각의 판들(Plates) 간의 충돌은(요번 대만지진은 북쪽의 두꺼운 유라시안 판[Eurasian Plate]이 필리핀해 판[Philippine Sea Plate]을 밀어덮쳐 생겨난 것이다) 예측불가능한 개연적 사태이며 지구내적 조건과 더 인과적으로 밀착되어 있는 사태일 것이지만 그러한 변화조차 단순한 해프닝으로 볼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 일산ㆍ분당지구에 단 정도의 지진이라도 발생한다면? 삼국사기(三國史記)를 보면 우리나라 또한 지진이 잦은 나라로서 작고 큰 주기적인 지진의 사례가 계속 등재(登載) 되어 있는데? 과연 안전할까? 지신(地神)의 진노? 우리는 지장보살님께 무어라 해야 할까? 지신의 진노?

 

진노에 필요한 것은 화해의 요청이다. 여기 인간과 天地와의 화해, 인간과 자연과의 화해, 인간과 그의 환경과의 화해라는 21세기의 제1주제가 등장하는 것이다. ()ㆍ지()ㆍ인()을 일컬어 삼재(三才)라고 한다면, ()이라는 일재(一才)는 천()ㆍ지()의 이재(二才)에게 화해를 요청하는 수밖에 없다. 천지(天地)의 멸망은 곧 인()의 멸망이기 때문이다. 단군 이래 4,000년 동안의 연속성을 우리 한민족이 불과 40년 동안에 불연속성으로 바꾸어 놓았다면 21세기 우리문명의 과제는 너무도 명약관화하다. 이제 우리는 그 40년의 죄업, 그 과욕과 과속과 과식과 과용의 부작용을 해소시켜야 하는 과제상황을 떠안고 있는 것이다.

 

 

 

 

 3. 종교와 종교간의 화해

 

 

다음의 주제는 종교와 종교간의 화해(the Harmony between Religions).

 

얼마전에 참으로 놀라운 기사를 하나 읽었다. 한겨레신문에 실린 현각(女覺)이라는 이름의 외국인 승려의 컬럼이었다(1999928일자). 현각은 얼마전 KBS의 다큐멘타리, 만행이라는 프로그램의 주인공으로도 우리에게 낯익은 인물이었다. 해맑은 얼굴, 거침없이 말하는 그의 명료한 자세가 수도인의 기품을 물씬 풍긴다. 미국 동부의 명문가에서 태어나 하바드대학에서 신학ㆍ철학을 공부한 나의 후배이기도 한데 참 사려 깊은 인물이다. 그런데 그 컬럼의 제목이 화계사의 불이었다. 얘기인 즉, 기독교 광신도들이 화계사가 마귀사는 곳이라고 여러차례 와서 몰래 방화를 한 사실이 밝혀졌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배타적 전도주의(the exclusive evangelism)가 이 지경에 이르렀다면 과연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멧세지가 어디에 있는 것인지 아연실색해지지 않을 수 없다.

 

화계사하면 우리는 숭산스님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숭산스님과 나와의 해후에 관해서는 나의 책 나는 불교를 이렇게 본다(1989)에 소상히 밝혀져 있다. 세계적으로 달라이 라마와 더불어 4대 생불의 한사람으로 꼽히고 있는 숭산스님의 위대한 진면을 우리 국내 불교계나 종교계에서는 너무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그 분의 가치가 그렇게 세속적인 평가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새삼 왈가왈 할 건덕지가 없다. 그러나 나와 화계사와의 관계는 참으로 먼 옛날, 나의 영혼이 순결한 하나님의 은혜 속에 감싸여져 있었던 그 푸릇푸릇했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화계사는 바로 내가 다닌 한국신학대학에서 엎드리면 코닿는 이웃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한국신학대학 입학원서를 사러 처음 방문했을 때 생각이 난다. 수유리 종점 못미처 마찻길 같은데서 뻐스를 내리면 그 신학대학 들어가는 길은 미루나무가 일렬로 쪼르란히 서 있는 아주 시골 동구밖 기다란 논두렁같이 생긴 그런 길이었다. 그 미루나무 길을 따라 한참을 울창한 북악기슭 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탁 트인 화창한 공간에 아주 아담한 금잔디의 동산이 나오고 그 동산위로 하이얀 니은자 모양의 건물이 우뚝 서 있었다. 그 우뚝 솟은 탑꼭대기에는 히브리어로 임마누엘이라는, 조형적으로 참 인상깊은 글씨가 눈에 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이다. 앞 교문을 들어서자마자 자그마한 다리가 있었는데 그 다리밑으로는 아름다운 개울이 졸졸 흘렀다. 그 개울은 바로 화계사를 돌아 흘러내리는 수유계곡의 청정한 물이었다.

 

그 하이얀 임마누엘 탑을 들어섰을 때, 나는 갑자기 어떤 광채에 쏘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까만 두루마기를 입은 어떤 노신사가 우뚝 서 있었다. 흰 동정에 옅은 뼈테 안경을 쓴 얼굴에서 발하는 빛의 느낌이 나를 어지럽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키가 훤칠했고, 얼굴은 웃음이 만면하고, 추운 겨울이었지만 화색이 화창한 봄날씨보다 더 환했다. 옆에서 누구와 유쾌히 대화를 나누고 있는 그 노신사의 모습에서 나는 신앙인의 삶의 어떤 영감같은 것을 읽고 있었다. 그때 나는 그 분이 누구인 줄도 몰랐고 감히 말도 걸 생각도 못했다. 그렇지만 그 순간 그 얼굴에서 받은 해맑은 느낌이 나로 하여금 신학대학 입학의 결심을 굳건하게 만들고 말았던 것이다.

 

그 분이 바로 문익환목사님이었던 것이다. 당대 구약학의 대가! 그리고 내가 뵈웠을 그 당시 그 선생님은 구약성경 공동번역판 원고집필에 몰두하고 계셨을 때였다. 많은 사람이 지금 문익환하면, 맹렬한 공산주의 운동가며 물불을 가리지 않는 반정부 데모의 투사, 최루탄의 혼탁한 공기속을 홀로 거니는 거친 얼굴을 연상하기 쉽다. 내가 처음 뵈웠을 때의 문익환선생은 정말 완벽하게 그런 분위기와는 무관한 정신 세계에 사시고 계셨던 진정한 수도인의 한사람이었다. 그 뒤 나는 그 분에게서 구약개론을 들었다. 그리고 물론 그 분의 강의는 매우 듣기 쉬었고, 또 히브리 원전을 완전히 소화한 데서 우러나오는 내용이 풍부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깨끗한 영적 체험담으로 우리 수강자들을 감동시키곤 했던 것이다. 저 멀리 교단에서 계신 모습은 항상 광채나는 해맑은 모습이었다.

 

 

나는 그 당시 관절염을 심하게 앓고 있었다. 내가 고려대학교 다니던 것을 중퇴하고, 한국신학대학에 입학하게 된 동기는 관절염이라는 극심한 신체적 고통과의 투쟁 속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가치관의 변화가 생겼기 때문이었기도 하겠지만, 또 한편으로는 지극히 단순한 물리적 동기와 맞물려 있었다. 한국신학대학은 당시 전교생이 캠퍼스에서 사는 거의 유일한 기숙사대학이었다. 따라서 관절염으로 고통받는 나로서는 기숙사와 학교강의실이 얼마 떨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별 불편없이 학교를 왔다 갔다 할 수 있겠다는 계산은 하나의 구원이었다. 당시 나는 구보나 오래 서있는 것이 불가능했다. 따라서 뻐스타고 학교를 통학하는 것이 매우 고통스러웠고 불가능에 가까웠다. 한국신학대학은 나에게 더 없는 배움과 삶의 보금자리였던 것이다.

 

당시의 한신의 캠퍼스는 정말 아름다웠다. 학생들뿐만 아니라 교수 전원이 캠퍼스 안에서 같이 살았다. 조그마한 낮은 12층짜리 후생 주택이 수유리 화계의 송림둔덕 위로 아름답게 배열되어 있었다. 한 집에 보통 학생들이 7.8명 같이 살았다. 그리고 새벽 먼동이 트면, 학생들이 모두 소나무숲의 새벽기운을 헤치고 성스러운 본관의 채플 홀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채플가는 언덕위의 등성이 오솔길에서 만났다. 여기저기 여명을 헤치고 나온 그들은 만나면 찬송가를 흥얼거렸다. 그러면 모두 교회에서 성가대의 경험이 있는 남녀였기 때문에 꼭 한사람이 멜로디를 시작하면, 테너ㆍ쏘프라노ㆍ알토ㆍ바리톤의 사중주가 자연스럽게 울려 퍼졌다. 푸르른 새벽기운, 여명이 입김을 붉게 물들이는 그 새벽, 우리들은 이러한 성스러운 합창속에서 만나고 헤어졌다. 더 재미있는 사실은 이러한 한신대 학생들의 합창의 배경으로 저 멀리서 들려오는 화계사의 범종소리나 목탁소리가 같이 하모니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체험 속에서 성스럽게 살지라도 멀리서 울려 퍼지는 범종의 소리를 그 어느 누구도 불경스럽게 들은 적이 없다.

 

우리 한국 신학대학 학생들은 때로 윗동네 화계사에 가끔 놀러가기도 했다. 그리고 스님들을 한신대 마당으로 초청하여 졸졸 흐르는 시냇물 앞에서 축구대회를 하기도 했던 것이다. 이런 나의 과거 추억을 더듬을 때, 도무지 기독교인들이(물론 한신대와는 관련 없다) 화계사에 불을 지른다는 이야기는 상상할 수도 없다. 스님과 목사는 친구지간이래도, 신도와 신도끼리는 잘 싸운다는 달라이 라마의 얘기가 얼핏 생각난다.

 

내가 솜니 원광대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들은 이야기이지만, 어느 이리 교회에서는 그 지역에서 오래 터전을 일궈온 원불교가 망하기를 기원하는 저주의 대기도회가 열리기도 한다고 들었다. 물론 내가 잘못들은 풍문이기를 바라지만, 그러한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그 교회 목사님은 교회사를 크게 잘못 배웠다. 기독교의 교회사는 바로 탄압속에서 강성해진 역사인 것이다. 로마제국 속에서 쿼바디스 도미네(Quo Vadis Domine,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를 외친 사람들의 역사가 그러했고, 모든 밋션 속에서 순교한 사람들의 역사가 그러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원불교가 망하기를 저주하는 동시에 곧, 원불교의 강성해짐을 돕고 있는 것이다. 그는 바로 원불교에 하나님의 은총을 빌고 있는 것이다.

 

 

이런 얘기들은 매우 하찮은 얘기이지만, 만약 이런 사소한 얘기들이 자칫 감정 싸움으로 번져 우리나라 종교신도들간에 대규모의 폭동사태가 일어난다면 우리나라는 어떻게 될까? 사실 이러한 우려가 없는 것도 아니다.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모든 종교 형태가 그 종교 중에서도 가장 극렬한 보수성과 광신성 즉 흰더멘탈리즘(Fundamentalism) 이라고 총칭되는 신령주의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세계적으로 공인되는 사실이다. 우리나라의 프로테스탄티즘처럼 단시간내에 폭발적인 교회조직을 확보한 사례는 이 지구상의 모든 기독교 전도사에 유례가 없는 사실이다. 세계사의 한 기적일 것이다. 그리고 그 광신적 성격은 라스베가스에 가서 도박으로 신도들의 헌금을 날려버리는 목사님의 명예를 위하여 일국의 최대 방송조직을 장악하는 쿠데타군단의 조직력을 과시할 정도로 흉포하다. 뿐만인가? 조계종 총무원이라는 것이 도무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때만 되면 스님들이 창칼을 휘두르며 싸우는 모습이 위성을 타고 전세계로 방영되곤 하는 것이다. 내가 뉴욕에서 침구학 강의를 하는데 그곳에서 듣고 있던 점잖은 미국의사 한 분이 일어나서 갑자기 질문하기를, 한국의 스님들이 낫ㆍ칼을 들고 막 싸우는 모습이 미국 테레비 뉴스에 나오는데, 도대체 그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옳으냐고 묻는 것이었다. 불교의 비폭력적 평화주의의 모습에 대한 평소의 인상과 한국의 불교는 너무도 다르다는 것이었다. 그러한 권승(權僧)들의 광란 이면에는 아주 깊이있는 수행불교의 전통이 우리 한국에는 살아있다고 강변을 할 수밖에 없었지만, 맥락없이 던져지는 이런 인상발언에 대해 나는 구차스러운 변명 이상의 얘기를 할 수가 없었다. 미국사회를 끊임없이 들끓게 하고 있는 한국산 종교의 갖가지 활약상, 신흥종교라고 보통 범주화되는 대부분의 한국의 민간종교단체가 뉴스메디아를 장식하는 정보형태를 종합해 보면 우리나라는 역시 지나치게 성스럽고 지나치게 영적이다. 역시 신령스러운 샤만(shaman )들의 나라라고 해야 할까?

 

많은 사람들이 종교를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실상은 모든 종교가 나쁜 것이다. 종교는 선()이 아니라, ()이다. 이러한 나의 갑작스러운 충격적 발언에 많은 사람이 의아스럽게 생각하겠지만, 한번 마음을 놓고 생각해보라! 인간 세상에 아예 종교라는 것이 있는 것이 좋겠는가, 없는 것이 좋겠는가? 개미 사회에 목사개미와 개미교회가 있는 것이 좋겠는가, 없는 것이 좋겠는가?

 

사실 인간세에 종교라는 것이 없어서 생기는 불선(不善)보다는, 있어서 생기는 불선(不善)이 더 큰 것이다. 인류역사를 한번 곰곰이 생각해보라! 인류가 이 지구상에서 저지른 모든 끔찍한 대규모 죄악상은 거의 99.9%가 종교라는 명분아래 자행된 것이다. 멀리 눈을 안 돌려도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대규모의 살상전쟁이 모두 종교 때문에 생기고 있는 것이다. 이란, 이라크, 이스라엘, 아랍, 코소보, 보스니아, 씨에라 레옹, 라이베리아, 인도, 파키스탄, 토오쿄오 지하철의 독극물 살인…… 셀 수도 없는 우리시대의 모든 비극, 인간이 개인적으로 저지를래야 저지를 수도 없는 흉악한 대규모 악들이 모두 종교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과연 종교가 좋은 것인가?

 

 

인간이 감내하기 어려운, 신체적 고통을 수반하는 고대사회의 모든 제식이 종교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종교 때문에 인간을 희생하는 제물(human sacrifice)이 생겨나고, 사제와 비사제간의 계급적 불평등이 생겨나고, 인간이 노예처럼 어떤 권위 앞에 복속되는 모든 모습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인간의 이성적 사유를 마비시키는 모든 기만적 행태가 종교에 속하는 것이다. 인간의 해방과 평등을 부르짖는 모든 종교의 슬로건의 이면에 반드시 종교라는 권위조직에로의 인간의 복속이 있지 아니한 예를 우리는 거의 발견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해방ㆍ평등의 실천만으로는 근원적으로 종교라는 조직이 유지될 길이 없기 때문이다.

 

도대체 종교가 뭐가 좋은가? 없는 것보다는 있어서 해악이 더 큰 것이라는 것은 너무도 명백한 사실이 아닌가? 우리나라 신흥종교의 모든 형태가 사기성을 지니지 아니한 예를 본 적이 있는가? 카메라 조작으로 성령이 내리는 것을 사진으로 찍어대고, 연보돈으로 축재하여 온갖 비리를 저지르고, 탁명환(卓明煥, 1937~1994, 사이비 종교 연구가) 선생을 살해할 정도로 그 배면에는 확인되지 않은 의문사들이 비일비재하고, 항상 검찰도 두려워 손을 대기 꺼려하는 암막의 베일이 종교가 아닌가? 도대체 종교가 뭐가 좋은가? 어떻게 종교를 선()이라 할 수 있는가?

 

그런데 이러한 나의 항변은 도무지 아무런 소용이 없다. 아무리 내가 이렇게 항변해도 종교는 인간세에서 없어질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니이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는 이 종교란 놈에게 엄청난 분노를 느꼈다. 그리고 이 종교란 놈의 주범인 신()을 살해하면 문제가 해결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1900년에 생()의 막을 내린 20세기의 예언자 니이체는 드높이 선포했다. ‘()은 죽었다(God is Dead!).’

 

그런데 니이체는 헛지랄을 한 것이다. 도무지 죽일 수 없는 것을 죽인 것이다. ()은 결코 사살될 수가 없는 것이다. 니이체의 선포에도 불구하고, 20세기는 인류사상 가장 종교가 보편화 되고 성행했으며, 인류사상 가장 많은 종교적 죄악이 저질러진 세기였다. 20세기는 인류사상 가장 많은 신흥종교들이 발생했으며, 20세기야말로 모든 신()들의 그야말로 신나는 축제장이었던 것이다. 니이체의 신의 사망선고는 결국 니이체라는 개인의 서구문명에 대한 양심선언에 불과했던 것이다.

 

종교는 본질적으로 인간의 허점을 파고든다. 인간의 이지(理智)가 발달하면 발달할 수록 그 이면에 생기는 공허를 파고든다. 인간은 강하지만 때로 한없이 나약하고, 혈기왕성하지만 때로 한없이 가냘프고 감상적이다. 항상 사회라는 군집을 형성하여 북적북적 비벼대지만 그럴수록 고독하다. 인간은 합리적 이성을 추구하지만 때로는 비합리적 감성에 호소한다. 치밀한 분석에 열을 올리다가도 맹목적 믿음에 호소한다. 종교는 바로 이러한 인간의 배면에 구조적으로 내장되어 있는 것이다. 인간에게 이러한 배면이 있는 한 종교는 사라질 수가 없는 것이다. 종교는, 문학이나 시가 인간에게서 사라질 수 없는 것처럼, 그것 또한 인간 존재의 본원적 측면을 형성하는 것이다.

 

 

종교는 분명히 악이다. 그렇다! 그것은 분명히 필요악이다. 그럼 이 악을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악을 제거할 방도가 있는가? 니이체의 실패를 계속 반복해야 할까?

 

종교는 악이다. 그리고 종교는 근원적으로 인간에게서 제거 불가능하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바로 종교라는 악의 배면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종교적 악은 엄청난 선의 가능성을 동반한다. 평소 때 할 수 없었던 희생을 가능케 하고, 개인의 욕망을 뛰어넘는 보편적 행위를 가능케 하며, 인간을 절망에서 구원하며, 죄의식을 씻어주고, 모든 인간을 사랑과 화합으로 인도한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초월자의 믿음 안에서 한 몸이 되며, 서로의 생명의 가능성을 극대화시켜주며, 아름다운 공동체 생활을 가능케 하는 질서와 극기와 이념을 제공한다. 종교는 악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인간세의 모든 악을 저지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종교가 인간세에 존속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악의 배면의 엄청난 선의 가능성, 그 에너지 때문인 것이다.

 

우리는 영원히 종교를 제거할 수는 없다. 그것은 용렬한 무신론자의 환상에 불과하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는 바로 종교를, 선의 가능성, 그 본래적 모습으로 복귀시켜야 하는 것이다. 종교의 모든 죄악은 알고 보면, 종교가 저지르는 것이 아니다. 알고 보면 그것은 종교를 빙자한 인간의 탐욕이 저지르는 것이다. 종교가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저지르는 것이요, 인간세의 제도가 저지르는 것이다. 종교는 어떠한 경우에도 교회나 승가의 역사로 이해되어서는 아니되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모습은 기독교의 모습이 아니다. 그것은 기독교를 가장한 인간세의 조직의 모습이다. 기독교라는 추상체가 그 교회조직에 어떤 구실을 제공했을 뿐인 것이다. 이제 우리는 교회조직의 이해관계를 떠나 그 교회조직을 발생시킨 원초적인 정신으로 되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 그 자체로 회귀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봐서는 아니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 그 자체를 듣고 보고 실천해야 하는 것이다.

 

20세기가 니이체의 예언과는 달리 종교가 지극히 성행한 시기라고 한다면, 우리의 문제의식은 제1의 주제와 일치한다. 즉 과학과 기술의 랑데뷰로 자본주의 산업사회의 놀라운 비약이 이루어졌다고 한다면, 그만큼 종교계에도 놀라운 비약과 번영이 이루어진 것이다.

 

 

과거에는 종교가 매우 편협한 지역주의(localism)의 문화적 틀 속에 갇혀 있었다. 대부분의 종교는 그 지역의 관습이나 제식의 특성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그리고 일차적으로 종교조직을 구성하는 성원의 삶의 방식, 우리가 문화적 가치라고 부르는 갖가지 형태와 밀착되어 있었다. 종교의 보편화를 막는 일차적인 요소는 그러한 관습체계였다. 기독교가 아직까지도 유태인 특유의 관습체계에서 해방되지 못하는 것은 매우 유감이다. 그러한 해방이 바로 예수나 사도 바울이 원하던 바였지만, 한국의 목사님들은 아직도 구약과 신약을 구분 못하고, 새로운 약속(신약)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낡아빠진 옛 약속(구약)의 관습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전라도에서 발생한 종교를 보면, 전라도사람의 특유의 풍습과 촌스러운 가치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21세기의 종교는 종교를 형성하고 있는 사회구조 그 자체가 그러한 지역주의를 벗어나기 때문에, 이제는 과거의 그러한 방식의 조직이나 관습이나 율법의 특수성을 강요하기 힘들다. 한번 생각해보자! 일제시대 때 일본사람들이 그 얼마나 한국사람들 입에서 마늘냄새가 난다고 쵸오센진을 경멸했는가? 일제시대 때 케이죠오(京城)에서 전차를 타면, 저 뒷문에서 한국사람이 한명 올라와도 앞문에 있던 일본사람이 닌니쿠 니오이(大蒜 香, 마늘냄새)’하면서 오만상을 찌푸렸던 것이다. 일본사람들은 식생활이 비교적 담박한 편에 속하는 것은 사실늘을 저주하는 종교적 금기의 제식이 생겨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일본인들은 거의 마늘 처먹느라고 환장한 사람들처럼 되어 버렸다. 이제 한국의 김치가 세계인의 킴치(Kimchi)’가 되어 버렸고, 일본은 이제 키무치의 대국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아지노모토 대신 키무치노모토가 대유행하고, 매운 음식이라면 그렇게도 질색하던 일본사람들이 한국의 라면을 선호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세계 김치시장을 놓고, 한국의 킴치상품과 일본의 키무치상품이 맞대결을 벌려야 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한국의 킴치 상품계는 일본의 키무치는 김치로, 규정할 수 없다는 선포를 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제 케이죠오가 아닌 토오쿄오(東京)에서 야마노테센 덴샤(電車) 뒷문에 김치냄새를 풍기는 한국인이 올라타면 앞문에 앉아있는 일본인이 어디서 구수한 냄새가 난다고 입맛이라도 쩍쩍 다실 셈인가? 엊그제까지만 해도 날생선을 먹는다 하면 귀신살코기라도 뜯어 먹는 것인냥 질겁을 하던 양키 아저씨들이 이제는 스시바에 가서 사시미를 먹을 줄 모르면 맨하탄 한복판에서도 문화인 행세를 할 수가 없다.

 

기독교 성찬식에 포도주를 쓰는 것은 단순히 예수시대의 유대인들에게 통용되던 술이 포도주였기 때문에 생겨난 관습에 불과한 것이다. 그것은 성찬의 본질적 의미와는 하등의 연관이 없다. 그렇다면 신부ㆍ수녀가 삥 둘러 앉아 걸쭉한 막걸리를 바가지로 퍼잡수면서 성찬제식을 행할 수도 있는 것이다.

 

내가 왜 이런 말을 하고 있는가? 4,000년의 연속성이 40년의 불연속성으로 단절되는 변화 대신 우리가 얻은 것은 바로 이러한 보편적 삶의 양식이다. 지역주의의 편협성의 파괴다. 따라서 이제는 종교도 그러한 지역주의적 관습체계로부터 해방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만큼 공통적 이해의 폭이 증대할 가능성이 커지는 것이다.

 

 

종교와 종교가 싸우는 것은 종교조직과 종교조직간의 이해(利害)의 상충(相衝)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해(利害)의 상충은 대부분 터무니없는 편견과 몰지각, 선입견과 몰이해에 뿌리박고 있다. 21세기 인류의 최대의 과제는 바로 20세기에 벌린 인류의 종교의 잔치를 통해 이제 서로를 이해하는 공존의 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파티에서 한 번이라도 만난 사람은 낯설어지지 않게 마련인 것이다.

 

모든 종교는 이제 배타적 전도주의(the Exclusive Evangelism)를 하루속히 포기해야 한다. 나의 믿음의 방식만이 오로지 인류를 구원한다는 좁은 편견에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 종교의 공존! 그렇다면 모든 종교는, 사이비종교이든, 신흥종교이든, 저등종교이든 다 수용해야만 하는가?

 

종교에 있어서 구극적으로 사이비와 진짜, 신흥과 구홍, 저등과 고등에 관한 명료한 가치 기준을 내세울 수 있는 척도는 존재하지 않는다. 종교란 사이비라면 다 사이비일 수 있는 것이요, 진짜라면 다 진짜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세의 종교적 현황은 우리가 모든 종교현상을 모두 선()으로 받아들이기에 어려운 측면들이 분명히 엄존한다. 이런 문제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인가? 나 김용옥이 신일 수는 없다. 종교의 고ㆍ저등, 다시 말해서 신의 고ㆍ저등을 판단할 수 있는 지고(至高)의 신이 아니다. 신을 법정에 세우는 하이에스트(highest) 코트(Court)의 판사는 아닌 것이다. 그러나 여기 내가 확연히 고등과 저등을 판단할 수 있는 하나의 기준이 있다. 그것은 모든 고등종교는 자기비판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기독교가 매우 문제점이 많은 종교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고등종교로 인정하는 것은 바로 기독교는 역사를 통해서 비판을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왔다는 것이다. 역사를 통해서 기독교는 악을 최소화시킬 수 있는 다양한 매카니즘(mechanism)을 확보해왔다는 것이다. 이미 기독교는 갈릴레오(Galileo Galilei, 1564~1642)에게 천동(天動)을 강요하고 부루노(Giordano Bruno, 1548~1600)를 화형에 처하는 그런 종교가 아닌 것이다. 불교 역시 기나긴 인간세의 역사를 통하여 자기비판과 자기성찰의 확고한 대승정신을 함양해왔다. 불교처럼 반불교적 교리들을 자내에 수용하는 폭넓은 종교는 세계적으로 희귀하다. ()만 해도 그것은 불교를 부정하는, 인간의 본연의 깨달음의 성찰인 것이다.

 

 

대부분의 사이비종교나 신흥종교의 문제점은 바로 자기비판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자기를 비판하는 자들을 적대적 관계로만 설정하며, 자기들의 좁은 편견을 절대화시키고 우상화시킨다. 기독교도 그러한 모랄에 사로잡혀 있는 기독교는 사실 기독교가 아니라 어느 목사 개인의 신흥종교인 것이다. 그리고 모든 고등종교의 조직은 리더십의 교체를 자유롭게 행하는 매카니즘(mechanism)이 장착되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이비종교는 리더십이 고착되어 있다. 종교가 자기를 개방할 수 없으면 그것은 종교의 자격이 없다. 어둡고 싸늘한 공기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백설이 되어서는 아니되는 것이다. 태양의 밝은 양광 아래서 금방 형체도 없이 녹아버리고 마는 그런 백설이 되어서는 아니되는 것이다. 대부분의 순결을 가장한 종교가 그러한 백설의 허상에 불과한 것이다.

 

종교라는 것도 알고 보면 돈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아무리 종교정신이 위대해도 돈이 없으면 그 조직은 유지될 수 없다. 종교의 돈은 대개가 헌신하는 신도들의 헌금이다. 그 돈에 진실이 있을 때 종교는 위대해질 수 있다. 그러나 그 돈이 어둡고 폐쇄되고 자만과 독선에 빠지면 결국 그 돈의 모임은 유지될 수가 없다. 종교도 돈이 없으면 끝장이다. 종교도 흥행이 안 되면 파장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종교의 흥망성쇠는 매우 단순한 것이다. 자체의 진실이 확보되면 그것은 자기갱생을 계속하고 그렇지 못하면 자망한다. 우리는 종교의 부흥과 전도를 도울 것이 아니라, 종교의 자망을 도와야 한다. 모든 폐쇄적이고 독선적인 사이비종교들이 자망(自亡)하도록 우리는 우리민족을 계몽시켜야 하는 것이다.

 

비판을 수용할 수 없는 모든 종교들이 폐업을 재촉하도록 우리국민이 깨어 있어야 한다. 헌금을 안 내면 종교는 하도록 되어있는 것이다. 20세기가 우리민족에게 있어서 지나치게 종교의 흥행이 잘 된 한 세기였다고 한다면, 21세기 우리역사는 종교가 흥행이 잘 안되는 세기가 되어야만 종교가 건전해지고, 종교간의 화평과 공존이 이루어질 것이다.

 

 

 

 

 4. 지식과 삶의 화해

 

 

21세기 셋째의 주제는 지식과 삶의 화해(the Harmony between Knowledge and Life)이다. 이것은 노자(老子) 철학 전반을 흐르는 반()주지주의적 색채와 깊은 관련이 있다. 지식이 본시 삶에서 나온 것이요, 삶을 위한 것이라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지식 그 자체가 삶을 괴롭히고, 삶을 위협하고, 삶을 노예화한다면 과연 어쩔 셈인가?

 

요즈음 부모님 노릇 하시는 분들의 공통된 고민 중의 하나가 이런 것일 것이다. 요즈음 애들은 공부를 참 안한다! 컴퓨터만 들여다 보고, 영화만 보고, 콜라텍, 락까페에 가서 춤추기는 열중해도, 공부는 안한다. 피씨방, 비디오방, 디스코방에서는 몇날 몇일을 새면서 열중할 수 있어도 도무지 공부는 하지 않는다. 솔직히 고백하지만 내 자식부터 그 모양이니 이것 참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것이다.

 

도대체 공부란 무엇인가? 공부란 놈에 대하여 나는 꽤 독창적인 새로운 나의 공부론이란 이론이 있다. MBC 이야기쇼 만남에 나간 나의 공부란 무엇인가?’의 내용이 그것이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 우리는 그 내용을 논할 계제(階梯)가 아니다.

 

흔히 우리가 말하는 공부란 것은 지식의 습득과 관련된 것으로, 더 구체적으로는 좋은 대학 가는데 필요한 지식체계, 대학입시 이후에는 대학에서 가르치는 카리큐럼에 충실한 지식체계를 일컫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궁극적으로 그 지식체계가 과연 우리 삶에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매우 근원적인 질문을 던져야 하는 것이다. 부모님들께서 말씀하시는 공부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독서. ‘독서도 만화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사려 깊은 책이나 전공에 관련된 책을 읽는 것이다. 손쉽게 얻어지는 쾌락적 독서가 아닌, 쾌락을 희생함으로써 얻어지는 그런 독서를 의미하는 것이다.

 

 

인생을 사는데 정말 재미있는 것은 무엇일까? 孟子(멍쯔)는 남녀노소할 것 없이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좋아하는 것으로 다음의 두 가지를 들었다. ! 그것은 참으로 천하의 명언이다[食色, 性也 告子]. 사람이 일상적으로 사는데 맛있게 먹는 것, 참 그것 이상으로 재미있는 것은 없다. 하루하루의 일과 중에서 단 한번이라도 정말 맛있는 것을 먹어 보았으면 ! 요새같이 퇴폐적인 외식 문화의 허식 속에서 어쩌다 정말 정성스럽고 특이한, 맛깔스러운 음식을 만나면 정말 한번 먹고 꼴깍 숨이 넘어가도 유감이 없을 정도로 우리는 쾌락을 만끽하게 된다. 음식의 묘미는 청결과 소재의 신선함과 조미의 프레이그런스(fragrance, ), 삼위일체(三位一體)예술이다. 그런데 요즈음과 같이 하이타이로 그릇을 씻어대고, 공해로 쩌든 소재에, 온갖 인공조미료를 퍼붓고 인공적인 된장ㆍ꼬치장을 처넣은 음식이 진미처럼 둔갑되어 나오는 세상엔 정말 향긋한 백미 밥 한그릇이 오히려 귀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요번 시드니에 가서 영어ㆍ우리말 두 강연의 성공도 유쾌한 것이었지만, 아내와 시내를 돌아다니다 우연히 만나게 된 우리 구어메이(gourmet, 미식가) 미각의 쾌거는 참으로 특기할 만한 사건이었다.

 

아내와 나는 중국에서 만났다. 중국에서 신혼생활을 했고, 중국말과 중국습관 속에서 평생을 살았다. 지금도 평상대화의 반은 중국말로 한다. 그래서 어디에 가든 꼭 들리는 곳이 차이나타운이다. 차이나타운에만 가면, 쎈스있게 선택하여 감만 잘 잡으면, 꼭 한 끼는 양식으로 니길니길 코팅되어버린 뱃속을 한번 유쾌하게 놀래켜 줄 챈스를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말을 잘한다는 것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다.

 

아내와 나는 강연이 끝난 날, 단촐하게 둘이서 호텔을 나왔다. 우선 길거리 키오스크(Kiosk)에서 상세한 시드니의 지도를 하나 샀고, 도보와 공공 운송체계만을 이용하여 시내를 샅샅이 훑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 유명한 오페라하우스가 보이는 부두가까지 걸어 나갔다가 그곳에서 센트랄 스테이션 가는 지하철을 탔다. 재미있는 것은 지하철이 이층으로 되어있다는 사실이었다. 홍콩이나 영국에서 이층뻐스는 많이 보았지만, 지하철이 이층으로 되어있는 사실은 예기치 못했던 것이었다. 센트랄 스테이션(Central Station)을 빠져나와 벨모아 파크를 가로질러 차이나타운으로 향했다.

 

 

오스트랄리아! ‘거대한 남쪽의 대륙이라는 이름의 이 오스트랄리아를 개발하는데 중국인 쿨리들의 어마어마한 노동력이 희생 제물이 되었다는 것은 역사를 통해서 잘 알 수 있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이곳에 일찍부터 정착하였고, 그들은 무시할 수 없는 상권을 형성했다. 그리고 그들이 시드니에 건설한 차이나타운은 유구한 역사와 보수적 전통과 풍요로운 현실이 잘 융합된 매우 깔끔한 곳이었다. 여기 저기 어슬렁거리다 우리 눈에 들어온 것은, 오스트랄리아 차이나타운에 유달리 풍부한 것이 해산물이라는 사실이었다. 우리는 오스트랄리아가 이 지구상에서 비교적 인위적 문명의 흐름에서 소외된 매우 청정한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청정하기 이를 데 없는 남대양의 풍요로운 어장 한 가운데 있는 대륙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차이나타운 어느 채관(菜館)앞 쇼윈도우를 지나다가 앗! 하고 나의 시선을 경악시킨 물체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어항 속을 어슬렁거리는 하나의 거대한 바윗덩어리와도 같았다. 영어로는 보통 킹크랩(King Crab)’이라고 하지만 중국인들은 왕게라고도 하지 않고, 아예 황제게라고 한다. 오스트랄리아의 게의 모습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초대형, 엑스라지 아니 슈퍼라지, 아니 크다는 표현이 도무지 적합치를 않은 그러한 것이었다. 어항 속에 웅크리고 있는 모습은 문자 그대로 거대한 태고의 암석이었다. 이왕지사에 한번 이 놈을 먹어봐야겠다! 우리는 크랩 요리를 잘 할 수 있는 곳을 골랐다. 우리 감으로, 굴번(Goulburn) 스트리트와 수쎅스(Sussex) 스트리트가 만나는 곳에 크게 자리 잡고 있는 금당해선채관(金唐海鮮菜館)’이라는 곳이 눈치 코치 다 때려 볼 때, 명가(名家)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용기 있게 진탕[金唐]에 입성(入城)을 시도했다. 퍽 큰 차이꾸안(식당)이었는데 거대한 한 벽 전면이 온갖 어항으로 장식되어 있어 그곳에서 직접 해물을 고르면 바로 즉석요리를 해 올리는 그러한 시스템이었다. 우리는 어항 앞에서 황제게를 찍었다. 그랬더니 웨이터가 우리를 의아스럽게 쳐다보면서 그것을 어떻게 먹으려고 하냐는 것이었다. 돈 주고 먹는다는데 왜 못 먹는다는 것일까? 저건 먹는 것이 아니라 그냥 전시용인가? 의아스러운 것은 내쪽이었다. 나의 반문을 받은 웨이터는 큰 그물을 집어넣어 게를 꺼냈는데, 자그만치 웬만한 어린아이 몸뚱이보다 더 큰 느낌이 들었다. 저울에 달더니, ‘치 꽁진하고 외치는 것이다. 무게가 7kg 나간다는 뜻이다.

 

7kg면 어떻고, 10kg면 어떠냐? 한번 산해진미를 먹어보고나 죽자꾸나! 그랬더니 그 웨이터가 하는 말이 이것을 먹으려면 최소한 열사람은 필요하다는 것이다. 왜소하게 보이는 초라한 부부 둘이서 이 황제게를 처분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이야기인 듯이 얘기하는 것이다. 그래도 나는 다 버리고 가도 좋으니 맛 좀 보자고 했다. 그랬더니 그 웨이터가 이것이 얼마인 줄 아냐고 묻는 것이었다. 그래서 얼마냐고 물었다. “뚜어 사오 치엔?”

 

세븐 헌드레드 달러스(seven hundred dollars)!”

 

나는 여기서는 그만 기절초풍하고 말았다. 기권표를 던지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오스트랄리아 돈으로 700불이면 미화로도 500불은 된다. 그러니까 우리나라 돈으로 한 육십만원 되는 것이다. 게 한마리 먹는데 육십만원! 아무리 미식가의 탐욕을 마음껏 발휘한다 해도 이것은 좀 심하다. 작전후퇴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함부로 접근하다간 큰 코 다치겠다는 생각이 들어 하는 수 없이 진탕[金唐]을 나와 버렸다. 미화 500! 우리는 아직도 학생 감각에 살기 때문에 외국 나가서 50불 쓰는 것이 좀 두렵다.

 

그러나 무조건 후퇴는 곤란하다. 얌체 같지만 나는 하는 수 없이 S.O.S. 특전을 쳤다. 현지에서 큰 사업을 하고 계신 친지 한 분께 전화를 걸었다. 마침 그 송사장님의 회사건물이 바로 차이나타운 근방이었고, 또 다행이 저녁 7시경이었는데, 회사에 계셨다.

 

 

도올: 시간이 있으시겠습니까?

송사장: 아 물론 나가지요. 그런데 어디 계시지요?

도올: 여기 수쎅스 앤 굴번인데요. 혹시 금당(金唐)이라는 곳을 아시는지요. 그 앞에 공중전화에서 걸고 있는 겁니다.

송사장: 금당(金唐)을 어떻게 아셨어요? 그곳이 여기 차이나타운에서는 제일 고급이고 제일 음식을 잘하는 곳입니다. 그곳에 들어가 계세요. 제가 곧 가서 모시겠습니다.

 

 

으음, 회심의 미소가 돌았다. 이제 한번 또 거하게 먹어보겠구나! 어차피 킹 크랩은 불가능지사(不可能之事)에 속하는 것이고…… 나는 허리띠부터 풀렀다. 송사장님은 바로 해물무역을 크게 하시는 분이었고, 그 금당채관(金唐菜館) 주인과도 친구사이였다. 송사장님이 오셔서 다시 웨이터와 기나긴 협의를 거친 결과 우리가 낙착을 본 것은 러브스타(lobster)’ 요리였다.

 

러브스타(바닷가재) 하면, 나는 좀 일가견이 있는, 그리고 미식가로서 견식이 높다는 자부감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미 전역에서도 러브스타의 고장으로는 보스톤항 이상을 꼽을 곳이 없기 때문이다. 보스톤은 러브스타가 크고 풍부하기로 유명하다. 그리고 보스톤 차이나타운의 러브스타 요리의 격조를 세계 어느 곳에서도 나는 경험하지를 못했다. 그래서 송사장님이 러브스타 요리 운운할 때 나는 좀 불만스러웠다. 러브스타는 보스톤 6년 유학시절에도 지겹도록 먹었고, 또 최근 보스톤생활을 통해서도 단골 메뉴였으니까! 그런데 웨이터가 어항에서 끌어올린 러브스타는 나의 눈을 다시 한번 의심케 만들었다. ‘리앙 공진 !’

 

2kg라는 뜻이다. 그리고 러브스타 한 마리에 200불을 받았다. 7kg짜리와 실갱이를 치고 난 후인지라 나는 2kg에 대한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그리고 좀 거대하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역시 러브스타의 모습을 한 것이었고, 그것이 실제로 얼마나 큰 것인지, 200불이면 너무 호되게 받아 처먹는다는 생각만 들었을 뿐, 감각이 없었다.

 

 

 

얼마 후! 드디어 요리가 전개되었다. 우아! 문자 그대로 산해진미(山海珍味)였다. 하나의 러브스타를 잡았는데, 아니 단 한 마리의 러브스타를 잡았을 뿐인데, 아니 이렇게도 푸짐한 요리가 나오다니! 내가 보스톤에서 자랑스럽게 먹던 그런 러브스타의 살코기 내용보다 실제적으로 한 열배는 되는 것 같았다. 이것은 완전히 우리의 상식적 개념을 뒤엎는 사건이었다. 진저 (생강)소스, 오이스터() 소스, ……

 

맛을 달리해서 푸짐하게 벌려 놓은 단 한 마리의 요리를 우리 셋이서 먹다 먹다 다 끝낼 수가 없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금당(金唐)의 요리솜씨였다. 어떻게 그 짧은 시간 안에 그 딱딱한 러브스타의 껍질들을 말랑말랑한 종이처럼 부드럽게 만들어 놓았는지, 살은 뭉텅뭉텅 푸짐하게 그 신선한 향기를 있는 그대로 발산했다. 남대양의 모든 신선한 바닷기운을 농축한 듯 그 쫄깃쫄깃하면서 투명한 아삭아삭함, 그리고 고상한 생강기름의 그윽한 향기는 도무지 지상에서 내가 맛보았던 최상의 감미로운 요리 같았다. 음식에 관한 한 나는 실전에 강한 쿠킹의 도사이기도 하고, 다양한 국제경험을 쌓았기 때문에 함부로 과찬하지 않는다.

 

그러나 시드니 수쎅스의 진 탕 러브스타 요리만은, 그 살점을 말캉 씹는 첫입의 순간에 그만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는 감동의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이 지구상의 내노라하는 구어메이(gourmet, 미식가)들이여! 시드니의 진 탕으로 가라! 그리고 러브스타 요리 한 접시만 시켜먹게! 200불은 결코 아까운 돈이 아니니까!

 

 

맹자(孟子)의 식색(食色)을 논하다가, 너무 이야기가 가로 새고 말았지만, 하여튼 인간에게 맛있는 것을 먹는다는 것처럼 즐거운 일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 못지 않게 인간을 현혹시키는 또 하나의 쾌락이 바로 색()인 것이다.

 

 

인간이 살아가는데 사랑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다. 여기서 사랑이란 매우 구체적으로 이성간의 사랑을 말하는 것이다. 사랑은 애타는 그리움이다. 사랑은 열정이다. 사랑은 불꽃이다. 아니 그것은 훨훨 타오르는 열화다. 사랑은 내 몸의 케미스트리(chemistry)인 것이다. 내 몸이 불타오르는 화학반응인 것이다. 모든 정신적 사랑도 결국은 신체적 사랑으로 꼴인한다. 아니 모든 정신적 사랑도 신체적 사랑의 전제가 없다면 그와 같이 열화와 같은 형태를 띨 수가 없다. 신체적 사랑이 빠진 정신적 사랑이 현실적으로 존재한다 해도 그것은 그러한 전제와 가능성 속에서 현존하는 것이다. 이성의 교합의 순간처럼 인간에게 쾌락을 주는 것은 없다. 아무리 부정해도, 아무리 부정해도, 그것은 지고의 열락(悅樂)이다. 지고의 황홀경이다. 그러니 길거리가 온통 그러한 케미스트리로 들끓고 있는 환경에서 요즈음 젊은이들이 그러한 열락에 몸을 내맡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 짜릿한 몸과 몸의 언어는 아무리 되풀이해도 그 순간만은 어느 무엇도 비견될 수 없는 강렬한 즐거움인 것이다.

 

몸과 몸의 만남, (, ‘구멍의 뜻인데 동양고전의 표현이다)와 규의 만남, 우리는 그 만남을 통해 인간관계의 자유로움을 획득한다. 세속적 규약으로부터의 해방을 획득한다. 그래서 인간은 성이라는 자유의 매력에 매료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자유는 결코 내적으로, 외적으로 모두 유지될 수 없는 것이다. 모든 자유는 순간이다. 그것은 세속적 규율을 해탈시키는 듯이 보이지만 결국 더 큰 규약과 제재와 규율 속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러한 규약과 규율의 질서를 획득하지 못할 때는 사랑은 파괴적이 되고 만다. 그래서 인간의 모든 비극이 생겨나는 것이다. 사랑이야말로 인간존재의 파라독스의 조건이다.

 

 

저 기사의 손을 빛나게 해주고 있는 저 여인은 누구뇨?

What lady's that which doth enrich the hand Of yonder knight?

 

오오! 그녀의 아름다움은 정열의 횃불이 더 붉게 타오르는 법을 가르쳐주고 있구다.

O, she doth teach the torches to burn bright.

 

마치 검은 에티오피아의 황녀의 귀밥에 달려 있는 찬란한 보석처럼,

저 여인은 검은 초야(初夜)의 뺨에 달려있는 듯,

It seems she hangs upon the cheek of night

As a rich jewel in an Ethiop's ear.

 

저 여인의 아름다움,

만지기엔 너무도 현란하고

그렇다고 이 땅에 내려놓기엔 너무도 고귀하다.

Beauty too rich for use, for earth too dear.

 

보아라! 주변의 아가씨들

너머로 빛나는 저 자태,

마치 떼지어 다니는 까마귀속의

백설의 비둘기,

So shows a snowy dove trooping with crows

 

저 춤의 박자가 종료되면

저 여인이 멈출 곳을

내 미리 눈여겨 보아두마.

As yonder lady o'er her fellow shows.

The measure done

I'll watch her place of stand,

 

그리고 그녀를 휘감아

나의 무례한 손길이

축복을 받도록 해야겠군.

And touching hers, make blessed my rude hand.

 

나의 가슴이 여태까지 과연 사랑을 알았던가?

Did my heart love till now?

 

지금 불타오르는 나의 시선이 그것을 부정하네!

Forswear it, sight.

 

나는 이 밤까지

진정한 아름다움을

본적이 없었노라.

For I ne'er saw true beauty till this night.

 

 

나는 대학교시절부터 셰익스피어를 원서로 암송하는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나 자신이 동양고전의 학문에 뜻을 두었기 때문에 너무 한문만 읽다 보면 사람이 고리타분해지고 구질구질한 냄새가 날 것 같은 컴플렉스 때문에 셰익스피어를 암송하는 취미가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셰익스피어를 원어로 읽을 때 느끼는 그 마제스틱(majestic, 장엄한)하면서도 인간의 내면의 감정을 후려쳐내는 언어의 마력은 이태백(李太白)의 분방한 시()백거이(白居易)의 감성적인 고시(古詩), 소동파(蘇東坡)의 단아한 사()의 맛과도 또 다른 깊이를 간직하고 있었다.

 

상기(上記)의 인용은 바로 로미오가 쥴리엘을 처음 쳐다보는 장면이다. 나의 번역이 셰익스피어 원어의 맛을 얼마나 울겨냈는지는 모르겠으나 우리나라 영문학자들의 현존 번역들은 너무도 살아있는 예술의 감동을 무시하고 있다.

 

~ 보아라! 그 얼마나 가슴 설레이는 순간인가? 한 남자가 한 순결한 여인의 아름다운 자태에 넋을 읽고 황홀경에 빠지는 그 순간의 감동을 어찌 이다지도 아름다운 언어로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인간에게 이 이상의 아름다운 순간이 또 있을 수 있는가?

 

 

[쥴리엘의 손을 잡으면서]

 

로미오: 나의 천하고 무례한 손이

이 거룩한 성소를 더렵혔다면

나의 부드러운 죄업은 이것이외다.

나의 두 입술이여!

얼굴을 붉히는 두 순례자 되어,

여기 수줍게 서 있소이다.

그 거친 만짐을

다시 하느적거리는 키스로써

부드럽게 고르려 하오.

Romeo. [Takes Juliet's hand]

If I profane with my unworthiest hand

This holy shrine, the gentle sin is this:

My lips, two blushing pilgrims, ready stand

To smooth that rough touch with a tender kiss.

 

쥴리엘 : 착하신 순례자시여!

그대의 손을 너무 비하시키지 마옵소서.

고상한 예절로 나의 성소를

방문했거늘.

성자에게도 순례자의 손이 만질 수 있는

손은 있소이다.

손과 손이 맞닿으면

성스러운 순례자의 키스가 되오이다.

Juliet. Good pilgrim,

you do wrong your hand too much,

Which mannerly devotion shows in this;

For saints have hands that pilgrims' hands do touch,

And palm to palm is holy palmers' kiss.

 

로미오: 성자에게도 거룩한 순례자의

입술이 닿을 수 있는

입술이 있지 않소이까?

Romeo. Have not saints lips,

and holy palmers too?

 

쥴리엘: 아아~, 순례자이시여!

입술은 기도에 써야하는 법이라오.

Juliet. Ay, pilgrim,

lips that they must use in prayer.

 

로미오: ~ 그렇다면, 사랑스러운

성자이시여!

이 손이 할 수 있는 것을

이 입술이 할 수 있게 하옵소서.

내 입술은 간구하오이다.

들어주옵소서.

소망이 절망으로 바뀌지 않도록.

Romeo. O then, dear saint,

let lips do what hands do:

They pray: grant thou, lest faith turn to despair.

 

쥴리엘: 성자는 움직이지 않소.

기도하는 자의 간구는 들을지라도.

Juliet. Saints do not move,

though grant for prayer's sake.

 

로미오: 그렇다면 움직이지 마옵소서.

나의 기도의 표험을 내가 받을 동안.

[강렬하게 키스한다.]

이로써 나의 입술의 죄가

그대 입술로써 씻어지오리다.

Romeo. Then move not,

while my prayer's effect I take.

[He kisses her.]

Thus from my lips, by thine, my sin is purg’d

 

쥴리엘: 그렇다면 나의 입술은 그대 입술의

죄를 간직하고 있으오리다.

Juliet. Then have my lips the sin that they have took.

 

로미오: 나의 입술의 죄라구요?

~ 얼마나 감미로운

책망이시오니이까?

나의 죄를 내가 다시

가져가오리다.

[두번째 강렬한 키스.]

Romeo. Sin from my lips? O trespass sweetly urg'd.

Give me my sin again.

[He kisses her]

 

 

이 얼마나 미묘한 감정의 묘사인가? 처음 멀리서 바라본 로미오가, 곧바로 줄리엘과 키스를 교환하기까지, 그 성스러운 열화(熱火)의 순간을 성자와 순례자의 이미지를 가지고 끌어가고 있다. 성자는 움직이지 않는 음()의 이미지요, 순례자는 움직이며 갈구하는 양()의 이미지다.

 

그런데 나는 이 젊은이들의 열화의 순간을 이다지도 고요하고 성스럽게, 그러면서도 모든 격조와 섬세한 감각을 잃지 않으면서 감미롭게 표현하고 있는 셰익스피어라는 작가의 언어적 상황이 참으로 궁금했다. 과연 노련한 한 작가의 손에서 그냥 상상과 감정이입만으로 이렇게 리얼한 언어들이 쏟아질 수 있을까? 도대체 셰익스피어라는 천재는 어떠한 인간이었을까? (로미오와 쥴리엘의 집필연대를 1595년으로 추정하면, 31세의 작품이 된다.)

 

 

최근에 한국에도 영화를 통해 선 보인 톰 스토파드(Tom Stoppard)의 명작은 바로 이러한 나의 문제의식에서 출발하고 있다. 셰익스피어의 언어는 죽어있는 상상의 언어가 아니라 살아있는 삶의 언어였던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상상 속에서 작품을 쓴 것이 아니라, 바로 젊은이의 열화(熱火) 속에서 붓을 옮긴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열애(熱愛) 중이었다! 셰익스피어 인 러브(Shakespeare in Love)! 자기 신분을 속이고 남장을 해서 로미오의 역을 맡은 레쎞스 가()의 딸 비올라와, 당시 무명의 작가인 셰익스피어는 사랑중이었다. 그 애절한 사랑,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업의 굴레 속에서 그의 깃털 펜은 굴러갔던 것이다. 그 감미로운 속삭임들은 모두 셰익스피어의 삶의 현실적 고뇌에서 우러나온 사랑의 고백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바로 20세기의 셰익스피어라고까지 불리우는, 우리 시대의 탁월한 극작가 스토파드의 고전해석이다. 물론 이 설정은 모두 픽션이다. 그러나 이러한 픽션은 우리에게 사랑의 진실을 가르쳐준다! 사랑! 사랑! 사랑! 사랑보다 더 행복한 삶의 순간이 어디 있으랴!

 

언젠가 공자(孔子, 콩쯔)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색을 좋아하는 것만큼 공부하기를 좋아하는 자를 아직 보지 못했다[吾未見好德如好色者也 子罕].’

 

우리의 자녀들이 여자를(이성을) 좋아하는 것만큼, 공부를 좋아한다면 우리의 부모들은 그 얼마나 행복할까? 이런 말을 하는 공자(孔子) 역시 색골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체험이 없이 이런 말을 했을 리가 없다. 색을 좋아하는 것만큼 공부를 좋아하는 자를 아직 보지 못했다 하는 것은, 실제로 보지 못했다 함이 아니요, 그 주제를 강조하기 위한 어법이다. 즉 공자에게서도 공부함의 이상(理想)은 호색(好色)의 이상(理想)이었다. 호색(好色)의 강렬함의 자신의 체험을 기준으로 공자는 호덕(好德)호학(好學)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공자는 이 때 바람을 피우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많은 주석가들이 이 언급이 공자(孔子)가 위령공(衛靈公)의 음탕한 미녀부인 남자(南子)를 만났을 때 즈음의 발설로 보고 있다.

 

 

그런데 사실 내 경험을 가지고 얘기를 하면 여자를 좋아하는 것 만큼 공부하기를 좋아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만은 아니다. 호학(好學)의 즐거움이 호색(好色)이나 호식(好食)의 즐거움에 결코 뒤지는 것이 아니다.

 

나는 평생 공부를 많이 한 사람으로 분류된다. 그런데 사실 공부는 재미있어서 하는 것이다. 재미가 없다면 내가 공부를 할 리가 없다. 나는 어려서부터 머리가 나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공부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고, 또 공부를 하다 보니까 공부가 재미있어진 것이다. 사실 색식(色食)의 즐거움은 너무도 짜릿하고 강렬한 것이기는 하지만, 인간은 도저히 식색(食色)만으로는 재미가 없어서 살 수가 없다. 먹기 위해서만 살고, 성교의 쾌감을 누리기 위해서만 산다고 한번 생각해보자! 과연 그것이 재미있을까? 과연 그것이 우리에게 지속적인 재미를 줄 수 있을 것인가?

 

먹는 것도, 맛없는 것을 계속 먹다가 어쩌다 미식(美食)을 만날 때 우리는 더 없는 감미로움을 느낀다. ()도 어쩌다 미색(美色)의 분위기를 만나야 즐길 수 있는 것이고, 로맨스도 뭔가 여운이 감도는 정도래야 감칠 맛이 있는 것이다. 유곽의 여인들에게 있어서 성교가 과연 무슨 재미가 있을까? 매일 매일 닥쳐오는 기나긴 밤이 지리한 엔터테인먼트의 업보라고 한다면 그것이 셰익스피어 인 러브의 로맨스는 도저히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확언하건대, 공부하는 것만은 매일 매일 해도 재미있는 것이다. 최소한 식색(食色)보다 더 지속적이고 더 짜릿한 재미가 있는 것이다. 미지의 세계를 더듬는 공부의 황홀경은 사실 인디아나 죤스의 갖가지 어드벤처보다도 더 짜릿하고 더 스릴이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은 현실적 시공에 얽매이지 않는 무궁한 모험인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공부하는 재미는 지속적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해도 지루하지 않고, 아무리 해도 지칠 줄 모르는 것이 공부인 것이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나처럼만 생각하고 느낀다면 얼마나 좋으랴! 우리 한국의 부모님들께서는, 우리의 자녀들이 모두 나 도올처럼 생각하고 실천한다면 오죽이나 좋아하실까? 공부하라고 매일 매일 닥달치는 괴로움도 없을 것이요, 노상 어딜 갔다가 그렇게 늦게 들어오나고 야단칠 시름도 없을 것이다. 왜 우리의 젊은이들은, 공부의 재미를 못 느낄까? 나 도올의 이러한 진실하고 평범한 체험담이 도무지 그들에게 설득력이 없는 것이다. 어떻해야 좋을까?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을 상규(上竅, )와 하규(下竅, )의 쾌락에만 방치해 두어야 할 것인가? 오는 21세기는 이규(二竅)의 세기가 될 것인가?

 

 

자아! 한번 잘 생각해보자! 이런 문제들을! 곰곰이 짚어 보자! 이런 문제들을!

 

길거리를 지나다 보면, 요즈음의 틴에이저(teenager)치고 스케이트 보드를 안 좋아하는 사람이 없는 것 같고. HOT같은 댄싱가수그룹의 춤 같은 것을 흉내내기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없는 것 같다. 그리고 NBA 농구선수, 마이클 죠단(Michael Jordan) 흉내내며 농구코트에서 공을 요리조리 돌리고 굴리며 바라별 묘기를 다 부리는 것은 다반사! 그런데 한번 생각해보자! 스케이트 보드를 잘 타는 아이를 쳐다보는 것은 매우 즐겁지만, 실제로 그렇게 스케이트 보드를 잘 타기까지 보드에 들인 그 아이의 공력은 시간적으로도 어마어마한 것이지만, 그 고된 훈련의 과정이 결코 즐겁지만은 않았으리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즉 열중은 했을지언정, 반드시 그것이 쾌감을 주기 때문에 그 고된 훈련의 시간을 소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힙합댄스만 하더래도 그것이 보기는 즐거울 수 있어도, 그렇게 즐겁게 멋있게 동작을 맞추어 자유자재로 춤을 출 수 있게 되기까지 들이는 몸의 공력은 참으로 어마어마한 시간과 정력이 소비되는 것이다. 영화관 막간 선전에 나오고 있는 유승준군의 헤드스핀을 쳐다보면 그 정도로 몸을 놀릴 수 있는 노력이라면,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1724~1804)순수이성비판(Kritik der reinen Vernunft)도 독파할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요즈음같이 청량한 천고마비의 계절에, 강변이나 해변에서 젊은이들이 요트를 타는 모습이나 물보라를 치면서 수상스키를 타고 있는 모습을 보면 신이 난다. 그런데 문제는 요트를 타고 싶다고 해서 타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수상스키를 타고 싶다고 해서 스키구두를 발에만 끼면은 끝나버리는 그런 얘기가 아닌 것이다. 공부를 하는 것과, 공부를 안하고 딴짓을 하는 것, 그 양자는 매우 다른 인간의 행위인 것처럼 보이지만, 알고 보면 지극히 공통의 한 측면을 가지고 있다. 즉 노력과 시간과 훈련의 기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공부를 안 하고, 노는 일조차, 노력과 시간과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요즈음 젊은이들은 스케이트 보드나 힙합에는 그 쓰잘 데 없는 시간과 정력을 소비하면서, 그 시간을 공부에는 쏟질 않는가? 분명 공부하는 것이 스케이트 보드보다는 더 확실한 효과가 있고, 더 지속적이고 더 다양한 재미를 줄 수 있으며, 더 확실한 삶의 가치와 보람을 확보해준다는 것은 너무도 명약관화한데, 우리의 자식들은 왜 이것을 모를까? 아무리 발을 동동 구르며 안타까움게 외쳐봐도 소용없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역시 공자왈 맹자왈(孔子曰 孟子曰)’이나 임마누엘 칸트에게 보다는, ‘스케이트 보드힙합,’ ‘테크노 댄스로 가고 있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립씽크 힙합보다는 공부가 확실히 더 재미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나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 내가 공부가 재미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냥 공부가 재미있는 것이 아니라, 공부를 재미있게 느낄 수 있게 되기까지 재미없고 지루할 수도 있는 훈련의 기간을 포함한다는 사실이다. 힙합을 자유자재로 추는 것은 재미있지만, 그 자유자재로움에 도달하기까지는 결코 즐거울 수만은 없는 시간과 정력이 소요되는 것과 매우 동일한 이치이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에 대한 우리의 분석의 최종 결론은 이러하다. 힙합을 배우는 과정과 공부를 배우는 과정을 비교하면, 역시 공부를 배우는 과정이 더 어렵고, 더 시간이 많이 걸리며, 더 지루하게 느껴지며, 무엇보다도 인간을 집중하게 만드는 흡인력이 부족하다는 사실이다.

 

힙합이나 스케이트 보드는 그 습득과정이 재미없을지라도 사람을 집중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는 것이다. 컴퓨터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이러한 분석에 있어서 우리가 최종적으로 점검해야 할 사실은 바로 우리가 그냥 공부라고 말해온 내용, 즉 인간의 지식이라고 부르는 이 사태의 본질적인 정당성에 관한 것이다.

 

과연 지식이 인간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인가? 지식의 습득과정이 우리의 젊은이들에게 스케이트 보드나 힙합만큼도 매력을 지니지 못하는 것이라면, 과연 그러한 지식이 우리 인간의 삶에 어느 정도 정당한 가치를 지니는 것일까? 인간이 꼭 지식을 추구해야만 훌륭해지는 것일까?

 

 

여기 지나온 20세기를 반성해 볼 때, 나는 단언한다. 지식(Knowledge)이 삶(Life)과 대적적(antithetical) 관계를 유지해 왔으며, 지식이 권위체계로서 삶 위에 군림해왔다는 것이다. 내가 산 세기를 회고해 볼 때, 나는 아무런 생각의 점검도 없이 무조건,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1724~1804)를 모르면 병신취급 받는다는 압박감 속에서 살았다. 다방에서 오바깃털을 세우며 커피향을 후후 불어가며 최소한 사르뜨르(Jean-Paul Sartre: 1905~1980)나 하이데가(Martin Heidegger: 1889~1976) 정도는 씹어대야만 가오가 서는 삶을 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나의 삶의 모든 고통을 감내하고서라도, 나의 삶의 모든 요구를 희생시키더라도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1724~1804)나 하이데가를 알아야만 한다는, 검증되지 않은 강박관념 속에 반세기를 산 것이다. 그러나 요즈음의 젊은 아이들에게는 이러한 나의 강박관념이 말소되어 버린 것이다. 삶 앞에 지식이 권위적 존재로서 군림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풍요의 덕분일까?

 

21세기의 제3 주제로서 내가 말한 이 지식과 삶의 화해라는 문제는 인류문명사의 매우 다양한 측면을 포섭하는 문제이다. 바로 이 지식의 정당성에 관하여 가장 본원적인 질문을 제기하고 있는 고전이 바로 이 노자오천언(五千言)인 것이다.

 

여기에 우리가 요청해야 하는 것은 지식과 삶의 화해의 문제다. 과연 나는 이성의 문제를 알기 위해, 그 난해한 언어로 쓰인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1724~1804)의 순수이성비판을 이해하느라고 몇년 아니 몇 십년의 세월을 투자해야만 하는가? 오는 21세기에도, 앞으로 100년 후의 조선의 대학생들에게도, 순수이성비판이 고전(古典)의 자격을 가지고 있을 것인가? 그렇다면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1724~1804)는 전혀 공부할 필요가 없는가? 오늘날 우리나라 대학의 카리큐럼을 둘러싼 모든 문제들이 이러한 본원적인 질문에 대한 명쾌한 비견이 없이 우왕좌왕하는 데서 생겨나는 과도기적 표류현상이다. 교육부는 암암리 자본주의적 효율성의 기준에 의해 학문 그 자체를 터무니 없이 천박하게 만드는 것만을 개혁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렇다고 보수적인 인문학이나 자연과학의 주장이 그대로 21세기에도 지속적인 정당성을 지닐 수 있을 것인지?

 

 

우리가 이러한 주제와 관련하여 마지막으로 고민해야 할 또 하나의 문제는 지식의 도덕성에 관한 문제다.

 

최근 복제 양 돌리의 문제를 두고, 또 유사한 사태의 무궁한 발전가능성을 전제로 전 세계적으로 갑론을박이 끊이지 않았다. 과연 인간의 지식이 모든 것을 다 알아낼 수 있고, 모든 꿈을 다 실현시킬 수 있다해서 우리는 지식의 진보에 따라 되는대로 다 캐내고 다 현실화시키면 되는 것인가? 유전자 조작이 쉽게 가능해진다고 해서, 수십억만년을 통하여 형성되어온 DNA의 배열을 하루아침에 바꾸는 것이 과연 지식의 도덕성인가? 지상의 배추와 지하의 무를 결합시키는 무추의 생산이 마음대로 가능해지고, 미꾸라지 하나도 가물치보다 더 큰 거대 종자로 개종하는 것이 마음대로 가능하다고 해서 과연 생산성의 이름 아래 그것을 그렇게 조작하는 것이 과연 인간지식의 위대한 진보의 도덕적 결과인가? 무와 배추가 아무 탈 없이 엄존하는데, 왜 구태여 무추를 만들어야 하는가? 미꾸라지는 몇백 만년을 우리와 같이 살아온 그 모습대로 얼마든지 진흙 속에 뒹굴고 있거늘, 100마리분의 고기를 한 마리 사육으로 얻기 위해 과연 거대 미꾸라지 종자를 만들어야만 하는가? 국가 예산을 낭비하면서 그따위 조작이나 하고 앉아있는 사람들을 우리는 과연 과학자라고 불러야 하는가? 그따위 과학자들을 만드는 것이 과연 우리 자녀들을 공부시켜야 하는 소이연일까?

 

인간의 지식은 시대에 따라 그 양태가 달라진 것이다. 20세기에 우리가 콤플렉스를 느낀 지식의 양태는 모두 이 과학이라는 한 마디로 집약되는 것이다. 인문과학ㆍ사회과학ㆍ자연과학ㆍ예술과학…… 과학 아닌 지식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19세기 말까지만 해도 우리의 지식이라고 하는 것, 즉 독서를 한다고 하는 것은 모두 오늘의 개념으로 말한다면 고전학에 불과했다. 그것은 전혀 과학(사이언스)이 아닌, 십삼경(十三經)이라고 하는 유가경전의 습득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지식의 체계만으로도 우리는 우리의 문명을 충분히 운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21세기에 과연 과학이라고 하는 지식체계가 20세기와 같은 권위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인가? 사실 우리가 과학이라고 하는 지식체계에 대해 강박관념을 가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바로 과학이 생산하고 있는 현실적인 문명의 힘 때문인 것이다. 그것의 도덕적 가치 때문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이 과학이라고 하는 정보체계가 점점 보편화되어 가고 있는 이 시점에서 과연 과학이라고 하는 지식의 한계는 설정되지 않아도 좋은 것인가? 이러한 모든 문제에 관하여 나는 독자들의 현명한 판단을 갈구한다. 결정적인 판단을 내릴 수 없을지라도 우리의 먼 훗날의 자녀들을 위하여 사려 깊은 생각을 한 사람들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인용

목차

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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